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포리즘 ⑥
도서관
도서관은 고물상을 닮았다. 둘은 이복형제가 아닌가 싶다. 도서관이 잡동사니 기억의 저장고라고 한다면 고물상은 물건들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활용도 면에서 보더라도 둘은 서로 비슷하다. 요즈음은 도서관의 역할을 컴퓨터에 일부 양도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한다. 컴퓨터로 해결할 수 없는 갈증을 도서관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선인들의 온갖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가 찾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내어준다.
고물상은 일단 용도 폐기된 물건들의 종착지이긴 하지만 대부분 재활용된다. 쓰레기라는 오해를 받고 버려졌으나 세례 의식을 거쳐서 다시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부활과 재생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도서관과 고물상은 ‘망각’을 모르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기억과 저장 능력은 탁월하나 망각의 기능은 거의 퇴화되었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왕 푸네스’에서 일찍 생을 마감하는 푸네스의 죽음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푸네스는 오늘날 대용량 컴퓨터와 비슷하고, 도서관과 고물상의 현신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의 과다 복용으로 푸네스는 조기 사망한다. 죽음과 소멸을 구원으로 생각했던 보르헤스는 이 작품을 통해 기억과 망각의 균형점을 환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둘은 순환하며 삶 앞에 쉼 없이 출현한다. 새롭게 나타난 것은 과거에 망각했던 것의 재등장이고, 망각은 다시 기억을 허물어 과거로 돌려보낸다. 그러므로 기억과 망각은 병행되어야 하는데, 요즈음은 무덤을 도굴하지 않아도 컴퓨터에 매장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을 무한정 소환하여 이용할 수 있다. 망각을 모르는 푸네스 같은 존재가 컴퓨터인 셈이다. 차고 넘치는 ‘기억’의 무게에 질식사한 푸네스를 애도하면서 한도 초과한 아름다움 때문에 단명하는 목련의 생애도 헤아려 보는 중이다.
새소리
예버덩에 머물 때 다양한 멜로디를 구사하는 새소리에 매혹되어 녹음한 적이 있다. 지저귀는 소리를 그대로 옮기면 아름다운 시와 음악이 될 것 같았다. 요즘도 가끔 기억이 나면 녹음한 새소리를 다시 듣곤 한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새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새에게는 문자도 없고, 저장 장치도 없다. 오직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노래하며 살아갈 뿐이다. 인간만이 무언가를 끝없이 나누고, 판단하며 기록한다. 대부분 몇 년만 지나도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들을 적고, 해석하고, 전달하는 행위를 지속한다. 새와 동물들은 그런 일의 허망함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 같다. 언어를 초월하여, 개념의 미라에 구속되지 않은 삶의 방식을 터득한 셈이다. 여기저기 글똥을 싸놓고 타인들의 박수와 환호를 기대하는 우리네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예전에 절필을 선언했던 몇몇 작가들이 떠오르는 날이다.
감나무
가지가 찢어지도록 열렸던 감이 한 알도 열지 않는 해가 있다. 해거리를 하느라 그렇다. 감나무는 한해를 쉬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충전한다. 그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감나무의 노동이 진행된다. 쉬면서 놀고 있는 거 같지만 실제는 방전된 몸을 충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충전이 불가능한 전지는 버려진다. 방전된 몸에는 더 이상 에너지도 열정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을 텐데 방전된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고갈된 심장을 쥐어짜거나 머리 한 구석에 붙어 있는 지식의 찌꺼기를 동어반복하면서 남은 생을 이어간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한두 달이라도 어디 낯선 곳에 틀어박혀 해거리를 해야겠다. 거덜 난 몸의 허기를 달래면서 천둥, 번개와 자잘한 풀꽃들의 강론을 몸에 모셔야겠다.
자석
자석의 식성은 단순하고 일방적이다. 같은 부족의 쇠붙이면 언제든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상대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집착하여 떨어질 줄을 모른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의 구애는 대개 불행하게 끝나지만 타고난 습성이 탐착을 경계하거나 멀리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그에게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을 끊으면 난제가 쉽게 해결될 거라고 한 마디 한들 자석에게는 들을 귀가 없어 소용이 없다. 쇠붙이에 집착하고 있는 자석을 강제로 떼어놓는 것만이 해결책인데 그것도 쉽지 않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제자가 사이비 종교에 미혹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종교 집단에 합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온 가족이 나서서 설득했지만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맹신과 같은 강한 자력은 자석의 천성이다. 눈을 멀게 하는 맹목의 쇳덩어리인 자석은 일생을 눈앞의 대상에 집착하며 산다. 자석에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에게는 차가운 심장과 돌덩이 같은 머리만 있기 때문이다.
스펀지
장미는 가시를 거부하지 않는다. 가시가 꽃의 파수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장미의 애제자 중 ‘스펀지’가 있다. 스펀지는 장미 선생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수용의 방식을 터득했다. 동문수학한 자들이 많았으나 모두 일찍 곁을 떠나고 유일하게 스펀지만 남아 스승의 뜻을 깊이 헤아렸다. 불가의 가섭 같은 존재였다. 스펀지는 거부하지 않는다. 수용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스펀지는 거부가 존재에 대한 대항이고, 삶을 협소하게 하는 독성물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스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사나운 가시도 가까이 두는 도량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배척보다 포용이 세계를 더 멀리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한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가들 역시 장미와 스펀지처럼 미추를 구별하지 않고, 삶을 널리 수용하는 능력을 지녔다. 온갖 모양의 쇠붙이를 녹여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용광로를 몸에 장착하고 사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그들은 성자처럼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이 아닌 전체적으로 살려고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악마와 신, 고저, 선악, 명암, 장단이 함께 있다. 한 세기 전에 장미 선생이 스펀지에게 가르친 삶의 내용들이다.
늑대
온갖 혜택과 지원을 독식하다시피 하면서도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하니 세상이 아수라판이다. 개들은 주인에게 애교와 아양으로 일용할 양식을 얻지만 늑대는 사람에게 먹이를 구걸하지 않는다. 늑대의 눈은 고독하다. 귀여움이나 사랑스러움이 없다. 생의 바닥까지 가 본 자의 표정을 하고 있다. 늑대는 상처 입은 구성원이나 약자를 내치지 않고 먹이를 마련하여 연명케 한다. 늙은 부모 늑대를 보살피고, 먹이가 생기면 암컷과 새끼에게 먼저 먹이는 등 인간 못지않은 덕성도 지니고 있다. 구성원 간의 강력한 유대를 통해 생명을 이어가는 늑대는 어떤 경우에도 비루와 누추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자존과 위엄으로 무장한 늑대가 야생의 거친 삶을 살아가는 전투적 생존 방식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