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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목사 스크랩 영계(靈溪)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 / 임군학 목사
한아름 추천 0 조회 39 12.08.30 09: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계(靈溪)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임군학목사) | 신앙글모음

하늘의 사람 2009.06.29 18:00   http://blog.daum.net/jjjmanjjj/15618183

 

 

길선주의 부흥운동

1. 한국 교회의 기원과 부흥운동

교회사를 볼 때 부흥운동은 시대 시대마다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초기 한국 교회에서도 있었다. 1903년 감리교 선교사였던 하디(R. A. Hardie)에 의해서 시작된 원산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연원이 되었고, 이것은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사에서 특징적인 사건이라면 이 사건의 중심에 바로 길선주가 있었다.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기도와 성령의 임재로 특징되는 영적 각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영적 각성은 말씀 연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은 처음부터 말씀 연구, 말씀을 깨달은 후에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 그리고 위로부터 내리우신 성령의 임재가 하나로 어우러진 걸작이었다. 한국 선교 초부터 위 세 가지는 한국 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아 왔다. 바로 그것이 사경회(査經會)였다. 사경회는 체계적인 성경공부, 기도, 전도 그리고 사경회 기간 동안 열리는 전도 집회를 통해 기성 신자들에게는 영적인 재충전의 기회를,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2.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인물 길선주

원산부흥운동의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1906년 하디 목사를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하는 중에 통회와 자복이 일어나고 큰 은혜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이길함 목사가 선두에 서서 한국인 제직들을 위한 특별집회가 열었는데, 이때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공부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뉴욕에서 온 존슨 목사가 인도와 웰즈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을 평양 사람들에게 전하게 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대부흥운동은 하나의 물결처럼 무드를 조성하게 되었고, 1907년 1월 평양에서 낮에는 사경회를 중심으로 한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 전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회 선교부에 속한 20명 이상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더 큰 복이 임할 때까지 함께 모여서 결정을 했다. 그들은 정오에서 오후 4시까지 기도하기로 했으며 저녁식사 시간까지 원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기도하기로 했다. 4개월을 기도했고 그들은 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주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했고 참된 교회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도운동 이후 그들의 사역에 변화가 온 것이다. 그들이 전도하며 예배를 인도할 때, 사람들이 울며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는데 마지막 날이 되어도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어 애태우던 중에 하늘에서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내리는 것을 체험하자, 길선주는 기도하던 도중 일어나서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나는 아간과 같은 도둑이올시다”라고 외치면서 자기가 불의한 생각으로 남의 돈 백원을 가로챈 사실을 성도들 앞에 회개하였다.
이날 장대현교회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졌고, 이와 함께 조직적인 복음전도 부흥도 일어나 두 사람씩 짝지어서 평양 시내 집집마다 전도하는 축호전도운동이 시작된다. 이처럼 길선주는 1907년 부흥운동의 기수였으며 그의 부흥회에서는 회개하고 병을 고침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3. 길선주의 부흥운동의 특징

한국의 경이적인 부흥에 있어 그 원동력이 되었던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 그 특징으로는 열성적으로 성행된 기도회와 말씀 중심의 사경회, 그리고 길선주 목사 특유의 종말론 강해를 통한 신앙의 고취를 들 수 있다.

1) 말씀 중심의 부흥운동
(1) 폭넓고 다양한 말씀 선포와 강의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 등 신앙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이 길선주의 설교와 강의의 주된 내용을 이루었으며 기독교 교육에 대한 내용과 전도, 기독교 상담, 회의법 등 일상생활에 유용한 내용들도 많았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우선 철저하게 모든 인간은 죄인임을 강조하고 회개할 것을 외친다는 것이었다.

(2) 체계적인 사경회 운영
사경회 운영의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새벽기도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전에는 성경공부, 오후에는 일반상식을 공부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개인전도방법을 익히고 흩어져 나가 축호전도와 노방전도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말씀 중심의 사경회를 주로 개최하였다. 길선주는 각 교회와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흥회와 사경회를 연차적으로 인도할 때에도 매일 새벽기도와 오전 사경 강의와 저녁 집회 설교 내용이 중복되지 않도록 하였고, 그의 열심 있는 기도와 능력 있고 힘 있는 설교는 좌절과 고통 속에 있는 우리 백성들과 성도들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어 주었다.

