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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같지 않은 학교,
니 릴레스콜레 (2)
존 홀트(John Holt)
3.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하나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 그런데 아이들은 뭘 하면서 지낼까? 아주 다양한 활동이 있지만 내가 봤던 몇 가지만 얘기해보겠다. 2년 전 학교회의에서 많은 논의 끝에 점심식사를 공동 급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여기는 모든 아이들이 참여하는데, 몇몇 아이들이 음식 재료를 사오고 빵과 고기를 자르고 캔 뚜껑을 따는 등 분주하게 움직여서는 점심을 차려 같이 먹는다. 아주 생동감 있고 시끄럽게 다정한 광경이다. 자주 접하게 되는 또 다른 활동은 학교 총회이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모두 참석하는데 누구나 발언과 투표를 할 수 있고 한 표 한 표는 똑같은 효력을 갖는다. 니일은 서머힐 총회에서 열두 살 아래 아이들은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들이 긴 의견을 낼 때가 자주 있다. 학교에서는 웬만하면 비공개 투표로 뭔가를 결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모두가 아니면 거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회의에서는 누가 누구를 괴롭히거나 귀찮게 군다든가 하는 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돈은 어떻게 써야 한다든지 하는 학교 정책을 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이 학교가 서머힐보다도 훨씬 멀리 나아갔다고 믿는다. 학교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아침 체조 시간이다. 율동과 춤도 함께하는데 작은 체육관에서 한다. 체육관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곳은 스쿼시 코트나 핸드볼 코트보다 약간 클까 말까 한 천장이 낮은 방으로, 비치된 비품은 두꺼운 텀블링 매트 하나와 콩고드럼 두 개가 전부다. 아침이면 노련한 음악가이자 댄서이기도 한 교사 한 명과 아이들 거의 모두가 이 체육실에 모인다. 교사는 북 하나를 차고 앉아 빠르고 신나게 리듬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고 뛰어오르며 춤을 춘다. 이 수업시간이 똑같이 진행되는 때는 단 한 번도 없다. 몸놀림은 자유롭게 즉석에서 만들어지고 한 사람이 먼저 하면 모두들 따라 한다. 아이들이 전에 했던 동작을 다시 할 때도 자주 있겠고 분명 더 좋아하는 동작도 있겠지만 수업이 계속되면서 생기 있고 우아한 새로운 동작들을 개발해 낸다. 새로운 리듬이 새로운 동작을 이끌어 낸다. 아이가 북을 칠 때도 있고 아이와 교사가 함께 치기도 한다. 이런 장면이 연출하는 그 유쾌함과 에너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나는 이에 비할 만한 장면을 본 적이 없다. 북소리 율동, 춤은 오랫동안 계속된다. 아이들 대부분은 너무나 건강하고 에너지에 넘쳐 있는데, 아이들은 그 열기의 많은 부분을 여기서 태운다(무슨 수를 써도 다 태울 수는 없겠지만). 학교는 고요하고 사색적일 때도 있지만 거의 언제나 아이들은 엄청나게 사교적이고, 말 많고 활동적이고 시끄럽다. 미국 학교에서 훨씬 덜 활동적인 아이들도 ‘활동과다’라고 딱지를 붙여서 약을 먹이는 것과는 참 대조적이다. 지켜보는 것의 가치 용접 장비를 갖추기 전에 이 학교에는 분젠버너가 한 대 있었다. 하루는 약 한 시간가량 서너 명의 아이들이 버너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는데, 나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우리들은 각자 집게로 못 하나씩 집어 들고는 불꽃 속에 담그고 있었다. 못이 붉게 달구어져서 작업하기 알맞게 물러지자 다들 철도레일 토막을 모루 삼아 못을 두드려 댔다. 그런데 학교에 새로 온 7,8세가량의 남자아이 하나는 뜨겁게 달구어진 못을 나뭇조각에 꽃아 넣는 일을 반복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자기 못에 닿거나 불꽃을 너무 많이 차지했다 싶으면 그 아이는 욕을 퍼붓고 으르렁거렸다. 그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겁을 먹거나 하진 않았지만 나는 당황했다. 어린아이 속에 그토록 큰 폭력성과 분노가 들어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아이가 못을 나무에 꽂을 때 무슨 상상을 할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당시 우리의 유일한 만남이었다. 그 2년 후 두 번째로 학교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평화롭고 친절하고 행복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속공예나 용접 분야에서 가장 숙련된 아이들 중 한 명이 되어있었다. 놀랍고 또 기뻤던 것은 그 아이가 나를 기억하고 게다가 친구로 기억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의 음악실 풍경이다. 훌륭한 재즈 피아니스트인 교사 한 분이 한 아이에게 전자기타로 재즈 화음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교사는 설명하고, 직접 시연을 보여주고, 피아노로 같이 연주했다. 그런데 다른 두 아이가 살짝 콩고드럼을 치면서 연주에 끼어들었다. 아이들은 제때 박자를 맞출 만한 실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제발 연주를 그만두라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경질적인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고, “우리가 바쁘다는 것 몰라?”라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떤 감정적 대응도 없었다. 두세 명의 다른 아이들도 그 방에 있었는데 나처럼 그저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씩 피아노와 기타가 제 가락을 낼 때면 나는 평소처럼 블루스 곡을 혼자 흥얼거렸다. 또 다른 아이는 창턱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수준에서 기능과 집중력을 발휘하며 참여하고 있었고 그 모두가 허용되고 있었다. 스톨리블라스 여사 (Mrs. Stallibrass)가 이렇게 말했다. “본다는 것은 소중한 행위다. 아이들에게 봐야 할 필요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데 빠져드는 일을 방해해선 안 된다. 오히려 ‘격려해야’ 한다.