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교 이광사 선생 묘지 글(圓嶠 李匡師 先生 墓誌) 번역
『圓嶠集』,「圓嶠先生墓誌」(李匡呂撰,1720-1783) a_221_561a
『李參奉集』,卷三,「員嶠先生墓誌」,a_237_285c
圓嶠公,生於肅宗乙酉(1705),卒於丁酉(1777),今上(正祖)即位之元年也。
公坐伯父事(伯父李真儒,1669-1730,辛任士禍〔1721-1722年〕,少論之峻少派。羅州壁書事件〔1755年〕),謫配富寧(咸鏡道),後移湖南之薪智島(1762年,莞島郡)。凡在謫二十三年(1755-1777),居南為十六年(1762-1777)。
二子肯翊(1736-1806)、令翊(1740-1801)以喪北歸,明年(1778)二月某日,葬于長湍某地某向原,配柳氏先葬此,至是同墳焉。
원교 이광사 선생은 숙종 31년(1705)에 태어나서 정조 원년(1777)에 돌아가셨다.
이광사 선생은 큰 아버지(이진유,李眞儒,1669-1730。이진유 선생은 소론 가운데 몇몇 강경한 인물들이 노론 사대신(김창집ㆍ조태채ㆍ이이명ㆍ이건명)을 탄핵하여 죽음을 내렸던 신임사화에 참여하였다가 처음에는 밀양 나중에는 강진으로 귀양갔다.)에 연좌되었는데 영조 31년(1755) 나주 괘서사건(을해옥사)이 일어나자 먼저 함경도 부녕(富寧)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전라도 신지도(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도)로 옮기셨다. 귀양생활이 모두 23년(1755-1777)이고 신지도에서만 16년(1762-1777)을 보내셨다.
두 아들 긍익(肯翊,1736-1806)과 영익(令翊,1740-1801)이 영구를 남쪽 신지도에서 모셔와서 이듬해 경기도 장단(長湍) 좋은 곳에 묻어드렸다. 둘째 부인 류씨(柳氏,1755년 자결함)을 먼저 여기에 모셨으니 함께 묻어드렸다.
嗚呼!後人如有知我圓嶠公者,知此是其遺墓足矣。今為誌,無事乎多〔言〕也。然自圓嶠公在時,世爭得圓嶠公一字以為寶,若是者,以其書而已。夫墨跡在紙,得人人見之,人人貴重之,而今之人竟未有真知圓嶠公書者。書猶如此,況於性情德行?又況於久遠之後乎?
아! 뒷날 우리 이광사 선생을 알려는 사람이 있다면 다만 여기에 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면 된다. 현재 묘지 글을 쓰면서도 긴 말을 쓰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광사 선생이 살아계실 때 세상사람들은 선생의 글씨를 받아서 귀한 보물로 여겼듯이 선생에게 중요한 것은 글씨뿐이다. 글씨는 종이에 남았으니 사람들이 볼 수 있고 귀하게 여길 수 있지만, 선생의 글씨를 잘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글씨도 이렇컨만 어찌 선생이 닦으신 마음과 덕행을 알겠는가? 더구나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는 어찌 알겠는가?
公諱匡師,字道甫,姓李氏,定宗別子德泉君(定宗十男,李厚生,1397-1465)為始祖。金慕齋安國(1478-1543)稱德泉在王子中最好學,尤邃禮經,學生多就受。德泉君以後,十餘世世,其忠孝文武,立朝至大官者,皆國人所知也。其未顯者,往往有文儒才行,知名於時,近世石門孝敏公(李景稷,號石門,1577-1640)諸孫尤盛。
선생의 이름은 광사(匡師)이며 어려서는 도보(道甫)라고 불렀다. 성은 이씨이며 정종 임금의 열 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德泉君,定宗十男,李厚生,1397-1465)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뒤에 김안국(金安國,1478-1543) 선생은 정종의 아들 가운데 덕천군이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예경(禮經)에 밝아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배웠다고 찬양하였다. 덕천군 이후 십여 세대가 대대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문무관직에 나가 조정에서 높은 관직도 맡았다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뛰어나지 않은 후손일지라도 학문을 연구하고 재능이 있어서 이름이 알려졌다. 최근에는 이경직(李景稷,1577-1640,호조 판서) 선생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하였다.
