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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성을 향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군대
II. 사회적 윤리:국가적 윤리 (13:1-14)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두 가지 국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천국 시민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국적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계하고, 마침내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므로, 그 시민권을 향유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요18:36)라고 하셨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영역인 국가라고 하는 세계의 시민권이 있다. 이것은 잠정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지마는 이 세상에 살 동안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고 살아간다.
바울은 앞 장에서 영적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자체 내에서 가질 윤리를 말하였다. 사랑으로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제 본 장에 이르러 바울은 세상 국가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윤리,곧 사회 윤리를 말하고 있다.
로마서 13장의 내용을 대별하면,
1. 정부에 대한 윤리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국가와 교회 간의 윤리이다(13:1-7). 복종의 윤리이다.
2. 사랑의 짐을 질것(13:8-10). 사랑의 봉사이다.
3. 각성의 삶(깨어 살 것)(13:11-14)을 살 것 등으로 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1.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13:1-7)
(1) 복종의 윤리 (13:1 - 7)
로마서 13장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하였다.
‘각 사람’(πάσα φυχἠ)은 ‘각 영혼’을 뜻하는데, ① 개인적이란 뜻도 있으나 ② 인격이란 개념으로 사용함이 더욱 자연스럽다.
크리스챤의 의무는 형식이나, 외식이 아니고 신앙적 인격으로 복종하여야 된다고 한다.
1) 성경의 여러 교훈
예수님의 교훈은 마태복음 22장 21절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였다.
여기 가이사의 것은 로마의 정부를 뜻함인데 로마 정부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여러 의무(세금)를 수행할 사실을 말한다.
디도서 3장 1절은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라」고 하였다.
베드로전서 2장 13-17절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하였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2) 교회사적 교훈
「저스틴 마터」는 “어디에서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쾌히 당신네들이 임명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예수에게 배운대로 보통세나, 특별세를 내기를 노력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한다. 그러나 다른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기꺼이 당신을 왕과 통치자로 알고, 또 당신이 왕권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당신을 섬기겠다”(변증1:17)고 하였다.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s)는 크리스챤을 위하여 화평을 강청하는 중에 “우리는 은총을 받을만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정부를 위해 기도하되 당신이 가장 정당하므로 국권을 아들이 아버지에게 받도록 기도하며, 당신의 나라가, 모든 사람이 당신의 지배 하에 오기까지 번영하고 커지기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왕들의 안정을 위해 영원하시고, 진실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 하나님의 은총은 왕 자신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원하는 바이다...쉬지 않고 우리는 우리 왕을 위해 기도 한다. 우리는 장수하기를 위해 기도하며, 나라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며, 왕가의 보호를 위해, 용맹스러운 군대를 위해, 충성스러운 원로원과 덕망있는 사람과 세계 평화를 위해 그리고 무엇이든지 사람이나 가이사든, 왕이든, 모두가 원하는 것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다.
그는 심지어 “크리스챤은 황제를 존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 주님에 의해 그 직임에 부름받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가이사는 우리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너희 편보다는 우리 편이다”라고 하였다.
아노비우스(Arnobius)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는 권세잡은 모든 자를 위해 평강과 용서를 빌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당시의 박해자가 네로(Nero) 같은 자일지라도 정부에 복종해야 하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은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끊임없는 교훈이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신자가 개인적으로 폭군이나 정권을 반역해서는 안된다. 다만 공무원들이나 혹은 부속 관원들이 폭군이나, 기타 집권자의 방종을 막으려 합법적으로 운동할 때 기독 신자들도 가담할 수 있다.”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IV 20:3) 또 말하기를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II 10:6).
장로 교회의 기본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도 개요(The Westminste
Confession of Fait 647)에는 “세계의 지존하신 주시요, 왕이신 하나님은 국가를 다스리는 자들을 자기의 수하에 두셨나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공중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권세와 도검을 주시며, 선행하는 자들을 장려하게 하시고, 악행하는 자들은 벌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관청에 소환될 때 거기 응하여 봉사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마땅히 정당한 국법에 의하여 경건과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려고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진정한 목적을 위하여는 필요한 경우에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였다.
국가를 향한 크리스챤의 윤리는 이렇게 적극적이다.