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하기 전에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 아이들은 자신이 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곰곰이 씹고 생각해보길 좋아한다.” 니 릴레스콜레에서는 모두가 이 점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난폭한 아이도 변한다 이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한 남자아이는 난폭하고 곧잘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아이들 스스로 “테러리스트들”이라 부르는 한 떼거리에 속해 있었다. 이 아이가 한번은 종이상자를 박살내다가 실수로 열 살짜리 소녀의 눈을 때렸다. 어찌나 심하게 쳤던지 진짜 다칠 뻔했는데, 그 아이는 뺑소니를 쳤고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소녀는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는 아픔에 못 이겨 주저앉았다. 다른 아이들과 교사 한 명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괜찮냐고 물으면서 다독거려 주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났다. 내가 알고 있ㄴ느 대부분의 다른 학교에서라면 소녀는 큰소리로 울기 시작할 테고 다른 아이들이 교사에게 일러서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할 판이었다. 그러면 그 어린 남자애는 붙들려 와서 사과를 해야 했을 것이고 아마도 벌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른과 아이들, 그리고 다친 소녀까지도 모두 그 사나운 꼬마가 고의로 소녀를 아프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아이는 이미 겁을 먹고 부끄러워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더 벌을 주고 수치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뭐하려고, 그 아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상으로 훨씬 심하게, 자기는 나쁜 아이라는 걸 느끼게 할 것인가? 그 아이가 그토록 거칠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건 바로 이 느낌인데 말이다. 그보다는 이곳에서라면 비난받고 벌 받을 걸 염려할 필요는 없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학교가 교내의 테러리스트들을 교화하는 방식은 설교나 벌이 아니라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서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참을성을 갖고 대하고 믿음을 갖고 용서한다. 그러다 때가 되면 아이들도 서로를 같은 식으로 대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의 샌드위치를 빼앗거나 서로 밀치고 싸우고 큰소리로 다투거나 고함을 질러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에게 화를 내긴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처럼 늘 고자질을 입에 달고 있거나 교사를 자기편에 끌어들이려 애쓰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분노를 간직하지도 않는다. 4. 이 학교가 잘되는 이유 대화, 그리고 경험의 연속체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가 이곳에서 아이들이 생기 있고 행복한 데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업 면에서도 그토록 좋은 성적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 대답은 영화에서 해설을 맡은 교사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교사들이 말하고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듣는다는 뜻이 아니다. 의도를 숨기거나 목적이 있는 어떤 강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첨단 학교에서처럼 교사가 토론을 장악하지도 않는다. 단지 대화가 있을 뿐이다. 아이들 사이에. 아이와 어른 사이에.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의 대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보통,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뭔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도 끼어든다. 대화는 수시로 방향을 바꾸면서 진행된다. 진짜 대화란 원래 그렇다. 중간에 대화에서 빠지는 사람도 있고 새롭게 끼어드는 사람도 있다. 대화 도중에 무리가 갈라져 두세 개의 다른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대화는 끝이 없다. 대화는 얼마 동안 중단될지도 모르지만, 생각은 계속된다. 그리하여 같은 맥락의 대화가 며칠 후 다시 이어진다. 행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생각 속에서 아이들은 데니슨(Dennison)이 『아이들의 삶』에서 언급했던 ‘경험의 연속체(continuum of experience)’를 갖게 된다. 그런 경험은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종소리와 분절된 수업시간, 수업계획, 유도된 토론 등 온갖 것들이 이런 경험을 방해하고 흩뜨려 놓는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도 있고 어린아이가 나이든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도 있다. 교사회의조차 아이들에게 닫혀있지 않다. 끼어들기를 조장하지는 않지만 나가달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비범한 교사들 이러한 설명을 학교를 운영하는 방법론이나 공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기 바란다. 이 학교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학교를 움직이게 하는 큰 부분은 그 속에 있는 어른들이다. 이 어른들은 아주 비범한 교사들의 모임인데, 내가 볼 때 적어도 세 관점에서 그렇다. 첫째는 이 교사들이 가르치는 기술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유능하다는 점이다. 교사들 대부분은 여러 종류의 일을 하다가 교사가 된 사람들로 일속에서 얻은 많은 경험과 유능함을 학교로 가져온 셈이다. 