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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1월5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22장, 사도행전6장
성경낭독: 사도행전2:42-47절
설교본문: 사도행전2:42-47절
설교제목: 교회가 해야 할 일들
예배찬송: 98장(시34), 19장(시12), 269장(시101), 357장(시134).
행2장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순절에 절기를 따라 성전방문을 위해 올라왔던 커다란 무리가 성령강림 사건을 목도한 다음에 어찌할지 물었고,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가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내어주어 이방인의 손을 빌어 죽였던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듣던 무리들 중에 “어찌할꼬?”라고 탄성이 터져 나왔고 회계하고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했을 때에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 앞으로 회개하여 돌아오는 폭발적인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이토록 큰 열매를 맺는 일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이적입니다. 주님께서 초대교회를 출범시키는 사건이 성령강림과 함께 말씀의 역사로 결과를 일으키셨음을 보게 됩니다. 회심의 사건은 단순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회개와 더불어 돌이키는 삶을 수반하게 만들었습니다. 무리들은 사도들을 통해 들리는 복음의 말씀을 기꺼이 수납했고, 교회공동체의 한 몸으로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이토록 신속하고, 끈질기게 인내하는 일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형성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행하고 누리는 가장 중요한 주요영역에 대해서 차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죽은 자를 살려 생명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체로 묶이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로 모인 이들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활동은 바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42절을 봅시다.
1. 교회의 주요한 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회공동체 생활은 네 가지 주요한 영역이 관여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사도들의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교제하고 떡을 떼며,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참된 교회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참된 교회를 찾고자 한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활적입니다. 순전한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곳에 생생한 교제와 뜨거운 기도가 끈끈한 사랑의 나눔이 보일지라도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복음을 들음으로써 성도답게 살아가도록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증거 된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쳐진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의 말씀이 선포되고 머무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있고, 주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시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성되고 보존되는 것입니다. 교회사 내내 여러 모양과 요란함으로 교회의 이름을 들먹이는 시답잖은 단체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물론이고 삶의 유일한 규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말씀을 훼손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짜깁기한 것들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막대한 교세를 이루고 멋진 건물과 화려한 외장을 갖추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반듯하게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는 성령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교회를 흉내 내는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래된 전통을 언급하고 자랑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전통에 심혈을 기울일수록 도리어 주님의 복음에서 멀어져간 유대교와 로마교회의 모습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하는데, 저들은 구원을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저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변형시킨 것들뿐입니다. 그곳에 교회는 없습니다.
‘힘쓴다’는 말은 ‘전념한다’는 표현으로 지속이나 끈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지속적으로 힘을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증언을 나누는 일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복음의 말씀이 유지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마28:19-20).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에 이어서 ‘교제’가 등장합니다. 교제(코이노니아)는 정확하게 공동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혼인’의 성격을 지닙니다. 몸 된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참여하게 된 몸 된 지체들은 언약관계란 이렇게 한 몸으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혼인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재산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누리는 것처럼 아낌없는 지원과 나눔이 머무는 상호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코이노니아’는 너도나도 상관없이 허물어지는 관계, 나와 너가 무너지는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나눔 역시 상호간의 부분적인 것이고(44,45절), 가난한 지체를 구제하기 위한 기부와 나눔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공산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허비하는 일, 자신의 일부를 헐어 무너진 지체를 세워 매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서로가 한 몸임을 배우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가족의 관계로 실질적인 나눔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어서 ‘떡을 떼는 일’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어떤 이들은 떡을 떼는 행위를 커다란 공동식사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례 즉, 성찬과 연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애찬을 이야기합니다만, 칼뱅은 성찬으로 읽어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으면 이 가르침을 확증하는 것으로 떡을 떼는 성찬은 가르침과 함께 따라오는 것으로 초대교회에서 예배 가운데 말씀과 성례가 함께 가야 하는 모범으로 설명합니다. 교제와 그리스도의 떡과 잔에 참여하는 일은 복음의 가르침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질서를 따라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기고 알맞게 집행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교회의 일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누가가 공동체 생활에 대해 강조한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에 따라, 직관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적극적으로 복종하면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문에는 관사가 붙은 복수로 ‘이 기도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어떤 정해진 기도’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고, 정해진 공적기도 함께 더 많은 자발적 기도들 모두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9시와 오후3시 즈음에 정해진 기도가 존재했습니다. 주님 또한 제자들에게 이러한 고정된 기도, 정해진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눅11:2-4).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던 이 일은 이제 성전파괴와 함께 성전을 향하지 않고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향한 것으로 바뀌었지만, 공동체의 기도형태는 이를 이어받았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정해진 시간으로 기도하는 범위보다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 가운데 공적인 기도에 참여할 수 있고,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교제, 주의 식탁과 기도는 교회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2. 