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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길의 소명 이야기
2012년 3월 3일 다우리 교회 토요학교 11:00-12:30
과거를 회상하는 것, 쉽지 않아!
영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보는 것이 그리 간단치를 않았던 것이다. 중년을 넘긴 48세의 나이! 몇 년 전 일어났던 과거만 해도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이었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2007~2009년 사이에 아버지, 큰 형님과 큰 형수님 그리고 2005년에는 젊은 조카도 하나님께 보내야 했다. 남몰래 베개를 눈물로 적시는 일도 있었다. 사랑했던 분들이라 더 충격이 컸다.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어떤 사람의 인생이 가벼울 수 있으랴! 그분들은 가셨지만 너무나 많은 삶의 순간들이 흑백으로 인화된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처럼 변하지 않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힘들고 지칠 때면 그분들이 베풀어 주신 사랑이 영길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아들에게 비친 영길!
아들에게 비친 아버지 영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들 희찬이가 지은 시가 있다.
아빠
아빠는 내 친구다.
나랑 야구를 한다.
아빠는 청소 대장이다.
아빠가 청소를 하면 집이 매끈매끈
아빠는 딸기다.
얼굴이 빨갛다.
아빠는 동네 운동선수다.
토요일마다 운동을 한다.
출생과 어린 시절
영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조선시대 후반 무관의 후예였다. 1896년 충청수영이 폐지 될 때 증조할아버지에게 변고가 생겨 집안이 몰락했다. 할아버지는 외가가 있는 현재의 고향에 정착 하셨다. 할아버지는 전쟁 후 1955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미신을 열심히 섬기던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길의 아버지는 자상하셨다. 어머니를 극진히 사랑하시던 분이었고 성실하셨다. 술과 담배와 놀음을 전혀 안 하시던 깔끔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자존감이 높으셨던 분이다. 이런 부모님에게서 영길은 1965년 9남매 중의 8번째로 태어났다. 영길이 자란 동네는 30여 호가 되는 작은 동네였다. 그런데 이 작은 동네에 술집이 세 곳이나 있었고 무당이 3명이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영길이가 태어날 당시 끼니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점점 가정의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다.
가정에 복음이 들어오고!
그런 암울한 가정에 복음이 가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계기는 큰 형님이 장애를 앓게 되면서부터였다. 집안 분위기는 늘 우울했고 회색빛이었다. 영길에게는 교회가 유일한 탈출구였고 위로였다. 힘든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영길은 타고난 천성으로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호기심 많은 아이로 자랐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으리라.
힘든 어린 시절
초등학교 1-3학년 기간에 영길이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통제된 학교생활은 감옥과 같았다. 그는 자유롭게 뛰어놀고 싶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도중에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다. 그 넓은 세계는 그의 무대였다. 후에 전 세계를 무대로 무역 인으로 뛰어다니는 작은 영길의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엄마가 대천읍 시장에 같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시고는 그만 혼자 가버리셨다. 영길이는 혼자 걸어 대천읍 시장엘 갔다. 그는 도시가 매우 궁금했다. 걸어서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영길이는 남포 면소재지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겨우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갈림길에서 다시 잘못된 길을 택해 다시 길을 찾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2시가 되어서였다. 이런 영길이의 모험심은 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보여주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였다. 미술 도구를 준비하지 못하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길가에 앉아 흙을 도화지 삼아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교회는 열심히 다녀!
그러나 영길은 주일학교에 열심히 나갔다. 집에 닭을 길렀는데 밤새 알을 낳으면 아침에 가서 꺼낸다. 매일 네 개를 낳는데 막내가 1개를 먹고 다른 형제들이 나머지 세 개를 나눠야 하는데 어느 날 헌금을 꼭 하고 싶었던 영길은 재빨리 계란 한 개를 챙겼다. 그런데 그 계란을 주머니에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계란은 교회 가는 길에서 그만 깨지고 말았다. 영길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영길에게 신앙적 큰 변화가 있었다. 교회의 목사님이 강대상을 청소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강대상을 청소하는 사람은 당시 교회에서 굉장한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영길이 강대상 청소를 하기 전에는 한 권사님이 담당하셨던 일이었다. 그분이 이사를 가면서 영길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큰 영광으로 알았다. 그는 기쁨으로 열심히 강대상을 청소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자존감이 살아났다.
즐거운 학교생활!
