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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미학 원문보기 글쓴이: 여세주
제17차 수필쓰기
(1) 푸른목도리청둥오리
뉴스에서는 11월 한파를 예고했다. 북서태평양의 온난화로 인해 우리의 겨울은 더욱 추워진다는 것이다. 예고처럼 벌써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설거지를 하던 나는 창문을 닫기 위해 팔을 뻗었다. 손끝이 잘 닿지 않았다. 나와 창 사이를 개수대계수대가 막고 있어 발꿈치를 들고서야 간신히 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딱! 소리가 났다. 밖에서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부딪힌 것 같기도 하고, 안에서 뭔가 깨진 듯도 한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주변에는 한 두 개의 병이 넘어져있을 뿐 별 이상은 없었다. 나는 하던 설거지를 마저 했다. 마무리로 행주를 씻어 탁탁 털다가 거울 앞 청둥오리 한 마리의 주둥이가 날아간 것을 발견했다. 아뿔싸!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내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집을 나서거나 들어와 한두 번이다. 그러나 설거지를 할 때만큼은 다르다. 계수대 앞에는 작은 앉은뱅이 거울을 놓아두었다. 거울은 늘 나를 다독였다. 내가 지쳐 보일 때는 눈썹꼬리를 살짝 치켜 올려주고, 마음이 싱숭생숭해 보일 때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주고, 신명 날 때는 눈을 별처럼 반짝이게 하며 콧노래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 거울 앞에 언제부터인지도 가마득한 어느 날 청둥오리 한 쌍이 깃들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산 청자로 빚은 부부새다. 한 마리는 푸른 목도리를 하고, 그 곁에는 붉은 목도리를 두르고 나란히 선 엄지손가락만한 원앙, 그날 이후 이 부부는 내 곁에서 살게 되었다.
주둥이가 날아가 버린 푸른목도리청둥오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젠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아 거울 앞에서 내렸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물을 마시다가 마주친 거울 앞의 빈자리를 본 순간 입맛이 씁쓸해졌다. 나와 함께 사는 옆지기는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병을 데리고 살았다. 그의 삶은 사투(死鬪)속에서 병마에게 때로는 애걸하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다독이면서 사는 수행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옆지기를 지켜볼 뿐, 나에게는 뾰족한 방책이 없었다. 말 한마디도 아꼈다. 그 모습을 청둥오리가 지켜보았다. 나의 바램이 간절할 때 청둥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보고 서 있었고, 원망이 차고 넘칠 때는 돌아서서 서로 딴 곳을 바라보았고, 기도가 멀고 아득할 때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청둥부부를 데려왔다. 버려질 허접쓰레기 속에서 뒹굴던 그들에게 묻은 먼지를 닦아주고 거울 앞 제 자리에 놓았다.
깨진 주둥이 조각은 어디로 갔을까? 근처의 물건들을 살폈다. 창틀, 선반, 조리대, 바닥, 병과 병 사이, 하수구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그 당시를 살펴보기 위해 시간을 돌렸다. 찌꺼기들에 섞여 수돗물에 쓸려 내려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거기에 닿자 음식쓰레기통에 눈이 멎었다. 마당에 신문지 여러 장을 펼치고 그 위에 찌꺼기들을 올리고 나무집게로 뒤졌다. 보리차 우린 것에서부터 시금치, 고추, 파, 멸치, 양파 등이 좌에서 우측으로 이동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둥이 조각에 대한 미련을 반쯤 접고 다시 나무집게로 귤껍질을 집어 들었다. 그때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작은 물체가 툭 떨어졌다. 청둥오리의 조각, 약 6밀리미터의 주둥이를 찾았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기쁨도 이러했을까? 내 모습을 수상쩍게 지켜보고 있는 우리집 개 호구(虎狗)에게 보여주며 “우와! 드디어 찾았다. 자, 볼래.” 의기양양하게 자랑했다.
‘찢기거나 깨어진 부분을 접착제로 고정시키면 원래의 성질보다 강도가 더 강해진다.’는 어느 공예 선생님의 말을 들은 적 있다. 정말 그러길 바라며 주둥이가 잘 마르도록 호호 불었다. 이런 나의 표정이 즐거워보였는지 붉은목도리청둥의 눈빛이 잠깐 깜빡였던 것 같다. 묵은 먼지를 털어낸 청둥부부의 털은 윤기가 돌고 살이 올라있다. 그러나 목에 두른 목도리가 햇볕에 삭아 제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는 서랍을 뒤져 비단 조각을 찾아 다림질한 후 가위로 좁고 길게 잘랐다. 촛불을 켜 날카롭게 삐쳐 나오는 날실과 씨실을 부드럽게 마름질해 목도리를 만들었다. 청둥부부의 헌 목도리를 풀고 내가 만든 붉고 푸른 목도리를 선물했다. 특히 푸른목도리청둥 앞에서는 눈을 마주보며 가만히 되뇌었다. “미안해”
다시 나와 함께 살아갈 청둥오리 부부는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노을이 아름답게 물드는 가을 하늘을 기다릴 것이다.
깨어진 장식용 청둥오리를 접착제로 붙이면서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버려질 위기에서 되가져온 청두오리와 병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남편의 모습이 유비된다. 이 작품을 그렇게 읽으려고 할 때, 남편에 대한 할애가 부족하다. 청둥오리만을 초점에 두고 읽는다면, 이 글은 단순한 무생물을 생명체로 인식해 가는 점진적 전개를 통해서, 작가의 휴머니스트적 심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할 만하다.
(2) 시베리아가 오고 있다
내 의식 속의 시베리아는 유형의 땅이었다. 러시아 소설에서 만났던 동토의 땅, 영하 60도를 오르내리는 죽음의 땅이었다. 아내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은 장차 어떤 난관도 함께 극복하자는 묵시적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여름날의 시베리아는 녹음과 훈기로 가득했고, 더 이상 유형의 땅은 아니었다. 거기 광활한 평원이 거인처럼 누워 있었다.
철도 건설로 시베리아는 숨통이 트였다. 25년(1891-1916)만에 완성된 공사에는 유배 죄수들의 노동력이 주로 동원되었고, 공사 중 사망자가 일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일만 킬로미터를 밤낮없이 칠박팔일 동안 달리며 그들의 노고가 떠올랐고, 그 긴 여로가 지구 둘레의 1/3이나 되는 거리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중에 시차가 일곱 번이나 바뀌고, 90여개의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났으며, 십여 개의 강과 우랄산맥을 관통하였다. 차창 밖의 광대무변한 평원은 내가 처음 우주의 무한대를 인지했을 때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지하자원의 보고인 시베리아가 지구온난화로 기지개를 펴고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대규모의 경작지 사이로 펼쳐진 도도한 자작나무 숲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러시아를 찾기 전 시애틀에 머물 때 딸 가족이 사는 마을 정원에서 이따금 자작나무를 보았다. 자작나무를 만나면 왠지 고고해 보이는 모습에 한참이나 서서 바라보고는 했었다. 귀국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자작나무 유화를 구해 딸의 거실에 걸어주고 왔다.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차창 밖에 늘어선 자작나무 숲을 대하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스크바까지 열차로 달리는 동안 자작나무 숲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자작나무 재질은 가볍고 단단하여 좋은 건축자재가 된다. 도마 이외엔 무엇이든 만들 만큼 용도가 다양한데 도마로 쓰면 칼이 상할 정도로 그 재질이 단단하단다. 쌍뜨 뻬쩨르부르크 에르미타주(겨울궁전) 바닥을 자작나무 모자이크로 만들었는데 이백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무늬 결이 산뜻하다. 러시아의 민속 공예품 마뜨료시카(알까기 인형)도 자작나무로 만든다. 인형이 인형을 품고 있는 목각인형은 다산을 의미하며, 달리 속내를 알 수 없는 러시아인들의 성격을 반영한단다. 얇게 허물을 벗는 하얀 나무껍질은 약재로 쓰이며, 자작나무에 생기는 차가(chaga)버섯은 항암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자작나무는 이름처럼 외모에서 귀티가 묻어난다. 고즈넉한 달밤, 자작나무 숲에 달빛이 비껴들면 누구라도 신비로운 분위기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어느 철학가는 자작나무를 두고 ‘나무 중에서 가장 수줍고 숙녀답다’고 썼는데 그것은 무성하고 반짝이는 잎들 가운데 화장을 하고 숨어있는 하얀 둥치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자신의 껍질을 벗으며 환골탈태 하는 성찰의 모습에 나는 감복한다. 그런데 그 하얀 나무 둥치가 우습게도 어느 날 내게 러시아인들의 손가락에 끼인 담배처럼 보였다.
러시아만큼 성인들이 끽연의 자유를 누리는 곳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성인남녀 누구나 입에 담배를 꼬나문 모습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가 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금연구역이 따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러시아의 남녀 평균수명은 55-60세에 불과하다. 80세가 넘는 우리나라 남녀 평균수명과 비교하면 문제가 많다. 수명으로 따지면 러시아는 후진국이라 할 만하다. 한때 할리우드의 명배우였던 율 부린너의 블라디보스토크 생가를 찾았다. 언덕에 동상으로 서 있는 그는 생전에 골초였는데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러시아인들의 짧은 수명에는 독주인 보드카도 한몫 했을 법하다. 한때 암울했던 정치와 혹한의 기후 속에서 남자들이 보드카를 마시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대낮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들이 자주 눈에 띈다. 러시아 남자들은 독주에 절어 지내고 아내를 자주 구타해 이혼율이 높단다. 이십대 전후에 결혼해 마흔 될 때까지 대개 2-3번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남자 나이 사십이 되어야 비로소 삶이 안정되고 믿을 만하며 성격도 관대해진단다. 그러고 보면 불혹不惑이란 말은 러시아 남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라 싶다. 높은 이혼율 때문에 가정 경제권과 양육권은 여자에게 유리하게 되어있고, 아내가 가정사를 쥐락펴락한다니 이것이야말로 모계사회의 복고적 진화가 아닌가. 러시아인들이 자못 궁금하다.
세계 최대의 국토에 비해 러시아 인구는 고작 1억 4천에 불과하다. 일본 인구를 웃도는 정도다. 이민제도가 없고, 공식적으로 해외에서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민을 받아들여 드넓은 시베리아를 개발하면 좋을 듯싶지만 그들은 보고의 땅을 아직은 숨겨두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비교적 어릴 때부터 예절교육을 많이 받아 성인이 되어서도 예절을 잘 지킨다고 한다. 서구 어느 나라 국민보다 공손하고 매너가 좋다는 것이다. 하긴 소탈하게 웃거나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모습에서 친절이 묻어난다. 공산주의의 평등사상 탓인지 누구에게도 조아리지 않고, 사람을 공평하고 수평적으로 대하려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10대-20대 초반의 러시아 아가씨들은 몸매가 예쁘고 미모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리의 무랑루즈에 나오는 미희나 가까이 서울에 진출한 모델의 모습에서 이미 확인된 바가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그 말을 실감할 만큼 미인들이 자주 눈에 뛴다. 감성적인 시인 백석은 만주에 거주하던 중 러시아 가족과 교류하며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던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에서 나타샤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표상하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우연하게 만나 우리 일행과 함께 여행한 금발의 소냐는 모델대회에서 포토제닉 상을 받은 미인이었는데 서툰 영어로 자신을 알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정겨웠다.
장년 이상은 냉전 시대 공산당 때를 벗지 못해서인지 근엄한 표정에 말투가 사뭇 엄정한 느낌을 준다. 열차 승무원이나 경찰 등 공직자들의 태도가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구화 되어 록음악을 즐기고 길에서 보드를 타며, 자유분방한 삶의 양식을 구가하고 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장차 러시아 사회통합에 갈등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이드가 러시아 대통령 푸틴을 ‘푸 선생’이라 지칭했는데 러시아에서는 그의 실명을 부르는 것이 금기라고 한다. 실명을 부르는 것이 대통령의 존엄을 건드리는 것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박정희를 롤모델로 삼는다고 알려진 그가 형식을 내려놓고 본질을 추구할 때 무엇이든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실명이든 애칭이든 국민들이 지도자의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사회와 국가야말로 소통이 빠르고 민주적이며 건강하리라 믿는다.
철의 장막이 어느 순간 걷히고, 시베리아가 우리 앞에 그 속살을 드러내었듯이 민주화된 러시아는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다. 광활한 평원에 거미줄처럼 동서남북 고속도로가 뚫리면 새로운 도시가 생겨날 것이다. 절주 광고판이 들어서면 러시아인들의 수명 또한 늘어나 여분의 노동력이 러시아 경제에 기여하리라 믿는다. 달리 시베리아가 희망을 준다면 그곳이 지구촌에 남은 마지막 청정지역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러시아만의 자산은 아니다. 눈을 감자 평원에 끝없이 늘어선 자작나무 숲이 선연하다. 시베리아의 푸른 여름을 보았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눈 덮인 동토를 밟아보고 싶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남짓이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닿는다. 속초에서 배를 타고 가는 노선도 있다. 우리 국민들이 러시아여행에 나서고, 러시아인들이 의료관광을 위해 한국을 찾아온다. 한러 교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우리 선조들의 활달한 기상은 언제나 광활한 북녘 땅을 향했다. 미지의 땅 시베리아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다. 비록 지금은 육로가 막혀 있지만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이고, 시베리아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땅이 될 것이다. 러시아에 유학하는 젊은이들이 차츰 증가하고 있다.
