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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케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5:14-20 서 5:14-20
오늘은 고린도 후서 5장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서론적으로 고후4:16을 말씀드리면서 이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육체는 점점 더 늙어만 갔습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항상 과로하고 그 몸이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항상 그를 괴롭히는 가시 같은 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그는 종종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몸에 상처를 입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성경에서 고백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고후11:20-)
그런데 이것은 비단 바울 사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는 제가 처음에 뵈었을 때는 흰머리 하나 없더니 이제 보니 완전 백발이 되어 그것을 애써 감추느라고 염색도 해 보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어느덧 백발이 될 나이가 되었는가! 세월은 덧없이 지나갔건만 마련해 놓은 것은 없고, 싸아놓은 부도, 그렇다고 사회에서 알아 줄 만한 아름다운 명예를 남긴 것도 없이 그저 세월만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일을 해 놓은 것도 아니라면 측은하기가 짝이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마음은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사람이 후패해지는 가운데 날로 새로
워지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은혜를 늘 받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 할 때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시도 베드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들을 우리 스스로가 지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다 주께 맡기고 우리 심령이 주안에서 편히 쉴 때! 우리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겉사람이 후패하여 질 수록 그 반대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인 육체가 점점 후패하여 허약하게 되면 이 육신을 근거로 하던 여러 가지 추한 욕심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욕도, 물욕도, 권세욕도, 명예욕도, 세상에 붙은 온갖 욕심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갑니다. 남에 대한 시기, 질투, 분노, 증오심 같은 악한 감정도 다 사라지게되고 자연히 남을 용서하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겉사람 육체가 아주 무너질 때에 새로워진 그의 심령은 옛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어떤 사람이 한가지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을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영혼 구원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종용하고 분별력이 있게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일할 필요도 느낀 사람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14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나를 강권하시는 도다."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매일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아 가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복음을 전합니다. 때로는 매를 맞으면서, 기절하면 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서 또 다른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어떤 때는 잡혀서 태장에 맞으면서, 감옥에 수감이 되어서도 온갖 비난과 악평을 들으면서도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일하였습니다. 그는 과연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거듭나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렇게 살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합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면 섬기지 않을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계신 주님의 그 사랑이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는 늘 마음에 고민이 있습니다.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옛날처럼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기쁘시게 하며 살까? 이것이 늘 고민입니다. 오늘 본문 15절과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소망, 고집, 계획이 있는 한 그리스도는 그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내게 소망이 있다면 주님이 소망이요 계획과 비전이 있다면 주를 위한 계획과 비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젊은 진젠돌프 백작이 어느 박물관에 관람을 갔습니다. 거기에는 유명한 성화들이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다니다가 문득 어느 구석에 걸려있는 성화 앞에 서서 마치 그 그림에게 붙들린 사람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습니다. 그 그림은 에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이마에 땀과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얼굴이 이 진젠돌프를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내 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라는 글이었습니다. 그 그림에 붙들려 있던 진젠돌프는 잠시 후에 그 자리에 주저앉다시피 무릎을 끓고 "오 주님이시어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하면서 그의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모라비안 교회의 진젠돌프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피난민들을 모아 가지
고 함께 기도하면서 온 천하에 선교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킨 유명한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분의 삶만이 아닙니다. 훌륭하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의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강권하심이 역사 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스스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내 속에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면 형제에게 해가 되는 존재로 사는가, 아니면 덕을 세우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람으로 사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Ⅱ.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잔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지금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전화를 할 수도 있게 되었고, 지구 반대쪽에서 일어난 사건을 정반대 쪽의 있는 사람이 동시에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루 동안에 무엇을 했는가를 앉아서도 추적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관학 문명의 혜택으로 생활 양식은 변했지만 사람은 옛사람 그대로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원시인 같고 부쉬맨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은 변했다고 하지만 속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간교하고, 교만하고, 시기하고 음란한 것이 그대로입니다. 마음이 잔인하고, 우둔하고 미련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안타가운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환경이 나뿐 것입니까! 도시 개발이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문제요!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만물보다 부패되고 더러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교육을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겠다고 취미 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을 바꾸는 것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독생자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분이 물과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일그러진 인간을 개조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 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바울 사도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다메섹으로 갈 때만 해도 살기가 등등한 사울 이었습니다. 교만하기가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이 없어지고, 살기와 독기가 빠지고, 증오심과 잔인성이 사라지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 주님께 그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생활도 그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생활이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되신 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그 증거인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배 드리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기도하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성경 지식을 좀 가지고, 찬송 좀 아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예수 안 믿으면서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변화, 생활의 변화,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사람이 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Ⅲ.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이유입니다.
19절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요, 기독교의 복음은 화목의 복음입니다. 화목할 대상
은 첫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둘째는 서로간에 화목하고 셋째는 화해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사람이 왜 담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였고, 범죄 함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큰 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 흘려 고난받으시고, 죽으시므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저 돌아와 화해 할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잘 못했습니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려고 죄인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두 팔을 넓게 펴시고 말입니다. "죄있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와 화목하자!"하시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이래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불화와 반목과 분쟁과 분열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해야 참된 평화와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사람과도 화해하고 화평해야 은혜를 받고, 우리의 예배가 열납되고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산상 보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전에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해 주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왔다가 요셉을 만납니다. 그때 그들은 동생을 만나 기쁜 것이 아니라 저희가 지은 죄를 만나 무서운 것입니다. 그때 요셉이 말 한 것을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마세요! 나는 벌써 형님들을 다 용서하였습니다."라고 하는 요셉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이런 것들을 담고 있으면 불행해집니다.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아니 달라지는 것은 내 마음만 황폐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면서 살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영광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Ⅳ. 끝으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수행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어디가나 싸움을 붙이는 삶이 있습니다. 거짓말로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 종류는 어디 가나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각계 각층에 불화하고, 반목하고 분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디 가나 화해자가 되어야합니다. 그 이유가 19절에 보니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20절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신이라고 하는 것은 대사라는 말입니다. 대사는 그 국가를 대표해서 가 있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대표로 이 세상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 사업장에! 학교와 시장에 천국의 대표로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그리스도를 보여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 생활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줄 책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생활을 조심해야 하며, 얼마나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 대선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시고, 변화된 삶으로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가시고, 어디 가나 천국의 대표자로 그리스도를 보여 주며 화목케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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