與圓嶠公為兄弟同時著文行者十餘人,圓嶠公為父兄宗族及士類所賢重。而圓嶠公之翰墨,又橫絕前後,書道之中興,於是為盛云。
孝敏公,諱景稷,某官。孝敏公,生孝簡公,諱正英,某官。生諱大成,某官。生諱真儉,某官,是為公四世。妣,貞夫人,坡平尹氏,某官趾祥女也。
이경직 선생의 문중에서 이광사 선생과 함께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형제들이 모두 열 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이광사 선생은 문중에서도 바깥 양반사회에서도 어질다고 인정받았다. 더구나 이광사 선생의 글씨는 조선의 서도(書道)를 앞뒤 두 시기로 가를 만큼 뛰어났고, 이때부터 조선 서도가 중흥하고 크게 발전하였다고 세상사람들이 평가한다.〔고려말기와 조선 전기에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고, 중기에는 한석봉의 석봉체가 유행하였다.〕
집안 내력을 보면 이경직 선생이 아들 이정영(李正英,謚孝簡,1616-1686,의정부 좌찬성)을 낳고, 이정영 선생은 아들 이대성(李大成,1651-1718,호조 참판)을 낳았고, 이대성 선생은 아들 이진검(李眞儉,1671-1727,예조 판서)을 낳았다. 위의 여러 분들이 이광사 선생의 4대 조상이다. 이광사 선생의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이며 학생(學生) 윤지상(尹趾祥)의 따님이다.
某與圓嶠公同祖孝敏公,吾王父(李德成,李後英之子,1655-1704)幼孤,鞠於孝簡公(李正英),其季父也,以是孝簡公子孫世世如昆弟。我伯父(李真源,1676-1709)、仲父(李真淳,1679-?)幼時,皆及孝簡公學。小子(李匡呂,1720-1783)又少學於圓嶠公,而公之稱一家賢父兄,每欽欽于我先人(李真洙,1684-1732)某兄弟(李匡尹、李匡呂),請圓嶠公為先人墓文並書之,而貧不上石也。
나(李匡呂,1720-1783)는 이광사 선생과 함께 이경직 선생의 후손이며, 나의 할아버지(李後英의 아들,李德成,1655-1704)께서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작은 아버지 이정영 선생이 길러주셨다. 그래서 이정영 선생의 자손들과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다. 나의 큰 아버지(李真源,1676-1709)와 작은 아버지(李真淳,1679-?) 모두 어려서부터 이정영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이광사 선생에게서 배웠다. 이광사 선생은 우리 집안에서 어진 어른이셨지만 나의 아버지(李真洙,1684-1732)께 끔찍이 잘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광사 선생께 아버지의 묘지(墓誌) 글을 지어주시고 글씨도 써주시길 부탁드렸는데 아직까지 가난하여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某幼從於先人任所,年十二三,始至京,始見圓嶠公。德宇渾重,祥和之氣,達於色容,是時尚未有知識,但覺初見如此人。間見公來拜吾先君,入拜諸母,恂恂敬愛,禮儀甚恪。
一日侍坐先君(李真洙),公(李匡師)自執筆行墨,曰:“東人之書,病在用筆,紙不受鋒。”睨之而墨有明暗,甚易見也。今尚記此時語。
某年十五六,始就公學。公教少者先視其寢食興居,動容必恭。時使掃室整書冊,執書唯謹,每授書,必先正其音讀,數數為說字義。其說文義亦不甚敷說,略可通而已。值肯綮處,即痛與辨析,文理字義俱到,往往有前人所不察。承訛襲謬已久,至是而始正者,其國俗口耳傳習之流失乖錯,尤不可勝言。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귀양지(평안도 宣川)에 있다가 열 두세 살에 서울로 와서 처음 이광사 선생을 뵈었다. 선생은 체격이 크시면서도 따듯하게 반겨주시는 마음이 얼굴에 역력하셨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을 때이지만 이렇게 생긴 분을 처음 뵈었다. 