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6 <징비록>―유성룡
유성룡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유성룡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해하지 않고 침착했다. 유성룡은 이황을 스승으로 두었고 학문은 날로 늘어갔고 성품 또한 뛰어나서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급제를 시작으로 유성룡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다. 그가 오른 관직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심지어 유성룡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관직에 많이 오른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다. 그런데 이건 거의 제일 중요한 것만 모아둔 것이다.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는 관직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그의 어머니를 지극히 정성을 들여서 모신다. 유성룡은 진정한 효자라고 할 수 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거의 모든 일을 다 해결했다. 유성룡은 특히 외교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일을 잘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유성룡은 문서를 아주 잘 만들고 문서를 아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전쟁 때 피난을 가야해서 문서를 태우고 도망 온 한 사관을 사신 명단에서 아주 빡빡 지웠을 만큼 문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서를 잘 만들려면 문장력이 좋아야 하는데 유성룡의 그 문장력은 어릴 때부터 닦아온 뛰어난 학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 그 후유증과 죄책감에 괴로워했는데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쓴 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그런데 유성룡이 징비록을 쓴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경계의 뜻을 후세에 전해야 하겠는 생각으로 쓴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왜곡된 곳 또한 없다. 유성룡은 솔직하게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징비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군사의 관한 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와 관련된 정보들이 징비록의 가치를 더욱 높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징비록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 방법을 찾는데 먼저 지형을 잘 파악해서 그 것을 이용하고 우수한 장군을 뽑아 필요한 곳에 보내고 군사를 뽑아 훈련시켜 장국의 명령을 잘 따르도록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훌륭한 무기를 가지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라고 알려주고 있다. <<징비록>> !!!!!!!!!!!!!!!!!!!!!!!!!!!!!!!!!!!!!!!!!!!!!!!!!!!!!!!!!!!!!!!!!!!!!
1586년 일본의 왕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원래 일본의 국왕은 ‘겐지’라는 사람이었다. ‘겐지’가 나라를 세운 뒤 200년 동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겐지 왕국을 무너트리면서 일본과 한국의 평화도 깨지기 시작했다. 여러 능력을 갖춘 도요토미는 군사를 일으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일본을 하나로 통일했고 이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야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조선을 지나 명나라를 쳐서 중국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는 거만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신이 일본으로 갔을 때 절에서 묶게 하고 탁한 술과 떡만 주고 사신이 있는 자리에서 평상시처럼 그냥 그 방에서 평상복을 입고 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무례하고 거만한 행동이었다. 그는 완전 안하무인이었다. 그러던 때에 통신사에서 가져온 일본 편지의 내용은 명나라를 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유성룡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실 명나라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았나? 하고 의심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때마침 유성룡의 주장에 따라 사신이 가니 그제야 명나라는 의심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조정은 바빠졌다. 군사를 정비해 나갔다. 그렇지만 그 때 당시는 꽤 풍요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평을 했다. 괘한 짓들만 했다. 괜히 성만 넓히거나 성을 평지로 옮겨서 공격을 잘 받게 되고 무기 상태도 그저 칼 창 화살 활 등만 있는데도 좋다고 말을 하였다. 결국 이레서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패하게 된 것이다. 우리 조선에 일본의 사신이 와서 명나라에 알려서 조공하는 길을 열라고 말하면 전쟁을 하는 고생을 피할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 조정에서는 그건 명나라의 관계를 교려할 때는 예의에 어긋나서 안 된다고 말을 하였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결국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에 일본이 쳐들어왔다. 우리는 소속무책으로 계속해서 당하고 밀렸다. 하지만 몰려오는 왜적에 대항아기는커녕 단 한 사람도 맞서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조선은 계속해서 당하고 임금은 피란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조정에서 대신들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느라 바빴다. 한 편 왜적은 부산 동래에서부터 길을 세 갈래로 나누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 사정이 아주 밝아 거침없이 경기도까지 올라온 것이다. 우리 조선은 그렇게 당하고만 있다가 처음으로 첫 승을 거두었다. 신각이라는 사람이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가서 함경남도의 병사들과 함께 서울로 나와 재물을 빼앗아가던 왜적들과 용감하게 싸웠고 결국 그들을 물리쳤다. 그런데 김명원이 임금께 신각이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상소문을 올렸고 신각을 주이라고 해서 형을 집행하는 사람이 갔다. 그런데 신각이 적을 이겼다는 소식이 뒤늦게야 전해졌고 급히 죽이지 말라고 사람을 보냈지만 이미 신각은 죽은 뒤였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신각은 살아있을 때 성을 쌓고 무기를 미리 준비하고 해자를 만들어 놔서 훗날 연 안성을 지킬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슬퍼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김명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일이라는 장수가 돌아와서 대동강 앞을 막으라고 했고 이일은 잘해냈다. 그렇지만 우리 조선은 너무 많은 전쟁에 결국 명나라에 sos를 쳤다. 그리고 평양성에서 임금이 피란을 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마을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임금이 말려서 결국 가라앚았지만 몇몇 궁인들이 도망을 가는 것을 백성들이 목격을 한 것이다. 결국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백성들은 폭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했다. 그러자 그 때 유성룡이 한 나이 많은 사람을 불러 말을 하고 그 노인이 백성들에게 말을 했다.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결국 그 때가 되서야 백성들은 겨우 폭동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은 평양성까지 빼앗기고 만다. 