북한의 나진과 가까운 러시아 핫산 지역은 우리나라 첫 이민 13가구가 정착한 곳이다. 스탈린 정권의 박해로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수십만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마침 우리 자본이 러시아를 통해 나진-핫산 개발에 35% 참여한다니 자못 그 의미가 크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시베리아 개발에 첫 삽이 될 것이고, 불행했던 고려인들의 원혼을 달래줄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이제는 러시아 역사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푸시킨과 도스토예프스키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시베리아 철도와 자작나무에 익숙해질 것이고, 무뚝뚝하나 속내 깊은 러시아인들을 자주 접하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금발의 미녀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지의 땅 시베리아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다. (22 매)
러시아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를 부연하고 확장해 나났다. 행간 띄움에 의해서는 총5토막으로, 각 토막은 다시 여러 개의 단락들로 구성하였다. 시베리아의 광활함, 자작나무, 러시아인의 문화(끽연과 보드카), 러시아인의 성격과 외모, 러시아의 변화에 따른 기대감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답사 순서에 따른 여행 감상이다.
이 작품이 러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어서 수필의 본질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겠지만, 의도한 형식 구성에 따른, 각 부분(단락 또는 토막)의 내용 통일(집중화)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주제를 위한 초점화와 통일성 확보가 필요하다.
(3) 깨와 참기름
어머님을 따라 깨를 수확하러 갔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바깥일은 모르고 컸다. 어머님은 시골에서 자란 둘째 며느리인 내가 일을 잘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종일 깨를 베고 묶어서 날랐다. 해는 질 줄 모르고 시간은 더디 흘렀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다. 도착하고 마음을 놓아서인지 토하고 온몸에 열이 났다. 입덧이 심해 며칠 먹지도 못한데다 해종일 땡볕 아래 있었더니 사달이 나고 말았다. 철이 없던 남편은 그 일을 어머님에게 말씀드렸다. 앞뒤 설명도 없이 앞으로 일은 내가 할 테니 며느리한테 시키지 말라고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편이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어머님이 거리를 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키워 장가보냈더니 마누라 역성만 드는 아들이 미운 대신 나를 멀리하는 것 같았다. 몇 번 밭일을 시켜보시더니 마실 물이나 가져오라고 하셨다. 매주 시댁에 내려갔다. 깻단은 잘 말라서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어머님은 큰 비닐을 깔고 나무 작대기로 깨를 털었다. 한번 두드릴 때마다 깨가 와르르 쏟아졌다. 알맹이가 단단하기는 한데 향이 없는 것이 꼭 나를 닮은 것 같다. 어머님은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셨다. 내가 하려고 서두르자 “아서라 몸 까끄럽다”고 했다.
시댁에 갈 때마다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어떤 날은 시댁 가기 전날 편두통에 시달렸다. 결혼해서 또 다른 부모가 생긴다는 것이 당연한데도 내 마음속에 그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매주 내려갈 때는 반가운 기색이 없더니 두 주 만에 갔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어머님은 오 남매 키우느라 일만 하였다. 자식들은 장성하여 대처로 떠나보내고 고춧가루, 된장, 김치 모두 당신 손으로 장만해 두었다가 때가 되면 가져가라고 하신다. 젊었을 때는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다. 사 먹으면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시중에는 중국산 천지라고 믿을 수 있는 먹거리는 당신이 직접 키운 것만 고집하신다. 수확해 두었던 깨를 짜서 참기름을 챙겨주신다. 땀이 배어 있음을 알기에 선뜻 받아오기가 송구스럽다.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니면서 거리감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승용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어머님 손을 바라본다. 갈퀴 같은 손이 얌전히 포개져 있다. 살며시 어머님 손을 내 손에 포갠다. “쭈그러진 손 뭐 볼 게 있노?” 하시며 물끄러미 쳐다보신다. 평생 일이 아니면 죽을 줄 알고 사셨단다. 긴 한숨을 토해 내시고는 살아온 이야기를 덤덤히 풀어내신다.
어머님은 육 남매 중 넷째 며느리로 시집와 시할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위로 셋이나 되던 동서들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어머님 몫이 되었다. 결혼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버님은 군대에 가시고 혼자 몸으로 시할머니 봉양했던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 인색한 시할머니와의 동거는 녹록지 않았다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부지런히 일해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해드렸다고 한다. 한 가문의 며느리로 살아간다는 동질감이 팽팽하게 달리던 평행선에 유연함을 더했다.
아침 해가 밝으면 어머님은 노구를 이끌고 밭으로 향한다. 밭을 일구며 삶의 애환을 위로 받았으리라. 밭은 어머님의 정원이다. 날마다 발걸음 해서 자식 돌보 듯한다. 풀 한 포기 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굵직한 고추가 달려있고 튼실하게 열매 맺은 토마토는 우리가 내려가면 어김없이 주스가 된다. 정원에는 늘 갖가지 채소로 풍성하다. 수확의 기쁨은 자식 키우는 재미와 같다며 해가 서산으로 넘어서야 흙 묻은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어머님도 며느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깨가 고소한 참기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녹여야 하듯이 나도 며느리에서 시어머니가 되기 위한 과정 속에 있다. 병원에 갔더니 섬망 증세라고 한다.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한다. 어머님도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평생 주기만 한 사랑을 당신도 누군가에게 받고 싶었으리라. 병원에 데리고 가줘서 고맙다고 구석에서 참기름 한 병을 꺼내어 주신다. “내 마음이다.”라며 시커먼 봉지에 넣어 칭칭 매어 주신다. 작은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을 가방에 넣으며 잘 먹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신다. 내 살아 있을 때 좋은 것 먹고 죽거들랑 힘들게 농사짓지 말고 편하게 사서 먹으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온다. 자꾸 뭔가 없어진다고 한다. 혹 받고 싶은 사랑이 아직 채워지지 않아서일까. 이제 조금씩 다가서려 하는데 어머님은 멀어지려는 것 같다. 참기름을 넣어 조물조물 나물을 무쳤다. 진한 참기름의 향이 부엌을 점령했다. 오랜만에 만든 비빔밥에 아이들의 손이 분주하다.
쉬운 일상어로 가볍게 서술해 낸 글이지만 결코 경박하지는 않다. 관찰자적 입장에서 농사일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시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시어머니를 향한 심리적 거리(관계)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시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점차 좁혀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작의도가 다른 데에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즉, 제목으로 보면, 깨가 참기름이 되는 과정/ 며느리가 시어머니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려고 한 듯하다. 궁극적 창작의도가 여기에 있다면, 이 뼈대가 작품 전체에 뻗쳐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직접적인 언술을 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삶의 끝자락을 애틋해하는 며느리의 정서를 잘 드러내고 있는 글이다.
(4) 의심
붉은색 큰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홍글씨의 화인처럼 ‘경고’의 붉은 글은 발길을 붙들고 내용을 확인하게 한다. 벌써 몇 번째나 붙여진 내용이다.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계단에 담배꽁초 버리지 않기, 개의 대․소변 처리 방법, 소음에 대한 주의까지 세세히 적혀있다. 아파트의 여러 곳 중 우리 라인 출입문에만 경고문이 붙여진 게 신경이 쓰인다. 출입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니 그곳에도 붙어있다. 거듭되는 겁박에 마음이 언짢다.
계단에서 발견된 담배꽁초가 원인이 된 것일까? 주민 중 누군가가 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관리실에 알려 방송을 해도 계속되었나 보다. 게다가 며칠 전엔 엘리베이터 바닥에서 이상한 액체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냄새와 색깔로 개 오줌이라며 개 주인의 경우 없는 처사를 소리 높여 탓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개를 키우고 있는 607호에 의심의 화살을 보내기도 했다. 듣고 보니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듯하다. 개를 운동시킨다고 자주 다니던 모습이 생각났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아쉽다.
아파트가 수상한 소문으로 흉흉하고 경고문이 나붙어도 남의 얘기였다.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으니 관심 두지 않았다. 그저 교양 없는 사람들과 같은 아파트에 살아 나마저 같은 취급을 받을까봐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 집에 탈이 생겼다. 주말 저녁 지인들의 모임으로 중국 요리를 시켜먹었다. 그릇은 깨끗이 씻어 밤이라 가져가기 편하게 검은 봉지에 담아 엘리베이터 앞에 내놨다. 다음날, 반점에서 전화를 받고서야 그릇의 실종을 알게 되었다. 반점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다며 지나갔지만 제법 많은 그릇이라 그 손실을 생각하면 다행이라는 안도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남의 가게 그릇까지 가져가는 몰상식함에 당황했지만, 이웃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찜찜했다. 더구나 누구인지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게 더욱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우선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으로 내리는 10층의 두 집과 마주 보는 앞집에 의심이 갔다. 평소 왕래는 없어도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는 해 대략 인물 됨됨이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도무지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갈 사람들은 아니었다. 의심의 범위를 넓혀 위아래 다른 층까지 생각의 폭을 넓혀보니 마음이 아득해졌다. 아닐 거야를 반복하며 외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의심이 자라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사람들을 눈여겨보게 됐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상대방이 몇 층을 누르는지 먼저 확인하고 나의 층수를 눌렀다. 그리곤 뒤쪽으로 물러서 상대를 살폈다. 휴대전화를 살피던 행동에서 상대방을 그가 모르게 살피게 되었다. 층수와 인상착의를 외우려 했고 간혹 풍기는 냄새에서 술을 마셨는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인지 알았다. 담배 냄새에선 언젠가 버려진 담배꽁초의 주인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라인의 사람들은 대충 파악했다. 모두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어디에도 그릇 도둑은 없었다.
하나에 매달리니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 또한 그랬다. 점잖은 얼굴 뒤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면 그 끝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이번엔 방법을 바꾸어 계단을 걷기로 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식물을 좋아해서 구석에 화분을 내놓아 보는 사람에게 좋은 기분을 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제 때 처리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을 내버려두어 냄새까지 나서 집주인의 게으름을 알려주는 곳도 있었다. 아이가 있는 집은 자전거나 유모차가 나와 있기도 했다. 자신이 믿는 종교를 문 앞에 표식으로 붙여놓기도 하고 먼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문을 열어놓고 초를 켜두는 의식행위도 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처음엔 계단에서 보이는 것으로만 집 안의 사람들을 추정했다. 몇 번 오르내리다 보니 이젠 안의 소리가 밖으로 들려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과 씨름하는 엄마의 높은 소리, TV 소리, 피아노 소리, 노랫소리, 싸움 소리 등 일상의 소리였다. 의심을 살만한 것은 없었다. 평범한 그들에게서 추악한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일 같았다. 의심도 깊어지면 병이려니 생각해 자기반성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도 슬그머니 내 뒷머리를 낚아채는 검은 생각이 있었다. ‘1006호 할머니가 수상해’ 지난여름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날개 부서진 선풍기를 들고 오면서 쓸 만하다고 하신 것, 장 보고 올 땐 뭘 샀는지 자꾸 물어보는 것이 관심을 넘어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 까닭이다. 이번에도 심증으로 가늠하고 넘길 수밖에. 그 후론 불미스런 일이 더 없었다. 할머니를 봐도 예전처럼 대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이사를 위해 짐을 뺄 때, 맘 구석에 쟁여둔 보따리 하나 보내버렸다.
식구들과 중국 요리를 시켜먹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시켜먹는 곳은 만리장성 한 곳뿐이다. 음식을 먹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만리장성 그릇의 면이 줄어들면서 수록 또 하나의 낯선 상호가 이름이 나타났다.
문 밖에 내어놓은 그릇이 없어진 사건을 두고 펼쳐내는 상상의 구체성이 이 수필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웃들에 대한 의심을 뒤집어엎어 진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자기성찰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주제도 얻을 수 있고 앞부분의 서술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파트에 나붙은 경고문 내용과 음식점 그릇이 없어진 사건의 연관성도 부여되면 좋겠다.