뒤에 더러 이광사 선생이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께 절하고 어머니께도 절하고 공손하게 모시면서 예의를 깍듯이 차리시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때 이광사 선생이 찾아오셔서 붓을 잡고 글씨를 써보이시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붓 잡는 것이 잘못되어 붓의 중봉(中鋒)으로 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곁에서 써놓으신 글씨를 엿보니 먹이 진한 곳도 있고 흐린 곳도 있어서 농도가 일정하지 않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때 말씀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뒤에 내가 열 다섯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광사 선생을 찾아가 배웠다. 선생께서는 먼저 어린 아이들에게 잠자고 먹고 일어나고 생활하는 것에 주의하여 몸가짐을 반드시 공손하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때로는 방안 청소와 책 정리를 시키셨고 책을 들 때는 아주 조심하라고 이르셨다. 또한 글을 가르치실 때는 먼저 발음을 바르게 하여 읽으신 뒤에 글자 뜻을 여러 번 설명하셨다. 문장의 뜻은 깊이 설명하지 않으시고 대략 알도록 하셨다. 그렇지만 중요한 곳은 낱낱이 깊이 따져서 설명하셔서 문법과 글자 뜻 모두 이해하도록 설명하셨는데 가끔은 옛날 학자들이 설명하지 못한 것까지도 풀어주셨다. 그래서 오랫동안 잘못 전해오는 것도 똑바로 알게 되었고 더구나 우리나라의 습관적인 잘못을 바로 잡아주신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世皆知圓嶠書絕代,然非有圓嶠公知見問學,無以發此翰墨也。圓嶠公少好丹家書,兼究釋典,後乃酷排二氏,沈潛經義。至史書、雜稗,亦不苟披閱。其看文字,或傍觀者所已曉,而公猶如未曉者,徐徐乃通,既通便不復遺忘。
少時不喜為文辭,今所存草稿若干卷,皆五十以後,在謫時漫筆。初不數數於篇章字句,詩文,皆氣厚而力大,句奇語重,深見菁華。識者謂圓嶠但以其文,亦足傳後名世云。
세상사람들은 선생의 글씨가 조선시대를 앞뒤 둘로 가를 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선생만큼 식견과 학문이 뛰어나지 않다면 이렇게 글씨를 잘 쓸 수 없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내단(內丹) 수련하는 글을 좋아하셨고 불교 경전도 깊이 연구하셨는데 뒤에는 불교와 도교를 아주 물리치셨다. 심지어 역사책이나 소설책도 깊이 읽으시고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다. 글을 보실 때는 곁에 있는 사람도 쳐다보면 아는 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여기시고 천천히 읽으셔서 뜻을 알아내셨고 뜻을 아신 뒤에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으셨다.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글 짓는 것을 좋아하시지는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원고 몇 권은 모두 50살 이후(1755년 51살부터 귀양)에 귀양지에서 되는 대로 써놓으신 것들이다. 처음부터 문장 구조와 글귀에 신경 쓰시지 않았지만 시(詩)와 문장이 모두 분위기가 깊고 힘이 있고, 글귀가 뛰어나고 의미도 깊어서 정화(精華)를 보여주셨다. 알만한 사람들은 선생의 글씨뿐만 아니라 문장도 후세에 이름을 전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고 전한다.