2) 기도 중심의 부흥운동
(1) 새벽기도회의 창시
기도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신앙 표현인데, 길선주는 더욱더 특이한 기도의 전통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길선주가 행한 기도회 중심의 부흥운동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가 시작한 새벽기도회이다. 길선주가 장대현교회에서 행한 특별새벽기도회는 매일 4시 반에 시작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400명이 모인 날도 있었다. 길선주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선도에 심취하였던 것이 새벽기도회 창시를 비롯한 그의 기도 생활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다. 길선주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새벽기도회는 세계 교회 사상 그 유래가 없는 최초의 일이었고, 이것은 길선주의 부흥운동의 특징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2) 성령의 임재를 통한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회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함께 소리를 내면서 기도하는 ‘통성기도’ 역시 그의 창안이었으며, 성령의 임재에 대한 체험적 고백이나 그 정서적 표현이 경건하게 감싸는 신앙생활도 그의 부흥회 특징 중의 하나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자복하는 형식의 기도회를 진행했다. 이후 한국 교회는 온통 죄를 회개하는 울음으로 변했다. 이처럼 그의 부흥회가 가지는 기도회는 성령의 임재를 통한 강한 회개와 자복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말세론 중심의 부흥운동
길선주는 요한계시록을 많이 읽고 연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구약성경을 삼백 독, 신약성경을 일천 독 하였으며 요한계시록은 일만 독 하였다. 3·1운동 때 33인 중의 하나로 체포되어 석방될 때까지, 감옥에서 보낸 2년간 그가 완성한 「말세학」또는 「종말론」은 그의 독특한 말세신학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길선주의 종말론 강해는 가난과 무지와 일제의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삶의 열정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한 민중들에게 내적?영적 투쟁을 자극하고 삶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과 불의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불의한 일제와의 투쟁보다는 일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신자 개인의 영적 투쟁을 강조한 면이 더 크다.


4. 길선주의 부흥운동의 영향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서의 길선주의 영향은 한국 교회 내의 질적, 양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길선주의 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에 가져다 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 근거를 두게 했다.
둘째,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교회의 개혁과 사회변혁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셋째,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전까지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도되어져 왔었다. 그러나 부흥운동 이후로는 한국 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이 선교사에게서 한국인 목회자들에게로 옮겨져 왔다.
넷째, 길선주의 부흥운동의 영향은 바로 교회의 자전(自傳, Self-Propagation)과 자립(自立, Self-Support)에도 있었다.
다섯째, 부흥운동은 교세의 확장을 가져왔다. 한국 북감리교의 경우 1988년에 불과 38명이었으나 1907년에는 무려 39,613명으로 무려 1,000배나 급성장하였다. 14명의 남자 선교사, 13명의 안내 그리고 13명의 해외 여선교회 사역자들, 도합 겨우 40명의 선교사들이 이룬 업적치고는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여섯째, 길선주의 부흥운동은 배움에 대한 갈망을 가져왔다. 부흥운동은 진리에 대한 사모함을 낳았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 은혜를 받고 나서 말씀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배운 경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Ⅳ. 결론

길선주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초기 한국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1907년 한국 교회의 대부흥운동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일제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을 신자들에게 불어 넣어 주었다. 비록 그들의 삶의 현장은 소망이 없고, 비참한 지경에 놓여 있었지만, 길선주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였고, 특히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갈망하게 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사회와 교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의지할 곳이 없는 민중들이 불안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미신숭배가 극성하는 것을 보자 민족정신을 좀 먹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서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한문성경을 한글성경으로 번역?보급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4년 7월 마포삼열 선교사가 펴낸 [신도쾌락비결]의 서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부인전도운동’, 오늘날의 ‘여선교회 운동’을 장려하고, 예배 시간에 남녀를 분리하는 막을 제거하는 등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박힌 당시 사회 속에서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길선주는 건전한 신앙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강력히 권하였고, 기도와 교회출석, 가정예배, 개인전도, 헌금 등을 장려하였는데 이것은 교회 발전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교회의 주요의식으로는 주일 대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수요3일 기도회 또 새벽기도회를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심방과 전도를 위한 일선 직원으로 권찰을 선임하였고, 매일 심방을 지휘감독하기 위해 장로를 구역장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 복음전파를 통한 민족운동가요, 구국 운동에 몸 바친 인물이었다. 사회적 혼란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초대 한국 기독교 역사에 공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흥에 대해 관심이 많다. 더욱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백년을 맞이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 교회는 부흥을 외치고 있음을 본다. 특히 영적인 목마름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에 정작 필요한 것은 이 시대를 새롭게 회복시켜 나갈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시점에 한국 기독교 초기의 교회를 일으켰던 길선주를 재조명하는 것은 현대의 한국 교계의 부흥운동에 있어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한국 교회에 큰 도움을 될 것이다.


-월간 <숲과나무> 2006년 9월호 기독교인물연구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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