(5) 하꼭꼬
구멍가게 앞 도로를 가로질러 상수도관을 묻었다. 한 달이 넘게 마무리 공사를 하지 않아 도로 중앙에 아스팔트가 벗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차가 쉼 없이 지나다니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아스팔트 벗겨진 부분이 더 깊게 패여 요철이 생겼다. 요철 위로 지나다니는 차들이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구멍가게는 하루 종일 파열음 소리와 먼지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닭장을 실은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오토바이 운전수 역시 가까이 와서 도로 요철을 본 것 같다. 급브레이크를 잡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오토바이가 심하게 요동치더니 시동이 꺼지면서 쓰러졌다. 사람이 안 다친 게 다행이다. 운전수는 쓰러진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우면서 “에이 씨X” 하고 욕을 하더니 시동을 다시 켜고 가던 길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닭장 오토바이가 지나간 뒤 하수구에 노란 물체가 폴짝폴짝 뛰는 것이 같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닭 한 마리가 하수구에 콕 쳐 박혀 발버둥치고 있었다. 하수구에서 닭을 건져내어 닭장수가 간 쪽을 쳐다보았다. 그사이 어디까지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닭을 자세히 살펴보니 발목이 부러져 아래쪽 부분이 없었다. 끈으로 꽁꽁 묶여있었던 발목이 부러졌기 때문에 닭장에서 튕겨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부러진 발목에서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찡할 정도로 불쌍했다. 어떻게 처리 할 줄을 몰라 가슴에 꼭 껴안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지나가는 아저씨가 유심히 살펴보더니 부화한지 두 달 채 안 되는 영계 닭인데 삼계탕으로 푹 고아 먹으면 보신되겠다고 했다. 살아있는 짐승을 보고 그런 말을 쉽게 하다니 내가 닭 대신 아저씨에게 화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궁리 끝에 닭을 부둥켜안고 헛간으로 갔다. 먼저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주고 싶었다. 얼마나 아플까? 피가 계속 뚝뚝 흐르고 있는 다리에 헝겊으로 칭칭 감아주었다. 그제야 잘린 다리에 통증을 느끼는지 ‘꾸욱 꾸욱욱‘ 거리며 심하게 앓았다. 나중에는 더 이상 아파서 못 참겠던지 꼭 잡고 있었던 다리를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너무 아파서 눈가가 눈물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닭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닭도 사람하고 하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상자로 집을 만들고 채소와 물을 챙겨주었다. 구멍가게에서 내다버리는 야채 찌꺼기만 챙겨도 닭 한 마리쯤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이삼 일 동안 어둡고 컴컴한 헛간이 낮설어서인지 아니면 부러진 다리가 아파서인지 싱싱했던 배추 잎이 시들 때까지 한 번도 조아먹지 않았다. 심지어 곁에 떠다준 물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먹지 않으니까 처음보다 더 홀쭉하게 마른 것같이 보였다. 걱정이 되어 지렁이 몇 마리와 파리를 잡아 바로 부리 밑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보살핀 덕분인지 일주일가량 지나자 조금씩 모이를 먹기 시작했다. 한쪽 발이 없어 온전하게 일어 설 수는 없었지만 남은 한쪽 발에 의지해서 날개를 퍼덕거려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모이를 먹고 나서부터 차츰차츰 기력이 회복되어갔다. 한번 먹기 시작하니까 먹성이 하루가 틀리게 늘어났다. 내가 헛간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금방 알아보고 날개를 퍼덕거리며 반겨주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모이 때문만 아닌 것 같았다. 진정으로 닭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눈을 깜박거리면 따라 눈을 깜박거려주고 손가락을 얼굴 가까이대고 좌우로 움직이면 닭의 시선도 손가락 가는 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사람이 아닌 닭이 어린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해주니까 무척 신기하고 기특했다. 친한 친구가 별로 없는어 외톨박이에게 말잘 듣는 졸병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한 달쯤 지나니까 닭이 몰라보게 살이 토실토실하게 올랐다. 노란깃털도 기름통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니까 덩달아 나까지 밥맛이 나서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 날 아침에는 닭의 행동이 다른 날과 달랐다. 학교에 가기 전에 잠시 얼굴 보고 갈려고 들렀는데 마치 학교에 따라 가겠다는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간신히 떼어놓고 나오기는 했지만 수업을 하면서도 닭의 모습이 아른거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닭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보는 닭을 그냥 ‘닭아 닭아’ 하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부르는 게 더 가까워지고 친해질 것 같았다. 궁리 끝에 닭 이름을 ‘하꼭꼬’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만난 장소가 하수구라 처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꼭꼬’ 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지어놓고 보니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닭도 좋아할 것 같았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뒤를 돌아보지 않고 헛간으로 달려갔다. 헛간 문을 열면서 “하꼭꼬” 라고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는데 아무반응이 없었다.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니 있어야 할 자리에 닭이 없었다. 닭만 없는 게 아니라 사과상자로 만든 집까지도 깡그리 없어졌다. 너무 황당했다. 학교 가기 전까지 분명히 저기에 있었는데....어머니께 물어보려고 가게로 나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말자 “배고프지? 내가 맛있는 것 해 놓았다. 큰 솥에 있으니 한 그릇 퍼 먹어으라” “예” 하고 대답을 했는데 그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로 덜덜덜 떨렸다. 솥뚜껑을 열었는데 솥 안에는 하꼭꼬가 털이 다 뽑힌 채로 발라당 드러누워 들어 누워있었다. 다리 한쪽이 없는 것을 보니 분명히 하꼭꼬가 맞다. 애야 네가 왜 뜨거운 솥 안에 있니?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몸서리 칠 정도로 너무너무 불쌍했다. 사람이 무슨 권리로 살아있는 생명을 마음대로 죽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보기 싫어 얼른 솥뚜껑을 닫았다.
그 뒤부터 지금까지 육류는 거의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단지 육류만은 먹지 않았을 뿐이다. 지난해 가을 지하철역에서 어지러워 잠시 깜박 정신을 잃었을 때가 있다.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의사이야기로는 너무 채식위주로 식사를 해서 영양 불균형으로 해서 어지럼증이 올 수 있다며 고기 먹기를 권했다.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을 하고 고기를 먹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내 체질에 고기를 입으로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남들같이 쉽지 않는 것 같다. (16.7장)
마지막 단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건의 경과를 서술하는 서사의 형식이다. 1인칭 화자의 심리까지 드러내 보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서사는 서사적 수필과 구별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 서사체가 비록 시간적 순차에 의해 전개된다 하더라도 발단에서 위기를 거쳐 결말에 이르는 서사적 구성과 갈등을 포함하고 있다면, 더욱 장르적 구분을 어렵게 한다. 이 작품의 서사는 어린 시절의 체험을 담담하게 서술해 냄으로써 다분히 동화적이다. 독자는 작가(주인공)의 생명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을 읽어낼 수 있고 그것에서 감동을 얻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단락으로 인하여 이 작품은 확실한 수필로서 장르변용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을 주관적 감성으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객관적 논리로서만 읽는다면, 앞의 서사는 마지막 단락의 결과를 위한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 길게 돌아온 것이다. 이 작품은 문학을 논리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여, ‘문학도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해석의 객관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믿음에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6) 우산
할머니 몇 분이 우산을 쓰고 간다. 그 옆에 어정쩡하게 우산도 못쓰고 따라가는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허리까지 굽어 잰걸음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갑자기 내린 비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나 보다. 할머니들은 우산을 씌워줄 생각이 없는지 빠른 걸음으로 간다. 같이 쓰고 가도 될 터인데 못 본 체한다.
그때 일행 중 한 사람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호통을 친다. 그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말투로 보아 노인정에 같이 있다가 나온 것 같았다. 보기가 안쓰러워서 빨리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우산을 씌워드릴까 하다가 마음을 더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우산도 씌워주지 않으면서 큰소리치는 할머니들이 얄미웠다. 우산도 없느냐는 소리가 내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뼈가 있는 말 같았다. 그 할머니에게만 겨냥한 말이 아닌 것 같아 내 심기도 불편했다. 그 말은 자식도 없느냐로 들렸다. ‘자식이라고 다 같은 자식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적허적 걷는 할머니가 슬퍼 보였다. 그 걸음에서 어머니들의 삶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우산만 되어준 세월이었지 당신을 위해 우산을 쓴 적이 있었을까. 가슴까지 비가 적실 것만 같아 애가 끓었다. 살아온 세월만으로도 힘겨웠을 텐데 타인에게조차 서러움을 당하고 있다. 삶이 힘에 부쳐도 자식이 있었기에 절망치 않았을 할머니의 삶을 이젠 누가 보상해줄 수 있단 말인가.
호통을 치는 할머니는 왠지 당당해 보였다. 체구도 좋고 허리도 꼿꼿하다. 옷도 때깔이 좋은 것으로 보아 힘 좀 쓰는 집안 같았다. 아마 가진 것이 많고 자식도 잘 돼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시장을 가다가 그 할머니를 만난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대문 밖은 사람 구경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이젠 노인정도 가지 않는가 보았다.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면 반가움에 말이라도 걸지만 아무도 대꾸를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말동무를 해주고 싶어도 대화가 되지 않을 듯해서 못 본 체하고 말았다. 할머니는 이리저리 눈길을 주며 사람구경을 한다. 사람이 그리웠을 무게가 느껴져 가슴이 아렸다. 섧은 눈빛이 오래도록 골목길에 맴돈다. 나는 할머니의 눈빛이 남아있는 그 골목길을 갈 수 없어서 다른 길로 다닌다.
어린아이에게 우산을 받쳐주고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띈다. 빗방울이 튈까 봐 상체를 아이 옆으로 바짝 기울였다. 그 어머니도 먼 훗날 저 할머니같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누구도 예외는 될 수 없을 것 같아 씁쓸하다. (7매 수필)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발상의 끈을 이끌어내어, 노인의 소외를 문제삼았다. 늙어서의 소외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귀결하여 주제의 보편성도 얻었다. ‘삶이 힘에 부쳐도 자식이 있었기에 절망치 않았을 할머니의 삶을 이젠 누가 보상해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대목을 두고 감정의 지나친 노출이라 할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눈빛이 남아있는 그 골목길을 갈 수 없어서 다른 길로 다닌다.’와 같은 서술은 대상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아왔던 작가의 가치지향을 뒤집어엎는 것이 되어 이 작품의 의도를 부정해 버릴 수 있다.
(7) 컴퓨터 세상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아침 출근길에 승용차를 타고 오면서 모바일 웹 강의를 듣는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서울 출장에 타고 갈 KTX 승차권을 역시 모바일에서 예매하고 결제한다. 잠시 쉬는 휴식 시간에는 음악 파일을 열어서 감상을 한다. 몇 가지 채팅 앱에 뜨는 새 글들을 읽어보고는 댓글을 단다. 오후가 되어 한가해지면 TV앱을 통해 어제 못 본 드라마를 다시 본다. 웬만한 소형 카메라 뺨치는 폰 카메라에다가 인터넷 검색은 기본이다. 소위 스마트폰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이패드를 들고 전자책을 펼쳐든다. 데스크탑이 두 대가 있고 노트북도 한 대 있다. 식구들 모두 스마트폰을 갖고 있으니 채팅 그룹으로 묶어서 어디에 있든 실시간으로 대화한다. 하드디스크에 담긴 음악 파일로 웬만한 음악은 다 컴퓨터에 연결된 앰프와 스피커로 듣는다. 영화 파일도 마찬가지로 컴퓨터와 스마트 TV를 HDMI로 연결하여 무한정 감상한다. 가끔씩 게임도 즐기며 여가 시간을 보낸다. 밤이 되면 아이패드에서 나오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스마트 기기가 이제는 나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처음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기와 마주한 것은 80년대 후반이었다. 그 당시에는 8비트 애플컴퓨터와 16비트 IBM 컴퓨터로 간단한 워드나 계산 작업에 활용하였다. 개인용 컴퓨터가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시기라 상당히 고가에 속하는 장비였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AT 컴퓨터가 그 당시 가격으로만 200만원에 호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요즘 물가로 따지면 봉급의 몇 배가 되니 거의 소형차 한 대 값이다.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자 컴퓨터의 보급이 확산되어 많이 내려갔지만 웬만한 각오 없이는 쉽사리 구매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한두 달 월급을 모아야 겨우 컴퓨터 한 대를 살 수 있었고, 프린터를 가지려면 또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안동 인근의 중학교에 근무할 때이다. 맡은 일이 기획이다 보니 여러 가지 워드 작업이 필수였다. 학교에서 못 다한 일들은 집에서도 해야 될 형편이라 컴퓨터를 하나 장만하고 싶었다. 그리 만만찮은 가격이라 아내의 동의를 구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반대였다. 몇 번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집에서까지 일할 필요가 어디 있냐고 했다. 한 살 터울로 낳은 두 딸을 키우기가 벅찼던 시절이라 이해는 되었지만 한번 컴퓨터에 꽂힌 내 마음도 접기는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을 발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제법 심각했다. 금요일 저녁부터 단식 투쟁에 들어가서 일요일 저녁 때 결국 확답을 얻었다. 내 생애 첫 컴퓨터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컴퓨터에 빠져 밤을 새는 일이 허다했다. 새로 구매한 프로그램을 설치하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하고, 컴퓨터가 다운되면 영문을 몰라 애를 태우기도 했다. 한 번은 새로 구한 ᄒᆞᆫ글 1.5버전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했는데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마침 인근 초등학교에 컴퓨터 박사라는 선생님이 계신다고 해서 찾아 갔다. 지금은 교육부 연구관으로 있는 분인데 컴퓨터에 앉아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니 금방 해결되었다. 그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며 컴퓨터를 배워 나갔다. 나의 컴퓨터 스승인 셈이었다. 그 후로는 함께 컴퓨터 동호회 활동도 하며 프로그래밍을 배우기도 했다. 그 당시 컴퓨터 관련 서적 구입에도 컴퓨터 몇 대 값이 들어갔으니 꽤 비싼 투자였다.
이런 투자 덕분인지 몰라도 컴퓨터 관련 기능들이 제법 몸에 익어 갔다. 그 다음에 옮긴 학교에서는 정보부장을 내리 맡기도 하고, 사소한 고장이나 정비는 스스로 다 해결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집에서 고장 난 컴퓨터를 가져 오면 고쳐 주기도 하고, 워드 프로그램을 다루다 막히면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어느 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컴퓨터 매니아가 된 것이다. 그 동안 업그레이드한 컴퓨터나 주변장치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여러 소프트웨어들도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정품을 구매했다. 하드웨어를 분해하고 소프트웨어를 익히며 지냈던 그 시절이 어쩌면 오늘의 편안함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닐까. 아마도 2,000년대 중반까지 중년의 40대를 할애한 근 10년 동안의 컴퓨터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있어 큰 이정표가 되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스마트 기기의 교체 주기도 그만큼 짧아져서 이제는 거의 분기별로 바뀐다. 이진법의 숫자 두 개가 이루어내는 오묘한 기계는 마침내 세상을 지배하는 시스템의 중심에 서 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이 바로 반도체 발견이 아닌가 한다. 전기가 통하고 안 통하는 단순한 이진법을 무한한 코드로 바꾸어, 형태와 색깔뿐만 아니라 소리와 움직임까지 제어하는 컴퓨터의 끝이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지 일개 범부로서는 짐작조차 어렵다.