역사상에 일어났던 워싱톤의 독립 전쟁, 크롬웰의 혁명 전쟁, 오렌지공 윌리암의 화란 독립 전쟁, 우리나라의 경우 삼일 독립 운동 등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성경 교훈과 역대 교회사적 교훈은 정권이 하나님의 절대하신 하나님의 법 앞에서 진행될 때만 이러하다는 내용이다.
크리스챤의 정부를 향한 복종의 윤리가 결코 무제한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이 점에 있어서 참으로 분명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이다.
가이사의 것은 정부를 향한 크리스챤의 의무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이다. 경배에 수반되는 우상숭배배격, 주일성수, 예배 등이다. 신앙 자유, 포교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이 점에 대하여 분명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5:29)고 하였다.
모든 크리스챤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와 정부에 대해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순복이 ‘하나님의 것까지를 도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국가라고 하는 일반 은총 영역의 기관을 통하여 세계를 혼란으로부터 보호하고, 백성들의 안녕 질서와 공공 복리를 증진케 하신다. 그 가운데 크리스챤은 그 삶의 혜택과 보호권 아래 두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아래 있는 일반적 도구로서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2) 복종의 이유
1) 일반적 이유
잘못된 유대주의 국가관과 크리스챤 국가관을 대조시키기 위함이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유대주의 세계관, 국가관은 결정적인 민족주에 근거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유대인들은 유명한 반(反) 로마주의 자들이었다. 전 팔레스타인, 특히 갈릴리는 계속적인 폭동으로 뒤끓고 있었을 때였다.
예컨데 열심당이있었다. 저들은 유대인에게 왕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믿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나 또 다른 곳에 조공을 바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폭력으로 로마 정부를 대항하는 길 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언제 어디서나 ‘칼을 품고 있는 자’로 알려졌다. 폭력으로 로마의 관리나 관청을 불 태우고, 사람을 죽이고 불법을 자행하였다. 이것 만이 애국 애족하는 길이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또한 소극적으로 엣세네파는 현실을 등지고 도피하는 경향으로 흘러 정부와 단절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그런가 하면 헤롯당은 아부하여 로마 정부에 타협하고 말았다.
이러한 잘못된 국가관에 대해서 크리스챤의 국가 윤리는 정 반대적 주장을 취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였다.
2) 성경적 이유
첫째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13:1-2).
로마서 13장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하였다.
‘모든 권세’란 ‘모든 권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므로 비단 정부의 권세 만을 지적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정부의 권세 뿐 아니고, 교회의 권세, 부모의 권세(가정), 선생의 권세(교육권) 등 이 세상의 모든 선한 제도들을 정하셨다. 그것들은 모두 축복의 권세요, 질서의 권세요, 사랑의 권세요, 안녕과 복리의 권세이다.
① 권세의 출처는 신적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권세를 주장하므로 앗수르를 선민 이스라엘 징치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사야 45장 1-7절 중에서는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에게
ⓐ 기름을 부었다고 하였다.
ⓑ 그의 오른 손을 잡았다고 하였다.
ⓒ 열국을 그 앞에 항복하게 했다고 하였다.
ⓓ 그에게 세계적인 패권을 주었다고 하였다.
ⓔ 그에게 재물의 풍성함을 주었다고 하였다.
ⓕ 그것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 그래서 고레스를 자기의 종이라고 불렀다.
고레스는 하나님의 종으로 성실히 그 권세를 수행하여 유대인의 해방의 도구로 선용되었다.
다니엘은 이렇게 예언하였다.
다니엘서 2장 21절에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고 하였다.
다니엘 4장 25절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라고 하였다.
분명히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에게 금, 은, 동, 철, 철과 진흙의 동상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다니엘을 통하여 이 꿈을 해석하였다.
금같은 바벨론 제국, 은같은 메대와 파사 나라, 동같은 헬라 나라, 철같은 로마 나라, 진흙과 철같은 열국 분열 시대의 여러 나라들 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 주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단2:37).
다윗의 고백에서 이 사실을 더 명백히 볼 수 있다.
역대상 29장 11절에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신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고 하였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하였다. 주권적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 중에 홍해의 기적을 맛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 중에 ‘그가(하나님)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다’고 하였다(출15:4).
