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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2024년 2월 25일 / 막 8:33-38
막 8:33-38 /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34) 그러고 나서 제자들과 군중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37) 사람이 자기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38)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카톡에 온 좋은 글로 설교에 필요한 것이기에 서론으로 실어본다.
▮ 이 세상에서 친구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을 더 두려워하십시오. - 존 플라벨 -
우리는 세상 가운데 주어진 믿음의 싸움을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작은 이익이나 편리함 그리고 즐거움을 놓치기 싫어서 믿음으로 사는 길을 주저하거나 연기하고 있지는 않는지, 현재의 작은 핍박과 불편함을 피하고자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면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고, 좀 적게 벌더라도 말씀과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그리고 자신의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자리를 떠나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
■ 앤드류 마리아(Andrew Maria)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성바오로출판사)이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이다. “사막의 교부로 알려진 마카리우스(Macarius)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님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보았다. 마카리우스는 주님께 달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카리우스는 다시 주님께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모른체하시며 십자가를 힘들게 걸쳐 매고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끈기 있게 주님 곁에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십자가를 어깨에 매신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에게 몸을 돌리셨다. 그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이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너의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먼저 지려무나.’ 마카리우스는 주님이 가리키신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자기의 십자가가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얼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왔다. 와서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메었던 십자가가 없어졌다. ‘아니,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물었다. 그때 주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아들아,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 내 십자가를 지는 것과 다름이 없단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가복음을 크게 둘로 나눌 때 본문이 분기점이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머지않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하여 입술로만 고백을 한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본문은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뜻 깊은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인지 점검해보았으면 한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수난 예고(豫告)를 들은 베드로가 강하게 반대하였다. 베드로는 이러한 태도로 인해 책망을 들었다. 왜 베드로가 반대하였을까? 고난이 없는 영광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시면 자신도 영광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는데,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하시니 그럴 수 없다고 만류한 것이다. 우리 아니 나부터라도 이러한 상황이라면 베드로처럼 하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의 관문을 넘은 후에 비로소 영광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석균 목사의 ‘눈물의 참회록’을 되새겨 불러볼 필요가 있다.
♬ ❶ 지금껏 내가 한 일이 주를 위한 일이었는지 지나간 세월 돌이켜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 한 몸 주를 위하여 목숨 버린다 했으나 주의 영광 뒤로 하고 나의 자랑 앞세웠으니 내가 가는 이 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예수 이름만 파는 가룟 유다와 같습니다. ❷ 한평생 주를 위하여 변함없이 살겠다던 베드로 같은 믿음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맘속엔 허영과 교만만 있고 주님 지신 십자가는 짐이 된다 벗었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율법만 앞세우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❸ 오늘도 복음을 들고 쉼없이 다녔지만 성령의 불같은 인도 믿음없이 전했습니다. 육신의 곤고함 더하여 복음의 사명 약했으니 아버지여 연약한 종 어찌해야 하오리까? 내가 가는 이 길이 영광의 길이라면 바울과 같은 믿음을 내게도 허락하소서.
십자가가 짐이 된다고 벗어버린 것은 아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의 길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십자가는 영광 얻기를 소망하는 자가 반드시 넘어야 할 최대의 관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먼저 져야할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지?
1.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 복음성가 ‘야곱의 축복’을 만든 이기현 음악감독의 이야기 /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산소 압력 조절 실수로 인해 시신경이 끊어져 시각 장애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고도 불리며 CCM 작곡가 겸 가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였다. 500곡이 넘는 복음성가를 작곡, 편곡했다. 그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기도를 받으면 눈이 떠진다는 소리를 듣고 8살 때 어머니를 따라 기도원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기도원에서 키보드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음악에 눈을 떴다. ‘키보드 소리가 신기했어요. 반주자에게 쳐보고 싶다고 했죠. 처음에 화음 3개를 알려주시더군요. 쭉 듣고 따라 치다가 석 달 만에 예배 반주를 하게 되었어요.’ 이후 음악은 삶의 전부가 되었다. 레슨을 정식으로 받은 적이 없었으나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나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다. 복음성가를 작곡, 편곡해서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눈보다 귀한 예수님, 눈을 잃었지만 맹인이 되었서도 예수님을 만났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증거하며 살기 원합니다.’
비록 두 눈은 멀었으나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찬양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많은 사람이 그의 노래를 통해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 그 역시 예수님을 만난 후 절망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목적도, 방향도 없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택하자.
