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렌스 (D.H. Lawrence, 1885-1930)와 체스터턴 (G.K. Chesterton, 1874-1936)
1. 작가 소개 및 감상
이번 호에서는 소설가들의 수필을 감상하기로 한다.
로렌스는 1885년 영국의 중부 탄광촌에서 광부인 아버지와 여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식하고 관능적인데 반해, 어머니는 지적이고 엄격한 청교도적이었다. 신분의 차이에서 야기되는 계속적인 부모의 불화가 성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정뱅이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웠던 어머니가 모든 애정을 아들에게 쏟아, 로렌스의 사춘기때 여성관계를 복잡하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환경이 뒷날 그의 문학에 흐르는 주제의 한 원형을 이루었다고 한다.
1910년 12월에 어머니를 여의고, 1912년 봄에는 노팅엄대학 시절 은사의 부인이며 6세나 연상인 프리다와 사랑에 빠져 둘이서 독일, 이탈리아 등을 전전하였는데, <아들과 연인(Sons and Lovers, 1913)>은 이때에 쓴 것이다. 1914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프리다와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1915년에는 <무지개(The Rainbow)>를 발표하였는데 성적인 묘사가 문제되어 곧 발매금지를 당하였다. ‘만년에 피렌체에서 완성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 1928)>은 <무지개>나 <사랑하는 여인들(Women in Love, 1920)>에서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였던 그의 성(sex)에 관한 철학이 보다 구체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며 외설시비로 오랜 재판을 겪은 후 미국에서는 1959년에, 영국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 출판이 허용되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수필 <알맞는 여성상을 부여하세요(Give Her a Pattern, 1929)>에서 로렌스는 ‘현대 남자들은 여성을 진정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를 실패한 바보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의 찬미자라는 그에 대한 선입견과는 달리 여성을 한 인격체로 보고 있다.
체스터턴은 영국 런던(Campden Hill in Kensington)에서 출생한 소설가로, 20년대에 가톨릭에 귀의한 후에는 가톨릭 입장에서 많은 문학비평과 사회비평을 썼다. 슬레이드 스쿨(Slade School of Art)에서 미술을,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of London)에서 문학을 공부하였다. 약 80권의 책을 썼으며, 수백편의 시, 200여편의 단편소설은 물론 수필도 4,000여편에 이른다. 희곡도 여러편 썼다. 체스터턴의 소설은 많은 독자들에게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데, 특히 유명한 <브라운 신부의 천진함(The Innocence of Father Brown, 1911)>에서 시작되는 탐정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는 5권에 이른다.
체스터턴의 수필은 기발한 착상, 풍자와 역설로 유명하며, 다루는 소재도 어린이, 전쟁, 자동차 등 다양하다. 여기에 소개되는 <독서에 관하여(On Reading)>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국 이미 옛날 있었던 사상들의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2. 원문 읽기
알맞는 여성상을 부여하세요(Give Her a Pattern)
D. H. 로렌스
여성의 실제적인 문제점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남성의 독선적인 여성관에 맞추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신경질적이 되었다면, 그것은 자기가 대관절 어떠한 여성이면 좋고 또 어떤 유형을 따라야 할지 또는 남자의 어느 여인상에 맞추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는 많은 남자가 있는지라 여성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남성의 여성관도 다양하다. 그러나 남자는 무엇이든 유형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여성에 대한 견해 즉 이상적인 여성이란 개별적인 여인이 아니고, 어떤 유형을 가리키게 된다. 탐욕스러운 로마의 귀족들은 그들의 재물에 대한 탐욕과 걸맞는 여성에 관한 이론이나 이상형을 만들어 냈다. “시저의 아내는 남의 의심을 살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시저의 아내는 남편이 아무리 의심이 받을 짓을 하여도 순순히 정절을 지켰다. 그 후 네로 황제와 같은 신사들은 “방탕한” 여인상을 만들어 냈고, 숙녀들은 누구에게나 헤프게 굴었다. 단테가 한 정숙하고 순결한 베아트리체와 등장하자, 정숙하고 순결한 베아트리체들이 수 세기 동안 보라는 듯이 누볐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남자들이 유식한 여성을 찾아내자 유식한 여성들이 시와 산문에 제법 등장하였다. 디킨즈는 앳된 아내라는 것을 새로 창안하였는데, 이때부너 앳된 아내들이 우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정숙한 베아트리체 형을 낚아버렸다. 정숙하지만 시집은 갈 수 있는 아그네스형이 그것이다. 조지 엘리엇이 이 여인상을 모방하여, 이러한 여인상이 확고해졌다. 고귀한 부인, 순수한 아내, 헌신적 어머니상이 등장하였는데 그저 일만 죽도록 하다 한 세상을 마쳤다. 우리의 가엾은 어머니들은 바로 이런 유형의 여인이다. 