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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5일 저녁, 110년전 을사늑약이 강제된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서는 의미 있는 모임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17일부터 올해 3월 1일까지 이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주제로 한 전시회 <난잎으로 칼을 얻다>를 마감함에 앞서 관람자들과의 대화가 있었고, 아울러 필자의 산문집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의 북콘서트도 곁들였다. 이 모임에는 70여명의 초청인들이 주최측 다섯 분과 2시간 반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에 앞서 필자가 이 전시회의 준비위원장 겸 산문집의 저자로서 <역사와 나>라는 제목의 짧은 연설을 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H.카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역사학도들이 역사발전의 의미를 터득하게 될 때 인생관과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필자는 역사 발전의 의미를,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하는 인간이 양적으로 증대되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또한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하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더 평등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했다.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수적으로 증대되어 가고, 그 인간이 사회관계에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이뤄나갈 때 역사는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고, 필자의 인격과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인류의 역사를 살핀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인식에는 역사학도인 필자의 신념과 사상, 의지와 고민이 담겨있는 셈이다.
역사발전의 의미를 이렇게 가지게 되면, 역사 해석과 인생관이 달라지게 된다. 고려시대 ‘천민의 난’이나 조선 후기의 ‘농민반란’ 그리고 ‘동학란’ 같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된다. ‘역사 발전’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것들은 ‘난’이 아니라 ‘신분해방운동’ 혹은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평가된다. 특히 ‘동학란’의 경우, 그들이 안으로는 반봉건․사회개혁을 외치고 밖으로는 반외세․자주독립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으로까지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 발전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관을 바꾸어 역사발전에 헌신, 기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역사 발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자신을 역사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들 뿐아니라 자기시대의 역사적 방향이 반(反)역사적으로 나간다고 판단될 때 거기에 저항하면서 역사의 진전방향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투쟁하게 된다.
역사의 발전방향에 대한 신념은 반역사적인 거대한 세력 앞에서 고난과 희생을 각오하게 만들어 이를 동력화시킨다. 한국 근현대사에 나타난, 반봉건·사회개혁, 항일독립운동, 군사정권 하의 인권·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은 바로 역사발전의 신념을 동력화한 열매였다. 여기서 역사의 길과 현실의 길,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있는 사람이 구분된다. ‘역사발전’을 확신하고 자신의 신념체계를 거기에 일치시키는 삶이 역사의 길이고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도록 헌신 봉사한다. 이런 삶이 ‘역사적인 삶’이요 역사와 더불어 사는 삶이다.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땅으로 이끈 지도자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이집트 왕자로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집트의 노예로 고난받는 자기 동족을 생각하면서 호화생활을 포기하고 동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 조선 후기 실학시대의 유형원 이익 정약용도 마찬가지다. 특히 다산 정약용(1762-1836)은 30대 후반까지 출세의 길을 걸었지만 신유사옥 이후 20여년 귀양살이를 통해 민초들의 고난에 눈뜨게 되면서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귀양살이 기간 동안 연구한 수많은 저술은 바로 고난받는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쓴 것이다. 그가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고난받는 민중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다산의 귀양살이 20년은 당시에는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로 하여금 역사에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모세와 정다산이 걸어간 그 길이 ‘역사의 길’이다. 그것은 자신의 안락만을 약속하는 ‘현실의 길’을 포기한 데서 가능했다.
나라가 망할 때, 역시 역사의 길과 현실의 길이 갈렸다. 매천 황현과 이완용의 삶에서 드러났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천은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는 절명시를 남기고 ‘역사의 길’을 택했다. 이는 일제로부터 나라판 대가로 작록과 은사금을 받은 이완용의 ‘현실의 삶’과는 반대되는 길이었다. 망국의 대가로 76명(8명 수작 거부)이 작위를 받고 그 후 158명이 습작(襲爵)하여 현실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삼한갑족’의 후예 이회영 6형제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토와 재산을 정리하고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 우당 6형제가 걸어간 길, 그 길이야말로 역사의 길이요, 역사에 살아 있는 삶이다
이 전시회 준비위원장인 내 강연이 끝난 후 같이 패널로 참석한 네분(이종찬 전 국정원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서해성 작가, 이종걸 의원)이 서 작가의 사회에 따라 이번 전시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세 분은 우당 이회영과 6형제가 남긴 일화와 행적, 더 나아가 오늘의 시대상황도 덧붙여 말했다.
