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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와 인상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말했는가에 있지 않고 또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에도 있지 않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는 우리 몸에서 나간 것이 무엇인가에 달렸다. 만일 우리가 말한 것과 우리 몸에서 나간 것이 다르고 우리의 행한 것과 우리 몸에서 나간 것이 다르다면, 그것들은 결코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서 나간 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대부분 누구든 인상이 매우 좋다거나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이 인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인상은 그의 말에 근거하지 않는다. 만일 인상이 사람의 말에 근거한 것이라면 말을 잘 할 때에는 좋은 인상을 주고 말을 잘 하지 못할 때에는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이다. 이럴 때 다른 인상에 대해 말할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외에 다른 어떤 기묘한 것이 사람에게 인상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우리에게 준 인상은 사람의 말과 행위 외에 어떤 것이다. 그가 말할 때나 행동할 때 그의 몸에서 나온 어떤 것이 우리에게 인상을 주는 것이다.
사람에게 인상을 주는 것은 다 우리 몸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에 의해 파쇄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생각은 사려가 깊거나 야만스런 생각일 뿐이다. 자연히 형제 자매를 만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그들을 접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 몸에서 느낀 것은 그 생각뿐이다. 혹 우리가 비정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감정이 지나치게 열렬하거나 지나치게 냉담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감정이 주님에 의해 파쇄되지 않은 결과, 우리가 사람들과 왕래할 때 우리의 감정이 흘러나오게 되고 우리 몸에서 사람들이 받은 인상은 우리의 감정이 된다. 우리 몸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 무엇이면 우리 몸에서 나간 것도 그것이며 사람들이 받은 인상도 그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과 행위를 제어할 수는 있지만 우리 몸에서 나간 것을 제어할 수는 없다. 자연히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면 당신에게서 나간 것도 그것이다.
열왕기하 4장에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영접한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강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 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니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줄을 내가 아노니>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갈 때 그는 한 편의 메시지를 전한 적도 없고 기적을 행한 적도 없었다. 그는 거기를 지날 때마다 그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었었다. 그 여인은 그가 음식 먹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사람에게 준 인상이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준 인상이 무엇이고 우리 몸에서 나간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었다.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을 때 우리가 사람에게 주는 인상은 우리 겉사람이게 된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이프게 하거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거나, 찌르고 강팍하고 교만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할 것이다. 혹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총명한 사람이거나 구변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 것이다. 혹 당신은 사람들에게 소위 좋은 인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는가? 이런 인상이 교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실 수 없으시고 교회 안에도 이런 것은 필요치 않다.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우리의 영이 해방되기를 원하신다. 또한 교회도 우리의 영이 해방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한 가지 큰 필요가 있다. 또한 이것은 아주 중대한 필요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겉사람의 파쇄이다. 만일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영은 해방될 수 없고 사람들에게 영의 인상을 줄 수도 없다.
어떤 형제가 성령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는데 그의 모든 말과 모든 태도와 인용한 이야기들이 다 자신으로 충만되어 있다하자. 앉아서 그것을 듣기란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의 입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가득하지만 그의 온 몸은 자아로 가득하다. 전한 것은 성령이지만 사람에게 준 인상은 자아이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를 주의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 몸에서 나가느냐를 주의해야 한다. 만일 당신 몸에서 나온 것이 당신의 자아라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당신의 자아를 느낄 것이다. 당신이 전하는 메세지의 제목이 좋고 당신의 교리가 좋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니님은 우리가 교리적으로 계속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고자 하신다. 