그래도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노트북에 아이폰 핫스팟으로 연결해서 원격 강의를 듣는 지금 이 세상은 참으로 편리하지 않은가? (12.6매) (2013. 11. 26.)
컴퓨터를 구입하여 익혀갔던 체험을 통한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스마트폰을 활용한 디지털정보화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서술하여, 삶의 편리성에 대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첫 문장(단)을 마지막 문단과 합치고, 컴퓨터 이야기와 스마트폰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어 사회의 변화 과정을 순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8) 걷자생존
우리 집 가까이에 유천이 있다. 유천은 실개천이지만 사람이 많이 찾는 대구의 신천 보다 나은 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호젓하고 아담한 느낌이 들어 정겹다. 또 하나 좋은 것은 방천에 올라서면 바로 도시의 복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방천 왼편에는 온갖 곡식들이 자라는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땀 흘리는 농부의 모습이 옛날 고향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좋다. 방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도시와 시골풍경이 마주하며 누가 더 잘났는지 자웅을 겨루고 있다. 나는 와글와글 울어대는 개구리소리와 풋풋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쳐 고향처럼 아늑한 이곳을 틈만 나면 걷는다. 그뿐이랴 달성습지를 옆으로 끼고 거닐며 마주치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모습과 철 따라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온갖 풍경들은 나를 들뜨게 한다. 낙동강 기슭을 따라 잘 다듬어진 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상쾌한 기분은 또 다른 덤이다.
내가 이 먼 곳까지 이사 오게 된 까닭은 아이 교육 때문이었다. 정든 곳이 좋아 아내의 거듭된 이사 요구도 묵살하고 한 집에서 20년을 눌러 살았다. 아이가 대학진학에 유리하다며 전학을 원해 하는 수 없이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던 주위 사람들, 자주 오르던 인근 산, 거의 매일 나가던 운동 클럽,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팽개치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사 와서 낯설고 물선 곳에 적응하는 것은 또 어떻고. 수구초심이라 고향이 동해 쪽인 나는 은연중에 동쪽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고향 가는 방향과 반대되는 곳, 그것도 변두리로 이사 온 것이 내심 못마땅했다. ‘자식이 웬수지! 아이 대학진학 후에는 옛날 살던 동네나 아니면 동쪽으로 다시 이사해야지.’ 하고 스스로 나를 달랬다.
어느 날 건강검진에서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고조부 때부터 부모님까지 모두 장수한 집안이고 외가조차 대사증후군의 병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릴 때는 골골했으나 장년이 되어서는 누구보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항상 건강할 것이라는 오만이 탈을 불렀다. 저녁 운동 후 친구들과 어울려 새벽녘에나 끝이 나던 잦은 음주도 이 병을 불러오는데 크게 한몫을 한 것이 분명했다. 삶에 굵은 올가미가 씌워졌다.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자유를 박탈당했다.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먹어서는 안 될 것이 더 많았다. 과자나 아이스크림같이 설탕이 첨가된 음식은 당연히 먹을 수 없다. 나에게 주식과 같았던 국수부터 밀가루로 만든 모든 음식, 기름기 짜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 수많은 종류의 과일까지도 그림의 떡이 되어 버렸다.
일상에서 쉽게 얻고 접할 수 있어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던 것들이 가까이 있어도 가질 수 없을 때 그제야 소중함을 느낀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특권처럼 여겨진다. 보통 사람이 부럽기 시작했다. 갑자기 닥쳐온 불행에 체념하면서, 살아온 대로 살 것인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것마저도 혼란스러웠다. 무병장수가 아니라 일병장수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건강을 맹신해서 몸을 돌보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하지만 지병을 관리를하다 보면 다른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큰 병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역에 바로 붙어있는 우리 집은 편리한 점이 있다. 열차 출발 몇 분 전에 현관을 나가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문제다. 이 열차를 놓치면 지각인데 8층에서 버튼을 누르면 기어이 25층까지 올라갈 때가 많다. 10층까지만 갔다 오라고 마음속으로 빌어도 기어이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제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바쁠 때일수록 더 그렇다. 꾸물거리다가 조금 늦게 나온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애꿎게 맨 위층에 사는 사람을 원망하기도 한다. (단락 바꾸기) 승용차로 예식장에 왔는데 차량정체로 차 안에 갇혀 시간이 자꾸만 흘러간다. 속이 타서 차에서 내리려고 해도 내릴 수 없다. 혼주 얼굴도 못 보고 허겁지겁 축의금만 전하고 올 때도 있다. 주차 안내원에게 괜히 신경질을 내기도 하고 차를 가지고 온 것을 후회도 해본다.
나에게는 ‘적자생존’이 아닌 ‘걷자생존’이 생활 모토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져 적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 ‘적자생존’이라면 당 수치 조절을 위해 틈나면 걸어야 살 수 있는 것이 ‘걷자생존’이다. 시간이 나면 캠퍼스를 거닌다. 30년간 근무하면서도 무관심해서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봄이면 교정에 흐드러진 벚꽃의 향연, 가을이면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느끼는 상념, 한 솥밥을 먹으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의 마주침, 이런 모든 것들은 당뇨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유천을 자주 거니는 것도 ‘걷자생존’ 실천의 일환이다. 신이 미리 알았는지 산책하기 좋은 이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다. 자주 걷다 보니 내가 사는 주위의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25층까지 올라가든 말든 이제는 상관이 없다. 시간이 급하면 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리면 그만이다. 계단을 걷는 것이 오히려 건강유지에 도움이 되어 좋다. 예식장에는 굳이 승용차로 가지 않는다. 행여 승용차로 갈 수밖에 없을 때라도 구태여 북새통인 예식장주차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 주차하면 공간도 널려있고 주차하는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정체로 짜증을 낼 필요도 없고 걸을 기회를 얻어 더욱 좋다. 오늘도 예식장 위치를 잘못 알아 한 블록 더 멀리 주차하였다. 걸어야 할 거리가 더 멀다. 하지만 짜증이 나지 않는다. 더 걸을 수 있으니까. 이사 온 이곳에도 지난번처럼 오래 머물 것 같다. 전에 살던 곳보다 ‘걷자생존’을 실천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이 흥미롭다. 수필 구성의 기교를 부려보고자 한 의도도 주목을 요한다. 각 단락에 배치한 화제를 아무런 관련성 없이 던져놓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걷자생존’이라는 의미 풀이와 함께 하나의 주제로 묶었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문학적 수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문학이고, 그래야 문학다워진다.
그럴진대, 더 구조화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화제2(이사), 3(당뇨병), 5(엘리베이트), 6(예식장의 번잡함)의 네 가지 화제의 부정적 측면만을 먼저 내세우고, 이 부정적 측면을 마지막에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반전의 기법을 구사해 보면 어떨까. 화제1은 마지막으로 돌려야 할 것이고, 화제3(큰병 예방)은 버리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9) 바보 셈법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오셨다. 전화도 한 통 없이 불쑥 찾아 오셨다. 휴대폰 사용법이 너무 어렵대서 ‘오는 전화만이라도 받으시라’며 억지로 목에 걸어드린 그 휴대폰은 집에 두셨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부터 행정구역상의 시․군 경계 두 개 너머에 있는 작은 도시에 혼자 살고 계신다. 혼자가 편하다며 그렇게 사신 지 삼십 년이 다 되었다.
잘 뚫린 도로 덕분에 승용차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아들집인데 세 시간도 넘게 걸려서 택시와 기차,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고 오셨다고 한다.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태우러 가겠다고 해도, 아들이지만 그것마저 부담시키기 싫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리신다. ‘우리가 남이냐’고 서운해 해도 도대체가 막무가내다. 그렇게 하고야 마는 것이 절대 바꾸지 않는 당신의 습성인지라 그런 면에서는 우리 부부도 ‘어머니는 그런 분’으로 알며 그냥 넘길 수밖에 없다. 오늘의 깜짝 방문은 생일을 맞은 손녀를 격려해 주기 위해서라고 하신다.(이 부분은 주제 형상화에 직접적인 요소로 작용하지 않으므로, 한두 문장으로 줄이면 좋을 듯)
저녁상을 물리자 어머니의 이런저런 훈계를 겸한 주문이 어김없이 쏟아졌다. 늘 반복되는 얘기인지라 모두들 그냥 흘려듣는다. 객지에서 공부하는 당신 외손자한테도 신경을 써라, 시집간 외손녀들의 애들 돌잔치 같은 일에도 관심을 보여라, 심지어는 당신 여동생인 이모들과도 연락을 좀 더 자주하라는 것들이 주된 내용인데 결론은 ‘베푼 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무수히 들어온 어머니의 지론이다.
오랜만에 삼대가 둘러앉은 딸내미의 조촐한 생일 밥상이 치워질 무렵이었다. 아래층 아주머님이 초인종을 눌렀다. 얼굴 표정에서부터 불만이 넘쳐흘렀다.
난감한 상황의 내용인즉슨 ‘아래층 뒷 베란다와 거실의 화장실 천장에 물방울이 맺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집의 물이 새고 있으니 집을 수리하라’는 요구였다.
갑작스런 사태에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어쨌거나 수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우리 집이 맨 위층인지라 누수의 근원지는 분명한 듯하다. 건물 신축 연도가 십오 년이 넘었으니 배수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배관자체가 낡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가능성 있는 추측들이 이것저것 마구 떠올랐다.
어쨌거나 아래층 분들께는 미안한 일인지라 정중한 사과와 함께 양해를 구했다. 생각지도 않은 돈도 들여야 하고, 어지럽고 골치 아픈 공정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지만 ‘빠른 시일 내에 원인을 찾아 보수 하겠다’고 약속하며 아랫집의 양해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민망할 정도로 머리를 조아려 사죄를 하셨다. ‘고쳐주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굽신거릴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런 경우 어머니의 지론에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 자명하므로 꾹 참고 말았다.
시멘트 건물에서 물이 새는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위쪽의 배수관 이음새에 균열이 생기거나, 쌓여진 시멘트 벽돌의 곡각지점에 뿌려진 방수액이 오랫동안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노후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특성상 엉뚱한 곳이 누수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같은 층의 반대쪽에서 누수가 시작되어 수평 층의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나오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느라 근 한 달 동안이나 애를 먹었다. 처음엔 우리가 공사를 몇 달 뒤에 하겠노라고 했다. 아래층에는 마침 갓 해산을 한 새댁이 친정을 찾아 몸조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해야하는 갓난 애기와 산후조리원을 마다하고 마음 편한 친정을 찾아온 산모를 생각했음이다. 그런데 뾰로퉁한 얼굴의 아래층 아주머니는 ‘일 주일 안에 공사를 마치라’며 딸과 며느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 사장을 찾았다. 이 방면에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녔으므로 작업 일정 준수를 당부하며 바로 공사를 하게 했다. 견고한 시멘트벽과 바닥을 깨고 부수는 데에만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그 진동과 소음은 실로 대단했다. ‘소음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쪽지를 엘리베이터에 커다랗게 붙였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은 끝난 일이기에 차분하게 애기 할 수 있지만, 그 때를 생각하노라면 정말이지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집안이 엉망이었다. 공사를 한다던 첫 날 퇴근 후, 집에 들어간 나는 아연 질색했다. 길가의 공사판에서나 봄직한 먼지가루들이 거실과 주방 곳곳에 보얗게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염려하여 ‘공사 시작 전에 거실과 부엌 천정으로 비닐 터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었는데 간단히 무시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이사장을 불러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잘 지내던 인간관계를 이 일로 망가뜨리고 싶지도 않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체념을 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공사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부터 웬일인지 공사가 단 한 발짝도 진척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바닥을 부술 때부터 서울업체가 지어서 집이 단단하다’며 노동의 강도가 생각보다 세기 때문에 비용을 추가부담 해야 한다고 은근히 강요하던 작업 인부가 방수액 건조 이후로는 아예 전화연락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그렇게 그냥 보냈다. 출퇴근 때마다 속에 불이 났다. 복장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래층에서 상태 확인을 왔다. 아주머니는 진행 중인 난장판을 보고는 눈을 부라렸으나 달리 방법이 없는 일 아닌가. 빚쟁이한테 애걸복걸 사정 하듯 전후좌우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다른 곳에서의 몸조리를 부탁하면서도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나중에 혹시나 있을 분쟁에 대비하여 현장 상황을 증빙할 수 있는 사진을 찍어 두었다. 며칠 뒤에 나타난 인부들에게 나는 할 수 없이 제발 잘 부탁한다는 비굴한 가짜 웃음을 지으며 ‘괞찮을 거라는 추측’으로만 공사를 마무리 할 경우, 재발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배수관 자체의 교체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여기에서 또 인부들의 근성이 발동했다. 자기들의 기술력에 대한 불신을 핑계로 다시 또 사흘을 그냥 보내는 게 아닌가. 인내에 한계가 왔지만 난 나의 주장대로 해 줄 것을 고집했다. 떨떠름한 태도로 배관을 교체하면서 관의 부식상태를 확인한 그들은 내 말에 일견 수긍을 하면서 조금씩 양순해졌다.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방수액을 두르고, 건조를 기다려 물을 채워서 아래층의 누수 상태를 확인하기를 여러 차례, 처음 약속한 공기의 다섯 배가 지나서야 비로소 공사가 종료되었다. 비용에 대해 이 사장은 최소 금액이라고 온갖 생색을 냈지만 나에게는 적지 않은 지출이었다. 내 마음 고생 비용은 아예 산정도 하지 않았는데...