한나는 기도 중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2:31)고 하였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신다’(삼상2:6)고 하였다.
애굽 바로의 권세가 하나님께로 왔다. 앗수르 산헤립의 권세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권세가, 페르샤의 고레스의 권세가, 헬라의 알렉산더의 권세가, 로마의 시저의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온 것이다.
② 권세자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로마서 13장 2절에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1절에 대한 결론적 표현이다. 모든 권세의 출처가 하나님께로 왔다고 하면, 그 권세를 받은 자의 명령은 곧 하나님 자신의 명을 대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크게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권세 잡은 자의 명령이 무제한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에 대한 명령 순종도 무제한적이 아니다.
이 말씀은 다음 3-4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권세자의 명령이 언제 하나님의 명령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 곧 공의 수행을 전제하고 나온 말이다. 공의로운 명령일 때, 곧 하나님의 명령이 되는 것이다.
역사상에 종종 하나님의 명을 대행하지 못한 경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대신 이루어준 일이 많다.
예컨데, 바벨론 포로 중에 살던 히브리 청년들은 계명에 위배될 때 불순종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왕명을 거역하고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 갔다. 그 결과 저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참으로 순종한 사실을 하나님이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까지 하지 않았는가?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예배함이나 기도함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그의 행위가 정당하였음을 하나님이 사자굴을 통하여 입증하여 주었다.
예수님도 헤롯 왕에게 퇴거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 하시고 그 명령을 어기고 그 영토에 머물면서 전도 사역을 계속하신 일이 있다(눅13:32).
그러므로 불의한 권세자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라 함이 아니다.
저 영국과 여러 나라들에서 왕권 신수설이 유행하였다. 특별히 영국에서는 헨리 8세 때 그러하였다. 왕권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독재주의 였다.
그러나 스튜아트(Stuard), 요한 낙스(John Knox) 등을 중심하여 여기에 항거하고 반대하였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 불충하는 왕을 악하게 보았다(호13:12). 사도 요한은 적 그리스도 왕을 짐승이라고 지목하였다(계13:7-8).
그러나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칼빈주의자는 정치의 형태에 대해서는 결코 시비하지 않는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군주 정치가 타락하면 독재주의가 되기 쉽고, 귀족 정치가 타락하면 소수당 중심의 정치가 되기 쉽고, 민주 정치가 타락하면 폭도 정치가 되기 쉽다”고 걱정하였다.
이 세상에서의 정치 형태는 그 자체가 완전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나라의 역사와 민족의 습성에 따라 결정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이다. 구미 여러나라들은 민주주의가 효과적이다. 그러나 아랍 계통의 여러나라들은 왕족주의가 효과적이다.
어떤 정치의 형태이든 하나님의 공의를 중심하고 움직이는 정부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바람직한 정부 형태는 ‘민주 공화제’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뜻은 정부를 향한 교회의 윤리는 복종이다.
그 이유
첫번째가 정부의 권세는 원천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결코 이 세상 역사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류의 다양한 정부의 권세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우연의 산물인 것은 하나도 없다.
둘째 이유는 이 세상 관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3장 3절에 「관원들은」이라고 하였다. 13장 4절에 「그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다. 13장 4절 중반절에 다시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다. 13장 5절 중에도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 곧 디아코노스(διακονός)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꾼이란 뜻이다.
로마서 13장 3-4절의 요긴한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권세, 곧 정권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선을 조장하고, 악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관원을 세웠다고 하였다. ‘관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① 관원들, 저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청지기들이다.
성경이 밝히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다’고 하고, ‘하나님의 일꾼’이라고도 하였다.
어느 시대, 어느 권세자를 막론하고, 저들이 받은 관원의 권세가 자신으로 말미암았거나 아니면 타인으로 말미암은 적이 없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사람은 그 권세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관원’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 세계의 청지기라함은,
㉠ 종속적 관계를 뜻하고 있다.
하나님은 주인이요, 인생은 그의 종된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관원들은 예외없이 하나님과 주종 관계 아래 놓여 있다.
㉡ 유한적임을 알 수 있다.
권한이 제한적이고, 시간과 활동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이 세상 관원들이 받은 권세가 무제한적이 아니다.