만일 우리가 다룸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는 그리 유용하게 쓰임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또 이럴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적인 교리만 줄 수 있을 뿐 영적인 인상을 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전한 교리는 신령한 반면에 우리가 사람들에게 준 인상이 우리의 자아라면 이것은 극히 불쌍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파쇄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거듭거듭 환경을 안배하신 목적은 우리의 그 강한 부분을 깨뜨리시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강한 부분이 한 번의 강타로 깨지지 않는다면 두번째의 강타가 있게 된다. 그래도 당신이 강하다면 세번째 강타가 올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풀어 놓지 않으신다. 당신의 강한 부분이 깨뜨려질 때까지 그분은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성령이 우리 몸에서 이루신 통제는 일반적인 말씀을 듣는 것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먼저 생각의 이해로 시작하여 몇개월이나 며칠이 지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그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이것은 말씀 듣는 것이 먼저이고 진리 안에 들어가는 것은 나중이다. 그러나 성령의 통제는 이와 같지 않다. 성령의 통제의 한가지 특징은 당신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갈 때가 바로 그것을 얻을 때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지며, 먼저 교리를 보고 나중에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말씀 듣는 데에는 빠르고 성령의 통제를 배우는 데에는 매우 더디다. 많은 교리는 한번 듣기만 해도 기억하게 되지만, 성령의 통제에 대하여는 열 번 환경이 임하여도 성령이 우리의 어떤 것을 통제하고자 하시는지를 모른다. 주님은 한 번으로 우리를 깨뜨리실 수 없을 때 또 한 번 치신다. 성령에 의해 어떤 것을 당신에게 이루기까지 한 번, 두 번, 열 번, 당신을 통제할 때가 바로 그 진리를 본 날이다. 당신은 그 진리를 봄과 동시에 그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령의 통제에는 성령의 허물어드림과 세우심이 있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이다. 성령의 통제를 거친 사람은 진리의 온전함을 얻고 또한 동시에 허물어짐과 세움을 얻게 된다. 성령의 통제를 받고 주님 앞에서 무언가를 보고 만질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지난 5 년, 10 년의 시간을 들여 나를 다루신 목적이 바로 이것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자. 여러 번의 다룸을 받을 때 그것은 실지로 제거될 것이다.
빛 비춤과 죽임
비춤도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통제와 비춤의 두 가지 역사로 우리 겉사람을 처리하신다. 어떤 때는 이 두가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때로는 돌아가면서 역사된다. 때로는 환경 가운데서 성령이 우리의 강한 부분을 계속 처리하신다. 때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을 때에야 특별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신다.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육체는 흑암 안에서만 감취어진다는 것이다. 흑암이 없는 곳에는 육체가 숨을 곳이 없다. 많은 육체적인 행위가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가 그것이 육체인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비춤이 우리에게 육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실 때 우리는 두려워서 감히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교회가 풍성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때, 말씀의 사역이 강할 때, 선지자의 말씀 전파가 강할 때, 빛은 더 많아지고 또 강해진다. 이 빛이 당신에게 임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당신의 입으로 한 말이 원래 교만이었음을 알게 된다. 본래 교만을 말할 때 당신은 교만을 자랑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 교만을 볼 때, 당신은 <아! 이것이 교만이었구나. 본래 교만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구나. 원래 이렇게 더러운 것이었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계시의 빛 안에서 본 교만은 평상시 입으로 말한 교만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입버릇으로 말한 교만은 그 가증함을 느끼지 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 더러운 정도를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자신의 교만을 말하지만 그것에 대한 느낌은 별로 없다. 어느 날 빛 아래서 비춤을 얻을 때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비춤은 당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한다. 오늘 당신이 본 자아는 전에 당신이 말한 자아보다 몇 배나 도 가증한지 모른다. 심지어 천만 배나 더 가증하고 더러울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의 그 교만, 당신의 자아, 당신의 육체는 제해지고 위축되며 더이상 살아나갈 수 없게 된다.
빛 가운데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이나 빛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가장 희귀한 일이다. 빛 가운데서 본 바가 빛 가운데서 죽임당한 바이기도 한 것이다. 본 것과 죽임당하는 것은 별개의 단계가 아니다. 빛 가운데서 내 자신의 형편없음을 보고 그 후 몇 년이 지나야 점차적으로 자신의 형편없음이 다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비춤 아래 자신의 형편없음을 볼 그 때가 바로 자신의 형편없음이 끝나고 자신이 땅에 엎드려질 때인 것이다. 빛은 능히 우리를 죽이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가장 기묘한 일이다. 성령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계시해 줄 때가 바로 당신의 자아를 처리될 때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곧 봄으로써 죽는 그것이다. 그 봄으로 인해 육체는 위축된다.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방법이고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빛이 계시될 때 그것은 곧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빛이 계시되어 사람에게 보일 그 때가 바로 그 본 것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이다. 그 더러움과 가증함과 주님에 의해 정죄됨을 당신에게 보여주실 때 당신의 자아는 더이상 살지 못하게 된다.