公於諸經四書,多不能曲從先儒(朱子),尊事鄭霞谷先生(鄭齊斗,1649-1736),而先生主王氏(王守仁,1472-1528)。公於王氏,亦深契致良知之說。平日精義異聞,屢稱鄭先生。先生喪,服麻會窆。少聞筆法於白下尹公(尹淳, 號白下,1680-1741),尹公喪亦如之。
公平居無甚異人,又或曲謹小慧之所能及,而泛若不省然者,然實銖黍內晰,大閑不可越。每事故夷險之際,愈見其肅然安泰,覺去人遠甚,坦厚直性,恂恂大人也,而直性樸拙。見人便妄少情實者,愀然不屑也。
선생은 사서(四書)와 오경을 공부하시면서 여러 곳에서 주자(朱子)를 억지로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하곡 정제두(鄭齊斗,1649-1736) 선생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존중하셨다. 하곡 정제두 선생은 왕양명 학술을 지지하셨다. 이광사 선생도 왕양명 학술에서 치양지(致良知) 주장을 깨달으셨다. 평소에도 깊은 의리(義理)와 뛰어난 해석을 말씀하실 때는 자주 정제두 선생을 일컬으셨다. 정제두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로서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례하셨다. 이광사 선생은 어려서부터 윤순(尹淳,1680-1741)에게서 글씨를 배웠고 윤순 선생이 돌아가지자 마찬가지로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례하셨다.
선생은 평소에 남들과 다를 것이 없이 평범하셨다. 설사 작은 재주를 다하여 특별한 뭔가를 이루시더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아주 작은 것조차 세밀하게 따지셨고, 사람이 지켜야할 커다란 도리는 넘지 않으셨다. 매번 집안의 큰 일(事獄)을 겪을 때마다 선생의 숙연히 평안하신 모습을 볼수록, 보통사람과는 아주 달리 넓고 깊은 본성에서 우러나와서 솔직하게 어른들을 공경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남들이 속없이 망령된 짓을 하는 것을 보시고는 엄숙하게 무시하셨다.
心思手藝,將無所不通,而無不知其道。以書擅揚一世,手不捨筆硯,而終身硯止弊匣,其端素不留於外好如此。
體貌敦碩,望之天然貴重,又洪於飲量,善言笑。每講授諷讀,聲氣遒越,響流堂宇。閑坐未語,或手畫地,徐行書勢。髭鬚郁然,眄睞清深,人為之屬目焉。
선생은 마음속에서 생각하시는 것과 손이 서로 맞게 하셔서 글솜씨로 나타내셨으며, 생각과 글솜씨 둘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도 잘 알고 계셨다. 글씨를 잘 쓰셔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시더라도 붓과 벼루를 놓으신 적이 없다. 그렇지만 평생동안 벼루로 써놓으신 글씨를 덮어놓으셨다.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겉모습에는 조금도 마음을 두시지 않으셨다.
체격이 크셔서 멀리서 바라보아도 중후하셨다. 주량도 아주 크시고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하는 것도 잘하셨다. 글을 읽고 가르치실 때 목소리가 아주 우렁차서 집안을 울릴 정도였다. 한가롭게 앉아계실 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칸을 쳐놓고 천천히 글씨를 써보시기도 하였다. 수염과 구렛나루가 빽빽하게 많고 눈동자가 맑고 깊어서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公生長於家門盛時,雖中經世故,闔門兄弟具在,群從六七家,鄰巷相從,孝友雍睦。公與伯氏無妄公(李匡泰,號無妄齋,1693-1754)、恒齋正字(李匡臣,號恒齋,1700-1744)二從兄,文學相師友,天倫之樂,同堂之勝事,亦人家罕比。
及無妄公喪葬纔畢,而乙亥(1755年,乙亥獄事,羅州壁書事件)事作,兄弟分配南北(李匡師,富寧;李匡鼎,1701-1773,吉州;李匡顯,機張;李匡明,1701-1778,甲山;李匡呂,1720-1783,?;李匡贊,1702-?,?),家盡破。