그래서 우리 젊은 남자들은 이러한 고결한 어머니들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가졌고, 다시 앳된 아내형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별로 창의적이지 못했다. 그저 앳된 아내란 소년같은 모습을 지녀야만 했다. - 이것이 새로 덧붙인 모습인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진짜 여성에 대해서 확실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어쩐지 좀 위험해. 데이비드의 도라(David Copperfield가 Agnes과 결혼하기 전 결혼했던 여자. 인형처럼 귀여우나 아내로서는 게으르고 쓸모가 없었음: 역자 주)같이 너무 주착이 없어. 남자 어린애 같이 취급하는게 안전해. 이렇게 해서 여성은 남자 어린애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다른 여인상들도 있다. 유능한 남자는 유능한 여성을 이상적 여인상으로 만든다. 의사라면 유능한 간호원을, 사업가라면 유능한 비서를 만들어 낸다. 모든 유형의 여성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남자 멋대로 존경스러운 여성상(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라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음에는 또 하나, 남성의 영원한 비밀스런 여성상이 있는데, 창녀가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여성이 이같은 여인상에 맞추어 살려고 한다. 단지 남성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래서 불쌍한 여인은 운명을 망쳐버린다. 여자가 제 정신이 들어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자는 남자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다르다면 여자는 한 여인상을 요구할 뿐이다. 내가 따를 수 있는 여인상을 주십시오. 그것이 한결같은 여성들의 요구인 것이다. 물론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유형을 이미 정하지 않았다면, 그녀 자신은 절대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남자가 어떠한 이상형을 요구하든 자신은 알 바가 아니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비극은 여성이 어떤 여인상을 찾거나 요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지 않다. 남성이 여성들에게 준 여인상이라는 것들 - 예를 들어 앳된 아내, 어린 소년과 같은 얼굴의 아가씨, 완전한 여비서, 고귀한 배필, 자기 희생적 어머니, 처녀와 같은 냉정을 간직하면서도 아기를 낳는 순결한 부인, 남성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스스로 타락하는 창녀 - 이것이 모두 남성이 여성에게 만들어 준 형편없는 여인상이며, 모두가 인간의 참된 자연스러운 완벽함으로부터 벗어난 여인상 들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들을 대등한 존재, 치마를 두룬 남자, 천사, 악마, 앳된 얼굴, 기계, 도구, 가슴, 자궁, 두 다리, 하녀, 백과사전, 이상 아니면 음탕한 존재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자를 인간으로, 여자의 성(sex)을 가진 참된 인간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들은 이상한 여성상, 기묘한 여인상이라 할지라도 이를 따르려고 한다. 오히려 별난 얼굴일수록 좋아 한다. 기괴하기로 말하면 인공적으로 꽃처럼 꾸민 얼굴을 가진 요즈음 이튼소년같은 소녀얼굴보다 더 기괴한 꼴이 다시 있을까? 정말이지 꼴불견이다. 여자들은 이 꼴불견처럼 살려고 한다. 어린 소년 얼굴 모양을 한 처녀보다 소름끼치게 하는 상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처녀들은 이러한 얼굴이 되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그것도 여인의 진짜 비극의 뿌리는 되지 못한다. 웃기는 것은, 흔히 단테 - 베아트리체 관계에서처럼, 비인간적인 역겨운 형태이다. 베아트리체는 단체가 바라는 여인상대로 계속 순결을 지켜 처녀로 한평생을 보내게 하고, 단테는 집에서 포근한 아내를 맞아 자식을 낳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가장 고약한 여성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최악의 것은, 한 여자가 남자가 바라는 여인상에 맞추어 살기 시작하자마자, 남자는 바로 그 이유로 그 여인을 싫어하게 되는 경우다. 젊은이들 사이에 이튼소년형 소녀를,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몹시 꺼리는 풍이 있는데, 그 까닭은 그런 형의 소녀가 정말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녀는 대중 앞에 내놓으면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바로 바라던 여인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인상을 만들어 냈던 바로 그 청년들은 속으로는 그 소녀를 혐오하고 내심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할 단계에 이르면 이 여인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 젊은이는 이튼소년형 소녀와 결혼하고는 즉시 그런 여인상을 싫어하게 된다. 곧바로 발작하듯 다른 유형의 여인들과 사귀기 시작한다. 고귀한 아그네스형, 정숙한 베아트리체형, 남편에 매달리는 도라형, 그리고 선정적인 매춘부형, 이러한 여인들과 놀아난다. 그는 아주 난잡한 혼란 속에 빠지고 만다. 그 불쌍한 여인이 남자가 바라는 여인상이 되려고 노력할지라도, 그 남자는 또다른 여인상을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결혼이 지니는 모습이다.