그 후 학교생활도 정상을 되찾았다. 학교의 공부도 재미있었다. 성적이 하위권에서 점점 좋아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학급에서 상위권에 들었다. 공부를 잘 해 육성회비는 면제 받기도 했다. 그 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하나님께서 영길의 삶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하신 때였다고 생각한다. 5학년 때는 반에서 3등을 하기도 했다. 많은 아이들이 영길이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그 다음 달에는 반에서 1등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집에서 거의 공부를 하지 않는다. 소꼴을 베는 것 바쁜 집안을 하고 남은 시간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특별활동에서도 특별한 두각을 나타냈다. 백일장과 과학경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영길은 초등학교를 우등생으로 마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면 소재지에서 6km떨어진 대천중학교에 들어갔다. 버스에는 콩나물시루처럼 빡빡하게 학생들을 싣고 다녔다. 하루는 버스에서 한 아이가 압사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대천 읍내에 사는 아이들은 공부를 개인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서 영길도 대학에 가고 싶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 책도 많이 읽었다. 다독 때문인지 문학 소년으로 성장해갔다. 그 때문인지 다른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도 많이 했다.
방황하던 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다니던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면서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어, 사회, 정치, 경제, 역사로 관심 영역이 넓어졌다. 몰랐을 때는 어렵지 않았는데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불평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불평불만이 쌓여갔다. 구름처럼 밀려드는 피서객과 부모의 삶이 이해가지 않았다. 힘들 때면 바닷가를 찾았다. 바다는 영길의 그 고민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 같아서였을까? 영길은 인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공부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영길은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학과는 행정학이었다. 아버지는 행정고시를 공부해 고급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다. 그러나 영길은 재미가 없었다. 민법과 경제학이 훨씬 매력이 있는 과목이었다.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운동이었다. 체육과 아이들과 어울렸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가정 먼저 생각한 것이 경제적 독립이었다. 주중에는 열심히 대모 대에 참여하고 주말에는 건설현장에서 벽동을 나르며 2년을 보냈다.
군 생활
군 입대를 앞두고 기도를 했다. 당시에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학생들은 전방으로 보내져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 일도 있는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다. 연무대에서 훈련병 시절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서 눈물콧물 흘리며 자신의 삶을 회개했다. 훈련 후 기차를 타고 배치된 곳이 바로 용산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곳에 배치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방부에 연줄이 있었던 아이 앞뒤에 영길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영길의 키(?) 때문에 수도방위사령부에 가지 못하고 88올림픽 대 테러 부대에 투입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동기 7명과 모의를 했다. ‘우리는 죽어도 노태우는 못 찍는다.’ 일병으로서 투표하는 현장에서 소신을 지켰다가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89년 5월 18일에 제대했다.
세계를 누비는 자유인이 되다!
해외에서 영업이 되는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는 어떤 물건이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팔 수 있다. 실패도 많이 경험했다. 물건을 살 마음이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쉽지 않았다. 만났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의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보장이 없었다. 초기에는 구매 담당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92년경에는 한국(코리아)을 모르는 나라들이 많았고 한국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세계 텔레비전으로 보도되는 대모로 치안문제가 있어 보여 그들이 거래를 원치 않았다. 대모에 대한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박대를 당할 때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겨내야 했다. 외국의 사무실에서 큰 소리를 치고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순간적으로는 폼이 날 수 있지만, 다시는 그 사무실에 방문해 내 제품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비즈니스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정중함을 유지했다. 다음 기회를 위해서다. ‘다음 기회에는 내 제품을 반드시 사도록 하고 높은 가격에 팔거야!’라는 결심을 하면서 말이다.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동남아에 가면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해외에서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외면하기 힘들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 나라에 정통하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바이어를 만나게 해 줄 것이라고 해 속은 적도 있다. 홍콩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처음 한 사람을 만나 거래를 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신뢰할 만한 사람임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술도 먹지 않기 때문에 핸디캡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시장 개척을 하면 다른 한국 기업이 다시 쳐 들어온다. 그러면 또 다른 시장을 개척했다. 화교와 중동, 동남아 사람들도 거래를 주로 했는데 한국 사람은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서 경쟁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한 번 신뢰하면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중동사람들은 교활했다. 잘못하면 ‘신의 뜻’이라고 핑계했다. 이태리 사람들은 게을렀다. 가장 호감이 있는 사람은 독일과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한국산 정수기를 동남아에 엄청나게 팔았다. 세관직원들이 영길을 바로 알아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때부터 집안에서도 영길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영길을 대견하게 생각하셨다.
1997년 11월 동남아시아로부터 시작된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를 위기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재직하던 회사도 쉽지 않았지만 시장을 잘 개척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대표와 생각의 차이로 인해 스스로 퇴사했다. 그 때가 2000년 3월 30일이었다.
서영통상!