33절 /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의 ‘하나님의 일’은 원어로 ‘타 투 데우’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한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한다면 ‘사탄’이라고 책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반면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포기하고 세상 영광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는 길을 택하도록 요구하였다. 믿는다는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가치관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관으로 바꾸어야 하고,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일부터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2. 자기를 부인하라
■ ‘성공의 법칙’의 저자 맥스웰 몰츠(Maxwell Maltz)의 이야기 / 그는 성형외과 의사였다. 수많은 시술과 임상을 통해 외모가 바뀌었을 때 나타나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수술 후 어떤 사람은 자신감을 얻어 긍정적인 인생을 사는 반면 어떤 이들은 외모가 나아졌음에도 여전히 부정적인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면에 각인된 불행과 실패의 자아 이미지를 바꾸지 않고는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변화는 마음의 성형 수술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자아 이미지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자아 이미지를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자아 이미지로 바꾸어야 한다. 신앙생활도 성공하려면 나를 지배하던 옛사람 즉 나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올려놓아야 한다. 감정과 욕심에 끌려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 이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할 때 가능하다.
이렇게 살아가면 좌절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는다. 초가삼간도 만족하며 살 수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에 서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존심도 부인하고 이기적 욕심과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부인해야 한다. 나를 지배하는 미운 감정, 섭섭한 감정을 부인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우리라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여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 드러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 때 예수님이 나타난다.
34절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는 원어로 ‘헤아우톤 아파르네사스도’인데 ‘죄악된 성품을 부인하다’라는 의미이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날마다 죄악된 본성과 결별하고 죽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자기 안에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과거(aorist)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지금 당장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부터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내일로 미루지말고 지금 당장 자기의 권리를 유보(留保)하고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라는 말이다. ‘형편이 되면 ….’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도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지금 당장 – 바른 신앙고백을 했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저하지 말고, 희생을 각오하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외치지만 실제로 희생은 뒷전이고, 언제나 상석만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겉으로 열심을 품고 일하는 것 같지만 발걸음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화가 있으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라고 7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리고 23:1-4에서는 이렇게 지적하셨다.
마 23:1-4 /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 말씀을 남에게 해당되는 책망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로 여기면서 고칠 것이 있다면 과감히 회개하여 예수님께 칭찬받는 성도가 되도록 힘쓰자.
▶ 그러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가? ‘예수님을 좇으라’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그 의미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 말씀을 듣는 군중,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계속해서 순종해야 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라. 십자가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 그 곳에는 더 무거운 십자가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달게 지면 그 십자가가 너의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여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를 따르는 자만이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때로 금식하고, 사랑을 베풀며 어느 때보다 뜻 깊은 사순절을 보내시기 바란다.
3. 목숨을 잃어버리라
■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두고 언론인 클럽에서 ‘세계의 자유민들도 승리를 향해서 함께 진군하고 있다’라고 연설을 하였다. 연설 중에 젖소의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목장으로 젖소를 사러 갔습니다. 마음에 드는 젖소 한 마리를 고른 아버지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젖소의 혈통은 좋습니까? 유지방 성분은 어떻습니까? 매일 얼마의 젖을 냅니까?’ 그러자 젖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송아지 때부터 키운 이 젖소가 늘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젖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젖소는 틀림없이 당신에게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줄 것입니다.” 이 말을 한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말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늙은 젖소와 같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가진 모든 것을 국민 여러분과 미국을 위해 다 바치겠습니다.” 연설을 듣던 언론인들이 모두 일어나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지? 하나님을 위해 손해 볼 수 있는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주를 따르는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35절 /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의 ‘목숨을 잃으면’은 원어로 ‘아폴레세이 텐 프쉬켄’인데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버리다’라는 순교적 의미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적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적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그의 3친구의 선택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교훈이 된다.
