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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9) 12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신라의 원보 최은함의 아들. 고려시대의 문신·재상. 시호 문정(文貞).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太祖:왕건)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老:시조 고운의 손자, 원보 은함의 아들)는 나이 겨우 12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分)을 하사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사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왕 앞에서 <논어(論語)>를 암송하여 칭찬을 듣고,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20석(碩)을 하사받았으며, 원봉성(元鳳省) 학생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그후 승로의 나이 17세 때 고려 태조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 이후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積弊),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일찍 문병(文柄)을 관장하고 982년(성종1) 왕명에 따라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對中國觀)의 시정 등에 관한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을 시정, 새로운 제도를 제정·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토호(土豪)들의 횡포로 인한 세공(歲貢) 수납의 폐해를 시정토록 12목(牧)을 설치, 목사(牧使)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982년(성종1)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이 되고, 988년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에 승진하고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태사대광에 추증,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했던 관가정(觀稼亭) 청(淸)이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上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洲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태종14)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인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최단(崔鄲)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1388년(우왕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안동원수(安東元帥)로서 좌군도통수(左軍都統帥) 조민수(曺敏修)의 휘하로 출정,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이 해 상주(尙州)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1390년(공양왕2)에 한양윤(漢陽尹), 1392년(태조1)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안(齊顔)의 증손이며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렬공(忠烈公) 광위(光位:제안의 현손)는 고려 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받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랑공(正호公) 호(灝)는 고려 정종 때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의 명저를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사성공(司成公) 예(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충간(忠諫)으로 유명했던 문밀공(文密公) 제(堤:밀직공 선지의 5세손, 문숙공 선의 아우)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9살에 시를 지었던 문정공(文正公) 해(瀣)는 원(元)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지내고 귀국한 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벼슬에 있는 동안 기복이 많았으나 조금도 지절을 굽히지 않았고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 [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당대의 문호로 명망을 떨쳤다.
문창후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치적으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화숙공 현우의 5세손 형손(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종질 호(湖)는 무과에 장원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어 가문에 공신(功臣)의 맥(脈)을 이었다.
화숙공 현우의 7세손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했던 숙생(淑生)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최진립(崔震立)
인조(仁祖) 때의 명장 진립(震立)은 경주최씨의 [쌍의(雙義)]로 가문에 절맥(節脈)을 이었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했던 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늙었다는 이유로 근왕(勤王)하는 장수를 바꾸려하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종하는 후미부대를 지휘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당하자 이 노장(老將)은 용인 험천(龍仁險川)에서 순절했는데,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며, 화살이 다 되자 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라]하고는 끝까지 항전했다. 난이 평정된 후에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그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을 온 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있는 것 같이 자약했다고 한다.
최흥원(崔興源)
정조(正祖) 때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일컬어졌다.
최소(崔昭)
화숙공 현우의 8세손으로 숙생의 손자. 성효(性孝)가 뛰어났으며, 시집(詩集)을 남겼다.
동학(東學)의 창시자.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현종10) 전국 각지를 유람하여 구도행각에 나섰다.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도를 닦던 중 금강산 유점사에 있다는 중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를 깨닫고,1856년(철종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하여 포교를 시작, 도를 천도라 하였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보국사에 들어가 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1864년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에게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되었다. 1907년(융희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최종수의 아들. 1861년(철종12)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가 되었다.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4년(고종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울진(蔚珍) 등지에서 관헌의 눈을 피해 각 지방을 전전하며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인제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을 간행했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했다.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조직을 강화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지사(志士).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이항로(李恒老)의 수제자. 1855년(철종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4세의 고령으로 제자인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최준(崔浚)
경주시 교동에서 '최부잣집'으로 이름났다.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최씨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최창식(崔昌植/1892~1957)
독립운동가, 언론인. 서울 출생. <황성신문(皇城新聞)> 후기의 소장기자(少壯記者)였고, 후에 오성학교(五星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문제가 되어 금고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업무에 참여하고, 전원위원회 이사 ·내무위원장 ·법무총장 ·선거위원회 위원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 특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11월 임시정부가 개편되면서 조소앙(趙素昻) 후임으로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의 편집부장으로 있으면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제10대 임시의정원 의장, 1926년 국무위원, 1927년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글 학자. 호 외솔. 울산 출생. 경성고보 재학 중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商權)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共同商會)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강제 사직하였다. 그 동안 이화여자전문 교수도 겸직하였는데 실직한 동안 한글 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正音學)>을 발간하였고 1941년 연희전문에 복직,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8·15광복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 행정을 담당, 그 기틀을 잡았으며 이어 한글학회 상무이사·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1년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가 1954년 연세대학으로 돌아가 교수·문과대학장·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주요저서에 <우리말본>, <한글갈>, <글자의 혁명>, <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