2000년 서영이가 태어났다. 2001년 4월 20일에 서영통상이라는 작은 기업을 여의도에서 시작했다. 3년 정도 회사는 번창했다. 그런데 그 후 위기에 봉착했다. 사업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정말 어려웠다. 휴대폰 사업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완벽하게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2005년 말부터는 회사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안에 어려움이 닥쳐왔다. 2007년 아버지와 큰 형님과 큰 형수님이 쓰러지셨다. 가족 가운데 영길은 이런 점에서 책임을 맡는 그런 사람이었다. 특히 영길은 아버지를 집에 모시고 간병을 했다. 영길은 그래도 겸손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식은 절대로 지성으로 부모를 간병하지 못하더라.’
다우리 교회로
2010년 영길은 교회를 가지고 고민하며 기도했다. 2011년 다우리 교회는 영길과 그의 가족을 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이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한다.
영길의 특징
영길은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나 내면의 상처는 별로 없다. 대신 남에게 상처를 주는 편이기는 하다. 언제나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특징을 말하면 이렇다.
첫째, 영길은 싫증을 잘 낸다. 그러나 한결같다. 안정은 불안하다. 매일 뭔가 달라야 한다. ‘Something fun, something exiting’한 것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낀다. 교회는 여기에서 제외한다.
둘째, 어느 정도 팽팽한 긴장감을 즐긴다.
셋째, 집요하다. 잘 포기하지 않는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도한다. 한 번 만난 바이어는 한 번 이상 샀던 것 같다.
넷째, 추진력도 있다. 영길을 ‘Korean German Tank’라고 중동아이들이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다섯째, 거래를 잘 한다. 가격 흥정을 할 줄 안다는 말이다. 마음을 먹으면 깎을 수 있다. 백화점에서도 깎는다. 흥정을 할 때는 화를 내면 안 된다.
여섯째, 숫자 감각이 뛰어나다. 사람이름과 얼굴을 잘 연결시킨다.
일곱째,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 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힘들어 하기도 한다.
여덟째, 일을 미루지 못한다.
아홉째, 배짱도 있다.
열째, 제 몸 하나는 잘 관리한다. 절대로 아프지 않다.
열한 번째, 결단, 도전, 개척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열두 번째, 어느 나라에나 어울리는 외모이다. 태국, 중국, 베트남, 일본 모두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다우리 교회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
첫째, 어떤 일이라도 열정을 가져라. 세상의 어떤 일도 열정이 없이 일을 하면 뭔가 부족한 일이 되고 만다.
둘째, 하고 싶고 성경적인 일이라면 실패를 두려워말고 시도해라. 결국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얻어지는 것이 많고, 한번 해본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셋째,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이 있을 텐데 어려움을 묵상하지 말고, 말씀을 묵상함으로 이기라.
영길의 소명
소명은 연약한 자를 돌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힘든 자와 정신적으로 힘든 자를 돕는 것이 은사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다. 사회가 어려워지는 것은 개인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왜곡이 사회의 왜곡을 만드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도록 하신 것 같다. 앞으로도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자들을 위해 살기를 원한다.
[질문]
영길의 장점이 느껴졌다. 본인의 최대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약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키가 작다. 말을 잘 못한다. 논리적이지는 않다. 상대방의 생각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본인의 생각이 앞서가기 때문인 것 같다.
2. 하는 일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 얻나?
=> 처음에는 하나하나 찾아 다녔다. 코트라(Kotra) 같은 데서 얻었다. 그런 정보는 추려야 하더라. 대부분 현장에서 찾았다. 태국에서 택시 운전기사가 소개 해 계약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현지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얻는 자료는 신뢰할 것이 별로 없다. 영업을 하다보면 알아지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거래가 될 것인지 아닌지가 직감으로 95%를 판단이 된다.
3. 언제 제일 즐거운가?
=> 돈 벌 때이다. 사업은 만만치 않다. 피를 말리는 과정도 있다. 몇 달 동안 계속되기도 하다. 항상 경쟁을 해야 한다. 정말 피 말리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계약이 미뤄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기다려야 한다. 정확한 정보를 잘 주지 않는다. 보람 있을 때는 달러(Dollar)를 벌어들일 때이다. 우리나라 무역 1억불인데 그와 같은 원동력은 영길이 같은 세일즈맨들이다. 친구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수출역군이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아들은 아버지를 깔보는 데 그렇지 않더라.
4. 몇 개 국어를 하는가?
=> 영어를 한다. 지금은 몇 개 국어를 해야 하는 것 같다. 언어는 배우면 되더라. 중요한 것은 자기 관리이더라. 여행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무실과 호텔만 왔다 갔다 했다. 힘들 때면 운동을 했다. 언어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있다.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3개 국어 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5. 희찬이와 서영이가 있는데 자녀에 대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 아이들이 독립적인 영혼으로 크기를 원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아버지가 그것을 간섭하거나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희찬이에 대해 선교사로 만들면 좋겠다는 소망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20세가 되면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좋겠다. 혼인은 빨리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