㉢ 자의적 삶이 아니다.
신의적 삶임을 보여준다. 결코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마음대로 행세할 수가 없다.
㉣ 반드시 결산하는 끝날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관원이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결산을 나타낼 때가 반드시 오게 됨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특히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이 그때 그때마다 사사를 세워 직접 통치하셨다. 그런 사사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자였다.
모세나 사무엘 같은 자도 하나님의 사자로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범죄한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느부갓네살도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25장 9절에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치게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27장 6절에도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라고 하였다.
반대로 그들을 도와주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한 파사의 고레스도 하나님의 종, 또는 사자라고 하였다.
이사야 44장 28절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기쁨을 성취하리라」고 하였다.
이사야 45장 1절에도「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라고 하였다.
또한 이사야 45장 4절에는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 저들은 부분적으로, 또 잠정적으로 하나님의 심부름을 했던 하나님의 사자였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다.
② 하나님은 저들에게 ‘검’을 주셨기 때문이다.
로마서 13장 4절에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 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고 하였다.
우리 본문에는 「그가 공연히 칼을 갖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므로 이 세상에 관원들이 ‘칼’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칼’은 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력을 뜻함이다.
하나님께서 관원들에게 주신 ‘검’, 곧 권세의 내용이 무엇인가?
㉠ 선을 권장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일반 은총 세계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왕권 행사에 있어서 이 세상의 통치자를 임명하시므로 그를 통하여 당신의 일반적 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말하자면 선을 행하는 자에게 포상하고, 명예와 지위를 높여주고, 권장하는 일이다.
예컨데, 호국 정신을 가진 애국자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 세금 납부의 의무나, 병역의 의무나, 교육의 의무에 충실한 자들을 격려하고 상을 주는 일이다.
공공 복리를 증진시키는 일이나, 가정을 잘 다스리고, 국가의 질서를 준수하는 자들, 국가의 산업과 경제에 공헌하는 자들에게 포상하는 일들이다.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선행을 많이 하고,여러 문화 업적과 보존에 공헌하는 자들을 포상하고 격려하는 일이다. 교육에 이바지하므로 국태민안에 이바지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더더욱 사회가 선의 성향을 띠게 되고, 밝고 명랑하여지는 일이다.
공공 시설에 공헌하고, 이바지하고, 나아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들에게 정부는 은총을 베풀고 포상하므로 선을 권장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 수종들도록 검 곧, 권세를 주셨이다. 그것이 ‘법으로 정하여 놓은 권력 선용’이다.
그 법은 개인을 위한 법이 아니고 모두를 위하여 정해 놓은 공법이요, 공도이다.
㉡ 악을 제지하는 일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관원들에게 ‘악’을 제지하는 ‘검’, 곧 권세도 주셨다.
관원들이 사용하는 또 한 가지의 ‘검’의 역할이 바로 법으로 정해진 권력을 행사하므로 사회와 국가에 악을 제지하는 일이다.
치안을 위하여 경찰력을 동원하게 하고, 국방을 위하여 국군 통수권을 행사하게 하는 경우들이다.
또한 입법, 사법, 행정권을 행사하게 하여 백성의 안녕과 질서와 공공 복리를 증진케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관원들에게 복종하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로마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고, 방관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저들은 기독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최고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권세를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이교도적 사회의 악법과 반신적, 반기독교적, 반교회적 악법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겠다.
그리고 세상 관원들의 통치를 반대하고 저들의 통치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은 바울을 통하여 권면하기를 이 세상 관원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사자요’, ‘일군’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사자요’, ‘일군’인 것 처럼, 이 세상의 관원들도 꼭 같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들에게 주어진 활동 영역과 내용과 방법이 다를 뿐이다. 교회의 사자들은 영적인 통치자들이요, 특수 은총의 영역이다. 일반 사회의 관원들은 일반 은총의 영역들이라는 것이다.
기독신자들은 이 두 면을 다 관계하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고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안에 들어간다. 그럼에도 육신이 세상에 머물동안 우리는 이 세상 나라의 국적을 가진 자들이요, 그 국법 안에 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일반 은총의 국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권면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관원들이 무신론적이요, 반신적이요, 반기독적이요, 반교회적인 악법으로 다스릴 때는 어찌 하는가?
