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칼
칼 속에 숨어 있던 글자들이 종이 위로 튀어나온다
숨어 있던 생명들은 속살이 눈부시다
아직 응고되지 않은 핏방울이 종이를 파고든다
종이는 칼을 자를 수 있지만, 칼은 종이에 먹힌다
칼 속에는 분노와 애정이 공존한다
분노는 가을 단풍빛이고 애정은 초봄의 싱그러움이다
종이를 칼 속에 디밀면 칼의 진실이 보인다
반세기 글을 쓰면서도 종이에 잘리는 칼의 아픔을 몰랐다
종이가 칼에 잘린다고 믿고 있었다
세월 흐른 후 칼날이 무뎌지고 녹이 쓸무렵 칼 속에 고여 있던 캐캐 묵은 시간과 종이에 잘려 쌓이는 칼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종이'와' 칼'을 詩語로 쓸 수 있다는 발상은 남다르다. 특별하다는 말이다. 詩人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닐 터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종이가 어떻게 칼을 자를 수 있담?”
바로 이렇게 의문을 내놓고 여기에 대답을 찾아볼 때 창의적이요, 발산적인 사고가 나오는 것이다.
“배에 물을 띄울 수 있을까?”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고?”
“코딱지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겠지.”
“똥 덩어리로 동화가 될까?”
물론 유아적 사고라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웃음이 평생 제대로 된 시 한 수 남기지 못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비틀기’ ‘낯설게 하기’ 등의 점잖은 문학적 기법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칼 속에 숨어 있던 글자들이 종이 위로 튀어나온다”
란 시구절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랜 사유의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세기’를 사고한 후에야 비로소 깨친 결정체라고 시인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감상하는 이는 눈을 부라리고 다음 얘기에 집중해 보아야 한다.
종이는 칼을 자를 수 있지만, 칼은 종이에 먹힌다
종이와 칼이 문법적으로 수동과 피동으로 위치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이라면 이 정도의 도발은 식은 죽 먹기라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 처럼 성남시청 앞 광장에 나와 자위할 수 있을 만큼의 반역을 해 볼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배를 쓰다듬으면서 ’이놈의 페니스처럼 내 배도 만지면 불렀으면‘하고 뻔뻔스러울 수 있겠는가? 그럴 용기가 없으면, 아니 고정관념에 쫀다면 애당초 참신한 시 쓰기는 포기하는 게 나을 듯하다.
종이가 칼에 잘린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수고 침 뱉을 그 빌어먹을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시인 스스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았는가?
‘반세기’를 사고한 후에야 비로소 깨친 결정체‘
라고.
대시인을 늘 가까이서 뵙고 함께 문학을 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전율을 느끼게 하는 순간임을 고백한다.
첫댓글 김고문님께서 이 평론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요즘 안녕하신지도 궁금하나이다
그나저나 우교수님 평론에
가끔 등장하는 낯 뜨거운 비유들만 우회적으로 써주신다면 더 좋은 평론이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저만의 느낌일까요ㆍ
아무튼 우교수님 시평은 무언가 다른 어록들이며 골계미의 뉘앙스가 풍기나이다
이비아ㅡ
역시 교수님 최곱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