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출간
나의 첫 단행본인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가 출간된 날이 2005년 5월 11일이었다. 책이 출간되면서 나의 관심은 노점에서 책으로 옮겨갔다. 장사 실력도 형편없는데다 마음까지 분산돼 제대로 일을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예상 외로 책이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방송과 신문 등 주요 매스컴이 거의 모두 책 소식을 다루어주었다.
이 책은 대광중학교 동료교사였던 내 친구 서인명의 권유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강의석 사건으로 학교와 넉 달간 싸우다 교단에 목사직까지 반납하고 나오자 서인명 선생은 한국교회의 실상을 세상에 제대로 알리려면 책을 내야 한다며 출간을 적극 권했다. 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에게 그동안 인터넷에 써온 글들을 중심으로 엮어내면 충분히 출간할만한 내용이 될 터이니 부담 갖지 말고 책을 내보라고 계속 강권했다.
책 출간이 낯선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 종교교과서를 집필한 경험이 있고 고등학교 종교교과서 전체의 기획과 편집 책임을 맡았던 경험도 있었다. 대광고를 비롯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산하의 중고등학교는 거의 모두 그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행본을 출간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당시 내가 단행본 출간을 기피했던 이유는 (지금 돌이켜보니 참 까칠하고 건방진 생각이었지만) 우리 사회에 책 같지 않은 책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 의미 없는 책을 내는 것은 자원낭비에 환경파괴라고 생각했던 내가 스스로 책을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서인명 선생의 권유를 계속 흘겨듣던 내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먼저 강의석 사건을 보고서 형식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티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해주고 싶기도 했다. 세상이 기독교를 그토록 싫어하고 심지어 증오하는 이유를 교회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20년 동안 사역해 온 목사 일을 그만둘 정도로 한국 교회에 깊이 절망한 이유에 대해서도 한국 개신교회 교우들과 진지하게 소통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노점으로 고전하다 지쳐가던 5월 중순에 발간된 초판 3천부는 불과 20여일 만에 다 팔렸다. 5월 31일, 2쇄 3천부가 발간됐다. 2쇄도 한 달이 못되어 다 팔렸다. 6월 28일, 3쇄 2천부가 발간됐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출간 두 달도 못되어 6천부의 판매고를 돌파한 이 책은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만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2. 이집트의 고깃가마
6월 어느 날,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주차단속 공익요원과 다시 마주쳤다. “아저씨, 여기 주차금지구역인데 계속 장사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 친구야,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가! 부탁을 해 보았다. “내가 장사를 해야 하는데, 좀 이해해 주면 안될까요?” “어떻게 이해를 해요. 주차금지구역인데...” “알았어요, 치울께요.”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같은 장소에서 다시 주차단속을 당했다. 단속이 두려워지면서 그동안 억지로 지켜왔던 의지마저 거의 사라져갔다.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혹시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기관에 민원을 넣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그 자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돈 버는 일엔 무능한 것 같다. 게다가 돈 되는 일과는 반대 방향으로 살아왔다. 1970~90년대는 부동산투기의 시대였다. 투기로 돈을 버는 시대는 21세기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부동산 투자(?)에 나섰을 때 나는 투기하지 말자며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그것이 불거토피아다. ‘불거토피아’는 ‘불’로소득을 ‘거’부하여 유‘토피아’를 만들어보자는 뜻을 담은 인터넷 카페다. (지금은 카페 운영을 다른 분에게 맡기고 활동을 중단했지만) 2003년 가을에 이 카페를 만들 때는 전세난에 시달린 사람들의 자살이 잇다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하게 사는 법을 배우자고 교사들에게 설교했었다. ‘차격이 인격’이라며 사람들이 차에 돈을 들일 때 나는 앞으로 10년 동안 경차를 타겠다고 지인들에게 선언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의 차는 배기량과 거의 비례해서 환경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약속은 어렵지 않게 지켰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경차를 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내가 큰소리치던 대로 어느새 나는 가난한 삶 한가운데로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왜 이리 힘든 것일까? 그 동안 내가 외쳐왔던 구호는 모두 배부른 자의 헛소리였던가? 어느 정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쓴 웃음이 나지만, 이집트를 탈출한 성서 속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한복판에서 이집트의 고깃가마를 그리워했듯이 학교에서 받던 월급이 그리웠다.