빛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가장 중대한 일이다. 바울은 비춤을 얻은 후에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빛 비춤을 받은 즉시 엎드려졌다. 본래 바울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모든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비췰 때 그의 첫번째 반응은 땅에 엎드러지는 것이었고 어리둥절해지는 것이었으며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것이었다. 빛은 그를 땅에 엎드러지게 했다. 우리는 이것이 두 단계가 아닌 한 단계임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과정이 다음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먼저 나를 비추시고 나로 깨닫게 하신 후에 내가 그것을 하겠다. 또는 하나님이 나를 먼저 비추사 나에 형편없음을 보시시면 내가 그렇게 고치겠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다만 당신의 가증함과 더러움과 당신의 그 형편 없음을 보여주실 따름이다.이것을 볼 때 당신은 <아, 내가 이렇게 더러운 사람이라니! 내가 이렇게 가증한 사람이라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실 때 당신은 엎드려질 것이고 위축되어 기어서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주님의 비춤을 얻은 후에 그에게 교만하라고 해도 교만해지지 않는다. 만일 한번 하나님의 빛 안에서 당신의 참 모습을 보고 당신의 교만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다면, 당신 몸에서 그 인상은 영원히 제해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 고통을 주고, 당신의 쓸모 없음을 느끼게 하며, 당신으로 교만치 못하게 하는 어떤 것이 당신 속에 있게 된다.
다른 면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비출 그때는당신이 간구할 때가 아니라 당신이 엎드러질 때인 것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실 때 기도만 하고 있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의 원칙은 나중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의 원칙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빛 비춤을 얻을 때, 우리는 다만 무릎을 꿇고, <주여, 당신을 내 구주로 영접합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이럴 때 역사가 일어난다. 만일 누가 복음을 듣고서 <주여, 당신이 내 구주가 되어 주소서>라고 말한다면, 그가 며칠간 기도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를 구원했다는 느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즉시 빛 아래 엎드러져 주님께 <주여, 당신의 판단을 받아들입니다. 나의 대한 당신의 판단을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빛을 주실 것이고 자신의 더러움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비추시는 날 우리는 과거 주의 이름으로 했다는 많은 일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했다는 많은 일들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이다. 그 그림은 바뀌어서 전에 당신이 가장 고귀하다고 느꼈던 목적들을 이제는 그 안에 가장 비천한 동기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본래 완전히 하나닝을 위했다고 생각한 일도 이제는 그 안에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발견할 것이다. 그 깨달을 정도는 당신으로 땅에 엎드러지게 하는 정도다 사람의 자아는 어디나 파고들어 하나님의 영광까지도 탈취하려고 한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날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만 우리의 벌거벗은 상태가 드러난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벌거벗은 상태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신다. 본래 그분만이 우리를 아시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상태는 벌거벗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아직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벌거벗음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 속의 모든 생각과 모든 동기를 들춰 놓으사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앞에서도 벌거벗은 자가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앞에서 벗은 자가 될 때 우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자아를 모르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들어갈 구멍이 없을 정도로 부끄럽게 된다. <본래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과거 내가 자랑했던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알게 되었다. 본래 나는 내가 남보다 더 선하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비로소 내가 이런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에 대해, 내가 더러운 자라는 것과 내가 가증한 자라는 것을 표현할 더 좋은 말이 없다. 당신은 수년 동안 눈이 멀어서 이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더러움을 볼수록 당신의 수치를 느끼고 온 세상의 모든 수치가 당신 몸을 억누르는 것같이 느낄 것이다. 당신이 주님 앞에서 엎드러질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통회하면서, <내 자신이 한스럽다. 내 자신이 밉다. 내 자신이 구제불능인 사람임을 시인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바로 이 비춤, 바로 이 통회함, 바로 이 부끄러움, 바로 이 가증함, 바로 이 고개를 들지 못함이 수년 동안 당신이 벗지 못한 것을 벗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순간적으로 본 것에 달려 있다. 보는 것과 제거하는 것은 한 단계에 속한 것이고 서로 연결된 것이다. 주님은 사람을 비추시는 동시에 또한 그 사람을 구원하신다. 비춤은 곧 구원하심이요 봄은 또한 벗어남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보는 것과 이 빛 비춤이 필요하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의 교만이 제거되고 우리의 육체적인 행위가 멈춰지며 우리의 겉껍질이 파쇄된다.