현대 여성들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 남성들이 바보다. 이렇게 간단히 말할 수 밖에 없다. 현대 남성들은 바보이며 그중에 특히 젊은 남성들은 으뜸가는 바보다. 현대 남성은 과거 어느 시대 남성보다 여성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냐면 여성들이 어떤 형의 여성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남성 자신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들은 정말로 바라는 여성이 어떤 형인지 모르고 짜증만 내기 때문에, 앞으로는 여성상이 계속해서 빠르고 아주 다양하게 변화해 갈 것이다. 앞으로 2년만 지나면 부인들은 고래 뼈를 받쳐 부풀게 마든 페티 코트를 걸치거나 - 남성을 위해 이런 모습도 있었다. - 또는 중부 아프리카의 벌거벗은 흑인 여인같이 구슬을 꿰어 만든 허리둘레를 하거나 - 아니면 놋쇠 갑옷, 혹은 금위기병대의 제복을 입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여성은 무엇이고 입을 것이다. 왜냐하면 젊은 남자들은 정신이 이상하여, 어떤 형의 여성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유형이든 따르면서 살아만 한다. 남성들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남자가 바라는 여인상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든 한 여인상을 지니지 않고서는 살아 나갈 수가 없다.
여자들은 어리석지가 않다. 그들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남자의 논리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여자는 감성의 논리가 있고, 남자는 이성의 논리가 있다. 이 두 논리는 서로 보완적이지만, 대개는 서로 대립적이기 쉽다. 그러나 여자의 감성의 논리는 남자의 이성의 논리에 비해 비현실적도 아니고 냉혹하지도 않다. 서로 달리 작용할 따름이다.
그리고 여자는 감성의 논리를 결코 잃지 않는다. 남자가 바라는 여인상에 맞추면서 몇 해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여인상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 이상하고도 무서운 감정의 논리가 작동하여 이제까지의 여인상을 두드려 부수게 된다. 이것은 부인의 여러 가지 놀랄만한 변화가운데 그 일부를 설명하는 것이다. 몇해 동안은 얌전한 베아트리체니, 앳된 아내로 처신한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한다. 얌전한 베아트리체는 표효하는 암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 여인상에 감정적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남자는 여전히 바보다. 남자는 이성적 논리의 바탕위에 두거나 전제로 한다. 남자는 밖에 나가 행동을 하지만 특히 여성관계에서는 여성보다도 이성이 없는 행동을 한다. 그들은 그녀를 완벽히 얻을 때까지 어린 소년의 앳된 얼굴형을 단련하며 수년을 보낸다. 그리고 그 여자와 결혼한 순간, 이번에는 딴 여인상을 바란다. 오 젊은 아가씨들, 당신들을 추켜 올리는 청년들을 조심할 지어다! 남자들이 당신들을 차지한 순간, 전혀 다른 형의 여인을 바란다오. 그들이 앳된 소년 얼굴 모습을 한 소녀와 결혼한 순간 곧바로, 이번엔 순결하고 점잖은 귀부인형 아그네스, 혹은 가슴 깊이 위안을 줄 영원한 어머니형의 여인, 혹은 완벽한 사업가형 부인, 혹은 검은 비단 침대포 위의 야한 매춘부형 여인, 그것도 아니면, 바보천지 같이, 위의 모든 여인상을 합친 형을 동시에 탐낸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적 논리라고 하는 것이다. 여자 문제에 관한한 현대 남자들은 멍청이다.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손에 얻은 것을 영원히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크림 케익을 원하는 동시에 햄과 계란, 또한 오트밀 죽을 원한다. 남자는 바보다. 그저 부인들이 운명에 엮여 남자가 바라는 여인상에 맞추어 애쓰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삶의 현실은 부인들이 별수 없이 남성이 바라는 여인상을 추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본을 따야 할 여인상을 제시할 때, 여자는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추종하며 살려는, 기성의 낡아빠진 바보같은 여인상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감정의 찌꺼기 말고는 또 무엇을 남성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앳된 소년 얼굴 모습을 원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과연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칠칠치 못한 여자 외에는 그런 남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 그리고 여성은 바보가 아니고, 오랫동안 계속 바보 노릇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여자는 손톱을 세워 무지막지하게 남자를 할퀴어 주고, 남자로 하여금 엄마를 소리쳐 부르게 하리라 - 남자는 갑자기 여인상을 바꾸게 되고.