한 마음으로 필요를 따라 나눔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하루 3,000명이 더해져 커다란 무리를 이룬 교회공동체의 출현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 떡을 떼고 기도하는 일을 보고 들었던 유대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이 두려움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가중되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혐오심이 강했던 유대인들을 제지시키시고,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으셨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일정한 기간이라도 생성되는 기간을 가지도록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저들이 교회를 헐뜯고 찢고자 맹수처럼 달려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적과 표적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만드는 데 유익했을 뿐 아니라 불경건한 자들의 입을 막고 그들로 유순하게 하고 잔악한 마음을 잠재우는데 유용했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완악하고 변덕스러운 왕이었지만 표적과 기사 앞에서 마음이 누그러졌고, 종종 찔림을 받아 깊은 후회에 침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금 교만하고 완악한 기세로 일떠섰지만 하나님의 손이 그를 짓누르실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사와 표적으로 나타나자 승냥이처럼 교회를 잔인하게 찢고 핍박하려는 마음이 두려움에 눌려 교회에 해악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나올 때에 애굽 땅에 큰 두려움을 주셔서 온갖 애굽의 소유를 가지고 나와 예배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순절 이후에 나타난 사도들의 이적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임하여 교회의 생성을 방해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44절에서 말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가운데서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통용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다 함께 있어’라는 말은 ‘동일한 것’, ‘하나로’라는 뜻입니다. 다 함께 있다는 말은 수천 명의 무리가 한 공간에 머물렀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4:32)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믿음과 하나의 뜻으로 묶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한 마음, 같은 뜻을 가진 성도들 가운데 서로 간에 유무상통하는 실천으로 열매를 맺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공산주의’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또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노직이 주장하는 ‘최소국가론’의 공동체를 이야기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이며 한 아버지, 한 주, 한 성령, 한 몸으로 연합된 하나의 교회된 이들에게 드러난 자연스러운 성도의 교제의 결과입니다. 믿음의 일치와 성령의 역사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나눔과 교통이 아닌 인위적인 유무상통운동의 공동체를 외치는 이들이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을 내건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아무런 일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마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기관으로 서는 것을 핵심으로 삼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한곳에 쌓아두고, 각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따라 가져가도록 하지 않는다면 초대교회의 정신에서 떠나는 행위라고 말하면서 철저하게 공동의 삶을 추구했던 이들이 교회사에 여럿 있어 왔습니다. 한 편으로는 일반적인 국가법이나 경제법 뒤에 숨어서 자신만을 위한 부요한 삶을 추구하고 가나한 사람들을 기만하는 탐욕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이고 금욕적인 삶도 주의해야 하지만 세상과 같이 욕망의 노예 노릇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45절에서 말합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을 위해 나누어 준 것은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달리말해 가난에 빠진 사람들이 각자 필요한 대로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유대인의 삶에서 떠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박해와 핍박을 받아야 했고, 이는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기존에 누리는 삶의 기반에서 떠나서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제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서는 나눔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재산을 공유하는 것이 가정을 꾸려나가며 독립적 경제생활을 반대하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사도행전4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그곳에서는 큰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이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친 두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구제에 빠졌던 사람들의 그 당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제금을 모았던 것입니다. 물질을 공동소유하고 분배하기 위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가정이 있고 개인적 삶도 필요합니다. 다만 동일한 신앙고백 안에 한 마음으로 묶인 우리는 영적인 가족으로 형제의 구제문제와 결핍에 대해서 함께 해결하고자 애써 감을 뜻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성도들은 함께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46-47절을 봅시다.
3. 하나님을 찬미하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는 날마다 성전 경내에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일상적으로 나아가던 유대관습에 따른 것으로 유대인 성도들이라면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날마다 이전의 습관을 따라 성전 경내에 모이기를 힘썼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더 좋은 기회와 여견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성전에 모이는 것은 성전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개인적 관심사들을 다 제쳐두고 나아오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여러 사도들이 매일 성전경내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하루 3,000명이 더해진 것을 비롯해서 복음의 말씀이 곧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함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회개하여 돌이키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어갔습니다. 성전에는 모이는 모임은 이제 성전경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고, 가정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교 관행처럼 성전에 모이던 것에서 확장되어서 각 가정들(카트 오이콘)로 확장되었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집에서 떡을 떼는 것은 소박한 식사교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늘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되 소박하고 검소하게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곧장 벌어지게 될 박해와 위협들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함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변화와 충돌, 시시각각 변해가는 위험들 속에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복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행복한 모습은 이웃들에게 관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도들이 누리는 안식과 기쁨의 이유를 사람들을 궁금해 할 것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쁨으로 즐거이 나누는 모습으로 인해서 이웃들에게 호감을 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온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파괴하고 죽이고자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증오라는 독에 오염되지 않고 순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한 이웃들은 교회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에 관심과 인정을 보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함으로 주님은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고, 기쁨으로 찬미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어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부르심과 돌봄이 있어야 하지만 사도들과 교회의 수고, 성도들의 헌신이 함께했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내시되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 복음전파의 수고와 돌봄과 교제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보존해 가십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사역에 수고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순수한 복음의 말씀을 보존하고, 교제와 나눔, 기도와 기쁨의 찬미로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해 나가는 일에 수종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