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6일, 독일 학술답사 5일째>
“폭풍 로타(Lothar)가 가져온 흑림(슈발츠발트)의 생태적 변화”
프라이부르크에서 슈트트가르트까지는 흑림을 통과하여 이동하기로 하였다.
오전 흑림의 야외 박물관(SCHWARZWALDEA FRELUCHTMUSEUM VOGTSBAUERNHOF)을 둘러보고,
관광도시로 잘 알려져 있는 프라우덴슈타트(Freudenstadt)에서 조금은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보냈다.
흐른 하늘을 보면서 출발했던 아침과는 달리 한낮의 태양은 역시나 뜨거웠다.
7월 말 독일 남서부의 한낮은 30℃를 넘나들었지만 습도가 낮아서인지 그나마 쾌적하였고,
그늘 한 조 각이라도 만나면 시원하기까지 했다.
2시간 가량을 머문 프라우덴슈타트의 기억들을 주섬주섬 집어넣고, 1999년 발생한 폭풍 로타(Lothar)로 훼손된
산림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시 50분쯤 되었을까 말짱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 했다.
영동에서 영서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지나온 듯 사뭇 다른 풍경과 기후가 느껴지는 것이 고산지대스러웠다.
해발 1,000m의 능선부. 도로에서 약간 벗어나자 독일가문비나무로 꽉 들어차있던 흑림의 모습은 어디가고
고랭지 밭을 보는 듯 휑한 풍경이 나타났다. 바로 폭풍 로라의 흔적이었다.
부러지고, 뿌리 채 뽑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독일가문비나무들 사이로 자라고 있는
여러 종류의 어린 나무들이 그간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폭풍 로타는 1999년 12월 26일,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일대를 강타하며 많은 피해를 입혔다.
시속 300km의 폭풍 로타가 약 2시간 동안 흑림 일대를 휩쓸면서
20만주의 독일가문비나무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는 이 지역을 관할하는 산림청에서 10년간 벌채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하니 그 피해규모가 가히 엄청나다고 하겠다.
특히, 흑림을 대표하는 독일가문비나무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단순림으로 조성해 놓은데다가
가문비나무가 여러 대에 거쳐 조림되면서 토양이 산성화되고 이로 인해
나무의 뿌리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면서 시속 300km의 폭풍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폭풍 로타의 피해를 입은 지역 중 일부는 다시 조림지로 복구를 하였으나,
우리가 방문한 이 지역은 조림하거나 인위적으로 복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연상태로 유지하면서 그 모습 그대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자연 스스로의 복원과정, 천이과정을 모니터링 하고 있었다.
독일가문비나무의 획인적인 산림지역에서 활엽수들이 자연적으로 싹을 틔우면서 혼효림이 형성되어 지는,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고 있는 흑림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약 2500년 전 너도밤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같은 활엽수 등으로 뒤덮혀 무성하고도 두려웠던 이곳을
‘흑림’이라 불러주었던 켈트족의 영혼이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능선부의 한 단면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독일 삼림의 이용과 역사, 그리고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사진설명> 먼저 도착한 한 그룹의 학생들이 입구에서 간략한 설명과 안내를 받고 있다.
우리에게도 폭풍은 아니었지만 수 년전 강원도 고성 등
동해안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산불지역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자연복원과 인공조림에 의한 생태계 복원 방법을 놓고 논쟁이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최근의 평가는 빠른 복구를 위해 간벌 등 인위적인 방법을 취한 곳 보다
자연 상태로 놔둔 지역에서의 회복이 빨랐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자연이 증명해주는 이러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고 거세지는 듯 했다. 오후에 비가 올거라던 일기예보를 떠올리며 후다닥 차에 올라탔다.
금세 밖은 어두워졌고, 굵고 거센 빗줄기는 흑림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 1999년 12월의 기억을 덧씌우는 듯 했다.
차안은 차분해졌다. 문득, 아침에 들렀던 흑림 야외 박물관에서 본 목재 이용에 관한 전시물들이 생각났다.
박물관에는 5세기의 슈트트가르트 지역의 산림지도가 있었다.
들었던 몇 가지 설명이 떠올랐다. 화약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나무를 이용하여 광물을 채취하였는데,
장작불로 바위를 데운 후 찬물을 부어 바위를 깨는 방법으로 광물을 채취하였다고 한다.
벌채한 나무는 300m X 50m 폭의 직선으로 파서 만든 수로를 이용하여 나무를 옮겼다.
1800년대 초 네덜란드가 해양 패권을 놓고 영국과 각축을 벌이던 당시, 흑림 지대의 목재는 뗏목으로 엮여
라인강을 타고 하류의 네덜란드로 떠내려가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갑판과 돛대로 쓰였다고 한다.
나무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원시상태의 천연림이었던 흑림이 황폐해지자
그 심각성을 인식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에 의해 19세기 초부터 대대적인 녹화사업이 진행되었다.
천천히 자라는 너도밤나무나 참나무를 베어내고 경제성이 뛰어나고 빨리 자라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를 심었고,
흑림 지역의 숲 8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숲은 그 후 산업혁명의 여파로
엄청나게 늘어난 목재수요를 지난 200여 년 동안 충족시켜 주었다.
이렇게 집약적인 수목관리를 해온 독일은 근대 임학의 출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일의 과학적인 임업정책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임업정책을 수입한 일본이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를 실험 대상지로 삼으면서
한반도의 자연림 70~80%가 벌채되고 인공조림으로 식재된 바 있다.
아무튼 이러한 집약적인 숲 관리는 숲의 종 다양성을 낮추었고,
현재 독일에는 자연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 임업분야에서 독보적이었던 독일은 종다양성이 높은 혼효림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생태학과 임학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는 등 숲과 산림 관리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흑림은 목재생산지로서의 삼림이용정책에서
자연환경을 잘 보전하면서 지속가능성을 갖춘 산촌관광, 생태관광 등의 지역으로 그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글/사진 박정운 http://saveoursea.tistory.com/
첫댓글 흑림 지대의 그 무성한 숲이 바람에 무너져내렸다는 사실을 생태학자들은 여러가지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수해'라고 일컬어지는 백두산 북쪽 벌판의 천연림도 폭풍에 의해 일순간에 10만ha 가량 쓰러졌다는 사실은 북반구 중위도에서 겪는 강한 바람의 영향 앞에 생명체인 나무가 성냥개비마냥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드러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도시 가로수로 키 큰 소나무를 캐다 심는 경향이 있는데 상당히 우려됩니다. 바람과 폭설의 피해를 견딜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