고수 동굴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수억 년 탑을 쌓아 종유석을 매달았다.
사방에 커튼 둘러쳐진 동굴 벽
연신 터져 나오는 감탄사에
내 손은 어느새 땀을 쥔다
단번에 이를 수 없는 형상들
수억 년 세월이 쌓인 것이고 보면
나 지금껏 숨 쉬고 살아온 길
이루어 놓은 것도 꺼내 보일
그 무엇도 없으니
동굴 속 이리저리 둘러보는 동안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살아온 길목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머릿속 순간순간 뛰어가는 생각들
차곡차곡 원고지 속에 쌓아 두었더라면
지금쯤 변치 않은 시의 향기를 지녔을 텐데
고수가 되는 길을
난 고수 동굴에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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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 텃밭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 심장이
다육이 몸을 흥건히 적신다
언제나 무능한 나를 필요로 하는
책의 이랑은 찾아든 비문증에
모서리가 울퉁불퉁하다
앉은뱅이 전등 앞에 돋보기 쓰고 앉아
책갈피 넘어갈 때마다 존재를 자랑하던
오뉴월 칡넝쿨이 노트북마저 칭칭 감고 있다
서툰 농부가 호미질하듯 읽는 시집 속
내가 되기는 왜 이리 힘드는가
곁가지로 새는 잡지는 끝까지 거부하는 호미질
옆에서 눈치 보던 카톡 새도 해충 같은 방해꾼
일벌처럼 메모에 분주한 노트는 톡새를 경계한다
우량 품종 심어도 삽질이 어렵고 잘 크지 않는다
새침하게 돌아앉은 문학 잡지나 신문이 손에 잡히지만
역시 한 면만 훑어본 후 눈도장만 찍고 나온다
낙서장은 쇠비름 잡초처럼 진딧물로 얼룩지고
여기저기 뿌려놓은 모서리 텃밭
밑줄 들이 꿈틀꿈틀 지렁이 되어
밭고랑을 기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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