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는 기계론의 시대다
이마무라 히토시가 3장에서 주장하는 말은 “근대는 기계론의 시대”이다. 근대는 왜 기계론의 시대며,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기계도 도구다. 그런데 기계라는 도구는 근대이전의 도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의 의지가 없이 도구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기계는 ‘독립성’을 띤다. ‘자동기계’를 근대인은 경이로와 했을 것이나 지금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근대가 기계론의 시대라는 말은 근대의 자연이 더 이상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는 자연을 ‘제작’하고야 말았다. 세계를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언어>로 설명하려 하였다. 이로써 고대의 세계상과 근대의 세계상은 확연한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고대의 세계상은 유기적 세계상이다. 각각의 사물도 그 존재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퓌시스라 불렀다. 각각의 개체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립적 원리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에는 서로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없어 <닫힌> 우주가 된다. 그러나 갈릴레이에 의해 자연이 수학화되면서 모든 사물은 같아져 버렸다. 닫히고 순환론적인 세계상을 갈릴레이가 무너뜨려버렸다. 살아 있는 자연은 인공적인 자연이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옷을 입고 깊이 은폐되어버렸다. 자연은 이념적 설계도에 따라 기계 만들듯이 만들어져버렸다. 갈릴레이의 이러한 자연기계론은 뉴턴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근대의 기계론은 우리에게 인식의 확실성을 추구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선을 긋듯이 그렇게 분명할 수 있는가? ‘확실성’은 바로 기계론적 세계상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기계론적 세계상을 상징하는 기계는 ‘시계’다. 근대적 세계상을 정립시키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베이컨은 <<신기관Nonum Organum>>에서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였다. 그는 정신을 기계처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갈릴레이와는 다른 방식이다. 그는 기계를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의 정신이 수학적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자연을 제작함으로써 정복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단지 도구를 사용하고 그것으로 자연에 작용을 하지만 변혁을 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없었다. 그렇기에 “기계론적 세계상은 전적으로 새로운 관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베이컨으로부터이론적인 엄밀성을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데카르트로부터 베이컨과 같은 발상을 엿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이론을 구성하여 우리로부터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베이컨처럼 데카르트도 확실성과 정확성을 추구하였으며, 인식하는 정신의 모델로서 시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과 기계는 엄밀히 다르다.
근대에는 모든 것들이 기계적으로 설명하려한다. 화가도, 건축가도 그렇다. 원근법의 발생도 근대의 산물이다. 이 모든 것은 기계론적 세계상에서 탄생했다. <생각하는 나> 마저도.
기계론적 세계상은 코기토와 더불어 완성된다. 다시 말해 자연이 제작될 뿐 아니라, 인간도 제작된다. 그러나 이 관념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홉스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작위적 이미지를 강조했으나 홉스는 정치라고 하는 구체적인 인간세계를 작위적 세계상으로 철저하게 그려냈다. 홉스는 근대사회사상의 첫건설자가 된다. 그의 인간기계론은 18세기의 유물론이라는 형태로 말해졌다. 근대의 세계관은 유물론이건 관념론이건 세계를 기계로서 파악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기계론적 세계상은 시간을 순환에서 진보로 바꾸어 놓았다. 시간은 직선적이며 양적이게 된 것이다. 진보는 팽창되고 확대된다. 그래서 근대는 전투저이다. 옛것을 탈피하고 새로운 것에로의 과감한 진격이다. 그리고 증가이다. 인류의 지성이 진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그리고 이 관념을 가장 잘 발달 시킨 것이 프랑스다.
기계론적인 세계상, 이 말에서 우리는 이미 자연스러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계론적 세계상에는 인간 삶의 의미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 삶과 근대가 만들어낸 세계상의 거리는 벌어졌다. 이 거리를 줄이려는 노력이 베그르송과 후설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후설은 <<유럽학문들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라는 저서에서 갈릴레이로 상징되는 근대의 정신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갈릴레이를 비판함하고 생활세계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로부터 들어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세계에서 그것을 체험하는가? 우리의 체험에는 태양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를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태양은 여전히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지고 있으니.
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성의 구조>>, 이수정 옮김, 민음사, 1999
제 3장 제작되는 근대적 세계상: 기계론(pp.10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