富寧尤極塞荒絕,公處之裕如,人不見憂色。初,公以筆蹟在鞠囚文書中,坐繫二十餘日,未及出獄,柳孺人(妻,柳宗垣之女)憂事且不測,先自殞(1755年,自決),公終身為至慟。
公雖處罪籍,屢蒙先王(景宗)矜宥,及移配,上(英祖)怒,臺臣至有被譴者。公感祝恩造,常以身在編配,無地效死為恨也。從兄公正字(李匡臣)見公感恩之作,讀未竟,嗚咽沾衣,正字公亦至誠忠慕故也。
丁酉(1777)八月二十六日,啟手足于薪智島之謫舍,壽七十三。居人如哭親戚,送喪至京者七八人。富寧人來省公于南,及聞喪又至。足見德意之感人深也。
선생은 우리 집안이 번성할 때 태어나서 자라셨다. 비록 중간에 큰 일을 겪었지만 집안 형제들이 모두 평안하여 여섯 일곱 집의 형제들이 한 동네에 살면서 자주 모였고 우의도 돈돈하였다. 선생은 큰 형님(李匡泰,號無妄齋,1693-1754)과 재종형(李匡臣,號恒齋,1700-1744)과 어울려 함께 과거시험을 공부하였으며 형제간의 즐거움은 집안의 기쁜 일이며 남의 집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선생의 큰 형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루자 을해옥사(1755年,乙亥獄事,羅州掛書事件)이 일어났고 형제들은 멀리 남쪽으로 북쪽으로 각기 귀양살이를 떠나면서 집안은 거의 다 망하였다.(李匡師,함경도 富寧;李匡鼎,1701-1773,함경도 吉州;李匡顯,경상도 機張;李匡明,1701-1778,함경도 甲山;李匡呂,1720-1783,?;李匡贊,1702-?,?)
선생께서 귀양살이 가셨던 함경도 부녕(富寧)은 북쪽 변경지역에서도 아주 편벽한 곳이었지만 선생은 태연하고 여유로워서 걱정하는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았다. 을해옥사를 보면, 선생의 글씨가 죄인들의 서신에 들어있기 때문에 잡혀가서 감옥에 스무 날 넘게 갖혀계셨다. 그런데 부인 유씨는 너무 걱정하시다가 큰 일이 날 것이 무서워서 먼저 자진하셨다. 선생은 평생토록 애통하셨다.
선생 이름이 비록 역적 목록에 올랐으나 경종 임금의 보살핌을 받았고, 더구나 함경도 부녕에서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로 귀양살이를 옮기실 때에는 영조 임금도 너무 심하다고 화를 내셨고 그래서 탄핵하였던 사헌부(司憲府) 신하들 가운데 오히려 질책 받은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두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며 몸이 귀양지에 있어서 목숨 바쳐 충성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며 글을 지었다. 재종형 이광신(李匡臣) 선생도 선생이 지은 글을 읽다가 마치지 못하고 목이 메여 옷을 적실 만큼 크게 우셨다. 이광신 선생 역시 충성심이 깊으셨기 때문이다.
선생은 정조 원년(1777) 음력 8월 26일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 귀양살이 집에서 편안히 돌아가셨고 향년 73세였다. 동네사람들도 친척처럼 슬피 울었고 서울까지 따라온 사람이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함경도 부녕에서도 남쪽 신지도까지 찾아와서 문안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고 또 부음을 듣고 경기도 고양(高陽) 묘지까지 문상 오기도 하였다. 이것을 보면 선생께서 남들에게 잘해주신 것이 깊었다는 알 수 있다.
初聚權氏某官某女(權聖重之女,1719年娶),早卒(1731年卒),有一女亦夭。
繼配柳氏某官某女(柳宗垣之女,1733娶,1755年自決),生二男一女。
長男肯翊(1736-1806),次令翊(1740-1801),女適柳某。
二孺人,公皆為誌述事行。
肯翊、令翊皆為公才子。令翊尤俊爽,書與文皆足繼公。公在時求書者,並萃令翊。公嘗言:"余書,唯兒子令翊能臨似之。"公亡四年而令翊亦死,慟哉!