단 3:8-30 / [고발당한 다니엘의 세 친구] 바벨론 사람 몇몇이 바로 이때에 유다인들을 고발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9) 그들은 느부갓네살왕을 찾아가 이렇게 고발하였다. `임금님! 만수무강하소서. 10) 임금님께서는 신상 제막식 때 풍악이 울리자마자 모두 엎드려 신상 앞에 절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11) 또한 그 명을 거역하는 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런데 바벨론 지방관리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임금님의 명을 어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다인들인데 임금님이 섬기는 신에게 예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님께서 세우신 신상에 엎드려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13) 그 말을 듣고 느부갓네살왕은 화를 내면서 당장 그 세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14) 그들이 왕 앞에 나아오자 왕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너희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란 말이냐? 너희가 네가 섬기는 신께 예배드리지 않고 내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냐? 15) 지금이라도 나팔과 피리와 수금, 삼현금 또 양금과 생황 등 갖가지 악기들이 풍악을 울리거든 꿇어 엎드려 금신상 앞에 절을 하여라. 만약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장 너희를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질 것이다. 어쩔 테냐? 그래, 너희는 너희를 구해 줄 다른 신이라도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냐?' 16)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저희들에게 내리신 그 조건에 아무런 대답도 할 마음이 없습니다. 17) 임금님께서 우리를 불가마에 내던지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금신상에게 절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실 마음만 있다면 임금님께서 우리를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진다 하실지라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18) 설령 그분이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임금님이 섬기는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또한 임금님이 세우신 금신상에 꿇어 엎드려 절하지도 않겠습니다.' 19) [불가마에 던져진 세 친구] 이 말을 듣고 느부갓네살은 안색이 변하더니 매우 화가 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느부갓네살은 곧 명을 내려 불가마에 불을 더 지펴 평상시보다 일곱 갑절이나 더 뜨겁게 하라고 하였다. 20) 그러고는 자기 군대 가운데에서 힘이 가장 센 군인들에게 명을 내려 그 세 사람을 꽁꽁 묶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지라고 하였다. 21) 그래서 그 군인들은 세 사람을 꽁꽁 묶었다. 물론 속옷과 바지와 도포를 입은 채로 묶었다. 그런 다음 그들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졌다. 22) 그런데 왕의 명령이 너무 엄하였고 불가마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 던졌던 군인들마저 그 불에 타죽을 수밖에 없었다. 불이 그렇게 뜨거웠어도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23) 이렇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꽁꽁 묶인 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져졌다.
▶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한 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자.
단 3:24-30 / 그때 갑자기 느부갓네살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신하들에게 소리 질렀다. `아니, 그래 우리가 세 녀석을 꽁꽁 묶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지지 않았더냐?' `예, 임금님, 하라는 대로 하였습니다.' 하고 신하들이 대답하자 25) 느부갓네살이 또 말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 불속에 네 사람이 묶이지도 않은 채로 왔다갔다 한단 말이냐?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어 보이는구나.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저 네번째 사람은 꼭 천사같이 보이는구나.' 26) [승진한 세 친구] 느부갓네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아, 이리로 나오너라.' 그러자 그 세 사람이 불 가운데서 곧 걸어 나왔다. 27) 지방장관과 대신과 총독과 다른 관료들이 불가마에서 나온 그 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불에 상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도 그을리지 않았고 옷도 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기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28) 그러자 왕이 입을 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바로 그분이 천사를 보내셔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 사람들을 건져 주셨구나! 이 사람들은 내 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내가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세운 신상에 절하지도 않았다. 29) 그러니 이제 내가 명을 내리노라. 그 어떤 사람이든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인종이 다르든 쓰는 말이 다르든간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런 말을 입에 담기라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또한 그가 살던 집은 아예 부숴 버려 쓰레기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 세상에 이와 같이 사람을 구해 줄 신이 어디 있느냐!' 30) 그러고 나서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바벨론 지방에서 지금까지 맡고 있던 벼슬보다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마 6:25-34 / 그러므로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진정한 성공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므로 내일 일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헛된 영광을 좇아간다고 따라가서는 결코 안 된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고 있다.
약 4:13-17 / [자랑에 대한 경고] `오늘이나 내일 이러이러한 도시로 가서 일년쯤 자리잡고 앉아 한밑천 잡아 보자'고 계획하는 이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14) 내일 일을 어떻게 기약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아침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여기 있으나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릴 존재입니다.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일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해야겠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마음대로 계획을 벌이고 자랑을 늘어 놓습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17)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길이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인가’를 잘 구분하여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좁은 길을 잘 선택하시기 바란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은 영원히 쇠하지 않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의 ‘나를 따르라(Nachfolge)’는 산상수훈을 토대로 제자의 도리를 밝힌 책이다. 본회퍼는 이 책에서 제자라는 말대신 ‘뒤따르는 자(Nachfolge)’라는 말을 했다.
