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므로, 복음이 이해되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신론과 인간론은 복음의 두 가지 큰 전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이 두 전제에 대해서 기독교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가장 먼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서 기독교와 반대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신학,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종교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고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도덕적 요구도 있을 수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순수한 느낌이란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친구에 대한 사랑이라는 고귀한 현상은 친구에 대해 우리가 아는 지식에 의해 일어난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인간의 사랑도 실은 도그마로 가득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도 우리 마음에 축적된 엄청난 양의 지식에 의존하는데, 종교의 근거인 절대자와의 관계는 왜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향한 가장 비열한 악담에 대해서는 인내하면서, 왜 친구에 대한 악담에는 분노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절대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의 기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분명히 발견했다. 들의 백합들은 하나님의 뜨개질 솜씨를 드러냈다. 도덕법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했다.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된 법은 하나님의 법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발견했다. 우리 주께서 선지자들과 시편 저자들의 글을 사용한 방식은 얼마나 심오한가! 그런 하나님의 계시가 무익하다거나, 오늘날에는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마음과 정신에 가장 친근하던 것들을 멸시하는 행위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 지식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와 무관하게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선행하는 어떤 뜻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된다.
예수의 모든 말씀에는 지고의 한 인격적 존재에 대한 지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친밀하고 인격적인 접촉을 갈망했고, 바로 그 접촉이 예수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예수는 놀랍도록 친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했으나, 그런 계시는 오직 구약의 유산과 예수 자신의 가르침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참된 의미를 가진다. 합리적 유신론, 한 지고의 인격자,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의 뿌리에 있다.
예수가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행동을 결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지식은 “실천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은 이런 뜻이 아니다. 현대의 토론에서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지식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이론적이지 않은 실천적 지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객관적 실재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 지식, 전혀 지식이 아닌 자식이다. 이것은 예수의 종교와 아무 관계도 없다.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는 모호하고 비인격적인 선과 맺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생한 인격자와의 관계였으며, 이론적 지식의 대상이 되면서도 분명한 존재였다. 예수의 종교의 기초는 인격적 하나님의 참된 존재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정당한 논증을 압축해서 보관하는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본능적인 믿음처럼 보이는 것이 많은 논리적 단계를 거쳐 도달한 결론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원시적 계시의 결과이며, 유신론적 증명은 처음에 다른 방식을 통해 도달한 것을 논리적으로 확증한 것에 불과하다. 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논리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관심사다. 종교와 철학은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한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참 종교는 사이비 과학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거짓된 철학과도 화평을 이룰 수 없다. 종교에서 참된 것이 철학이나 과학에서 거짓이 될 수는 없다. 기독교의 뿌리에는 인격적 하나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유신론적 논증을 헐뜯고 과학적 혹은 철학적인 확증과는 무관한 “실천적” 지식에서 도피처를 찾는 이 시대에, 자유주의 설교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 호칭은 유신론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만드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매우 고상한 개념을 표시한다. 이 단어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것은 다신론과도 연결되어 많은 민족 사이에 퍼져 있다. 특히 구약의 용례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준비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개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나라 혹은 왕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긴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 개개인은 그들이 선민의 일부인 까닭에 언약의 하나님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단어의 의미를 말할 수 없이 풍부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특별히 기독교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옳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교훈에 들어 있는 이 요소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이것을 우리 종교의 총체요 본질이라고까지 간주하는 경향을 때로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전에 생애를 바쳤던 많은 것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신조들에 나타난 신학에는 관심이 없다. 죄와 구원의 교리에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대속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거기에 따라오는 사람끼리의 형제됨이면 충분하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받아들이므로 당신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이라는 이 현대적 교리가 예수의 교훈의 어떤 부분도 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도 없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5:44-45). 여기서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모두 돌보는 분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는 불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이라는 현대의 교리는 예수의 교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과 유사한 것이 신약성경에 등장한다. 또한 일반적인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아버지됨과 아들됨이라는 용어가 여기저기서 사용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드문 경우다. 일반적으로는 “아버지”라는 고상한 용어가 훨씬 친밀한 종류의 관계, 곧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와 맺는 관계에서 사용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이라는 현대적인 교리가 “기독교의 본질”인 양 높이 평가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복음이 선포될 때에 설교자가 하나의 가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애매한 자연주의 종교에 속할 뿐이다. 하나님의 부성에 관하여 신약성경이 특이하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믿음의 가족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신 개념은 부성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사상적 차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인 견해와 다르다. 실은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적 가르침의 중심과 핵심 자체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제시된 기독교적 신관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위치를 가진다. 다른 속성들을 알기 위해서 그 한 가지 속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두려운 초월성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조물을 창조주로부터 구분하는 엄청난 간격에 주목한다. 물론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재하신다. 하나님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반면에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이 웅장한 세계의 진행과정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된 인격이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 생명이 그 생명의 일부인 것이다. 결국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때로 복음서의 성육신 이야기는 인간이 최고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일반적 진리의 상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설명이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이상하다. 왜냐하면 사실 범신론은 매우 오래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항상 종교생활에 해를 끼쳐 왔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범신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사방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구별을 없애며,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의 인격 사이의 예리한 구분을 허물고 있다. 이 견해에서는 심지어 사람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생명의 일부로 간주된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는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94-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