어쨌든 책 판매가 호조를 이어가자 마음이 들뜨고 노점에 대한 열정은 급격히 식었다. 6월의 노점 실적은 미미했다. 그런 나에게 단속은 당차게 살아보겠다는 열정을 꺾는 것이기도 했지만,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냥 여기서 접을까...
그러나 쉽게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론이 마치 특별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접으면 뭐가 되나? 내 스스로 예수님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는데 불과 석 달을 못 버티고 접을 수는 없었다. 저 놈 쇼한다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내 힘으로 보란 듯이 일어서겠다고 큰소리도 쳤는데 어떻게 여기서 두 손을 든단 말인가?
어떻게든 홀로 일어서보겠다는 의지가 꺾여갈 즈음, 두 번째 책을 내보자는 의견이 다른 출판사에서 왔다. 청소년을 위한 교양도서 시리즈의 종교 분야 단행본이란다. 그런 책이라면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종교의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를 다루는 책이라면 만만치 않겠지만, 개론적으로 훑어가며 청소년들에게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도록 도와주는 책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지난 20년 동안 내가 해 오던 일이 아닌가?
나는 기꺼이 동의했고 목차를 만들며 글 쓸 준비를 갖추어 갔다. 장사를 나가는 날도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 해 말, 인물과 사상사에서 출간한 두 번째 단행본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06년 문화관광부 교양도서로 선정되었다.
3. 실패로 끝난 노점 4개월
그럭저럭 7월로 접어들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무리에 섞이든지 차를 갖고 다니지 말아야 했다. 그래, 행상으로 바꿔보자! 나는 그동안 판매해왔던 품목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액세서리 세트를 주종목으로 선정하여 지하철 역내를 이용해서 판매해 보기로 했다.
7월의 어느 날, 노점에서 행상으로 바꾼 나는 5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공덕역 지하에서 목걸이와 귀걸이가 한 세트를 이룬 내 주종품목 30개가 장착된 서류가방을 펼쳐놓았다. “아주 특별한 상품입니다. 다른데서 구경하기 어려운 고급 액세서리 세트가 오천원이요...” 그러나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10분쯤 지났을까, 한 신사분이 아내에게 선물하겠다며 세트 하나를 사 갔다. 힘이 솟았다. 10분에 하나씩만 팔리면 1시간이면 여섯 세트 3만원이 된다. 5시간이면 15만원... 행상으로 바꾸기를 잘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물건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노원역이 어떨까? 그곳은 4호선과 7호선이 교차하는 역이었다.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자! 노원역에서 내린 나는 환승하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을 골라 다시 좌판을 폈다. 오가는 사람은 엄청 많았지만 상품을 구경하던 아가씨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돌렸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내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있었고 억지로 웃음을 짓고자 하였지만 그 표정이 어떠했을까.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났다. 퇴근길 인파는 거의 사라지고 간간히 사람들이 오갔지만 물건은 하나도 팔지 못했다. 좌판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는 7호선 전철을 탔다. 피곤이 몰려왔다. 비참한 느낌과 오기가 교차했다. 도봉산역에서 내리면 집까지는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막차까지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을 것이다! 끝까지 한 번 해보자!
도봉산역에서 내린 나는 개찰구 앞 의자에 다시 좌판을 펼쳐놓았다.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열차가 들어오고 몇몇 사람들이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역시 서둘러 개찰구를 빠져나갈 뿐이었다. 물건을 팔려면 손님을 끌어야했지만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액세서리만 만지작거렸다. 그 날 이후, 나는 다시 장사를 나가지 못했다.
7월 중순 경,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신학연구원으로 채용결정이 되었으니 8월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나는 열심히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래, 잘된 거야! 내가 만약 장사로 성공했다면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냥 돈 버는 재미에 빠졌을 가능성이 커...!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떳떳할 수 없었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목표는 실패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깨어 있고 자유로운 교회공동체 중 하나였지만,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역시 개신교 교회의 산하기관이었다. 결국 나는 개신교 교회로 돌아왔고 다시 교회 일을 통해 생활비 일부를 벌게 되었다.
* 이 글은 <공동선> 2015년 05+06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