이 사실은 성경과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악인들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출애굽 시대에 바로도 보내고 모세도 보냈다. 또 포로 시대에 느부갓네살도 보내고 다니엘도 보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네로도 보내고, 시저도 보냈다.
그러한 악법을 통하여 기독신자들을 신앙파수의 용광로로 삼았다.
그 법이 악법일 때 단연코 하나님의 법을 좇았다. 그 결과 반정부주의자, 무법자, 반사회주의자, 반민족주의자로 오인을 받고 순교적 최후를 맞이한 경우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악한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므로 다시 역사를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게 한 일이다.
이것이 역사상의 나치주의자나 일본의 군국주의자였다.
결국 이 법은 심판을 받았고, 새로운 선한 법을 개정하여 살게 하였다.
저 소련의 공산주의와 공산국가주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법을 해산하는 과도기에 이르렀다.
중대한 성경의 교훈은 기독교회의 사회 윤리 중의 하나는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다.
그것은 복종이다(13:1).
그 이유는 첫째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13:1-2).
둘째가 이 세상 관원들은 그 권세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기 때문이다(13;3-4).
셋째 이유는 크리스챤의 사회적 양심생활 때문이다.
로마서 13장 5절에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하는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하였다.
불신자들은 권세자 앞에 복종함이 외적인 법이 두려워 순종할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자들이 권세자 앞에 복종함은 ‘세상 권세의 출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또 그 권세의 집행자, 곧 관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이기 때문이고, 법 이전에 크리스챤의 사회적 양심생활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코 기독신자들은 국가 관원의 명령에 순종하는 동기가 이 세상의 정권 잡은 자의 노를 면하려 하는데만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크리스챤들이 감당할 책무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챤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그것은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데 우리들의 본질적이요, 궁극적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신자들이 세상 관원에 순복함이 바로 우리들의 의무요 권리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모범된 국가 시민 생활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모범적 시민 생활 그 자체가 바로 빛이요, 소금이다. 그것은 선한 행실과 직결된다.
크리스챤의 사회적 양심 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모범된 시민 생활로 나타난다.
모범된 시민 생활이 무엇인가?
본문의 경우,
첫째, 납세 의무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13장 6절에 ‘공세’라고 하였다. 이것은 인구세를 의미한다. 당시 로마 제국의 경우 피지배국가에게 부과된 세금을 뜻한다.누가복음 20장 22절에 나오는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공세를 바치라고 하였다.
‘국세’는 일반적인 세금을 뜻한다.
마태복음 17장 25절에 ‘관세와 정세’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세금 납부의 의무를 시행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세금은 그 나라의 공공 유지비가 되는 것이다. 공원이나 공공 교통기관, 사회 복지 사업이나 교육 기관이나 기타 여러 경우에 공공 복리의 증진을 위해 쓰여진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개념 중에 하나는 ‘세금을 많이 내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들의 신성한 세금 납부의 의무가 바로 국가 선진화의 첩경이 되고 있다.
크리스챤들의 사회적 양심 생활 가운데 하나가 납세 의무의 솔선수범이다.
회사 경영에나 기타 여러 경우에 세금 포탈이나 또 그것을 위하여 이중 장부를 만드는 일등은 불미스럽고, 부도덕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과되는 정당한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므로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는 국세를 주라’고 하였다.
둘째,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로마서 13장 7절에‘두려워할 자를 두러워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위정자, 곧 관원에 대한 외적인 시민의 질서이다. 위계질서이다. 안녕과 축복의 질서이다.
기독신자들은 지고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한 세상의 관원들을 두려워하며 섬긴다. 이유는 그들이 행사하는 권위가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요셉이 바로 앞에 그러하였다.
바벨론에서의 히브리 소년들과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러했고, 페르샤의 다리오 앞에서 다니엘이 그러하였다.
통치자에 대한 백성들의 덕목 중에 하나가 그를 두려워하므로 섬기는 것이다.
셋째,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다.
로마서 13장 7절 하반절에 또 말하기를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였다.
