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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일군의 모형 성막
성막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모형입니다. 이 구원의 길의 중심은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성막의 기준과 기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힘들게 걸어가시고,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이기고, 새롭게 열어 놓으신 길을 우리는 너무도 쉽고 가볍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그저 구원 받는 것을 목적으로만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에 너무나 부끄러울 것 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군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참다운 일군이 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열어놓은 길을 바르게 따라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제시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있고,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따라가야 할 예수님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성막입니다. 때문에 나 스스로 만족하는 일군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막을 배워야 합니다.
1. 일군이 알아야할 가장 중요한 것 - 하나님의 뜻
일군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닌 주인의 뜻과 생각을 우선으로 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생각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다면 이는 참된 일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군이 되려면 먼저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성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a)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많은 복을 주시고, 풍요롭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최초의 아담이 살았던 에덴은 4개의 강이 흐르는 풍요가 넘치는 땅입니다. 이러한 땅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주권자로 세우시고, 마음껏 누릴수 있는 자유와 더불어 선악과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는 하나님을 언제든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족히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뱀을 이용한,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담이 선악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타락한 죄인 되었어도 여전히 아담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죄인을 만날 수는 없기에 잠시만이라고, 그들의 죄를 가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법을 제시했습니다. 그 방법이 제사입니다. 성막 이전의 제사는 그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출애굽 이후 성막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 이상의 회복을 말하고 계시는데, 출애굽기 25:22절에 모세를 통해서 성막이 완성되던 날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성막을 통해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만나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의 뜻을 바르게 알고, 행하는 자는 참 일군이 되지만,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일만 하는 자들은 삯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막은 반드시 알아야하며,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b) 구원을 받아야할 이유를 알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 구원이 무엇으로 부터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은 구원보다는,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죄의 결과가 사망인줄 모르고, 알아도 하와가 하나님의 무시하는 것처럼, 무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며,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더욱이 이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스스로 결론을 내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죽음 이후에 심판을 말하고, 구원을 말해도 이들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자기 마음대로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거나, 윤회를 말하며, 심판을 외면을 해도, 죽음의 주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이후의 심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구원은 이 죽음과 심판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할 때에 “예수를 믿으면 저 천국애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라고 전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 한다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단지 어디서 영원한 생명을 사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일반적으로 죽음을 말할 때,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죽음의 의미는 단절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체의 기능이 상실된 것을 말하지만, 육체의 기능은 모든 것이 다, 더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서 시신을 기증하면 그 시신을 통해 쓸 수 있는 모든 장기들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합니다. 그렇게 이식한 장기들은 또 회복되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죽는것인가? 몸의 기능이 다 소멸되었다면 이식도 불가능할 것인데, 우리는 지금도 기증한, 많은 시신들을 통한 장기이식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단순한 기능의 상실이 아닌, 그 육체를 주장하던 영혼과 단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절됨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며, 죄인된 인간의 결과입니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이 죽음의 단절입니다. 이 죽음의 단절은
첫째로 육체와 영혼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이러한 단절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은,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되면 이들은 결국 서로 분리 곧, 죽음의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영혼과 육체가 서로 분리된 후에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죽어버리면, 세상에서 괴롭게 하던 육신의 병이나, 환경 등의 문제들이 죽음 이후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과 육체의 영역은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 있을 때도 다르지만, 분리된 후에는 더욱 완전한 영역의 구별로 나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법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괴롭거나, 힘이 들면 자살을 생각합니다. 물론 자살을 하면 현실적인 문제에서 해방은 받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가 죽음 이후에까지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죄로 인한 심판의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최초로 지음을 받았을 때는 죽음이 없는 육체요,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오염된 육체는, 순결한 영혼과의 분리, 즉 죽음이라는 새로운 사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리된 후에는 육은 본질적인 흙으로, 영은 하나님의 심판대로 올라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소멸에 관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신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어떤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빨리 가려고, 자살을 했다고 한다 하면, 이 죽음의 결과는 지옥입니다. 모든 이유를 대더라도 자살은 100% 지옥입니다. 요즘은 자살을 사회적 타살로 치부해서, 살인자도 용서받고, 구원 얻는데, 다른 사람을 죽인 자는 구원 얻고, 자신을 죽인 자는 무조건 지옥이라는 말은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죽인 살인에 속한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자살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지고 계셨던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한데 있습니다.
이는 심각한 하나님에 계획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 속에 태어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는 심각한 반역입니다.
두 번째로 이들의 죽음이 지옥일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어떤 죄를 지든 살아 있다면 회개할 기회가 있고, 용서 받을 기회가 있지만, 죽음으로 육체와 영혼이 단절되어 분리되면 다시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돌이켜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기에 그 죄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자살은 영원한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죽을 만큼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영원히 지옥에서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에 산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로 자살을 선택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단절이란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의 단절은 세상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영적인 상태의 모습을 말합니다. 눅9:40절에 말하는 것처럼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 함은, 생물학적으로는 저들이 살아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저들은, 영적으로는 죽은 자 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단절된 자, 곧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죄인 된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수 없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다시 태어남을 말함같이 실제적인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과 단절된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연결시켜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심을 말하기 때문에 거듭난다고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참사람, 곧 생령이 된 것처럼, 오늘날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야 참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단순히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함만이 아니고,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이 아니고는, 주라 시인 할 수도 없고,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롬8:2)
그러나 이 하나님과의 단절이 무서운 것은, 우리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도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복과 사랑은 끊어지고, 죄악의 결과인 죽음과 두려움이 커지게 되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는, 강팍함과 완악함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팍함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결과인 죽음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단절입니다.
세번째로 단절이란 마지막날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짐을 말합니다.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천국이냐? 지옥이냐? 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이라고 해서 다시 죽는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을 받은 자 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책이나, 영화에서처럼 지옥은 사단이 다스리고,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천국이든 지옥이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을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이유는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아, 늘 감사와 기쁨만이 있지만,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의 감시하시고,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입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지옥을 둘째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을 말하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성막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