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성왕(孝成王)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함께 궁전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말했다. "뒷날 내가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나는 이 잣나무와 다를 바 없으리라." 신충이 일어나 절했다. 몇 달 뒤, 왕이 즉위해 공신들에게 상을 내렸으나 신충을 잊어버리고 그 상 받는 이들에서 빠뜨렸다. 신충이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자, 잣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말라버렸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했더니, 신하들이 그 잣나무에서 노래를 발견해 왕께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말했다. "정사(政事)에 골몰하다 보니 옛 맹서를 거의 잊을 뻔했구나." 왕이 곧 신충을 불러 벼슬과 녹을 내리자, 잣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 내가 한번 불사(不死)의 도(道)에 대해 말해 보리라. 동해에 새가 있는데 이름을 의태(意怠)라 하오. 그 새의 됨됨이는 무능한 듯하여 느리고 높이 날지 못하오. 날 때에 같은 새 떼의 도움을 얻어서 날고 머물 때는 새 떼 속에 끼어 있으며, 날아갈 때 앞장서지 않고 물러설 때는 꽁무니에 처지지 않으며, 먹을 때도 앞에 나서지 않고 반드시 그들이 먹다 남긴 것을 먹소. 그러니까 이 새는 그 행렬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사람으로부터 해를 입지도 않소.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재난을 면할 수 있는 거요. 곧은 나무는 먼저 벌목되고 단 우물물은 먼저 말라 버리오. 내가 선생을 보니, 선생은 자기 지식을 꾸며서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만들고 스스로의 행실(行實)을 닦아 남의 잘못된 행동을 돋보이게 하며 마치 해와 달을 들고 가듯 자기자랑을 했을 거요. 때문에 재난을 면하지 못할 것 같소.
○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노래에는 듣는 사람에게 마법을 거는 불가사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세이렌의 섬을 지나던 배의 선원들은, 운수 나쁘게 일단 세이렌에게 걸려들기만 하면, 그 알 수 없는 매혹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다에 빠져 죽곤 하였다. 오뒤쎄우스는 키르케의 충고를 듣고,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아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단단히 묶고 세이렌의 섬을 다 지나가기까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일행이 세이렌의 섬을 통과할 즈음 잔잔한 바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가락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던지 오뒤쎄우스는 밧줄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한편, 큰 소리로 외치며 온갖 몸짓으로 제발 밧줄을 좀 풀어달라고 부하들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그 전에 받은 명령대로 그에게 달려와서는 밧줄을 더 단단히 묶었다. 항해는 계속되어 노랫소리는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뒤쎄우스는 무사히 세이렌의 섬을 빠져 나온 것을 기뻐하면서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내어 귀에서 밀랍을 뽑아내게 했다. 부하들도 오뒤쎄우스를 돛대에서 풀어주었다.
○ 나르키소스의 관심을 끌려다 하릴없이 소박만 맞은 요정이 신들에게 나르키소스에게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를 듣고 그 요정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 산 속에 아주 물이 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고 곱게 빛나던지, 양치기도 그 곳으로는 양 떼를 몰지 않았고 숲 속 짐승들도 그 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동물뿐만 아니라 낙엽이나 부러진 가지도 그 샘물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사냥에 지친 나르키소스가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가로 왔다. 그는 물을 마시려다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나르키소스는 넋을 잃고 수면에 비친 이의 빛나는 눈, 디오니소스 같은 머리카락, 상아처럼 흰 목, 조금 벌어진 입술,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온몸을 정신 없이 내려다보았다. 나르키소스는 그만 그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그 그림자에 입맞추려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사랑스러운 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물 속에 담갔다. 그러나 그 모습은 달아났다가 잠시 후면 다시 나타나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르키소스는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샘가를 방황하면서 수면에 비친 제 모습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