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東庵) 이현욱(李鉉郁)
樂民 장달수
진주시 월아산 남쪽에 진성면 동산리는 재령이씨(載寧李氏)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곳이다. 고려 충절신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후예들인 이곳 재령이씨들은 예로부터 뛰어난 선비가 많았다. 조선 선조 때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난 성재 이예훈(李禮勛)과 퇴계학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갈암(葛巖) 이현일(李玄逸)의 학문 지결을 계승한 월암(月菴) 이덕화(李德華) 등이 이곳 출신으로 명망이 있던 선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진성 재령이씨 가문의 학문과 행실을 이은 동암(東庵) 이현욱(李鉉郁)은 1879년 월강(月岡) 이상규(李祥奎)와 연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암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로 원대한 꿈을 품고 가학을 몸소 익혀 아름다운 소문이 사방에 넘쳐 났다. 집안 어른들의 기대 또한 남달랐다.
동암은 어릴 때 부친 월강공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한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은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한다. 월강공이 이것을 보고 기특하게 여기며 “우리 집안 문학은 너에게 의탁해야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국운이 기울어지는 때를 당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깨달아 향리에 은거하며 마음을 억제하였다. 여러 동지들과 옛 성현의 글들을 익히며 오직 쇠퇴해 가는 도를 바로잡는 것을 일생의 임무로 삼았다. 젊은 시절 스스로 반성하며 이르기를 “책 읽는 것이 중요하지 문장 등을 익히는 것은 필요 없다. 성현들의 말씀을 체득하고 성경충효(誠敬忠孝)등의 말을 항상 가슴에 새겨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지”라 했다. 21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에 따라 3년상을 치르고, 9년 후인 1908년 모친상을 당하자 부친상과 같이 3년상을 치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동암은 인근의 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재주에 따라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배우러 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나고, 또 더러 예물을 가져오면 반드시 맏형 등 집안 어른께 올리고 자신은 어려운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동암은 나라가 망하자,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 은거하며 학문 정진으로 평생을 보내고자 결심을 했다. 그리고 지역의 석학들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당시 지역의 학문 종장은 면우 곽종석이었다. 동암은 면우를 찾아가 학문을 배우기를 청했다. 뿐만 아니라 면우와 동문인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도 찾아 학문의 방법을 물었다. 면우와 회당은 한주 이진상 문하의 뛰어난 학자로 당시 영남 학문을 대표할 수 있는 선비였다. 동암은 중년 이후 면우와 회당을 찾았다. 두 선생을 만나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학문의 요결을 듣고 기뻐하며 따르기를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하였다. 나라 잃은 시대, 동암은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니 은거하여 학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학문의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위기지학은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을 부지런히 수양하여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 당시 나라 잃은 시대를 살아간 뜻있는 선비들은 위기지학을 학문 목표로 삼아 무너져가는 사람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즉 도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선비들의 사명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나라보다 도를 앞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도를 중시 여기며 이를 지켜 가고자 했다. 동암도 일제시대엔 도를 지키고자 학문 정진에 힘을 쓴 것이다.
을유년 해방이 되었다. 나란 찾았지만 도는 여전히 무너지고 있다. 성현의 도를 다시 세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판단한 동암은 지역의 석학들과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길을 떠난다. 지리산, 금강산, 남해 금산, 안의 삼동 등 명승을 찾아 선현들의 숨결을 느끼고자 한 것이다. 옛날 선비들이 명산대천을 찾아 자신을 수양하고자 했던 그런 정신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평생 고향에서 학문 수양에 매진하다 해방이 된지 3년만인 1948년 동암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지금 동암이 살았던 진성면 동산리에는 그의 학덕을 기리는 재실 ‘아남재(牙南齋)’가 있다. 월아산 남쪽에 있는 집이란 의미이다. 동암이 세상을 떠난 지 42만인 1989년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세운 재실이다. 아남재 기문을 보니 동암의 일생과 학문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공의 학문은 위기지학이다. 면우 곽선생을 사사(師事)하여 학문하는 진결(眞訣)을 듣고 가슴에 새겨 고침이 없었으며 회봉 하겸진 같은 석학을 따라 도움을 입고 갈고 닦은 연후에 그 조예가 더욱 깊어졌다. 행실이 더욱 돈독하여 사우들의 추중함이 때로 미치지 아니함이 없었으나 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삼가고 마음을 기울려 험난하다 절개를 잃지 않았다. 또 이름 구하는 일에 그 뜻을 구하지 않고 자나 깨나 성현의 심법(心法)에 복종하여 경(敬)을 주로 삼아 존심(存心)하였고 치지(致知)로 사물의 진리를 궁구하였으며 정성으로 수신의 명을 삼았고 명덕(明德)으로 수양의 근본을 삼아 저술에 게으름이 없었다. 서책을 두루 읽어 향내(鄕內)의 모범이 되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진양속지’ ‘유행편’에는 “자는 보경(普卿)이요, 호는 동암(東庵)이니 본관이 재령(載寧)이다. 진실 되게 궁구하고 힘써 배우다가 늦게야 면우 곽종석(郭鍾錫)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또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과 청계(晴溪) 최동익(崔東翼)을 따라 강마(講磨)하는 도움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암은 5권의 문집을 남겼다. 적지 않은 분량이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많은 글을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공신 은열공 강민첨 장군 위패를 모셔 놓은 은열사(殷烈祠)에 갈 때마다 ‘은열사 중건기’를 쓴 이현욱이란 선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이번 글을 쓰며 진주의 단아한 선비 한 분을 또 다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