선생은 15살(1719)에 고양(高陽) 군수 권성중(權聖重)의 딸 안동 권씨와 결혼하였으나 27살(1731) 때 세상을 떠났다. 딸을 하나 두었는데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29살(1733)에 다시 류종원(柳宗垣)의 딸 문화 류씨와 결혼하였고 아들 2명과 딸 1명을 두었다.
장남 이긍익(李肯翊,1736-1806)과 차남 이영익(李令翊,1740-1801)이고 딸은 유씨에게 시집보냈다.
권씨와 류씨 두 부인에게 이광사 선생은 묘지(墓誌) 글을 지어 일생을 기록하였다.
장남 이긍익과 차남 이영익 모두 이광사 선생의 뛰어난 아들이지만, 이영익이 좀 더 뛰어나서 글씨와 문장 모두 이광사 선생을 계승하였다. 선생이 살아 생전에 글씨를 받으러오는 사람이 있으면 차남 이영익에게 모여들었다. 선생은 일찍이 “내 글씨는 오직 둘째 아들 영익만이 나를 닮게 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선생이 돌아가신지 4년 뒤에 차남 이영익마저 세상을 떠났다. 정말로 애통하기 그지 없다!
我家先世,皆善筆翰,孝簡公(李正英,擅長於篆書、籀書)尤以書名家,至公而始聞用筆於尹白下。公自言余三十以後,專學古人,然余創知筆意,得之白下公。語及白下,常致敬焉,不但為其先友也。
公臨池之學,度越宋唐,力追魏晉,真艸篆隸,異體而一貫,數百千年以來,發之自圓嶠公。世或謂圓嶠公篆隸遠過真草,公之留心篆隸,眾碑學習,亦在四十以後。蓋書道益進,而問學益近故也。
우리 집안 윗대 조상들도 글씨를 잘 쓰셨는데 이정영(李正英) 선생이 전수(篆書)와 주서(籀書)를 잘 쓰셔서 이름을 떨치셨다. 그렇지만 이광사 선생에 이르러 윤순(尹淳) 선생에게서 정식으로 붓글씨를 배웠다. 선생은 “나는 서른 살부터 옛날 글씨(왕희지 글씨)를 연구하였다. 그렇지만 글씨 쓰는 전문성은 윤순 선생에게서 배웠다.”고 회고하셨다. 선생은 윤순 선생을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존경심을 나타내셨는데 윤순 선생이 아버지(李真洙,1684-1732)의 가까운 벗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생의 붓글씨 쓰는 공부가 송나라를 거쳐 당나라를 넘어 위진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갔고 그래서 진서(眞書)、초서(草書)、전서(篆書)、예서(隸書) 여러 서체까지 모두 깨달으셨다. 이렇게 여러 서체를 하나로 깨닫는다는 것은 천년만년에 선생이 처음이시다. 세상사람들은 이광사 선생의 전서와 예서가 진서와 초서보다 한결 뛰어나다고 평가하는데, 선생께서 전서와 예서에 주목하여 옛날 비문을 연구하신 것은 40살부터이다. 아마도 서도(書道)가 점차 크게 진보하신 것은 학술이 더욱 진보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述『書訣』五六千言,發明王(王羲之,303-361,321-379)、衛(衛鑠,別稱衛夫人,272-349)意旨,又有後編以廣之。後編者,令翊代述,既成而公加修訂,又萬餘言。
公雖有斯文,世無精心求之者,則斯道之湮廢猶夫前矣。天下事,其苦心者自知之而已矣。韓文公(韓愈,768-824)有言:“僕為文,意中以為好,則人必以為惡。小稱意,小怪之,大稱意,大怪之。時時應事作俗下文字,下筆令人慚,以示人則以為好。”俗人之好惡,在古已然,無異乎今人之不知圓嶠公書也。
선생께서 60살에 『서결(書訣)』 5-6천 자를 기술하셔서 왕희지(王羲之,303-361 또는 321-379)와 위삭(衛鑠,衛夫人,272-349,후한 채옹蔡邕에서 위나라 종요鍾繇에 이르는 정서正書 필법을 왕희지에게 전수함.)의 깊은 뜻을 밝히셨고 나중에는 「후편(後篇)」을 쓰셔서 내용을 확장시키셨다. 그런데 「후편」은 차남 이영익이 대신 쓰도록 시키셨고 완성되자 직접 수정하셨는데 1만 자가 넘었다.