통제와 계시의 비교
이 두 가지 중요한 것, 곧 성령의 통제와 하나님의 비춤 혹은 성령의 계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잠시 비교해 보자. 성령의 통제를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상당히 점차적인 것이고 한 차례 한 차례 발생하는 것이다. 때로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는 수년이 걸린다. 또한 성령의 통제는 반드시 사역의 공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많은 때 이것은 사역의 공급없이 성령의 통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령의 계시는 다르다. 많은 때 이것은 아주 빠르고 며칠 또는 몇 분에 우리에게 발생한다. 하나님의 비춤 안에서 몇 분 혹은 며칠 내에 당신은 자신이 끝난 사람이고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며 전에 자랑했던 것이 당신의 수치인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성령의 계시는 많은 경우 말씀의 공급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강할 때, 말씀의 공급이 많을 때, 성령의 계시도 많아진다.
그러나 말씀의 사역이 없고 성령의 계시가 없다 하더라도 겉사람을 보류한 채 주님 앞에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말씀이 결여되고 계시가 결여된다 하더라도 성령의 통제는 여전히 있기 대문이다. 당신이 수년 동안 다른 성도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하더라도 성령은 여전히 당신을 통제하고 주님 앞에서 당신은 당신의 높은 단계의 것을 만질 수 있다. 교회가 약하기 때문에 말씀의 공급을 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성령의 통제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것은 성령의 통제가 그에게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성령이 수년 동안 통제했어도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님이 한 번 우리를 쳐도 우리가 그 뜻을 모르고 두 번 쳐도, 십 년간 우리를 쳐도 우리는 무지한 노새같이 주님의 뜻을 모른다. 이것은 가련한 일이다. 우리 몸에 통제가 적은 것이 아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주님의 손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많은 때 주님이 우리를 치고 계시는데도 우리는 계속 사람을 우리를 치는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완전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주님을 향하여 우리는,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시 39:9)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당신은 당신을 처리하는 이가 당신의 형제나 자매 혹은 당신의 친척,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을 처리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당신은 이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수년 동안 주님이 내 몸에서 나를 통제하신 목적이 나를 처리하기 위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의 무지함으로 사람을 나무라고 운명을 나무라는 이것은 하나님의 손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모든 일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길며 얼마나 무거우며 어느 정도인가까지도 그분은 다 척량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일들을 닥치게 하시는 목적은 다름이 아닌 당신의 특출한 점을 깨뜨리고 당신의 강팍한 점을 깨뜨리며 당신의 처리하기 어려운 점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주님이 우리 몸에서 역사하시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시기 바란다.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 자신이 드러나며 우리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만일 주님이 우리 겉사람을 허물어뜨리시면 우리가 사람들과 왕래할 때 더이상 우리는 강팍한 부분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영은 해방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인식을 갖고 또한 그분에게서 전례 없는 축복을 얻기 바란다. 하나님의 복 주심을 그분의 자녀들이 얻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고자 하신다. 복음이 옳을 뿐 아니라 복음 전하는 사람도 옳고, 교리가 옳을 뿐 아니라 교리를 전하는 사람도 옳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통하여 밖으로 해방되실 수 있는가에 있다. 영이 해방될 때 세상에서 영을 필요로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또한 이것보다 더 철저하고 달리 대치할 수 없는 일도 없다. 주님은 당신의 교리나 당신의 가르침을 주의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전한 내용도 주의하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당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를 물으신다. 당신 몸에서 사람에게 나간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느끼게 하는가, 주님을 느끼게 하는가? 당신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만지게 하는가, 주님을 만지게 하는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만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모든 수고와 일은 별 가치가 없다.
형제들이여, 주님은 당신이 입으로 한 말보다 당신 몸에서 나간 것을 더욱 주의하신다. 사람들과 접할 때마다 당신 몸에서 무언가 나간 것이 있기 마련이다. 만일 밖으로 나간 것이 당신 자신이 아니라면 하나님이고, 당신의 겉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의 영이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반복해서 당신이 사람 앞에 서 있을 때 당신의 몸에서 나간 것이 무엇이냐고 묻겠다.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이 빛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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