이것도 지도자에 대한 육적, 인격적 태도를 말함이다. 결코 마음에 없는데도 외적으로 두려워함이 아니고, 내적으로 존경심이 일어나는 나머지 외적으로 두려워하므로 순복하는 미덕이 나오는 것이다.
지도자에 대하여 인격적인 존경을 하여야 한다.
이 모든 큰 이유가 ‘저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일반적 은총 영역에 선을 이루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4, 5).
그러므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선한 통치자의 경우는 이것이 가능한데 악한 통치자의 경우는 고통이 수반된다.
성경은 선한 통치자 뿐 아니라 악한 통치자의 경우에도 세금을 바치고, 두려워 하고, 존경하라고 하였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가능하였다.
애굽의 요셉의 경우나 바벨론의 히브리 소년들의 경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저들은 선으로 악을 이겼다.
역대의 순교자들은 신앙과 양심 문제로 국가의 명에 불복하고, 순교하기에 이르렀으나 세상 관원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은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통치자보다 선한 통치자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살아야 한다.
옛날에 중국에 ‘우’라는 임금은 죄수를 만날 때 그를 붙잡고 울었다고 하였다. ‘유관’이란 관원은 민가를 순시하다가 소를 잃은 농부를 보고 친히 수레에서 내려 함께 걸으면서 잃어버린 소를 찾아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목민의 지팡이가 된 지도자가 나와야 된다.
중대한 결론은 기독신자들은 정당한 양심 생활을 위해서 권세자들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2. 사랑의 윤리이다(13:8-10).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크리스챤에겐 두 가지 큰 빚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하나를 가리켜 ‘공공 부채’라고 하였다. 곧 크리스챤의 사회적 양식 생활의 하나로 감당할 납세의 의무라고 하였다.
세금은 모든 시민이 함께 감당해야할 공적 부채이다.
당시 로마제국에 소속된 나라 사람들에게 부과한 세금은 세 가지였다.
그 하나가 토지세(지세: ground tax)이다.
국민이 자기 땅에서 나는 소출 중 곡식의 1/10과 포도주와 실과의 1/5을 헌금이나 물품으로 지불하도록 한 것이다. 예수 당시의 여리고 평지는 풍성한 소산들 때문에 예루살렘 다음 가는 세금이 부과 되었다.
또 하나는 소득세(income tax)였다. 이것은 국민 각자의 소득의 1/100을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두세(poll tax), 곧 인구세가 있었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14세부터 65세까지에 이르는 모든 사람이 내는 것이었다.
이것들 가운데는 수출입 관세, 도로세, 교량세, 시장세, 입출항세, 차량운행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를 황제로 모시고 사는 모든 크리스챤일지라도 이 세상 로마의 황제를 위하여 이런 세금을 잘 내어야 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은 ‘공공 부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납세 의무는 결과적으로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였다.
다음에 바울은 본문에 와서 크리스챤들의 개인적 부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2장 8절에 ‘피차 사랑의 빚’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서로 사랑함’의 빚이란 뜻이다.
1) ‘서로 사랑함의 빚’은 인간 관계의 윤리이다. 형제 간의 윤리이다.
①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3:8). 자기가 아닌 타인이다.
②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3:9).
타인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갖는 이해, 용서와 같은 사랑을 타인에게 행하는 것이다.
③ 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웃에게 행하는 악은 어떤 것인가.
6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7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8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9계명를 범하는 것이다. 곧,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10계명, 곧 ‘탐내지 말라’는 것이라고 하였다(13:9).
이 모든 것들은 사람과 관계된 계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은 인간 관계의 정상화를 뜻함이다.
2) 사랑의 빚은 어떻게 갚는 것인가?
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였다(13:9).
예컨데 물질적인 빚같은 것은 지지 아니 해야 한다.
② 사랑의 빚은 피차 지고 살아가야 된다고 하였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사랑의 빚은 피차 지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이유는
㉠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한 예수님의 사랑, 곧 용서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예수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바로 그것은 영원한 빚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구원의 은혜, 곧 ‘복음의 빚진 자’라고 하였다.
㉡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형제간에 사랑의 빚을 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라고 하였다. ‘죄 지은 자’는 직역하면 ‘빚진 자들’을 뜻한다.