아래층의 아주머니는 추가 지출된 산후조리비와 위자료 배상까지 운운하였으나, 착하고 곰살맞은 그 집 사위의 이해와 중재로 애오라지 입막음을 할 수 있었다.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어머니로부터 주문이 들어왔다. 원인 제공은 우리가 했으니 그 여자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애기 백일이 오면 반드시 선물을 하라고 하시며 ‘이런 것도 다 공을 쌓는 것이다. 베푼 만큼 돌아올 것’이라며 그것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이니 반드시 그리 하라고 강요까지 하셨다.
공사가 끝나고 두 달쯤 지난 뒤에 어머니 집에 갔다. 우연하게도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안방 장롱 옆의 도배지 한쪽이 유난히 반질거리며 묽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위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빛이다. 순간, 이 무슨 업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석 달 전의 그 일이 되새김 되어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지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눈치를 알아챈 어머니가 별 일 아니란 듯 설명하셨다.
“아 그거! 윗집 여자가 다음 주에 고쳐준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랬냐? 언제까지 고쳐 준다는 거냐? 윗집엔 여자만 있냐? 뭐하는 여자냐?고 계속되는 우리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차분하게 얘기하셨다.
“모든 것을 윗집에서 다 고치고, 도배도 다시 해 줄 것을 약속 받았으니 걱정 말라”고...
누수 책임으로 얽혀진 우리 집과 어머니의 윗집이 대비되었다. 허허로운 웃음이 나왔다.
그 후 추석을 조금 앞 둔 어느 날, 어머니 집을 다시 찾았다. 김장 얘기도 해야 하지만 전화로만 확인 한 누수 부분 수리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출타 중이신지라 우리는 시장입구의 건어물 아지매 가게에서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인심 후덕한 이 아지매는 오래전부터 어머니와 살갑게 지내는 터다.
‘아들이니까 들었을 거 아니냐’면서 아지매는 방수 공사의 진행 전모를 알려 주었다.
“아휴! 어무이가 고생 엄청 했어! 물은 새는데 웃층 여편네는 완전 ‘나 몰라라!’ 하더라고! 그 여자 아주 막 돼 먹었어! 돈 좀 들었을 걸? 처음 공사하고 안돼서 다시 탐수 기계를 동원해서야 물 새는 데를 찾았거든. 물은 세탁기 있는 데에서 샜는데 할매 집에는 안방으로 흘렀다며? 어쨌든 그 돈 할매가 다 댔어!”
다 잘 되었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이건 뭔가? 분노가 치밀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정 안되면 법으로 하겠노라고 단단히 벼르고 기다렸다. 어머니는 ‘만나도 소용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다. 이럴 경우 그 뜻을 거스를 수 없음은 내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유는 알고 싶었다.
그 여자는 혼자 산다고 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들어오는.; 데 그 때는 항상 만취 상태라 얘기 자체가 안 된다고 한다. 동네만 시끄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끝난 일이고, 그 여자보다는 우리 형편이 훨씬 나을 뿐더러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니 불우이웃돕기 한 셈 치라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어머니 특유의 그 ‘인과응보형 자업자득설’에 대한 훈계만 다시 잔뜩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어머님 뜻이니 그냥 넘어 가자‘고 했지만 난 벌써 포기를 했었다. 바보 같지만 어머니의 셈법은 늘 그랬고 우린 거기에 늘 따를 수밖에 없었음이다.
그 일이 있고 한참 후, 친구와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 집 누수 얘기를 화제로 삼았는데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화재 보험이나 운전자 보험 계약사항 중에 그런 경우의 배상 항목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험회사 임원으로 퇴직한 친구의 말이니 정확할 것이라 여겼다.
서둘러 집으로 전화를 했다. 계약서를 찾게 하여 사진으로 전송 받았다. 작년에 한참을 망설이다 가입한 운전자 보험이었다. 계약기간 삼년. 아직 유효하다. 계약내용을 주루룩 눈으로 훑었다.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일상생활 배상책임, 보험가입금액 100,000,000원!’(27.2)
‘바보 샘법’은 제목이면서 곧바로 주제와도 직결된다. 공동주택의 누수 문제를 두고 가해자였을 때와 피해자였을 때를 비교의 방법에 의한 글쓰기로 제시하고 있다. 그 중심에 어머니가 있고, ‘베푼 대로 돌아온다’는 어머니의 가치관이 작품을 일관하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어머니 이야기를 중심으로 압축하고 통일성있게 정리하는 퇴고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어머니가 아들네 집으로 불현 듯 찾아온 대목을 대폭 축약하고, 마지막 보험 이야기는 삭제하면 어떨까.
(10) 무제
찰칵, 문 여는 소리
어디에 숨어야 하나.? 환풍기 안에 들어갈까, 아니 바람이 너무 센데.
“여기 있었네, 꼼짝 마. 넌 끝이야.”
이쪽은 샴푸 향기가 나는 걸 봐서 숨기에 적당치 않다. 저쪽으로 가야겠다.
새벽 과식한 탓에 몸이 무겁네, 휴~
“어디 숨었니 비겁하게, 넌 계절도 모르니? 지금은 가을도 지나 겨울이다. 시도 때도 모르는 멍청한 것, 빨리 나와, 숨어봐야 소용없어 여기는 내 그라운드야.”
무서워, 아줌마의 도끼눈에 오금이 저려 꼼짝할 수가 없네. 숨이 막혀 날갯짓조차 힘이 든다. 가슴은 왜 이래 뛰는지. 내가 어리석었지 뭐야, 아줌마의 귀가 그렇게 밝을 줄 몰랐지. 내 작은 날갯짓에 금방 일어나 불을 켜고 나를 찾아냈어. 았다. 나는 침대 밑으로 얼른 숨어 버렸지. 아줌마는 모든 불을 끄더니 옷방을 지나 화장실로 가는 미등을 켰다. 무슨 일일까 궁금한 나는 미등을 따라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찰칵 문이 닫혔다. 결국, 화장실에 갇히고 말았다.
“ 팔과 이마가 모기에 물려 온통 울퉁불퉁하다. 가려워서 긁었더니 상처에 피가 났네. 여름 모기보다 겨울 모기가 더 독하다니까. 옛날에는 모깃소리가 나서 불을 켜면 주위 벽에 붙어 있어서 잡았는데 요즘은 모기도 머리를 쓰나 보다. 찾아도 없어. 잘 숨는다니까.”
아줌마, 누구나 죽는 건 싫거든요. 당신들이 마구 쓰는 에어컨이나 난방기구들, 그리고 각종 기기들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과잉으로 기온이 올라가고 환경이 파괴되어 결국에는 지구의 온난화로까지 되었지요. 그로 인해 우리 모기들도 활동 기간이 길어지고 개체 수도 늘어나게 되었지요. 우리도 쉬운 건 아니다. 당신들의 환경에 맞추어 살려니 뼈를 깎는 적응 훈련에 힘이 든다구요. 나도 여름에 활동을 하고 겨울에는 2세가 알로 동면하길 바라지요. 올여름은 유난히 더 더웠잖아요. 당신들의 에어컨 바람을 피하려다 보니 조금 늦었네요.
아줌마 나보고 비겁하고 멍청하다고요? 미꾸라지는 하루에 천 마리 이상 장구벌레를 먹어야 되고, 박쥐나 잠자리도 모기가 없으면 먹이사슬이 위험하지요. 세상에 어느 것 하나 필요 없이 태어난 건 없지요. 비록 내가 알을 품어 철분과 단백질이 부족하여 사람들의 피로 약간 보충했을 뿐인데 세상에 몹쓸 것으로 취급하는군요.
당신들은 선생이 제자를 성추행하고, 국민의 생활은 아랑곳없이 정당 간 힘겨루기나 하는 국회의원들, 국회주차장에 버스 한 대를 놓고 치워라, 못 치운다 하며 서로 발길질해대며 시시비비 하는 꼴이란 참으로 가관이더군요.
내가 몇 년을 함께 살자고 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일이 주인데 너무 야박하잖아요. 추운 날씨에 지나는 거지에게 따뜻한 옷 한 벌 내어주던 옛 인심이 그립네요. 맞아요, 지구의 기온만 변한 게 아니지요, 사람들의 사고도 많이 바뀌었죠. 주거환경이 변했듯이. 나도 강둑 풀더미 아래서 알을 낳고 이듬해 새순이 돋고 잎이 무성할 때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청정한 물에서 자라기를 바라지요. 뭔가 새로운 게 있을 것 같아 목숨 걸고 까마득히 날아오르는 모험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아요. 위에도 아래도 별다를 게 없으니까요.
휘이익~ 모기약 뿌리는 소리, 곧이어 화장실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제목부터 달아야 한다. 글을 다 쓰고 난 후에 수정하더라도. 그래야 목적지를 바라보며 글을 쓸 수 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모기 한 마리를 잡는 짧은 상황을 모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사회의 모순을 풍자한 글이다. 사물을 의인화했다는 점에서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활발하게 창작되던 ‘가전체’의 전통을 이었다. 그러나 대상이 되는 사물의 특징을 서술하지 않으므로 가전체와는 매우 다르다. 사물의 의인화를 통해, 사물의 시각을 빌려, 인간의 모순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교훈적 의미를 갖추었다.
이 작품은 수필인가? 전달방법은 매우 특별하지만,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수필이라 할 수 있다. 모기의 입장에서 풀어놓은 비판적 언어들은 허구인가? 작가가 상상한 바이지만, 작가가 바라본 현실이므로 실제적인 체험이다. 그러므로 허구가 아니다.
(11) 그것은 하나
내 몸뚱이의 역사는 대단하했다. 몸의 구성은 반쪽이 정확하게 대칭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쓰이는 기능은 확연히 다르다. 먼저 지시하는 뇌기능부터가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이성으로 구분되어 있다.
반나체로 거울 앞에 선 내 모습. 이렇게 오래토록 찬찬히 들여다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내 몸에 대한 불만투성이가 둔탁한 현의 소리로 변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뒤뚱거리는 오리나 휘어져 쓸모없는 나무와 무엇이 다른가. 균형이 잘 잡힌 모델이나 배우의 몸매를 보면서 경탄을 보낼 때나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단점을 과감하게 피력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떻게 망가져도 이처럼 이토록 보기 흉측할 정도로 하게 내 자신을 돌보지 못했을까. 돌보는 정도가 아니라 내 팽개쳐둔 친 느낌이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다듬고 화장품도 찍어 발랐는데 중년의 내 몰골은 형편이 없었다. 이제 어쩔거나, 변화의 순응에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노화에 접어든 내 얼굴과 몸을 스스로 책임져야할 수밖에 없다. 바른 마음으로 지금보다는 더 험악하지 않게끔 가꾸어야지 하고 다짐을 해 본다
일은 저지르고 볼일이다. 피트니스센터 필라테스 과정 1년 치 회원권을 끊었다. 평소 워낙 운동을 안 한 탓으로 제대로 된 운동을 해 봐야지 하는 강박 관념이 지금에 와서야 딱 맞아 떨어졌다. 형식적으로야 친구의 강요에 이끌려 갔지만 어쨌거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올바른 운동을 해서 몸매를 바로잡아야지 하는 강한 욕구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에야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 은 것이 있었다면 회원권이 비가 비싼 게 것이 흠이었다. 그래도 무리하게 결정했던 것은 무료체험으로 거울 앞에 서서 자세히 바라본 내 몸매의 각선미에 심히 놀랐고, 더욱이 필라테스룸에서의 트레이너로부터 구체적으로 몸의 균형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는 내 정체성마저도 뒤흔들렸다. 충격이었다. 체험이 끝날 때까지 ‘지금부터라도.’라는 말이 내 입안에서 수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몸은 내 삶의 흔적이자 변화하는 증거물이다. 시간은 역사를 낳았지만 내 몸은 내 삶을 이끌어 온 도구였다. 비록 신체는 내 마음에 내키지 않은 흔적일지라도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더없이 소중한 유기체이다. 지금에 와서야 이 흔적들을 보듬고 어우르고 싶었다. 아니 눈물이 나도록 쓰다듬고 사랑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의미 없는 삶이 있겠느냐마는 내 인생도 그저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년의 내 모습,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내 얼굴이, 내 어깨가, 내 가슴이, 내 복부가, 내 등이, 내 팔다리가,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내 삶도 갓 꼬인 새끼줄같이 팽팽하던 삶의 탄력은 어디에도 볼 수 없고 푸석한 세포에 물을 품어 놓은 빛바랜 마루 같다. 피트니스센터 건물 창문 너머 바삐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들도 나와 다르지 않겠지 하면서 애써 위안을 삼는다. 언뜻 카페에 올려져 있던 고등학교 동창생의 육체미가 언뜻 스쳐갔다. 이 나이에 친구의 육체미는 환상적이었다. 쫙 벌어진 가슴이며 균형 잡힌 몸매, 탄력 있는 근육들이 평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 비법을 묻고 싶었다. 그리고 갑자기 운동선수가 부러워졌다.
