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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본문 : 에스라 10:1-4
우리 나라가 일제의 쓰라린 압박과 고통에서 해방 된지 58주년이 지났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치며 피 흘렸습니까? 또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또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순교를 당하였습니까? 그토록 고통 당하던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일본의 천황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은 8.15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희미하게 종전 기념일정도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다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국권을 상실한 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징용에 끌려가며 위안부가 되었고 재산을 수탈 당하며 자유를 잃고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그런 아픔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꿈에라도 조국광복의 기쁨을 맛보았던 8월 15일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광복 58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70년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하여 살 때의 정황이 나타납니다.
그토록 고통의 세월을 보내었다면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았어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와 보니 백성들,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이 일에 방백들과 두목들이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 9장을 보면 에스라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스 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스 9:7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에스라가 이와 같이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죄를 자복 할 때에 많은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큰 무리가 모인 것입니다. 이들도 함께 심히 통곡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람 자손 중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스가냐는 자신들이 지은 죄악을 인정하면서 그래도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라는 말은 '지금, 이제'라는 뜻입니다. 스가냐가 이스라엘에게 지금부터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질 소망의 근거가 아니겠습니까?
1.죄를 자복하는 결단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회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 백성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통회 자복은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그런데 엘람 자손 중의 하나인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 앞으로 나와서 참으로 주목을 끄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스 10: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기를 결의해도 그런 용기를 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자기 죄를 숨기려 드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 받지 못했습네다. 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 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 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길목사의 우렁찬 공개 자복이 터지자 회중 석에선 통회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성장을 가로막고 민족공동체를 분열, 파괴시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다. “네 탓이다. 네가 책임져라”라는 파행이 계속되는 한 회생의 처방은 없습니다. 요즘 보십시오. 연일 서로 책임공방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당이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야당이라도 바로 서야 하는데 야당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요즘 야당의 지지도가 여당보다 더 낮다는 여론조사가 그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려면 서로가 자기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민주당의 김근태 의원은 경선 때 경선 자금을 받아쓴 적이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벌금 500만원을 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치인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내 탓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범죄처럼 추악한 것도 없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 참회하는 눈물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다윗과 같은 성군도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 전에 죄를 자복합시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2.죄를 버리는 결단 때문입니다.
스가냐는 죄를 자복한 후에 이어서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스 10: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진정한 회개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한 후에 여전히 그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아 자식까지 낳았던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아내와 자식까지 내보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인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애굽 여인을 첩으로 얻었습니다. 그것도 아내 사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잉태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주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여종이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고 만장했을 까요? 그러다가 사라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입니다. 어느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무리 여종이고 여종의 몸에서 난 자식이지만 자신의 핏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식을 내어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 때문에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이나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의 말대로 행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두 사람을 내어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 앞 광장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스 10: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스 10: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에스라가 온 회중들에게 죄악에서 떠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회중들이 어떻게 대답하였을 까요?
스 10:12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이방여인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철저한 조사를 거쳐서 실행되었고 그 명단까지 발표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녀를 낳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 그들은 순종하여 죄를 청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도 죄를 철저하게 버리려는 결단이 있다면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3.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 때문입니다.
스가냐는 죄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 이어서 또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것이 소극적인 결단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의 교훈을 좇으며 율법대로 행하는 것은 죄와 싸워 이기는 적극적인 결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죄를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것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실천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는데 나중에 보면 옛날과 똑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다른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율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코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정금 같이 쓰시기 위해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게 했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게 쓰시기로 작정하실 수록 거룩한 삶을 위해 많은 준비를 시키십니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랍니다. 호박은 여러 날이 걸려야 자랍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립니다. 참나무와 같은 인물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거룩한 신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거룩을 완성하는 데는 평생이 걸립니다.
거룩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이라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받지만 거룩은 은혜의 수단인 영성 훈련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룩에 대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십시오. 그러나 그 거룩한 삶은 단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말씀을 실천하는 훈련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모난 부분이 깎여지고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죄를 자복하십시오. 죄를 버리십시오.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