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 하권
[문수사리의 신통 2, 마왕과 걸식(2), 바루의 밥]
“이에 천마(天魔) 파순(波旬)이,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마련한 그 공양 음식을 방해하려고 생각하여 변화로 4만 비구를 만들어 해지고 떨어지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더럽고 냄새나는 몸으로 깨진 발우를 잡고 서 있게 하였으며,
가슴과 등을 모두 드러내고 얼굴이 추악한데다가 절름발이, 곱사등이 모양을 하고서 초조한 마음을 품은 채 대중 속에 앉아 모두 발우를 잡고 갖가지 공양을 받게 하였으나
그 발우의 밥이 역시 줄거나 다하지 않았으므로 파순이 만들어 낸 비구들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발우의 밥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문수사리가 다시 위신(威神)의 변화를 나타내어 여러 만들어 낸 비구들의 발우 밥을 항상 가득하게 하였는데,
그 형체 있는 음식[搏食]이 입에 들어가서는 목이 메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밥을 떠서 입에 올리면 그 손이 입과 나란히 되어서는 멈추었다.
그리고 땅에 쓰러져 스스로 안정할 수 없었다.
이에 문수사리가 천마 파순에게 물었습니다.
‘이 비구들은 어째서 먹지 않는가?’
파순은 대답했습니다.
‘이제 여러 비구들이 장차 죽으려 합니다. 혹시 독을 섞은 음식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문수사리는 말했습니다.
‘독 없는 사람이 어찌 독을 행하겠으며, 내 자신 더러움이 없는데 어찌 더러운 독을 남에게 주겠는가?
음욕과 분노와 우치가 있으면 이것이 바로 독이 되니,
보살이 지녀온 법품(法品)과 계율은 이러한 많은 독이 없다.
이른바 독은 슬기가 없고 은애(恩愛)의 집착으로 이것이 내 것이라든가 내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내며,
죄(罪)와 복(福)과 명색(名色)을 인연하여 행하는 것이 평등하지 못한지라, 인연을 짓는 것이 나와 남에 있다고 보므로 모든 덮임과 느낌[受]에 머물러서 그 몸을 탐내고 집착하며,
갖가지 생각과 감관이 있어서 삼계(三界)에 머물러 잡음[取]이 있고 받음이 있고 갑작스러움이 있고 사나움이 있고 가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다.
몸을 탐내어 수명(壽命)이 있다고 하매 거리끼고,
자기 생각이 청정하다고 하매 집착하며,
성냄에 가려서 12인연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쟁송(諍訟)하는 모든 소견 때문에 자기 소견을 끊지 못하며,
생각함이 있고 아는 것이 있다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청정하다는 생각과 청정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분수(分數)의 일을 일으키니, 이것을 있고 없음과 모든 업과 모든 은애(恩愛)를 충분히 관함이라고 하며,
이것이 내 것이라서 행할 바가 없다고 하여 공에 빠질까 두려우며,
두 가지 생각을 벗어나려 함으로써 그 상(想) 없는 것을 상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원(願) 없는 것을 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얻을 것 없는 것을 얻을 것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행할 것 없는 것을 행할 것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두 가지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함으로써 보살의 법품(法品)에 대하여 법품이 아니란 생각을 하고,
삿된 소견의 행을 위해 바른 법을 관한다는 생각을 하고,
악지식(惡知識)에 대하여 선우(善友)라는 생각을 하며,
부처님의 행을 어지럽히고 바른 법을 비방하여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면서도 구호하는 일이 없으며,
투쟁과 욕설을 일삼아 성실한 말을 허망한 말이란 생각을 하고,
허위와 사기에 대하여 성실이라는 생각을 하고,
모든 음욕을 범하면서 머무른다는 생각을 하고,
모든 유위(有爲)에 대하여 안온하다는 생각을 하고,
생사에 대하여 소견을 일으켜 집착하면서 열반을 나타내는 생각을 갖는다.’
문수사리는 다시 말했습니다.
‘파순이여, 이러한 상법(像法)의 행위가 바로 독이다.
부처님 교법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감로(甘露)의 가르침이 불교의 첫째이며,
안온한 가르침이 불교의 둘째이며,
방일(放逸)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셋째이며,
원한(怨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넷째이며,
느낌과 집착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다섯째이다.
바른 법장(法藏)의 가르침이 불교의 여섯째이며,
쟁송(諍訟)함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일곱째며,
일어날 것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여덟째이며,
남이나 나에 대한 집착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아홉째이며,
비방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째이다.
구제하여 옹호할 것을 생각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한째이며,
고요하고도 담담하여 아무런 생각을 내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두째이며,
청정으로써 청정을 되찾아 담박하여서 그렇게 여길 것 없다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셋째이며,
바른 것으로써 평등의 밝음을 가져오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넷째이며,
성내지 않고서 잘 성립시키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다섯째이다.
높고도 높아서 모든 착한 근본을 쌓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여섯째이며,
이미 해탈하고도 다시 해탈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일곱째이며,
모든 외도를 교화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열여덟째이며,
일체 욕심이 지혜로운 자에게는 없으니 이 가르침이 곧 불교의 열아홉째이며,
시종(始終)과 생사가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무째이다.