먼저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를 중명전에서 열게 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우당 선생이 돌아가신 날이 바로 11월 17일이기 때문에 그 날과 관련 있는 장소를 전시회 장소로 물색하자니 중명전을 교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생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무정부주의를 선택하여 상해와 중국의 여러 곳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그는 관동군 사령관 제거를 목표로 대련으로 잠입했다. 그러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스파이에게 노출되어 대련에 상륙하자마자 체포되었다. 그 길로 악형과 고문을 당하게 되어 그 후유증으로 1932년 11월 17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우당이 순국한 11월 17일은 묘하게도 27년 전 을사늑약이 강제된 날과 같은 날이었다. 전시준비위원회는 11월 17일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곳이 덕수궁 중명전임을 새삼 떠올리고, 당국과의 교섭에 나섰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우당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이준 김구 및 상동교회 엡웟회 청년들과 함께 을사늑약 파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고종을 움직인 분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이 참작이 되어, 중명전은 전시회 장소로 허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문화재인 데다 못 하나도 제대로 밖을 수 없는 곳이어서 전시를 위해서는 매우 부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어려움에다 겨울 날씨까지 겹쳐 전시조건이 어려웠지만 약 3개월간의 전시기간 동안 거의 9천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참관하게 되었다.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원장은, 우당이 생전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은 분이어서 이렇게 전시회를 하게 된 데 대해서 할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하면서도, 국민적 호응에 매우 감사한다고 했다.
이어서 우당의 집안 내력과 6형제의 망명에 얽힌 이야기가 나왔다. 흔히 ‘삼한갑족’으로 불리는 이 집안은 고려말 익재 이제현의 후예로 조선 중기 백사 이항복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었으며, 우당 6형제는 이조판서를 지난 이유승의 아들들이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6형제는 비밀리에 재산을 처분하고 망명길을 택했다. 그들은 서울과 그 인근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인근 고을에서 서울에 이르자면 이 집안의 땅을 밟아야만 했을 정도라고 했다. 우당은 또 지금 서울 명동 일대에 수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명동 YWCA 근처에는 우당의 집터표지석이 있다. 마침 명동이 전국에서 땅값이 가장 높은 곳이라는 발표가 있은 직후라, 1평방 미터에 수천만원이나 한다는 그 땅 수만평 중에서 몇 백평이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평소 이회영 일가를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해석하고, 보수란 '진정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자'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이 땅의 보수들에게 “참 보수란 우당 형제들이 보여준 자기희생과 솔선수범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 교수는 MB 이후의 한국의 보수들은, 보수라는 탈만 썼지 진정한 보수가 아니라고 일갈했다. 보수로서 의당 가져야 할 자기희생이나 솔선수범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천안함 사건 당시 MB와 총리, 장차관들의 80%가 병역면제를 받았음을 예시하면서, 정말 지켜야 할 가치를 내팽겨친 이런 정권이 ‘보수’를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전시회의 목적이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진면목을 보여줌에 있다고 한다면, “이 땅의 보수들아, 중명전에 와서 ‘난잎으로 칼을 산’ 우당과 그의 형제들의 참 보수의 모습을 보고 본받아라”고 하는 것 같았다.