제자라는 말보다 더욱 역동적인 의미를 주는 ‘뒤따르는 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예수님 역시 그렇게 하셨다. ‘내 제자가 되라고 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주를 따르는 일은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가능하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디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주를 따라가시기 바란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시기 바란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맺는 글
♬ ❶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❷ 좁은 이 길 진리의 길 주님 가신 그 옛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소명 이루소서
❸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백성을 구속하니 참 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 유명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 /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독일 사람으로서 나찌 당원이었으며 전쟁이라는 기회를 포착해서 유대인 소유의 범랑공장을 인수하여 어떻게 돈을 많이 벌어 볼 것인가만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머리를 짜낸 결과 유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이윤을 챙긴 돈벌레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그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돈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가리지 않고도 일을 이루는 참으로 수단 좋은 사람이었다. 뿐만아니라 돈을 아는 만큼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짜릿한 세상 쾌락을 추구하는 속물중의 속물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날 나찌 수용소안에서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머리에 총을 맞고 ‘퍽’하고 쓰러져 죽는 유대인의 모습,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고 ‘억’ 소리를 내며 쓰러져 죽는 모습, 그것을 보며 ‘자기도 언제 죽을 것인가?’하며 공포로 가득찬 유대인의 모습을 보며 쉰들러는 인간 생명의 고귀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또한 수백명이 독개스실에 들어가 떼죽음을 당하는 소식을 들으며, 그는 스스로 고뇌하고 인생이 180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유대인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짜냈다. 돈을 물쓰듯 쓸 뿐 아니라 자기의 처세, 온갖 수단을 다 활용하였다.
자기를 의심하는 수용소장인 괴트를 미묘한 심리전을 이용해서 그들 설득하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온 재산을 날리면서까지 유대인을 구해 냈다. 사실 자기 공장에는 그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한명이라도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주고 수용소의 유대인을 자기 공장으로 데려 왔다. 마침내 쉰들러의 공장은 파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독일이 2차대전에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 있던 유대인은 거의 다 죽었다. 하지만 쉰들러의 공장 안에 있던 1,200명의 유대인들은 모두 구원, 자유, 해방을 받게 되었다. 쉰들러의 그 엄청난 노력으로 1,200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구하게 되었다. 이제 쉰들러는 나찌 당원이었기에 파산된 공장을 버려두고 도망을 가야 했다. 그때 1,200명의 유대인들은 쉰들러에게 감사의 보답으로 잇빨을 빼서 금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만약에 있을 일을 대비해서 1,200명이 모두 쉰들러에게 서명날인을 해 주었다.
그때 쉰들러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한탄, 후회하는 말을 고백한다. ‘내가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이 자동차를 팔았다면 10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이 뺏지를 팔았더라면 1-2명은 더 구할 수도 있었을텐데... 아니 내가 지난 날 술과 여자에게 썼던 그 많은 돈을 여기에 썼더라면 저 수용소의 모든 유대인을 다 구했을텐데... 내가 잘못해서, 내가 어리석었어! 더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더할 수도 있었을텐데 ….’ 그는 눈물을 자아내며 후회를 한다. 생명의 소중성과 가치성을 알았던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차를 타고 공장을 떠난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아! 쉰들러! 참으로 그대는 너무도 멋있는 사람이요.’ 하며 감탄을 연발한다.
쉰들러는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에게 영웅이 되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모든 유대인의 가슴속에 심겨져 있다.
■ 살아있는 순교자 / 여순반란 사건때 목사님이 심방을 갔다. 오는 길에 공비들에게 체포되었다. 목사님을 꽁꽁묶어 창고에 집어 넣었는데, 한밤중에 인민군 하나가 들어오더니 ‘여기 예수 믿는 동무 없나?’하고 했다. 목사님은 죽을까봐 겁이 나서 뒤에서 벌벌 떨고 웅크리고 있었다. 두 번째 들어와 물었다. 한참있다 세 번째 들어와 물었다. 목사님은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물었다. 따발총을 들이대고 ‘너 안 믿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확인해 오더니 목사님의 가슴을 쿡 찌르며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였다. 그때는 사람이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생각이 들어 ‘제가 목사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너 괴수구나. 나와!’라고 하였다. 목사님 말씀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하였다고 한다. 꼭 지옥에서 천국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이젠 됐다. 이젠 살았다.’ 죽으러 가지만 ‘승리했다’는 생각에 가벼운 맘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인민군이 밖으로 나오더니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결박을 풀어주고 ‘목사님! 빨리 가십시오.’ 하더란다. 그 인민군은 믿는 사람인데, 목사님이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살려드리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나오라.’고 하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정신, 자기를 부인하는 정신이 아닌가? 살려니까 복잡하고 문제가 많지, 죽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우리도 이젠 모두 십자가를 진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죽을 맘으로 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죽어야 살고 잃어야 얻는다. 이 죽음은 ‘땅’하고 총맞아 순간적으로 순교하는 죽음이 아니고, 순교자와 똑같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것을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자기를 죽여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리신다. 부활의 기적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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