건강한 체력이 건강한 정신을 만든다는 구호가 성행한 때가 있었다. 체력이 우선이냐 정신이 우선이냐를 놓고 밤새도록 토론을 한 기억이 난다. 사람이 태어나서 체격이 변화하면서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다양한 영양섭취와 적당한 운동량으로 균형 잡힌 성장을 한다. 정신은 어떤가. 말을 배우며 생각을 할 즈음 인간의 뇌는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것에서 느끼는 일차적인 감각을 넘어서서 생각을 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게 된다. 사유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 둘은 각자로 땔 수없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서 한평생 한 인간의 인격체를 완성하게 만든다.
몸과 영혼(정신)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이제는 마음이 문제다. 생물학적 요소인 육체는 아무리 가꾼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마음과 정신이 고요하고 평온 하다면 ‘나’라는 존재가 또 다른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애벌레(성충)에서 매미가 되듯이. 내수진천 외행현실內隨進天 外行顯實. 안으로 마음을 잘 수련하면 겉으로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위라고 했다. 몸과 마음의 균형과 조화, 건강과 평화, 영적 성장과 합일. 최근 나의 이상적인 생활 관심사다.
악기와 연주자는 내 몸과 정신과도 같다.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연주자가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면 악기의 본래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악기도 장인의 손에 의해 명기로 다듬어지기까지는 무수히 진단과 장인의 감각이 녹아 있듯이 사람의 몸도 꾸준한 운동과 단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잘 다듬어진 몸매라도 계속해서 관리를 소홀히이 한다면 균형 잡힌 몸맵시는 단숨에 망가지고 말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도 악기를 잘 이해하고 연주자가 소리 내고 싶은 정성이 담겨져야 훌륭한 소리가 발현되는 법것이다. 악기가 내는 소리는 그 근원이 자연의 소리일 것이다. 봄날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대지의 속삭임이나 나무의 물 올리는 소리는 직접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감각적으로 느끼는 소리이다. 오뉴월 녹음이 왕성한 숲속,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교향악이 울려 퍼질 때는 길가는 등산객도 잠시 쉬어간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물들 때는 어떠한가? 나뭇잎 사이로 걷는 중년의 걸음걸이 보폭에서는 중간 중간 엇박자가 뒤섞이지만 어색하지 않은 여유로움의 화음을 연출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자연과 나와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자연과 내가 하나 됨을 발견한다.
몸과 마음은 기氣와 이理의 원리와도 같다. 자연은 기로써 형체를 이루었다. 사물은 형체를 이루기전에 이치가 있었다. 무형의 근원이 이理다. 프로이드 심리적 구조에서는 이드는 기氣의 영역이고, 에고는 현실적 존재로 이理와 기氣가 동시에 작용하는 영역이고, 슈퍼에고는 이理의 영역이라고 한다.
내 몸은 소우주다. 이러한 이와 기가 공존하는 내 몸은 항상 어느 한곳으로 치우칠 수가 없다. 각자의 영역에서 밀당을 하고 있다. 내 거울을 보고 망가진 몸뚱이를 보고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것은 균형 잡히지 않은 겉모습이지만 실상은 그 이면에 정신적인 안정감이 상실된 것도 동시에 느낀 점이다. 음양의 조화 못지않게 근원의 본질을 발견한 것에 대해 더 큰 무게를 두고 싶다. 시공간 속, 지식의 개념화에 빠져있는 나에게 새로운 그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근원에서 통째로 볼 수 있는 전체성이 바로 그것이다. 체력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거울에 다가선다. 자신감 가득한 나를 바라본다. 미소 띤 얼굴에서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것은 하나, 고요함이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몸 관리를 해야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하였으나 마음관리가 더 문제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주제를 향한 통일성이 잘 갖추어진 작품이다. 다만, 理와 氣를 마음과 육체의 관계로 연결하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인식이 잘못되어도 공감을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2) 입영
벌써부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기상청의 예보는 올 겨울도 동장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춥고 긴 겨울이 될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애청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연예인들이 군부대로 가서 현역 군인과 똑같이 병영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침 큰아들이 입대를 앞두고 있는 터라 자연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남편과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는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7명의 출연자들이 최전방에 있는 수색대대에 입소하는 날이다. ‘대한민국 1퍼센트의 수색대원을 양성하는 정예부대‘라는 말에 보는 우리도 긴장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연병장을 지나치며 장병들이 체력을 단련하는 광경을 본 출연자들은 거의 사색이 될 지경이다. 그 중에서도 ‘아기병사’로 불리는 아들 또래의 출연자가 잔뜩 긴장해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럽다. 처음 방송을 볼 때가 훈련소에 입소해 유격훈련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힘든 상황이다. 살벌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곧 아들이 감당해야 될 일 같아 걱정이 앞선다.
방송을 보면서 몇 년 전 아이 둘을 해병대캠프에 보냈던 이야기가 나왔다. 곧 중학생이 될 아이보다 엄마인 내가 더 의욕이 앞서던 때였다. 공부도 체력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에 겨울방학을 맞은 두 녀석을 반 우격다짐으로 포항터미널에 데려다 주었다. 마중 나온 캠프 측 인솔자에게 아이들을 보내고 돌아서면서도 안쓰러움보다 기대감이 더 컸다.
그날그날 인터넷으로 확인이 가능한 캠프훈련은 생각보다 엄하고 강도도 높았다.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누가 내 아이인지 구별조차 하기 어려웠다. 영하의 날씨에도 조교의 구령과 호각소리에 맞춰 도보를 하고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여러 명이 한 조가 되어 보트를 들고 달리는 장면에서는 넘어지지 않을까 내가 더 조마조마 했다. 취침 점호시간, 며칠 새 홀쭉해진(?) 아이들을 보면서 좀 더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깃들기를 바라며 짠한 마음을 억눌렀다.
보름후면 아들이 진짜 입대를 한다. 건강한 청년으로 자라 나라의 부름을 받게 되었으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입대를 위해 아들은 타지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달 말에 집으로 올 예정이다.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은 열흘 남짓이다. 시간이 빠듯하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캠프를 보낼 때 마음은 간곳없고 남편 말처럼 걱정에 청승이 늘어진다. 누가 입대 날짜만 물어봐도 금방 눈가가 축축해지니 대략난감이다. 요즘은 군대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복무기간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짧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아이들에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의 생활이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머잖아 우리 아들도 ‘진짜 사나이’로 거듭날 것이라 믿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아본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아들의 군 입대를 앞 둔 어머니로서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소재가 다소 평범하지만, 아들에 대한 염려를 하면서도 스스로 위안하려는 마음을 담아냄으로써, 어머니의 미묘한 심리를 무난히 드러낸 작품이다.
(13) 보 물
몰아치는 바람이 송곳 같은 새벽이다. 유학 가는 사람처럼 녀석의 보퉁이는 가관이다. 백 팩을 매고 여행용 캐리어를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와 현관 앞을 지나고 있다. 태연하다. 새벽 3시 20분 고등학교 1학년 딸아이의 가출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을 보고 있다. 아이가 사라지고 현관문이 닫혔다. 차가운 불빛이 침묵위로 하얗게 쏟아진다.
학교 가야할 시간이다. 소리 불러 깨우지만 기척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고 자던 큰 베게만 침대 위에 나뒹군다. 썰물이 빠진 듯 휑한 느낌이다. 책상 위에 깨알같이 빽빽한 편지 두 장을 보니 기가 꽉 막혔다. 밤사이 편지를 쓰며 찍어낸 눈물이 휴지조각에 묻어 구석에 널렸다. 엄마 속만 썩이는 자신이 싫다고 했다. 그동안 게임으로 쓴 돈, 집 나가며 들고 간 돈 죄다 벌어서 갚으러 오겠단다. 벗어둔 교복과 텅 빈 옷걸이가 무거운 침묵을 마주하고 있다. 얼마를 들고 갔는지 지갑 속에 남겨진 지폐 몇 장이 검불처럼 마른손에 잡힌다. 어처구니가 없다. 귓불 송송 하여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겨질 터이다. 말 할 수 없는 괘씸함이 머리끄트머리까지 고슴도치 날로 일어섰다.
아이와 내가 전쟁을 시작한 건 녀석의 유치원 때부터이다. 일하는 엄마대신 아이와 놀아주는 컴퓨터와 TV가 고마웠다.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혼자 놀기에는 더 없는 친구였다. 컴퓨터 게임을 알고 난 뒤부터 새벽에도 아이의 방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곤 했다. 게임 아이템을 사느라 가져가는 돈은 거짓과 나쁜 손버릇으로까지 이어졌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시간을 쪼개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아무리 정신없다지만 고등학생이 시험기간에도 몰래 게임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사이 게임중독치료를 위해 별별 방법을 다 동원 했었다. “구제불능, 정신 질환자, 사회적 쓰레기”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말들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나 역시 게임이란 말만 들어도 이성을 넘어 10년의 세월이 단번에 연쇄폭발을 일으킨다.
아이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가족 같은 분위기, 숙식제공, 합숙 필수, 차비 없이도 전화만 주시면 모시러 갑니다.” 게임에 빠진 사람들을 모으는 부주광고가 인터넷에 수두룩하다. 부주(계정주인)의 아이디로 게임을 시켜 획득한 아이템을 되팔아 이익을 착취하는 자들이다. 남녀노소, 범죄자, 가출청소년, 게임중독자 죄다 모아 빗장을 걸고 아이템 사냥을 목적으로 합숙이 아닌 사육을 하는 곳이다. 아이의 게임계정을 영구정지 해둔 지 오래이다. 언니나 친구의 것으로 하다가 들킨 후로는 부주아이디로 게임을 해왔었다. 학교도 집도 비상사태가 되었다. 아이의 가출이 그토록 거부하던 결손가정의 실태를 고스란히 보여준 꼴이 되었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불길이 솟구칠 듯 속이 타 들어갔다.
이틀이 지나가고 있다. 불 꺼진 방 문틈으로 어둠의 그림자가 공포로 뒤엉켜있다. 정적은 이미 정적이 아니다. 전기를 흡입하여 빛을 뿜는 형광등, 이따금 돌아가는 가전제품 소리에, 떠다니는 먼지까지 신경을 거스른다. 음지에 붙박인 곰팡이처럼 게임중독자들의 피폐한 삶이 결국 나에게까지 미치는 것일까? 현실의 삶을 가상세계와 맞바꾼 채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아바타 같은 자들이 바로 내 아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들의 병든 삶에 흡착하여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 같은 자들에게 내 아이를 고스란히 내준 것은 아닐까? 아이의 초췌한 모습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 무서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어찌하고 있는지 염려는 시시각각 불안으로 엄습해 왔다.
지인을 통해 게임전용 컴퓨터 설치전문가를 만났다. 굴뚝같은 담배 연기 속에서 24시간 두문불출 게임에 빠진 수백 명의 게임중독자들의 실태를 전해 들었다. 4~50대씩 설치된 사무실과 주택은 물론, 2천대가 넘는 대규모 공장까지 있다는 것이다. 아이템 불법판매가 독버섯처럼 번지면서 돈벌이에 눈이 먼 게임부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아이에서 어른까지 철없고 분별력 없는 게임중독자들은 그들의 시뻘건 눈에 먹잇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이 열려 있어도 나갈 줄도 모르고, 가야 할 곳조차 잃어버린 중독자들. 자유의지조차 상실한 병적인 삶이 부주들 눈에는 현대판 게임노예일 뿐이다. 눈부신 발전이 가져다준 IT 강국의 허명 뒤에 사회가 병들고, 젊은 미래가 병드는 치명적인 책임을 이제 어디에서 물어야 할 것인가? 세상을 거꾸로 든 채 탈탈 털어도 시원하지 않을 것 같다.
연락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PC방, 독서실, 모텔, 찜질방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지만 찾을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은 서울 김 서방 찾는 것보다 더 무모한 것도 하게 만들었다. 지구대는 가출 당일이라며 신고조차도 받아주지 않았다. 휴대폰 위치추적도 헛것이나 다름없다. 만16세가 넘으면 본인동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부모라 할지라도 극단적인 사유가 아니면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책임만 있고 권리는 없는 지랄 같은 법 부스러기 앞에 원망스럽기만 했다. 백척간두에서 자식 생사도 모르는데 개인정보 나부랭이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모두들 말하는 앵무새 같았다. 세상이 미치든, 내가 미치든, 둘 중의 하나는 미치고 말 것 같았다.
종일 아이의 흔적을 쫓아다니다가 넋 나간 사람처럼 딸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딸이 좋아하던 게임의 프로그램이다. 수없이 지우고 뭉개던 파란 막대기가 커지며 아이의 호흡이 내 안 에와 깔린다. 단 한 번도 아이를 이해하려 했던 적이 없었다. 죽자고 감시만 하고 혼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손톱 크기의 아이콘이 바탕화면에 띄워졌다. 존재로부터 모든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리라. 아이가 없다면 게임이든, 공부든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아이가 의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더 반갑게 느껴졌다. 내 것인 줄 알았다. 내가 낳고 내가 키웠으니 당연히 내 희망이 되고 자랑이 되리라 믿었었다. 오랜 침묵과 마주하며 상처로 얼룩진 아득한 일곱 살 뽀얀 아이와도 만난다. 어떻게 있을까? 먼지 한 점조차 숨죽이던 밤은 온통 까맣게 질식되어갔다.