중간 중간 사회를 맡은 작가 서해성의 그 해박한 해설은 모인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가 설명한 우당의 “난잎 예술론‘을 거쳐 발언 순서가 이종걸 의원에게 넘겨지자 이 의원은 약간 어눌한 목소리로 다시 이 전시회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 중에 인상적인 것은 두 분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한 것이었다. 우당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딸 이규숙 여사다. 고문치사당하던 해(1932)에 우당이 66세, 부인 이은숙 여사는 44세였다. 이 여사는 해방 후 1975년 그가 겪은 독립운동의 실상을, 이번 전시회에 그 원본이 전시되기도 한 <독립운동가의 아내 수기>(일명 <서간도시종기>)를 통해 펴내어 월봉저작상을 받기도 했다. 한 여성으로서 망명 초기 대가족과 신흥무관학교를 뒷바라지한 내용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서 겪었던 처절했던 삶을 그려 놓았다. 그녀는, 전에는 종이었으나 그 후 독립군이 된 이들의 빨래를 해 주고 밥을 짓고 옷을 수선해 주었다고 술회했다. 양반집 대가의 마님이 ’종들‘의 빨래를 해 주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된 환경의 변화, 진정 이같은 우리 사회의 평등관은 독립운동을 통해 확연히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이종걸 의원이 우당의 딸이자 자기에게는 고모가 되는 이규숙 여사를 소개할 때에는 목이 메는 듯했다. 이규숙 여사에 대해서는 이 의원 자신이 손수 짓고 이번에 전시하기도 한 <규숙 고모님을 떠나보내며>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출생과 동시에 강보에 쌓여 망명길에 오른 이규숙은 완벽한 중국어에다 영어까지 잘 구사하여 독립운동 연락책으로 정보 수집에 적극적이었고, 독립군의 무기운반책으로도 혁혁한 활동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그들의 독립운동에 값하는 예우를 해 주지 못했다. 그의 고모가 5년 전 수원 어느 호숫가에서 행상을 하는 아들의 집에서 돌아갔다는 말을 전할 때에는 그걸 듣고 있던 좌중의 목울대들이 울먹였고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이 광복된 조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이는 이미 인구에 회자되어 건드리면 곧 터질 것만 같은 상처로 남아있지만, 그것이 오늘의 우리 세대에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기에 이 전시회를 마감하는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우당과 그 형제들이 걸었던 길은 역사의 길이었고 현실의 길이 아니었다. 역사의 길은 고난의 길이요 현실의 길과 비교할 때 비현실의 길이며, 비현실적이지만 정도(正道)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역사의 길은 그것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가지고 따져서는 안된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 하는 것으로 따져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역사의 길, 정도를 말했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일지라도 그 길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이요, 우리가 망명생활을 30여 년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거의 일진회도 ‘현실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 세상에 가장 현실적인 방법과 수단이 어찌 한두 가지에 그칠 것인가. 땀을 흘리고 먼지를 무릅쓰며 노동을 하는 것보다 은행 창고를 뚫고 들어가 금품을 도취(盜取)하여서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도 현실적이라 할 수 있고, 청빈한 선비의 정실이 되어 곤궁과 싸우기보다 차라리 모리배나 수전노의 애첩이 되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도 가장 현실적인 길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이만열
첫댓글 독립후손들이 힘든 삶을 살게 된것이
이 나라가 어려울때 아무도 그길을 가려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쁘게 말해서 현시점에서는 친일후손이 정답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이 제대로 대우받는 사회가 될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된다는 것을 현재의 우리가 가슴깊이 새겨야 할것입니다.
가슴이 먹먹... 눈물이 나네요
놓친 전시회였는데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이 ....눈물이....
이런 글을 대할 수 있게 됨에 감사드리며, 나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즈를 이 분들보다 더 철저히 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혼이 무엇인지 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는 분들이십니다.
감히 흉내 낼수 없는 역사의 길을 가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게 잊지 않고 기억하는게 아닐까요...
참으로 가슴이 먹먹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역사의 의미를 배우고 마음이 먹먹합니다. 진정 독립군이 아닌 매국노가 주인인 세상 역사의 방향은 어떡해야 합니까?
눈물로 이 글을 봅니다.
정도와 사도의 길을 선택할때 아무런 고민없이 정도를 택하는 사회를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먹먹해지는 글입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이회영, 당신은 우리 대한 조국의 희망이며 등불입니다. 전 재산을 조국에 헌납하여 만든 신흥무관학교, 우리도 이 길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이회영님 눈물이 납니다
감사합니당
그들이 걸었던 희생의 길이 옳은길이었음을 후손들이 볼수있는 기회가 있길 기다립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저항과 항전의 의지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시간 날 때 다시 자세하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슴으로 읽는 한국사란 제목에 들어맞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