교사들은 뭐든 할 줄 알고 만들 줄 알고 고칠 줄 안다. 이 점은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뭐든 하고 싶어 하고, 또 그래서 일을 할 줄 아는 어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뭐든 하고 싶어 하고, 또 그래서 일을 할 줄 아는 어른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매혹을 느낀다. 이 교사들이 지닌 자연스런 권위의 많은 부분이 이 유능함에서 온다. 일반학교든 자유학교든 문제의 많은 부분이 교사들의 실력이 부족하다는데서 온다. 자기들이 얼마나 아이들을 좋아하고 존중하는지, 그리고 프리스쿨 같은 데서 아이들과 더불어 지내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아주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때 내가 “자네는 뭘 할 수 있나?”하고 물으면 그들은 깜짝 놀란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을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몇 년 동안 그들이 해온 일이라고는 학생으로 공부한 게 고작이었다. 사랑과 좋은 의도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반론이 있을 법하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거의 언제나 한 줌의 능력과 한 아름의 사랑을 기꺼이 바꿀 것이다. 이런 점 말고도 니 릴레스콜레의 교사들은 지적이고 지식이 풍부하며, 호기심이 많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교사들은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또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니 릴레스콜레의 교사들은 소외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 역시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나라인 덴마크를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바꿨으면 하는 점이 물론 많지만 그들은 자기 나라를 좋아한다. 덴마크는 그들이 살고 싶은 땅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장소이고, 신나고 할 일이 가득한 곳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른이 된 자신을 좋아하고, 열정과 에너지에 넘친다.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이 인생에서 최고의 시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이 어른이 도고 보다 강해져서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세상 속의 일을 더 많이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울 만반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아이들은 세상과 반목하지 않는다. 세상은 있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세상이 아주 끔찍한 곳이고 그 속에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없다는 둥, 단 하나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세상을 부숴 버리는 일이라는 둥,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 멀리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아이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마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니 릴레스콜레의 교사들이 정직하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은 아이들이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주제가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며, 진짜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모른다고 인정한다. 대부분의 교사들의 진실은 이렇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니 릴레스콜레를 설명한 것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같이 살고 일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서 배우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보려 한 것이다. 또 교묘한 조종이나 매수, 협박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 짧게 말해 학교가 없는 사회에서 그렇게 하는 길을 제시해보려 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 우리 서둘러 우리 학교들 전부를 니 릴레스콜레처럼 만들자.”라고 생각하도록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학교가 니 릴레스콜레 같은 학교가 되는 걸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면 이미 그 사회는 아예 학교를 원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학교라는 제도를 없애버릴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곳에서, 그들을 돌보도록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데 반대한다. 그 장소와 사람들이 얼마나 멋진가는 문제가 안 된다. 아이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필요하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그 모든 구성원에게 열려 있고, 다가가기 쉽고, 환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회, 그 속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나이야 어떻든, 능동적이고 진지하며 책임 있고 유익한 부분을 담당할 권리를 갖는 그런 사회가 필요하지 않을까.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덴마크 자유교육』 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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