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무엇인가', '무엇이 실재인가'는 아주 오래된 물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과거에는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과감하게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견해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그것이 무엇인지보다는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답은 오리무중이다. 이제 우리의 오랜 물음은 방향을 살짝 바꾼다. 우리가 아는 것이 진리인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실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알려져 있고 무엇이 보이는가가 중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공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붕괴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실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인가가 분명히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미지라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를 4단계로 나눈다. 우선 이미지는 사실성을 반영한다. 즉 실재에 대한 모방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사실성을 감추거나 변질시킨다. 다시 말해 이미지는 실재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가져다준다. 세 번째 이미지는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마치 진리를 은폐하고 있는 듯이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떤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렇게 4번째 단계에 이르고 나면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 일뿐이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독립성을 띈다. 다시 말해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무언가를 닮으려 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자신의 실재성을 자랑한다. 더 나아가 실재 자체의 형이상학적인 가치마저도 폐기해버린다.
근대 사회가 상품생산에 기반을 둔 사회라면 현대 사회는 정보생산에 근거를 두는 사회이다. 정보화 사회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시뮬라크르의 시대이다. 우리는 극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극실재란 현실을 압도하는 가상현실을 말한다. 우리는 다양한 미디어 매체를 통해 자극받는다. 그 자극은 점차 각색되고 미화되어 시뮬레이션은 초실재에의 환상으로 바뀌어버리고 우리는 그 환상을 가지고 백화점으로 향한다. 이러한 현상은 TV에서 방영되는 연속극을 보면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연속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마치 현실적인 인물로 생각하여, 그 주인공을 실재로 미워하거나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아주 오랫동안 방영된 전원일기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농촌생활의 풍요와 따스함을 본다. 그러나 우리의 농촌현실은 어떠한가? 핵무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그렇다. 핵무기를 실제로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강력한 수단임에도 마치 그것은 평화를 수호하는 무언가로 받아들여진다. 현대사회의 이러한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하여 상업화한 것으로 우리는 디즈니랜드를 들 수 있겠다. 디즈니랜드는 미국사회가 제공하는 기쁨을 축소시켜 경험하게 한다.
현대사회의 이미지에 대해 보드리야르와 마페브르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가 대중을 소외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마페브르는 이미지는 세계와 인간을 연결시킨다고 본다. 과연 우리에게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정말로 실재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