우리는 자신이 남에게 빚을 지고 있고, 타인도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빚 탕감함을 받고 살아가듯이 내가 형제에게, 형제가 나에게 피차의 빚을 서로 탕감하고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리겐(Origen)은 말하기를 ‘사랑의 빚은 영구히 우리와 함께 남아 있고,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며, 이것을 우리 속에 주고, 또 영원히 받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하였다. 이 말은 서로 서로 열심히 사랑의 빚을 갚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의 세력에서 자유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빚을 갚지 않으면 사망의 세력, 곧 죄의 삯이 소리친다고 하였다.
그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 무엇인가?
① 이웃에게 죄를 범하지 아니 하는 것이다(소극적).
② 이웃인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적극적).
바로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하는 용서이다(마18:22).
그 뜻이 무엇인가?
즉각적 용서, 완전한 용서, 영원한 용서, 기억지도 않는 용서, 형제의 축복을 비는 용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온 용서이다.
3)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감은 바로 율법의 성취요, 완성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13장 8절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13장 10절에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하였다.
이는 곧 율법을 이루는 이김의 삶이다. 이 사실은 예수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율법 성취의 개가, 예언 성취의 개가, 구속 성취의 개가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 곧 희생으로 이 율법을 이루고 완성하였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고 행하면 바로 율법을 이루고 완성한 결과가 된다는 사실이다.
피차가 갖고 있는 사랑의 빚!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여로에 매일 매일 갚아야할 빚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에게 매일 매일 지고 있는 빚이다.
그럼에도 이 사랑의 빚은 숭고한 빚이다. 무한의 빚이다. 결코 예수님에게나 사람에게 다 갚을 수 없는 부채요, 갚을 수록 더 커져감을 느끼는 부채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또 우리는 형제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그것을 갚아야 한다. 그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은 형제를 용서하고, 또 불신 형제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3. 각성의 윤리(13:11-14, 개인과의 관계)
본문은 성자 어거스틴(Augustine)이 새롭게 출생한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그는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어느 날 나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실패와 좌절감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선하게 살고픈 나의 욕망과는 정 반대로 이어져 가는 나의 삶 때문에 나는 실망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그는 양심으로 이렇게 비참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래? 또 얼마나? 내일 그리고 또 매일? 왜 지금은 안될까? 왜 이 시간에 내 타락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지 못할까?” 이러한 생각으로 슬피 울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 담 넘어 이웃에서 어린 소녀의 한 음성 같은 소리가 그에게 들려 왔다. ‘취하여 읽어라’ 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의 영감에 눌려 집에 들어가 붙잡은 책이 성경이고, 그 성경 중의 내용이 바로 로마서 13장 11절로 14절의 내용이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방탕자 어거스틴을 이 음성으로 깨우쳐 주었다.
어거스틴은 자기 친구 알리피우스(Alypius)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 어거스틴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자기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응답이었기도 하였다.
언제나 성경만이 개인과 가정과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유는 그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탕자 어거스틴을 재창조하였다. 그리고 새 출발시켰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강령을 계속하는 중이다.
먼저 사회와의 관계 윤리, 곧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강령을 말씀하였다. 그것은 복종의 윤리였다.
다음으로 사랑의 윤리, 곧 대인관계의 강령을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자신과의 관계인 생활 강령을 말하였다. 그것이 곧 각성의 윤리이다. ‘깨라’는 말씀이다.
⑴ 시간 또는 시대에 대한 각성이다.
그것은 잠자다가 깰 때라고 말하고 있다.
13장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라」고 하였다.
여기 ‘시기’(τὀν καιρὀν)는 ‘그 시기’ 인데,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은 때를 말함이다.
그것은 바로 ‘주 재림의 시기’이다. 종말의 시기이다. 이 때는 하나님이 정한 구원 계획의 시간이다. 정하여 놓으신 그 시간 그 때를 향하여 역사는 멈추지 않고 진행하고 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우리 본문에 가까워 왔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 왔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워 왔다」고 하였다(13:13).
‘밤’은 불신앙과 환난의 때, 죽음의 때, 고통의 때를 나타낸다(살전5:5, 사21:12). 또한 죽음의 때를 가리킨다(요9:4).