참 남자는 바보다. 여성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품위있고 만족할 만한 여인관을 부여해야 한다. - 닳아서 해진 바보같은 속임수 여인상은 말고.
독서에 관하여(On Reading)
G. K. 체스터턴
위대한 작가들이 쓴 문학작품의 최고의 효용은 문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뛰어난 문체나 심지어는 정서적인 영감과도 거리가 먼 것이다. 좋은 문학작품의 가장 으뜸가는 효용은 우리가 단순하고 피상적인 현대적 인간이 되는 것을 막아 준다는 데 있다. 단순한 현대적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협소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이 세상 돈으로 최신형 모자를 사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는 구형 모자를 사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즉, 살 때는 최신형 모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지나고 나면 역시 구형 모자가 되는 것이다: 역자 주). 지난 세기의 길가에는 죽은 현대인들이 즐비하다(즉, 과거 사람들도 죽을 당시에 현대인들이었다: 역자 주). 훌륭하고 불후의 가치가 있는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진리를 일깨워 주고, 우리가 잠시 마음을 쓰고 있는 새로운 사상을 옛 사상과 대비시켜서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문학이 어떻게 그런 구실을 하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어서 우선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때때로, 특히 우리 세대와 같이 불안정한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이단시 되었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유행이 되고 있다. 유행은 때로 쓸모가 있기도 하고, 때로는 전적으로 해롭기도 하다. 그러나 유행은 언제나 어떤 하나의 진리나 혹은 반쯤 진리인 것에다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하는데서 생긴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지만, 칼빈이 주장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이 된다. 소박한 생활을 원하는 것은 옳지만, 즐거움과 예절을 희생하면서까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이단이 된다. 이단자(이단자는 의례히 광신자이기도 하다)는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자가 아니다. 진리는 아무리 지나치게 사랑한다해도 지나칠 수 없다. 이단자란 자기 자신을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단자는 자기가 발견한 반쪽 진리를 온 인류가 발견한 온전한 진리보다 더 좋아한다. 그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작은 역설(逆說)이, 수많은 그렇고그런 이야기와 함께, 세계인의 지혜라는 보따리 속에 묻히는 것이 싫은 것이다.
때로는 이 창안자들은 톨스토이처럼 순수하고 진지한 사람일 수 있고, 니이체와 같이 예민하고 여성적인 능변가일 수 있고, 또 때로는 버나드 쇼처럼 놀라운 유머와 용기와 공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일 수 있다. 이들 모두 파문을 일으키고, 어떤 학파를 창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든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언제나 문제의 그 사나이가 새로운 사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사실은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 그 사상 자체가 아니라, 기존 사상에서 어느 하나가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그 사상 자체는 호머와 버질로부터 필딩과 디킨즈에 이르는 보다 훌륭하고 공정한 사람들이 쓴 위대한 작품 속에 널리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은 고전에서 다 찾아 낼 수 있다. 다만 그 책 속에서는 그 사상들이 균형잡혀 있고, 제자리에 알맞게 다루어져 있으며, 때로는 그와 다른 혹은 더 나은 사상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위대한 작가들이 유행을 무시한 것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을 해왔고 그에 대한 모든 해답도 아울러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분명치 않다면,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좀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나이도 젊은 이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사상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겠다. 누구나 알다시피, 니체(F.W. Nietzsche, 1844-1900)는 그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이 가히 혁명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이 보이는 교리를 설파했다. 니체가 말하기를 일반적인 이타적 도덕이라는 것은 노예 계급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자기네보다 더 우월한 족속이 나타나서 자기들과 싸워서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이론에 찬성하든 안하든, 현대인들은 이것이 전에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상이라고 떠들어 댄다. 과거의 위대한 작가, 가령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차분하고 집요하게 주장한다. 그러한 기발한 생각이 이들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 마지막 막을 펴 보라. 그러면 니체가 말하고자 한 모든 이야기가 두 줄 속에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니체가 한 말이 그대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리차드 크룩백은 그의 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양심이란 겁쟁이들이 쓰는 말이다.
