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어풀이
가르마 : '가리마'의 사투리
삼단 : 삼(大麻 대마)을 베어 묶은 단. 긴 머리채를 비유함
답답워라 : 답답하여라
깝치지 마라 : 재촉하지마라.
맨드라미 : '민들레'의 영남 사투리
지심 매던 : 기음(김)을 매던
짬도 모르고 : 현재상황도 모르고
신령이 지폈나보다 : 제 정신이 아니고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혔나보다
핵심정리
* 표현기법 : 상징(일제에 대한 우회적 고발 - 저항)
* 주제 : 봄의 환희 속에서 느껴지는 조국 상실의 비애
조국 상실의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 국권 회복에의 염원과 의구심
감상포인트
▶ 푸른색
1연 - 생명감과 희망을 표상하는 색채 이미지,
10연 - 자조적 서러움과 절망을 표출하는 색채 이미지.
▶ 봄 : 자연적 의미의 계절적 봄, 참된 기쁨과 생명의 자유, 서정적 자아가 바라는 이상적 세계
▶ 점층적 시행의 증가 : 내용 심화
▶ 자아의 내면 변화 : 의욕적 어조 → 자조적 어조
▶ 이 시와 김소월의 시 '바라건대는...'과의 비교 : 상실의 절망감에서 오는 현실 인식이 같음
▶ 시인의 현실 인식 : 자신의 기쁨이 하나의 환상임을 깨닫고 현실에 다시금 절망하고 있다. 빼앗긴 국토를 바라보며 피지배 상태가 오래 갈 것을 우려함
▶ 자연물들에 대한 화자의 태도 : 친화적
▶ 작자가 느끼는 정서 : 답답하다.
시상의 전개
이 시는 외형적 구조 속에 내적 구조가 숨어 있다. 겨울이 가고 소생과 희망의 봄이 들판에 가득하여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는 계절이 주는 희망과 약동의 세계 속에 조국 상실의 암울한 상황을 딛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내적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1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오는가? 들을 빼앗기면 그 들에 찾아오는 봄마저 상실할 줄 알았는데 봄은 그 들에 찾아왔다. 그러니 그 봄은 화자에게 새롭고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다시금 봄을 맘껏 누려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햇살을 받으며 푸르게 물든 들판의 논길을 따라 감격하여 걸어간다.
2연, 그 감격은 고조되어 간다. 화자는 봄으로 가득한 천지에 완전 동화되었다. 내 의사로 찾아온 게 아니라 천지의 부름으로 이끌려 온 것처럼 화자는 물아 일체감(物我一體感)에 흠뻑 젖어 있다.
3연∼6연, 봄의 자연 하나 하나와의 교감을 노래한다. 바람은 봄을 맘껏 향유하기를 재촉하고, 종다리 소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예쁘게 명랑함을 자아낸다. 추운 겨울을 고맙게도 잘 이겨낸 보리밭은 비에 씻겨 상큼하고 생기 있고 깨끗하다. 내 머리마저 가뿐하게 할 정도로, 이 환희로운 봄을 느끼려면 쉼 없이 가쁘게 걸어야 한다. 마른 논을 적시는 도랑이 명랑한 소리를 내며 구불구불 흘러간다. 나비, 제비는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그것은 화자의 마음을 짐짓 나비, 제비에게 의탁한 것이다. 맨드라미 들마꽃도 보고 지나가야 하고, 우리 아낙네들이 김매던 들이기에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7연, 화자도 그 들에서 노동의 참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어한다.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노동의 힘겨움 끝에 오는 만족감을 누려 보고자 한다.
8연, 흥분했던 마음으로 들로 향했던 의식이 갑자기 내면으로 향한다. 그저 들판에 가득한 봄에 취해 희열감에 가득했던 흥분이 가라앉으면, 엄연한 현실로 인식되는 시대적 상황, 나라 없는 땅에서 그 봄이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진정한 봄은 존재하지 않는데, 겉으로 온 봄에서 과연 무엇을 찾는가. 들판을 걸어 어디로 찾아가려는 것인가? 이런 인식 끝에 자조(自嘲)섞인 절망감이 찾아오고야 만다. '우서웁다'고 말한 것이 바로 자조적 절망감의 표출이다.
8연, 바로 이런 절망감으로 논길을 걷는다. 계절의 순환으로 찾아온 봄, 푸르름, 풋내에 한껏 젖어, 이렇게 고맙게 찾아온 봄을 감격해 하면서도 또 진정한 봄이 오지 않은 슬픔을 아울러 안은 채 하루 종일 들을 걷는다. 봄 신령이 씌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들을 빼앗겨 어쩌면 이 봄의 생명감마저도 빼앗길지 모르겠다. 이 9연은 화자의 복합된 심정이 여실히 드러난 곳이다. 푸른 웃음과 푸른 설움이 뒤섞여 있는 화자의 심리를 읽을 수 있으며, 이 즐겁고 감격적인 봄의 정취마저도 빼앗길지 모른다는 절망감이 화자를 억누른다.
이상에서 각 연의 시 세계를 더듬어 보았는데, 향토적, 전통적 소재를 통해 국토와 조국에 대한 애정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국토에 대한 사랑을 여성 이미지로 시화하여 정서적 친밀감과 살가운 애정을 드러낸 수작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보이는 사회적 관심도 서정성에 융화되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초기의 경향시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이후 서정성이 박탈된 시가 양산된 것은 한국 시에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상화(李相和, 1901.4.5~1943.4.25)
1901년 대구(大邱) 출생. 호 상화(尙火). 1919년 서울 중앙고보를 3년 수료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문예지 《백조(白潮)》 동인. 《개벽》지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늪의 우화>, <나의 침실로>, <석인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별을 하느니>, <나의 침실로>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