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대상
산행일기
장 정 식
나는 반평생을 두고 산행을 해왔다. 산악인이나 등산가라는 전문인적 호칭까지는 분에 넘치는 대접이다. 하지만, 나는 산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산을 가꾸는 정성은 남달리 앞서고 싶은 한결같은 마음이다. 그것이 생활화 되어 고령의 반열에 든 이 시점에서도 정기적인 산행을 실천하고 있다.
명산 준령을 거의 섭력涉歷하고 오르내렸지만, 산은 매양 변화무쌍한 신비로운 위엄으로 내 인생을 거듭나게 하는 말없는 스승이다. 그러기에 나는 산행에는 시공을 초월한다. 언제 어느 때든 산은 그 나름의 개성을 지니고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사유思惟의 의미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겨울 갈무리한 대지의 활력을 억척으로 흡수하여 소생의 움을 틔운, 풀냄새를 물큰 뿜어낸 5월의 신록을 더 없이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숲속의 산행을 더 좋아한다. 신록의 향기로 천지를 가득 메운 계절의 여왕, 5월의 향기 묻어나는 신록은 우리에게 젊음의 활력과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고 왕성한 생명력을 넘쳐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또 다른 의미는 숲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화학적 요소인 경관, 소리, 피톤치드, 음이온, 온도, 습도, 햇빛 등이 인체와 쾌적한 반응을 통해 건강을 증진하는 ‘산림 세라피(숲 치유요법)’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숲의 보약 ‘피톤치드’를 마시면 인체의 면역력이 강해진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들어서면 특유의 시원한 향이 심장 깊숙히까지 툭 트이는 상쾌함을 느낀다. 이것은 나무에서 발산되는 ‘피톤치드’라는 휘발성 물질 때문이라고 한다.
나무가 해충이나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성해내는 항생물질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천연항생체라는 말이다. 공기를 정화하고 살균하는 작용이 있어 각종 감염질환과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에 약효가 크다고 한다.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은 ‘피톤치드’가 인간에 기생하는 병원체 활동을 억제하며 인체에 면역력을 가장 높인다는 데 있다. 그런데 숲에서 발산하는 이 ‘피톤치드’가 연중 1~2월에는 가장 적게 발산하고 5월부터 7~8월까지가 발산의 최고를 이룬다고 한다. 이는 곧 ‘피톤치드’는 숲이 왕성할 때 발산의 피크를 이루어 우리 인체에 작용하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오늘도 정기 산행일을 지켜 경쾌한 기분으로 산행을 한다. 경사가 완만한 코스를 잡아 걸으며 향수보다 좋게 코끝에 스밀 때는 숲 냄새를 심호흡으로 만끽하며 걷는다. 무등산 원효사를 지나 산중턱 길로 횡단하며 붉게 물들인 피다 못해 터져나온 철쭉꽃을 완상하며 걷는다. 산 중턱에 서서 온 산을 굽어보니 멀리 뻗어 내린 이산저산 계곡의 신록이 눈부신 한 폭의 그림이다. 조용한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미풍에 굽이쳐 밀려간 숲 물결의 경관이 영판 아름답다. 소생하는 온갖 숲 냄새가 강물처럼 가슴에 맴돌아 온 몸을 휘감아 씻어 내린다. 시원하게 호흡하는 산소에 청정수처럼 맑은 피가 몸 전체를 구석구석 감도는 기분이다. 이 푸른 물결을 헤치고 내 마음은 종달새마냥 청자빛 하늘을 높이 높이 날아오른다.
산주령 타고 멀리 뻗어 내린 계곡의 끝자락에 펼쳐지는 광활한 도심을 한 눈에 조망한다. 150만 인구의 보금자리인 고층 아파트가 푸른 숲 사이로 평화롭고 정연한 행렬이다. 여기에 깃들인 인간들은 모두가 세속에 묻힌 생존경쟁에 역사役事하는 꿀벌처럼 분주히 나부댄다. 그것이 곧 저마다의 생활이고 보면, 천태만상의 생활수단이 저 도심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영상처럼 뇌리에 스친다.
저 도시의 바운다리 안에는 극과 극의 인간적인 심성과 도덕적 행동의 선악이 공존하며 인간의 생존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서 빚어지는 인간들의 생활양상이 간단없이 매스컴에 빚어지는 생존가치, 이것들은 우리에게 쉴 새 없는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공존하는 선善은 보편적 진리로 잠재되어 있지만. 악惡은 유독 세상의 이목을 경악케 하는 행동으로 준동하고 있다. 또한, 사회의 본질적 가치는 물론 선이 지배적이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악행의 행동화는 그 파급 물살이 너무 거센 갈등양상을 나타나고 있다.
세상이 살맛나게 돌아가는 것은, 인간사회의 분위기가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대접 받는 존귀한 존재라야 한다. 그 속에 이해와 관용의 따뜻한 온정이 넘쳐나야 한다. 이러한 사회상이 사회윤리와 도덕성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상 인심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데에 편향함으로써 인간의 존재가치가 부도덕하게 짓밟혀가고 있다. 즉 물질적 가치추구에만 집착한 인간 사회는 인간적 도의와 사회윤리가 말살되고, 소통이 경직된 상태에서 대인對人간에 인정이 메마르고, 이해와 관용과 사랑을 베푸는 데는 차돌처럼 싸늘하고 인색하다.
사소한 이견異見에도 갈등이 생기고 충돌하고 분노하며 극단에 이른 살인행위가 거침없이 발생하고 있다. 저 많은 고층 아파트의 주거생활에서 이해 없는 층간의 소음 시비로 전투행위가 벌어지고, 화합과 조화를 짓밟는 험악한 사례의 낯 뜨거운 반목을 자존심인 듯 고수한다.
국민의 공복인 공직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공무상 부정과 비리를 예사로 자행해도 뉘우칠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을 애써 변명하려는 후안무치한 행위의 사례는 분노를 넘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신성하고 존엄하게 지켜온 도덕률인 ‘섹스’가 요즘엔 인간이 행하는 추악하고 동물적인 행위로 범죄시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저 호화찬란한 도심의 네온사인, 아름다운 꽃과 푸른 숲으로 화려한 외양의 평화로운 도시 풍경과 그 속을 메우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양심과는 너무도 괴리된 서글픈 양상이 아닌가.
산을 경원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산은 사시장철 만원이다. 산과 대화하는 시간만큼은 누구나 선량하다. 저 오염된 환경의 세속에 찌들어 더렵혀진 양심들, 이 아름다운 신록의 ‘피톤치드’에 의해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호소하는 간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