강자에게 겁주기 위해서 꾸며낸“
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사실은 명백하다. 셰익스피어는 니체의 사상과 지배자 도덕(Master Morality: 노예계급이 만들어 낸 이타적 도덕과 대비되는 용어: 역자 주)을 이미 생각했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여 적절한 곳에 사용하였다. 적절한 위치란 패배의 전야에 반쯤 미쳐버린 곱추의 입이다(곱추는 권모술수에 능한 야심가로 리차드 III세가 되지만 정적의 손에 죽는다: 역자 주). 약자에 대한 이와 같은 분노는 병적으로 용감하나 근본이 병든 자, 즉 리차드와 같은 인간, 니체와 같은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이 경우 하나만 보아도 저들 현대 철학가들이 과거의 위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냈기 때문에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망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옛 위인들도 다 그런 생각을 했다. 다만 그런 생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가 니체의 사상을 못 본 것이 아니었다. 보고는 그 허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예를 하나만 더 들자. 버나드 쇼(1884년 설립된 영국의 사회주의 단체 Fabian Society의 회원: 역자 주)의 뛰어나고 진지한 희곡 <구세군 바바라 소령(Major Barbara)>에서는 통속적인 도덕에 대한, 쇼에게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격렬한 글로 쓴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사람들은 “빈곤은 죄가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쇼는, “아니다, 죄다. 빈곤은 죄이고 죄의 어머니다. 부(富)에 대해 반항하거나 능히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가난하다는 것은 곧 죄가 된다. 가난하다는 것은 의기소침한 것이고, 비굴한 것이고 교활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쇼는 이 주장을 집요하게 전개시키려 하는 듯이 보이고, 그의 많은 추종자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이를 특히 강조했다는 것이지 그 주장 자체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새커리(1811-63)는 베키 샤프(Becky Sharp: 소설 <허영의 시장> 여주인공. 천한 신분 출신으로 영리하고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 런던 상류 사회에 출입하게 되나 남자 관계가 복잡. 역자 주)의 입을 통해 연수(年收) 1,000파운드인 사람이 도덕가가 되는 것은 쉽지만, 100파운드 가지고 도덕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제는 단지 새커리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생각의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이 어디에서 제시되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베키 샤프의 대화 속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영리하고 제법 진지한 여자인 베키는 우리 인생을 살맛나게 만들어 주는 깊은 감정에 대해서는 깊이 아는 것이 없는 여자이다. 제인 부인(‘허영의 시장’에 나오는 목사부인. 역자 주)과 도빈(‘허영의 시장’에 나오는 전 남편의 친구. 선량한 신사로 나중에 베키와 결혼한다. 역자 주)이 균형을 잡아주어서, 베키의 냉소주의는 나름대로의 상큼한 진리를 담고 있다. 부흥설교자처럼 혼자 준엄하게 떠들어 대는 쇼의 언더샤프트(‘구세군 바바라 소령’에 나오는 인물. 역자 주)의 냉소주의는 전연 진실성이 없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아주 부유한 사람들보다 덜 진지하고 더 비굴하다는 말은 전연 거짓말이다. 베키의 반쪽 진리는 처음에 기발한 생각이었다가, 그 다음엔 신조가 되고, 급기야는 거짓말로 전락했다. 셰익스피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커리의 경우도 우리가 생각해 볼 결론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있었던 사상의 부스러기 단편들이다. 어떤 사상이 셰익스피어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후대의 작가들은 그 사상의 허점을 부서뜨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많은 다른 사상들을 찾아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