선생께서 이렇게 좋은 글을 남겨놓으셨는데, 세상에는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집중시켜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면 선생께서 깨달으신 방법은 곧 사라져서 옛날부터 없었던 것처럼 될 것이다. 세상에 어떤 어려운 일이든지 애쓰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한다. 당나라 한유(韓愈,768-824)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글을 지었는데 마음속으로 잘되었다 싶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좋지 않다고 말하였다. 내 마음속으로 조금 잘되었다 싶으면 남들은 조금 나쁘다고 여기고, 아주 잘되었다 싶으면 남들은 아주 나쁘다고 여긴다. 때때로 남의 부탁을 받아 속된 문장을 지어서 종이 위에 쓸 때는 부끄러웠는데 이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면 오히려 잘 지었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이 좋다고 나쁘다고 거꾸로 평가하는 것이 옛날에도 그랬는데, 요즘 세상사람들이 이광사 선생의 글씨를 몰라보는 것도 이것과 다르지 않구나.
時俗筆硯之家,其願然而未能者,豈非恣媚均正,流利爛熟,人見之稱好邪?雖然,今之疵圓嶠書者,亦不謂圓嶠之不能是矣。夫能之而能不為之,其必有故也。尚不能圓嶠之所不為,而欲大怪小怪於圓嶠,則未離俗見焉爾。
方圓嶠至處京師有盛名時,或置異同者,亦不可無也,然不至如遷謫以後,欲出言疵瑕之益紛然也。蘇文忠(蘇軾,1037-1101)曰:“吾讀孔文舉(孔融,153-208)「論盛孝章(名憲,會稽人)書」,未嘗不廢書太息。”蘇公之太息,不為二賢,直慨然於時俗耳。
요즘 세상에 글씨 쓰는 사람들이라면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아주 쉽고 능숙하게 써서 보는 사람마다 잘 썼다고 칭찬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이광사 선생의 글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이광사 선생이 세상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지 못한다고는 평가하지 않는다. 대체로 할 수 있으면서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이광사 선생이 하시지 않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광사 선생을 이렇다 저렇다 비난하려는 태도는 아직 천박한 속견(俗見)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난 날 이광사 선생이 서울에 계시면서 이름을 날리실 때에도 좋다 나쁘다 평론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신지도에서 귀양살이 하신 뒤부터는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란이 더욱 심해졌다. 송나라 소식(蘇軾,1037-1101)은 “내가 후한시기 공융(孔融,153-208)이 성효장(盛孝章,名憲,會稽人)을 손권(孫權)으로부터 구해달라고 건안(建安) 9년(204) 조조(曹操)에게 보낸 「성효장을 논하는 서신」을 읽으면서 다 읽지도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고 말하였다. 소식이 한숨을 내쉰 까닭은 공융과 성헌(盛憲) 두 어진 학자의 불행 때문이 아니라, 다만 당시 세상사람들이 두 학자를 몰라보는 속세 여론을 개탄하였던 것이다.