새끼 잃은 짐승의 찢어지는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세상에서 쏟아내는 모든 소식과 일상이 귓등으로 비껴갔다. 결석이 길어질수록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초비상이다. 아이의 불통된 휴대전화에 선생님과 친구들, 온 가족들이 걱정과 회유의 문자를 남겼다. 큰 딸아이 휴대전화로 답장이 왔다. 잘 있다는 짧은 인사말을 보내고 휴대폰은 곧 꺼졌다. 누구에게 빼앗긴 것일까? 짧은 안도 뒤로 언니, 이모, 친구들의 문자 공세가 이어졌다. “돌아와라. 혼내지 않는대, 엄마가 걱정한다.” 등등의 문자를 남기면서 엄마 무서워서 못 올지 모른다며 무언의 채근을 나에게로 돌렸다. 죽든 말든 내버려 두고 싶다는 마음이 똬리를 튼 뱀처럼 좀체 풀어지지 않는다. 잘 있다는 그 말에 괘씸함이 중첩되어 나는 또 내안에 전쟁이다. 눈에 띄지 않으면 세상속이 온통 시원할 줄 알았었다.
어릴 적이었다. 엄마는 형사 콜롬보 같았다. 의심의 잣대는 네 형제자매 중 언제나 나에게와 꽂혔다.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고 오빠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치고 다녔으니 당연하다. 점점 엄마가 미워졌다. 왠지, 동네어른들이 정색하며 친 엄마 이야기를 할 때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호된 꾸지람을 들었던 어느 날, 나를 낳아준 친엄마에게 찾아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훌쩍거리며 아무도 몰래 뒤 곁 짚 낟가리 가래 깊숙이 옷 보퉁이를 숨겼다. 미련 없이 집을 떠나리라는 막연한 계획은 미움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었다. 장난기 많은 내가 빙빙 겉돌기만 할 때였다. 엄마는 숨기듯 조용히 그릇하나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속이 훤히 비취는 감 홍시 두 알, 겨우내 갈무리하여 명절에나 쓰일 것이었다. 숨겨둔 보따리를 풀어 놓으며 엄마에게 들킬까봐 가슴 두근거렸던 것이 기억 속에 어렴풋하다.
전화벨이 울렸다. 집 전화번호다. 아무도 없는 빈집인데 아이가 온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혀 일상인 듯 태연스레 전화를 받는다. 한참 뜸이 든 후에야 기어들어가는 모깃소리로 엄마하며 부른다. 무사하다. 내 아이가 건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그토록 감사해보기는 처음이다. 부리나케 집으로 왔다. 화가 돋은 듯 현관 앞에 서서 굳은 얼굴로 한참을 서있었다. 딸아이는 숨을 쥐구멍이 없어 애석해 보였다. “엄마 잘못 했어요.”라고 한다. 약사발을 기다리는 죄인이 따로 없다. “그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일단 씻어!” 눈길을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잘했든, 잘 못했든 무슨 의미 있겠는가? 욕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며, 하늘 뚜껑이 솟구치도록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돌아올 곳이 있는 떠남은 행복하다.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한 보따리지만, 다시 풀어놓을 수 있는 어머니가 있는 곳. 가슴속에 뜨거운 잉걸불을 안고 수없이 떠나지만, 머무르는 곳마다 돌아보아 지는 곳. 심연으로 가라앉는 삶의 파편들은 또 희망을 잉태하리라. “부모란, 자식을 위해 태산인들 못 옮기겠느냐!” 하던 어머니의 말이 먹물주머니가 되어 명치끝에 매달린다.
이규보는 언어의 조탁을 “용사(用事)”이라고 하고, 참신한 뜻을 부여하는 것을 “신의(新意)”라 하였다. 적절한 비유의 함축된 언어 속에 이 작품 역시 어머니로서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잘 담아내었다. 문장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긴장감을 갖추었다. 그런 가운데 자기성찰과 사회비판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으며, 감정의 절제도 잘 이루어내었다. 멜로드라마 같은 반전도 있어서 더욱 감동적이다.
(14) 마당밭
앞집 할머니가 돌아왔다. 때던 연탄을 헐값에 처분하고 도시에 있는 큰 아들집으로 간다며 지난가을 떠났던 할머니가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놀란 것은 장모님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당을 빌려 밭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도지를 주기로 하고 할머니가 떠날 때 허락받고 빌린 것이라지만 주인이 돌아왔는데 방으로 들어 갈 길조차 없어졌으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앞집 할머니가 혼자 산지도 30년이 되었다. 남편이 먼저 떠나고 자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로 나가자 땅 한 마지기 없던 할머니도 고향을 떴었다. 식당일과 가정부 일을 전전해서 모아놓았던 몇 천 만원되는 돈은 자식들 결혼 자금과 자리를 잡지 못한 자식들 보태주고 나니 바닥이 났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끔씩 남의 품팔이를 다녀 일용돈은 벌어 쓸 수 있었지만 거동조차 불편한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한 상태이고 보면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도 궁금하다. 수중에 돈이 있을 때는 자식들도 자주 오더니만 늙어 병들고 돈 떨어지니 발길도 뜸해졌다며 가끔씩 하소연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할머니를 큰아들이 모시기로 했다. 80을 넘은 연세 탓에 이웃의 도움으로 119에 실려 응급실로 가는 일이 가끔 있고 나서였다. 옷 보따리를 싸서 아들네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 염려 했었다. 공기업에 근무하며 자리 잡고는 있지만 결혼 시킬 딸이 있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못한 아들에, 아직도 대학 다니는 막내가 더 있으니 돈 들어갈 데가 어디 한두 군데이겠는가? 고부간에도 명절 때나 가끔 만나며 30여년 세월을 서로 떨어져 살아왔는데, 강퍅한 할머니의 성정으로 며느리와 마음 맞추며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했다.
할머니가 큰 아들 집에서 돌아왔지만 할머니를 다시 도시로 모셔가겠다는 자식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관두고라도 폐가처럼 흉물스런 집의 고장 난 연탄보일러라도 고쳐 주고 가면 좋으련만, 겨울에 비워 놓아서 얼어 터졌던 연탄보일러 수리도 없이 전기장판만 깔고 써느런 방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문살이 떨어져나가 창호지도 잘 붙지 않는 너덜너덜한 방문을 달고 또 한해 겨울을 나야할 할머니를 보면서 동네사람들은 그 집 자식들 책망이 이어졌다. 다들 살만해서 제 자식은 귀하게 키우겠지만 그 자식들이 뭘 보고 배울 거냐며 부모에게 무관심한 자식들을 탓했다.
노인들만 사는 동네지만 마을 뒷편에 그림 같은 집이 새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식들 키운다고 평생 고생만 한 아버지 어머니가 좋은 집에서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면 한이 될 것이라며, 자식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헌집을 허물고 짓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고향을 오는 자식들은 동네 노인들이 하루 종일 기거하는 마을 회관 경로당에도 선물을 잊지 않는다. 부모님의 체면을 살려드리기 위해서다. 술과 안주를 사오고, 과일과 라면박스를 사 나른다. 경로당에 모여 놀아도 효자 효녀를 둔 할머니들 전화기는 하루 종일 불이나지만 그렇지 못한 할머니들은 한숨만 내쉴 뿐이다. 할머니는 구석에 앉아 부러워하며 자식농사를 잘못 지은 자신을 탓해야만 했다.
할머니는 요즘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걱정하고 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내손으로 끼니를 챙겨 먹을 힘만 있다면 자식들 집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신념은 확실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그러지 못할 때를 염려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쓸쓸한 것이 노년이거늘 내 신세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물을 훔쳤다.
마을 스피커에서 이장님의 방송이 흘러나온다. 폐암으로 1년을 넘게 요양원에서 투병 중이던 동네 할아버지의 별세 소식이다. 써느런 저녁 바람에 텅 빈 마당 밭의 비닐이 펄럭이고 있다. (14.0)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노후생활을 문제 삼고 있다. 작가의 목소리가 아니라 동네사람들의 입을 빌려, 문제의 요인을 지목하고 있다. 농촌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삼의 실상을 깔끔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모자람이 없다. 자식의 효의식이나 자식교육의 응보에서 더 나아가서, 가족의식의 변화 및 노인문제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장치 또는 삶의 근원적 부조리함 등에 이르기까지 주목해 본다면, 수필의 사회적, 철학적 역할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서정적 수필을 최고로 여기는 오늘날 수필계의 풍토에서 소외될 각오를 해야 하는 상황은 우리 모두가 극복해 가야 할 문제이다. 시나 소설에 비해서 수필의 사회 정치적 역할은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장모님의 마당밭은 중요하지 않다.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도 필연적 요소가 아니다.
(15) 동갑내기 그녀
이야기가 길어지자 이성간에는 묻기 힘든 나이까지 물어보게 되었다. 지난 세월의 고난을 고자질하듯 자글자글한 잔주름들로 인해 나보다 대여섯 살은 위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었는데 놀랍게도 동갑이란다. 독일 온 지 41년째라니 이팔청춘에 고국을 떠나 먼 이국땅으로 온 셈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꿈에 부푼 시기에. 피상적이었던 그들에 대한 감정이 직접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우리 합창단은 독일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여장을 푼 뒤 옛 동독지역의 여러 도시를 돌며 음악가와 문호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칠 때까지 몇 차례의 공연도 했다. 바흐가 오르간 연주자이자 성가대 지휘자로 30년간 봉사했던 토마스 교회에서도 공연했다. 말이 공연이지 우리들만의 합창이라 함이 맞을 것이다. 무대는 대형 성당의 전면 성가대 자리였지만 별도로 초청한 청중도 없고 예배를 드리는 시간대도 아닌지라 관광객이나 개별적으로 기도를 드리러 온 신도 수십 명이 유일한 청중이었다. 바흐는 사후에 이곳 지하에 묻혔다. 요의가 별로 없었지만 바흐가 이용했던 화장실이란 안내에 직원용 화장실을 일부러 들렀다. 때로는 중세의 성곽이나 도시의 광장에서 분위기에 맞는 곡을 즉석에서 불렀다. 관광객들이 삽시간에 둘러섰다. 음악에 잘 호응해주는 그들인지라 박수갈채에 유명합창단이나 된 듯 흐뭇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돌아 다시 들어간 독일의 남부도시 뮌헨에서는 제대로 된 공연이 두 차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공연을 의식한 지휘자의 열성으로 우리는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연습에 열중해야 했다.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의 평원과 알프스 산자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차창 밖을 마음껏 즐기지도 못했다. 파트별로 모여 있어야 앉아야 해서 동행한 아내와도 멀리 떨어져 앉아야 했다.
오전공연은 루드비히 성당의 미사시간이었다. 우리는 2층에 있는 성가대 자리에서 웅혼한 파이프오르간의 반주에 맞춰 노래했다. 워낙 큰 성당이었다. 우리 노래는 공명이 잘되어 저 멀리, 저 높이 빈 공간을 휘감아 되돌아왔다. 아래층 신도석에서 들은 아내와 후원자들의 가슴 뭉클했다는 얘기에 한껏 고무되었다. 국내에서도 본 적이 없는 미사광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가슴이 벅찼다. 오르간 연주자의 연주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상하 2단 건반과 두개의 페달, 건반 양옆의 조절기를 사지(四指)로 감당했다. 악보도 넘겨야하고 중간중간에 마이크로 노래까지 부르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아마 바흐도 저랬으리라.
오후에는 크로이츠 성당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 우리 교민들과 그들의 배우자인 독일인들이 자리를 가득 매웠다. 그들은 두 달 전부터 우리 공연을 보러 온다고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고 수십km를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루드비히 성당에 비하면 낡고 아주 작은 규모라 가득 매워봐야 백여 명 수준이다. 우리 교민들만의 성당인줄로 알았다. 준비한 곡을 다 풀어놓지도 못했다. 고향의 노래가 동포들의 심금을 울려 손수건이 등장했다. 아는 노래는 따라 부르는데 다음 미사시간이 되었다고 떠밀리듯 쫓겨 나왔다. 소수민족별로 시간대를 나누어 예배드리는 곳이라 했다.
교민회와 신도들이 별도로 마련된 한인커뮤니티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각자 집에서 만들어 온 케익과 과일, 음료수를 차려놓고 어울려 앉았다. 우리는 성당에서 못다 부른 곡과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를 마저 불렀다. 뮌헨은 남부지방이라 광부들은 거의 볼 수 없고 간호사로 왔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파독 간호사 출신의 여자분과 얘기를 나눴다. 가족과 동행하지 않고 혼자였다. 나이는 들어보여도 미모가 상당했다. 얘기할 때 입을 자주 가렸다. 유심히 보니 빠진 송곳니가 부끄러웠던가보다. 고향이 경북 청도다. 부모님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고 오빠와 동생들은 보내준 학비로 대학까지 졸업하여 좋은 직장에 근무한다. 고향에도 두어 번 다녀왔다. 동생들 집에서 일주일씩 보내고 왔다. 조국이 발전했고 자신들보다 더 윤택해 보이는 그네들의 생활이 부러웠다. 자기를 위해 며칠간의 시간도 할애하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동생들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의 고생담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올라온 내용들을 통해 많이 접했고 콧날이 시큰하게 읽었던 탓인지 당사자로부터 두서없이 듣는 것은 오히려 생동감이 떨어졌다.
