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別原稿
安往哉 安校長先生님을
追慕한다
峰火山下 樂天山房書齋 가득한 史書典籍
鷺江外史 池錫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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季節은 時間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고 흐르면서 變化한다. 온 天地가 색동옷처럼 무수한 색깔로 채색하며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옆 사람과 속삭이듯 하는 노래 소위 랩송과 父母生辰보다 친구의 生日을 더 잘 기억하며 名詩 한 수는 암송 못해도 何如歌詞따위는 곧잘 흉내 내고 따라 부르는 아이들 世上에 살고 있다.
약간 영악하고 당돌해서 시행착오를 두려워 않고 자기표현에 거침없는 오늘의 아이들과 初期 寶城中學校 學生들을
回想해 보며 서울 寶城總同門會가 보내준 會誌用 原稿請託書를 쥐고, 살아
生前 그 어른의 쩌렁쩌렁한 訓話나 卒業式
誨古辭의 음성이 들리는 듯 싶은 牛山里 宅村 佳麟停 安校長 墓所길로 접어든 것은 지난 陰九月九日의 오후였다.
멀리 창공에 드리운 코발트빛 가을의 벤치가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한결 계절의 상쾌함이 온몸에 와 닿아 思索과 感想으로가득 채울 수 있는 맑고 밝은 가을의 하루였다.
腐儒아닌 漢學의 큰 선비요 寶城敎育의 元老이신 安往哉 安校長께서 享年 91歲란
長壽를 누리시고 檀紀4318(西紀1985)年 乙丑 2月 26日
忽然 長逝하신지 於焉 9年의 歲月이 흘러간다.
비록 직접 門下에 冊을 편 門下生은 아니라도 四半世紀를 寶中 한 校庭에서 國史를 비롯 歷史 全部門을 全擔指導하며 朝夕으로 아낌과 사랑을 받고 모셨던 恩師나 다름없는 上下요 尊敬하는 漢學者였던 安校長先生의 어진 行績을 그 年譜나 墓喝碑銘을 通해 再認識하고 卒業生들과 함께 큰 스승을 우러러 뵙고 推仰 追憶코저 佳麟停 巽坐之原이요 新作南海高速道路上에서 望見해도 墓域이나 碑碣이 환히 잘 드러나 보이는 位置다.
山所 下 墓道에 세워진 珍原 朴厦柱先生書에 花山 權龍鉉翁撰의 安校長 墓碣碑文을 보게되면「强倭强據三千里
失國我將安往哉」란 詩句로부터 시작됨을 본다. 庚戌國恥를 當하여「强暴한 島倭가 三千里江山을 强占하니 나라잃은 나는 將次 어디로 가랴」의 意다.
이렇게 作詩 하셨던 분이 安往哉 竹山安公 諱泰時요 字를 旺哉라 하니 젊었을 때 倭賊의 侵略으로 나라 잃은 슬픔을 읊어 恨을 터뜨린 글귀로서 中國上古 殷周 交替期 節義論上 義人 伯夷叔齊 兄弟의 故事인 採薇歌에「나는 어디로 가서 의지하랴」의 뜻을 본받은 것이리라.
그 高尙한 뜻을
세상 사람들이 높게 여겨 先生을 불러
安往哉라 하였고 先生 또한 儒業家門의 선비답게 自身의 衷心을 伯夷叔齊의 亡國恨에 견주어 이를 辭讓치 아니 함으로써 安往哉란 號의 뜻과 由來의 成立을 본다.
花蛇添足 일지모르나 여기에서 門下生들이 알아야 할 것은 安往哉의 安字는 성 安字가 아니고 어찌安어디로安으로 읽으며 先生의 字이신 旺哉의 旺은 往字가 아니라 旺字라는것에 留意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선생은 自少로 天性이 聰敏剛直하고 才質이 뛰어나 博覽强記하셔서 漢學을 專業하신 外에 時代의 新學에도 留念하셔서 光復以前에는 主로 全南의 初等界에서 敎鞭을 잡으시다 隱退, 乙酉의 光復을 맞이한 後엔 新政府로부터 寶城中學校 校長職을 拜命 就任하시자 卽日로 聖學에서 추출한 愛衆親仁의 校訓을 各敎室에 높이 내어걸고 文이라면 李栗谷을, 武라면 李忠武를 본받으라 이르셨고 校訓의 精神을 풀이하신 말씀에
‘諸子들아 모든 사람 尊敬하고 사랑하되 仁者로 스승삼고 義人으로 벗을 삼아 사람의 길 밟아가며 사람의 德 이루어라. 행여 누구는 좋더라 누구는 궂더라 論人長短하지말고 그의 長點을 取하여 나의 短을 補하는데 힘쓰라’
力說하셨으며 每樣 弟子들의 人性陶冶를 爲해 道德은 根本이요 文藝는 支末이라며 사람의 成分인 仁義禮智와 사람의 職分인 孝悌忠順과 사람의 生活能力이요 德行인 勤儉恭恕의 哲理를 先生의 敎育方針 理念體系로 삼으셨고 自作의 校歌를 通해 强調하시기를 공부는 格致誠正 사람의 崇德이며 抱負는 修齊治平 사람의 廣業이라 靑春은 두 번 다시 피는 꽃이 아니리니 人一己百 부지런히 삼사교양(三斯敎養 힘써서 해야 할 세 가지 일로 ‘몸을 움직이는 것ㆍ말을 하는 것ㆍ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 받들어서 知仁勇
三德으로 五達道를 밝혀가자시니 或者 民主社會를 志向하는 마당에 市民民主敎育에 걸맞지 않는 陳腐한 儒敎德目의 羅列 云云하면 先生께선 人者國民之道를 밝히고 깨우치고 指導함에 있어 무슨 新舊가 있겠느냐 다만 表現하는 方式과 語彙가 다를 뿐 이니, 解放이란 美名아래 밀어닥친 歐美洋風의 急激한 氾濫으로 炎凉世態主義가 蔓延 傷風悖俗하는 時代에 厚於薄하고 薄於厚하는 非人間化趨勢를 어찌 坐視할 수 있으리. 聖人之學 아니고
무슨 수로 바로 잡을 것이랴 하시고 懇曲히 儒學의 道理로 타일러 가르치셨음을 弟子들은 記憶하고 있을 것이다.
日暮途遠이라더니 선생님의 一片貌도 그리기 전에 워낙이 不文이라 請託者許諾의 原稿紙 八枚란 制限 紙面이 다됐으니 어찌하랴 權翁의 墓碣銘을 援用하여 끝을 맺으련다. 제자들은
恕諒있기 바란다.
「倭賊이 狡猾함에 갈
곳 없음을 슬퍼함은 義理의 사무침이요
옛 道理를 새學校에 揭示함은 가르침의 獨特함이요 先祖의 아름다움을 부지런히 紹述함은 精誠의 篤實함이요 늙어서도 世上 걱정을 잊지 아니함은 志氣의 卓越함이요 모든 아름다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간직함은 後世에까지 模範됨이 큼이로다.」
檀紀 4323年(西紀1991年. 九. 九. 重陽節)
- 樂天學人 - 寄
첫댓글 위의 글 중에서 校歌 가사 중 三事敎養을 三物敎養으로, 日募途遠을 日暮途遠으로
三事敎養을 三斯敎養( 힘써서 해야 할 세 가지 일로 ‘몸을 움직이는 것ㆍ말을 하는 것ㆍ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바꾸고 日募途遠을 日暮途遠으로 교정함
빠른 수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