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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09: 김태석(金泰錫, 男, 1919年 9月9日生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 |
*최초증언일: 1995. 8. 19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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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가다가 멈춰 서더라고. 허! 장교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떠나갔다- 활주로하고 비행기를 숨기는 격납고를 만들었는데 미사와는 진흙땅이라서 |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징용영장이 날아왔다. 영동군청으로 모이라 하여 나갔다. 그 때는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매일 쫓아다니며 살림살이를 뒤지고 방문을 열어 제치며 행패 부려 가족들까지 못살게 굴었다. 마을에서 같이 가는 사람들과 영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아오모리현 미사와까지 연행되었다.
「뭐! 볼 것도 없이 모두 다 집어 던지더라고. 소지품들이지. 문서. 책장 그런 걸 다 버리기에 이상하다고 우리들끼리 쑥덕대는 거였지. 우리는 총칼이 없었으니 뭐라 항의할 수 없잖아요. 오미나토를 떠나서 남쪽으로 쭉 내려오다가 바다 양쪽이 산으로 막힌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거기가 마이즈루라는 거요. 사람들이 해군들한테 물어 봤나벼. 왜 이리로 들어가느냐고 했나벼. 그러니까 “내일이면 부산에 도착하는데 물이 부족해서 그런다.” 이 말은 내가 들었어. 배가 가다가 멈춰 서더라고. 허! 장교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떠나는기라......., 그리고는 터졌어. 다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기름으로 덮여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었어.」
「일본 미사와에서 생활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맨 처음 끌려간 곳이 미사와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에 서고 보니 하늘이 캄캄하고 고향의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하루하루 일하다 보니 비행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나는 박재하씨, 지윤식, 김동천씨와 같은 날 연행되어 같은 장소에서 일했습니다. 활주로하고 비행기를 숨기는 격납고를 만들었는데 미사와는 진흙땅이라서 땅 팔 때 삽질하기가 몹시 힘들었어요. 식사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반찬은 청어와 오징어가 전부였지요.
김태석씨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던 영동역 앞에서 같이 연행되었던
박재하씨와 함께 우키시마호폭침사건 홍보 전단을 시민에게 나눠줫습니다.
사진 오른쪽부터 김태석씨, 박재하씨, 필자.
다다미 몇 장을 깔고 난로 옆에 나란히 누워 잤는데 숙소 하나에 50명에서 60명 정도 합숙했습니다. 이 같은 숙소가 상당히 많았지요. 일본 사람들은 일터에 나와도 일을 제대로 못했어요. 안한 게겠지. 감독들은 어디서 굴러들었는지 깡패 같은 놈들이나 노름쟁이들만 와요. 우리 한국 사람이 일하다가 감독들한테 눈 밖에 나면 치시마나 다른 채석장 같은 고된 공사장으로 다시 끌려가기도 했지요. 발과 허리에 부상을 입어 장애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주는데 중대 사무실에서 받았지요. 일당으로 65전을 계산한 것이 월급이었지요. 나중에 지급이 약속된 개인예금통장도 있었습니다. 처음 연행될 때는 6개월만 일하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처음 6개월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요.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28개월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광복을 맞았습니다. 47년이 지난 1992년 8월22일 김수곤씨와 함께 미사와비행장과 오미나토를 둘러보았는데 참혹했던 그 때가 머릿속에 가득하여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리더군요.」 진상규명회 여러분들의 진정어린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