某本疏淺,平日承聞丈席,將不能溟漲一蠡,而以行於世,遂見謂不貿貿粗識字。事故以來,未敢稱引舊聞,中切隱傷而已。又動履機阱,北地海南,不在天上,而永隔顏儀,用是為沒身痛。
肯翊兄弟屬某誌幽堂,雖不理於文,他人無可為者,待草刱在紙,使令翊裁定而不及焉,重可悲也。
나는 성격이 엉성하고 얕아서 평소에 이광사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때 선생의 깊고 높은 바다를 됫박질할 수 없었으나, 이렇게 살아오다가 나중에는 선생께서 네가 대충 겨우 글자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렇지만 을해옥사(1755年) 이후에는 이광사 선생께 배운 것을 함부로 들치지 않았는데, 다시 들쳐꺼내기에는 가슴속에 덮어두었던 아픔이 너무 절절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걸핏하면 빠져들 정치적 함정을 무릅쓰고 귀양 가셨던 함경도 땅과 신지도 바닷가까지 힘들다 않고 찾아가 모셨다. 그러나 지금도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면 찾아가겠으나 이제는 선생의 모습도 영원히 뵐 수 없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가슴이 아프다.
이제 조카 이긍익 이영익 두 형제가 나에게 아버지 묘지 글을 부탁하니 내가 글을 잘 짓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먼저 종이에 초고를 잡아서 글을 잘 짓는 이영익 조카가 수정하여도 되겠다. 생각할수록 더욱 더 슬프다.
1、오탈자 수정:
無事乎多也---無事乎多〔言〕也
亦足傳後名世---亦足傳名後世
亦未契致良之說---亦深契致良知之說
以書擅場一世---以書擅揚一世
又或曲謹小慧之所能及---又或有曲謹小慧之所能及
目不知棋道---無不知其道
而終身研止弊匣。其端素不留於外好如此。(?)
髭須郁然---髭鬚郁然
及無妄公喪纔葬畢---及無妄公喪葬纔畢
豈非恣媚均正。(?)
吾讀孔文舉論盛孝草書---吾讀孔文舉論盛孝章書
2、참고자료:
“苦心者自知之。”:
출처:蒲松齡(1640-1715),「自勉聯」:“有志者,事竟成,破釜沉舟,百二秦關終屬楚。苦心人,天不負,臥薪嘗膽,三千越甲可吞吳。”
“僕為文,意中以為好,則人必以為惡。……”:
출처:韓愈(768-824),「與馮宿論文書」:“僕為文久,每自測意中以為好,則人必為惡矣。小稱意,人亦小怪之;大稱意,即人必大怪之也。時時應事作俗下文字,下筆令人慚。及示人,則人以為好矣。小慚者亦蒙謂之小好,大慚者即必以為大好矣,不知古文,真何用於今世也,然以俟知者知耳。”
“恣媚均正”:
출처:韓愈,「石鼓歌」︰"羲之俗書趁姿媚,數紙尚可博(換)白鵝。"
“夫能之而能不為之”:
출처:『孫子兵法、軍形』:“昔之善戰者,先爲不可勝,以待敵之可勝。不可勝在已,可勝在敵。故善戰者,能爲不可勝,不能使敵必可勝。”
출처:蘇軾,「太息送秦少章」︰"吾讀至此,未嘗不廢書太息也。曰:嗟乎!英偉奇逸之士不容於世俗也久矣。雖然,自今觀之,孔北海、盛孝章猶在世,而向之譏評者與草木同腐久矣。"
출처:孔融,「論盛孝章書」︰“歲月不居,時節如流。五十之年,忽焉已至。公爲始滿,融又過二。海內知識,零落殆盡,惟會稽盛孝章尚存。其人困於孫氏,妻孥湮沒,單孑獨立,孤危愁苦。若使憂能傷人,此子不得復永年矣!……今之少年,喜謗前輩,或能譏評孝章。孝章要爲有天下大名,九牧之民所共稱歎。”
첫댓글 선생님 이제사 제대로 읽었으니 죄송합니다. 붓글씨와 공부를 병행해야만 더욱 깊은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요
이광사 비문을 보니 가문사를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