유성룡은 백성들을 타이르고 설득을 시켰고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민심은 조금씩 안정되어 갔고 남아 있는 군사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이 걱정하고 있었을 때에 마침내 명나라 구원병들을 맞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명나라는 평양성을 쳤다. 그런데 그 때는 비가 오고 있었고 말 조차 달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군사들은 갔고 결국 져서 돌아왔다. 그리고 명나라의 장군은 왜군이 무서워서 말만 그런 듯이 하고 강을 두 개나 넘어갔다. 얼마 후 명나라 장국은 요동으로 가고 말았다. 이렇게 우리 조선은 밀리고 도망치고 있었지만 수군에서는 아니다. 특히 이순신의 공이 크다. 수군에서는 일본이 넘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군사를 평양성에 보냈지만 패하고 말았다. 그 뒤 많은 싸움이 있었고 우리 조선도 훌륭한 장군과 그 장군을 잘 따라주는 군사들이 있어서 몇 번 큰 활약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조선은 행주대첩과 명나라의 강화 노력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서울을 다시 되찾았다. 그건 다 우리 모든 조선인들과 명나라의 구원병들의 공이라고 헐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조산은 어리석었다. 싸움에서 우리 조선이 이겼을 때 달아가는 왜적의 장수들을 잡을 수 있었는데 어리석게 그냥 놓아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행주산성에서 왜적에게 공경을 받았는데 행주산성의 뒤 쪽은 강이라서 강으로 뛰어서 죽거나 싸우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바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아주 죽도록 싸움을 했다. 그래서 왜적은 행주산선에 몇 번이고 쳐들어오지만 모두 패하고 만다. 그 이유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죽어라고 싸웠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우리조선은 정말로 많은 싸움을 했다. 그리고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최후의 결전이 일어났다. 바로 수군의 전쟁이었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왜군의 300척의 배를 이겼다. 그 때 명나라에서 진 린이라는 성격이 아주 포악해서 우리 군사도 막 때리는 그런 장군이 이순신의 군대에 합세하게 됐다. 그래서 유성룡은 걱정을 했지만 이순신은 먼저 잔치를 준비라고 진 린의 배가 들어올 때는 멀리까지 나가 예의를 차렸고 거기다가 이순신이 무찌른 왜군을 다 진린 에게 넘겨 그의 공으로 세워주었다. 그 뒤 원래 성격이 포악했던 진 린은 이순신에게는 뭐든지 다 물어보고 함께 처리를 했다. 그런 식으로 수군은 아주 멋있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우리 조선은 왜군에게 많이 당했다. 그러자 왜군은 아주 거만한 생각에 빠졌다. 항상 자기 자신들, 왜군들이 최강이고 또 최고라는 생각에 빠져 버렸다. 왜적은 속임수를 잘 썼다. 유성룡도 왜적이 낸 꾀에 대해서는 칭찬을 했다. 하지만 평양에서 쓴 꾀는 완전 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옛날에 조조가 말하길 적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게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지형을 잘 이용하는 것, 두 번째는 군사들이 명령에 복종하고 익히는 것, 셋째는 좋고 예리한 무기를 쓰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정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여기서 승부가 난다. 그러니 장수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세 가지를 알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 성이라고 하는 곳은 도적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곳으로 당연히 그 견고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 성윗담을 빼놓을 수 없는데 원래 유성룡은 성윗담이라는 것이 그냥 성 위에 더 쌓은 낮은 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성룡이 전쟁이 일어난 후 척계광이 쓴[기효신서]라는 책을 좀 더 자세히 읽고 보게 되었고 이 책을 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성윗담이란 곡성이나 옹성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곡성이나 옹성은 성문 앞을 더 쌓아 적이 성문으로 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성벽을 말하고 또한 큰 성문 밖에 둥글거나 네모나게 작은 성을 더 만든 것을 말한다. 유성룡은 이것이 아주 좋은 방법이고 이 방법을 우연히 생각해 내고 즉시 여러 대신들에게 알리고 회의할 때 여러 번 이것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실천을 하기 위해 돌을 모아 쌓으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 완성하지도 못했고 유성룡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까지 있어서 하지 못했다. 유성룡은 아주 대단한 인물이다. 여기까지가 징비록의 요약이다.
<감상문>
나는 지금까지 임진왜란 속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일반 학교에서 배운 언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언제 끝났는지 등등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으면서 정말 임진왜란에 대한 많이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징비록]을 읽으면서 옛날에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정말로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우리 조선이 일찍이 정신을 차리고 준비와 대비를 미리 잘 해놨으면 이렇게 큰 피해가 뒤따르지는 않았을 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조선이 미리 알지 못하고 준비 못한 것은 우리나라 백성들과 탐관오리들이 오랫동안 평화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유성룡과 같이 미리 눈치를 채고 준비를 하려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도 몇몇 있었겠지만 결국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 나는 그런 상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정말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솔직히 징비록을 읽고 많이 놀랐다. 이 책이 아무리 만화책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모든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 완전 정확하게 잔인한 부분도 다 들어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인데 나는 지금까지 솔직히 말해서 임진왜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속 이야기를 들으니깐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일본에게도 화가 많이 났지만 전쟁이 난 상황에서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 판에 그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당으로 나누어져서 싸운 대신들과 사람들이 정말로 한심스럽다. 물론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내가 만약에 저런 전쟁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 생각에는 나도 그 때 당시의 대신들과 같았을 것 같다. 나도 나 자신만 잘 먹고 살려고 왕한테 빌붙고 남한테 책임을 묻고 벌을 내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왕한테 나의 생각만을 이해시키려고 주장했을 것이다. 나는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유성룡은 정말로 대단한 것 같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알아채고 최대한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하려고 노력하고 또 대신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던 그 마음이 정말로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