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엄청난 재산을 가진 나이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다. 집은 매우 크고 넓었으나 대문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불이 났다. 부자는 무사히 밖으로 나왔지만, 여러 아이들은 아직도 불타는 집안에 있었다.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놀고 있었다. 부자는 아이들에게 불이 났으니 빨리 집에서 뛰어나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이들은 장난에만 정신이 팔려서 아버지의 말을 믿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부자는 방편을 쓰기로 했다.
“얘들아, 여기 너희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있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다. 빨리 불타는 집에서 나와 가져라.”
그때 아이들은 아버지가 말하는 장난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서로 밀치면서 불타는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부자는 아이들이 불타는 집을 나와 사거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흐뭇하고 기쁘기 한이 없었다. 그때 아이들은 아까 말한 장난감을 달라고 하였다. 부자는 그 장난감 대신에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주었다.
[묘법연화경](일명 [법화경]) <제3 비유품>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불타는 집[화택(火宅)]은 미혹에 빠져 있는 세상을 말하고, 아이들은 세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쾌락에만 탐닉하는 중생을 말합니다. 세 가지 수레는 삼승(三乘)을 비유합니다.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菩薩乘)에 해당합니다.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일불승(一佛乘)을 말합니다.
성문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도를 구하는 이를 말하고, 연각은 홀로 수행하여 도를 구하는 이를 말하고, 보살은 중생들과 함께 하며 도를 구하는 이를 말합니다. 승(乘)은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일불승은 바로 ‘중생이 바로 부처님이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불승은 받아드리기 힘든 가르침입니다. “내가 부처님이라니?” 워낙 어리석음에 빠져 자신의 참모습을 모릅니다.
따라서 불타는 집의 비유[화택유(火宅喩)]는 바로 상대방의 수준 또는 상황에 맞게 방편의 가르침[삼승]을 준 뒤, 결국에는 근본 가르침[일불승]을 알려준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세 가지 가르침[삼승]을 모아 결국 하나의 가르침[일불승, 또는 일승]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합니다.
일주문은 이러한 회삼귀일의 가르침을 나타냅니다. 네 개의 기둥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문은 세 개가 됩니다. 이 세 개의 문은 삼승을 나타내고, 일주문 그 자체는 일승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두 개의 기둥으로 된 일주문에는 적용되지 않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에는 들어가는 문이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주문까지 오는 여러 갈래 길은 삼승이고, 일주문은 일승입니다.
성인의 가르침도 대중에 따라 다양하게 접근하는데, 중생의 견해는 어떠하겠습니까. 진리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주장은 허무한 메아리 또는 독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주장 또한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