남편이나 가족이야기로 넘어가니 그녀가 독일어로 된 명함을 한 장 건넸다. 홈 페이지와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 나중에 찾아 들어가 보라 했다. 호텔로 돌아와 검색해보니 독일인 남편과 아들딸이 함께 펜션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복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고국은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지 찾으면 오히려 아쉬움만 남고 상대적인 박탈감만 커질 것이다. 40년전 조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으로 올 때는 여기서 주저앉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독일은 자국민이 꺼리는 궂은일에 종사할 인력이 모자라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궂은일을 하면서도 자국민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하층계급을 형성했다. 그 속에 우리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포함되었다. 특히나 중동지역에서 온 무슬림들이 많아 유럽 각국은 인종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국민들의 의식수준 변화로 3D업종에 종사할 노동력이 동남아 등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로 대체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독일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스케줄 때문에 자리를 파했지만 그들도 우리도 아쉬운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다음날 우리는 귀국길에 올랐다. 동갑내기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 머리속을 맴돌았다.(14.5)
제목으로 미루어 보면, 파독 간호사 이야기를 제재로 삼으려 한 것 같다. 파독 간호사의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그들의 삶이 지닌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독자들은 이 글을 읽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실상은 파독 간호사의 삶과 유럽지역 합창 공연이라는 두 소재가 비슷한 지면을 할애 받으면서 단순 결합을 이루고 있다. 두 소재를 전체성에 대한 부분으로 엮어내지 못한다면 이 수필의 통일성 확보는 어려워진다.
(16) 프로필 사진
프로필 사진이 필요했다. 증명사진 찍을 때와는 다른 경우라 적잖이 내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지인의 사진을 보면서 어디서 찍었는지 사진관 주소를 받아두었다. 머리상태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입술마저 탈이 나 차일피일 미루었다. 야외에서 자연스럽게 찍은 사진이 좋겠다 싶어 딸에게 부탁했더니 시간 맞추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입술이 진정되고 마침 얼굴색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기에 받아둔 주소를 들고 사진관을 찾아갔다. 좋아요, 좋아. 한 번 더.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젊은 남자의 추임새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정말 좋기는 한 걸까. 잘 되어야 할 텐데.
남의 사진을 보면서 혼자 피식 웃었더랬다. 그의 억지웃음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진사에서 특별히 웃는 모습을 잘 잡아달라고 주문했다. 사방이 허연 벽으로 된 사진관, 눈부신 조명등. 낯선 남자 앞에서의 미소 짓기란 민망함 그 자체였다. 고개를 약간 숙이시고 눈 크게 뜨시고. 사진사의 요구는 자꾸만 늘어갔다. 가장 즐거웠을 때를 떠올리려 애썼으나 손에는 진땀이 났다. 한참을 기다리자 사진사가 모니터 앞으로 나를 불렀다. 수십 개의 사진 중에 하나를 골랐다. 또 다른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디에 쓰실 사진이죠? “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질문만 했다. 뒤통수에 대고 주절주절 긴 설명을 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가만 생각하니 그 남자가 나를 볼 필요는 없었다. 모니터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나였으니까. 그 남자는 마우스와 자판을 이용해 대대적인 내 얼굴 다듬기에 들어갔다. 검은 점을 빼고 얼굴 톤을 밝게 바꾸었다. 듬성듬성해진 머리칼을 채우고 눈가의 주름을 지웠다. 처진 눈을 들어 올리고 눈동자와 입술색도 바꾸었다. 단박에 화사해졌다. 팔뚝과 옆구리에 드러난 살을 줄이고 얼굴 전체를 둥글게 수십 번 매만졌다.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술 받으러 가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 때 나는 늘 반대하는 쪽이었다. 손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아예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다. 사진 속의 내가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팔뚝 살 좀 봐. 눈이 많이 처졌네. 딸이 쌍꺼풀 수술하러 가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아무리 웃을 때 만들어진 주름이라지만 저건 좀 심하다. 여태 이 얼굴로 사람들 앞에서 파안대소했더란 말인가. 평소에 미친 여자처럼 거울 앞에서 자주 웃어나 볼 것을.
그 사진관에 간다고 모두가 예뻐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사진은 나임을 증명만 하면 되지만, 프로필 사진은 나 자신의 내면까지도 담아내는 그런 사진이었으면 했다. 없는 인물 가지고 예쁘게 만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아 주길 바랐다고나 할까. 만난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은 사진사에게 그런 요구를 하다니, 이 얼굴로 욕심이었나 보다. 몇 시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허탈했다. 나이면서 내가 아닌 모습. 이것을 프로필 사진으로 쓸 수는 없다. 다른 사진관을 가본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런저런 궁리 끝에 스마트 폰을 꺼냈다.
셀프모드로 찍으면 내 얼굴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 좋다. 누가 볼 사람도 없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삭제하면 그만이다. 커튼으로 조도를 은은하게 맞추고 열심히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나의 웃는 얼굴이 이런 것이었던가. 내가 봐도 너무 낯설다. 어색하기는 사진관에서나 집에서나 마찬가지다. 말없이 한참을 웃기만 했더니 얼굴에 경련이 왔다. 세상에 억지로 웃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내가 피식 웃었던 지인의 사진이 차라리 더 자연스러웠다. 겨우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 보정은 일절 하지 않은 채 알맞은 크기로 잘라 파일에 저장했다. 오늘이 내일보다 하루 더 젊은 날이라 했던가. 찰나의 행운 하나는 건졌지만 이보다 더 나은 날은 이제 없으려나. 왠지 모를 서글픔이 몰려온다. (12.8)
프로필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가장 나다운 나’, 즉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으려한 발상이 좋다. 사진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펼쳐나갔다. 더 이상의 퇴고가 필요치 않는 작품이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가장 나다운 나’에 대한 내면적 통찰 내지 정체성, 또는 ‘나’의 구조 등에 대한 보다 철학적 깊이가 더해진다면 ‘지금이 가장 나은 날’을 주제로 건져 올리는 데서 깊이를 가진 주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7) 더불어 살기
풍로 초가 활짝 벙글었다. 건드리면 뭉개게질 듯 여린 연분홍 꽃잎이 시집온 새색시의 첫날 아침 얼굴빛이다. 늦은 귀가 탓에 간밤의 피로가 온몸에 베여 뒤통수가 찌푸듯 했는데 방긋방긋 입을 연 연분홍 꽃잎을 보면 피로가 삽시간에 사라진다. 새끼손톱만 한 작은 꽃술을 받쳐 든 실가지들 밑으로 풍로 초 아닌 엉뚱한 꽃이 뿌리를 내렸다. 자그마한 씨시방을 품은 가지를 길게 뻗치고 있었다. 오래전에 본 듯한 낯설지 않은 야생화였다. 이름도 잊었다. 시방이 터져 바람따라 이쪽 화분에 날아와 자리를 잡은가 보다. 최근에 들인 풍로초 덕에 물을 받아먹고 다시 자라기 시작한 모양이다.
달포 전, 한때 즐겨 찾던 야생화 가계를 지나다가 풍로초 한 포트 옮겨 심었더니 어느 사이 발을 사방으로 뻗었다. 더 큰 공간으로 옮겨 줘야겠기에 뒹굴던 화분들을 이것저것 뒤진다. 몇 해 전 갈잎 조팝나무가 나의 무심함에 시들어 버리고 쭉정이만 남아도는 큰 접시 분을 잡았다. 우뚝 솟은 제주석 을 살짝 들어 그 밑에 풍로 초 원뿌리를 앉히고 뻗어나온 실뿌리들 을 가지런히 정돈 해준 채 부엽토와 굵은 모래를 덮어 꼭꼭 묻어 주었다.
5년전인 듯하다. 오며 가며 오매 가매 들르던 단골 가게계에서 작은 들풀 같은 야생화를 가져다가 돌과 이끼로 연출해가며 기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숫자가 불어나면서 원목 송판에다 장식용 벽돌을 괴어 아파트 앞 베란다 양쪽 끝까지 야생화분으로 장식했다. 이웃 아낙들이 구경거리라며 자주 다녀가곤 했다. 사람의 정성을 아는지 푸른 야생초의 앙증맞은 꽃잎들은 어지간한 추위에도 버티며 주인에게 희망을 주었다. 돌이켜 보면, 하루 중 반은 그들에게 빠져 현관문 안까지 들어온 식구들의 기척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생활방식이 바뀌어 외출이 잦았다.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물주기 회수를 하나 둘 건너뛰기 시작했다. 시들어가는 생명을 되살려 보려 애썼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 많은 야생초가 시나브로 시들어 죽기 시작했고 때마침 우리 집도 이사를 하게 되었다.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싹을 틔워 내던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돌과 이끼, 흙이 조화를 이룬 질그릇 몇 점을 그대로 남겼다.
풍로 초를 이 화분에다 자리 잡아주어 이미 발을 내리고 있지만, 홀씨로 날아와 먼저 자리 잡은 고놈이 알고 보면 터줏대감인 꼴이다. 내가 풍로 초를 옮겨 심을 때만 해도 질그릇은 물기 하나 없이 깡마른 이끼만 남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처지였다. 풍로 초가 물을 먹고 자라기 시작하면서 이름 모를 야생초도 풍로 초 사이를 비집고 나왔으니 풍로 초가 없었으면 자신의 존재조차도 알리지 못했으리라. 내 선택 기준에 작은 혼란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아니 나의 선택에 따라 그들의 자그마한 반란도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이기도 하다.
작정하고 자리를 잡아준 풍로 초를 그대로 두기로 마음먹는다. 대신, 바람에 포르르 실려와 아무렇게나 먼저 발을 내린 그놈을 분가시키기로 했다. 작은 뿌리나마 다칠세라 분속에서 몇 해를 묶은 흙덩이 전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땅속에서 피어오르는 훈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내 짐작과 달리 뿌리가 제법 깊은 곳에서 발아를 시작했다. 그 깊고 어두운 곳에서 단비 같은 물 한 방울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오랜 시간을 인고한 생명력이 대견스러웠다. 고놈을 꼭꼭 감샀던 그 곳은 따뜻하고 훈훈한 훈기를 품고 있었다. 표면의 흙이 바싹 말랐기에 그 속사정은 알아차릴 턱이 없었다. 다시 갈등의 시작이다. 먼저 와서 기다린 고놈은 풍로 초가 생겨남으로 인해서 흘러내린 물을 먹고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풍로초에게 터전을 양보해야 하리라. 반면 풍로초가 빨리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그 이유는 먼저 온 고놈이 숨 쉬며 토양 속에 따뜻한 온기를 간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그러하리라. 앞만 보면서 살아갈 때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풍로초와 고놈이 공생할 그 당시에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기에만 바빴을 게다. 분갈이를 앞두고서야 얼마나 절실한 상호관계였는지를 그들도 나도 알게 된 것이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 버린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길들인 일을 맡아서 진행하는 대타자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 하여 주위를 교란시킨 사람을 본적이 있다. 내가 먼저 이 집 가문에 들었다 하여 아랫동서에게 선행조차도 허락없이 행하지 말라는 맏며느리의 월권행사도 그러하리라. 일전에 제품홍보 담당자의 부탁을 받아 행사기간 일주일을 현장에서 생활적이 있다. 마주 보는 위치의 업체와 나의 옆 부스에 자리한 업체가 대립관계라는 귀띔을 누군가가 해주었다. 한때 A업체에게 B업체는 고용인으로서 기술을 배워 독립하여 급성장했다. 그 당시 A업체에게 설움을 당했다며 배타적 방법으로 경쟁을 시도한다고 했다. A업체는 고도의 기술을 전수해주고 키워준 B업체가 배은망덕하다며 전자의 속담을 인용해가며 힐난했다.
삶이란 건 오늘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 맑음, 내일 비.’ 라고 알리는 일기예보를 보라. 풍로초와 이름 모를 그놈을 두고 오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딱히 정해진 기준이 굳이 필요할까. 지혜로운 분별심이 가장 훌륭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도록 생명을 지켜온 고놈을 끄집어내어 산뜻한 분으로 분가해주었다. (앞에서 이미 분갈이 했음) 내 자리 네 자리 하며 다투는 이, 내가 더 잘났으니 넌 아무 말 말고서 따라오기만 하라는 이,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이. 내가 한 일은 대단하고 입은 은혜는 망각하여 상대 짓밟기 바쁜 이가 우글거린다. 시선을 멀리에 떨구어 보자. 내가 하던 방식에 다른이의 방식이 덧칠을 좀 하면 어쩌랴. 타인의 덧칠로 인해서 내 밑그림의 특성이 드러나는 원리를 왜 모르는가. 내가 누린 복혜가 누군가의 안락한 터전이 된다면 그 복덕은 바로 내 것이 되리라.
풍로초는 본시 여린 식물이기에 고놈의 따뜻한 온기가 배인 분속이기에 곱디고운 분홍 꽃잎을 속히 피울 수 있었으리라. 흙 속에서 질기게도 견뎌낸 고놈은 자생능력이 강하여 영양분을 제대로 먹지 못한 부엽토 속에서도 쭉쭉 잘만 큰다. 씨방이 커져 여기저기 작은 솜방망이 같은 몽우리를 만들었다. 얼마 안 가면 씨방이 터져 또 홀씨를 퍼뜨릴지도 모른다. 물을 흠뻑 먹인 흙을 수북이 담은 화분 하나 고놈 옆에다 놓아 줘야겠다.
제목이 너무 명시적이다. 글 전체를 아우르고 호기심을 야기하는 비유적 제목이 좋을 것이다. 화분에서 싹을 틔운 두 종류의 꽃을 통해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연상해낸 착상이 매우 참신하다. 그런데 충분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사람들의 세상살이와 이 두 식물의 관계성을 꼼꼼하게 대비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보충해 넣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또 걸리는 게 있을 것이다. 분 나누기를 통해 더불어 살아갈 그들을 갈라놓는 심보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