‘낮’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할 신천 신지를 가리킨다(말4:2, 살전 5:1, 2).
이것은 바울의 영적 영계의 선언이다.
깊은 밤은 새로 오는 밝은 새벽과 아침의 징조이다.
구약 시대를 보면, 죄악이 온 땅에 관영한 뒤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있었고, 그 다음에 밝은 구원의 새 아침이 왔다.
이스라엘은 430년간의 종된 고통의 밤이 지난 다음에 출애굽이라고 하는 구원의 아침이 왔다.
사사 시대의 암흑기가 지난 다음에 빛난 다윗 왕조 시대의 아침이 왔다.
말라기 선지 이후 400여년의 암흑기가 지난 다음에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왔다.
교회사에 보면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1,000여년이 넘도록 로마 카토릭의 교권 아래 영계의 흑암이 계속되었다가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광명이 세상에 왔다.
주님 재림 직전 시기에 밤이 깊은 것은 새 아침을 알려 주는 각성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밤이 깊었다’는 말은 신자에게 아침이 접근하고 있다는 각성의 촉진제가 된다.
⑵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1)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한다.
13장 12절에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라고 하였다.
어둠의 일이 무엇인가?
첫째는 육욕이다.
13장 13절에 ‘술취함과 방탕’이다.
여기 ‘방탕’(κώμος)은 주정꾼들의 오합지졸을 뜻한다. 무의미의 방가(放歌)들이다.
술취함(μἐθη)은 연락에 취함을 가리킴이다.
그 다음은 음란과 호색이다 성욕의 죄이다. 곧 부도덕이다.
여기 음란(κοίτη)는 무법한 성행위를 뜻함이다. 호색(ἀσελγεία)은 육욕을 즐기는 파렴치한 언사와 행동들이다.
그 다음은 쟁투와 시기이다. 곧 감정적 무절제이다. 여기 쟁투(ἔρισ)는 격정이고, 시기(ζήλο)는 남의 행복을 싫어하는 편견이다. 이것은 자기 우월감의 소산이다.
이것들을 모두 「어둠의 일들」이라고 하였다(13:12).
13장 14절에「정욕을 위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옛 사람과 그 행위라고 하였다. 율법 아래 살던 때의 삶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육신이라고 하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라고 하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밝은 새벽과 아침을 기다리는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어둠의 일들을 벗어버려야 된다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영의 말씀 앞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깨어났다.
2) 적극적으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13장 12절에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하였다.
13장 14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 바로 빛의 갑옷이다.
어떤 옷일까?
㉮ 제일 좋은 옷이다. 흰 옷이다(눅15:22). 돌아온 탕자에게 새로 입힌 옷이다.
㉯ 칭의의 옷이다(계7:14).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한 자가 입는 옷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 입는 옷이다.
㉰ 선한 행실의 옷이다. 요한 계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다.
회개하는 옷, 믿음의 옷, 선행의 옷이 빛의 갑옷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옷’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은 옷’을 뜻한다.
갈라디아 3장 27절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덧입혀졌음을 뜻한다.
‘옷’은 육신의 몸을 보호한다. 추위와 더위와 비, 바람, 눈과 여러 불결 등에서 보호한다.
특별히 전쟁 중에서 군인의 갑옷은 제 2의 생명이다.
캄캄한 죄악의 깊은 밤을 통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남는 법은 회개와 믿음과 선행의 옷이다.
‘옷’은 일하게 하는 신분이다. 옷을 볼 때 군인인지, 경찰인지, 학생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분한다. 옷을 볼 때 노동하는 사람인지, 여행하는 사람인지, 예식장에 가는 사람인지를 분별하게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만이 깊은 밤을 안심하고 통과할 수 있다.
영감의 음성이 주장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역사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에게 종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종말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성경을 기록할 때가 벌써 2,000여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종말의 시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함이 성령의 뜻이다.
종말 대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함이 성령의 소원이다.
신자들에게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한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대로 생각하고, 육신대로 듣고, 육신대로 말하고, 육신대로 판단하고, 육신대로 행동하고, 육신대로 따르면 끝장이란 말이다.
영을 좇아 영의 소리를 듣고, 영의 감정대로 고백하고, 영의 의지대로 판단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생활을 날마다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