뜻을 안정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두째이며(본래 스물한째의 법은 없음),
뜻을 그치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셋째이며,
평등하게 끊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넷째이며,
일체 악법을 짓지 않는 신족(神足)의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다섯째이다.
몸과 뜻이 고요하여 두 가지 감관이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여섯째이며,
중생들의 신심을 위해 가장 힘껏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일곱째이며,
일체 번뇌를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음이 없이 모든 이치를 깨닫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여덟째이며,
널리 본체를 환히 깨달아서 도를 풀이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스물아홉째이며,
행하는 바 허물이 없고 고요하다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째이다.
부드러워서 싸움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한째이며,
해탈을 부르는 진리의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두째이며,
성내는 말씨가 없는 슬기로운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셋째이며,
법의 이치에 따라 분리(分離)가 없고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슬퍼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넷째이며,
칭찬하거나 꾸짖거나 나[我] 없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다섯째이다.
모든 외도를 항복 받아 고요하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여섯째이며,
무위의 마음으로 바라밀(波羅蜜)에 이르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일곱째이며,
저 언덕에 이르러 훌륭한 방편을 내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여덟째이며,
자비로써 중생을 옹호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서른아홉째이며,
가엾이 여겨 해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째이다.
모든 존재[有]를 벗어나 공덕의 갑옷을 입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한째이며,
즐겨 함도 없고 조작함도 없고 말하는 것도 없으면서 가엾이 여기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두째이며,
할 일을 이미 끝내고서 지혜를 일으키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셋째이며,
훌륭한 체하는 생각을 없애고서 삼보(三寶)를 끊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넷째이며,
보살의 뜻을 내어 일체를 안락하고 청정하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의 마흔다섯째이니,
모든 존재[有]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설하실 때에 그 여러 천자들과 천마 파순을 따라온 5백 천자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어서 함께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이와 같이 불법의 가르침을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곧 웃으시기에 현자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웃으십니까?
이미 웃으심에는 마땅히 뜻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네가 이 여러 변화로 된 비구를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아난은 대답했습니다.
‘이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뒷날 다섯 가지 탁한 세간에 가서 법이 다 되려고 할 무렵에 이러한 비구들이 있어 만족함을 모르고 불선한 일을 행하면서 의복도 제대로 바르게 하지 못한 채 그 성품이 사나워서 조용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아난아, 그때의 비구들은 음식을 탐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갖가지 비방을 일으키며,
계율을 범한 사문을 받들어 섬기려고 가사(袈裟)를 겨드랑이에 걸어서 현재 존장 비구들에게 공경하지 않을뿐더러
서로 따라가고 오는 행위가 어지러워서 사람들에게 많은 병고가 되며,
또 사문이 되어서는 안락과 명예를 구해 공경 받을 것만을 찾고 법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세간에 나의 법 가운데 이러한 무리들이 있어 소견 없는 사람들이 청정하지 못한 일을 행하기 때문에 모든 천신들이 다 근심하는 반면 못된 악마는 다 기뻐하리라.’
아난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못된 악마가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러 정사(正士)들 스스로가 못된 악마의 일을 일으키는 것이지, 못된 악마 파순이 방해할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게으른 자에게 기회를 노리지 않고 그 어떤 비구이든 정진하고 수행하기를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는 이가 있으면, 파순은 이 정진하는 이에게 기회를 노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부지런히 힘껏 정진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
그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룩하지 못한 것을 이룩하고 밝은 진리를 얻어 밝지 못한 것을 제거하여 마군의 관속을 항복 받음과 동시에 여래의 가르침을 일으키며,
바른 법을 받들어 간직하여 경전의 이치에 공양하여라.
이것이 바로 나의 가르침이다.’
이 말씀을 설하실 때에 5천 비구가 모두 신명(身命)을 버려 열반에 들면서,
‘우리들은 법이 어지럽게 무너지는 때를 보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
허공에 앉아 몸에 불을 놓아서 스스로들 화장하였고, 수천의 천자들이 그 뼈를 공양하였으며,
2백 비구는 번뇌를 멀리 여읨과 동시에 법의 눈[法眼]이 생기고,
2백 비구는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어서 해탈하게 되며,
3만 2천 하늘들은 유순한 법의 지혜를 얻고,
제석ㆍ범천ㆍ사천왕과 여러 권속들은 다 합장(合掌)하고 가서 부처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부처님께서 오래 머물러 널리 교수하사 저희들로 하여금 법이 어지럽게 무너져 사라지는 때를 보지 않게 하소서.
누구나 이 경전의 법을 듣는다면 끝내 게으르지 않고 뭇 번뇌도 없을 것이며,
모든 느낌에 집착하지 않아 뜻의 행함이 머무는 데가 없고 모든 마사(魔事)를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며,
나[我]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자 사리불이여, 문수사리 동자가 나타낸 신통 변화와 경전의 법을 강설(講說)한 것이 곧 이러하였으니,
내가 그 눈으로 직접 다 보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