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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사도행전 21:20-26
우리는 계속해서 2,000년 전에 기록된 사도행전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첫째가 ‘그리스도인’이요, 둘째가 ‘제자’요, 셋째가 ‘형제’입니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사도행전을 읽어야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많은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제자도’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라고 하면 사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우리는 다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형제’입니다. 이 말이 초대교회에서 상당 기간 동안 계속 쓰여 집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앞에 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또한 형제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가리켜 “형제여”라고 부른 데는 보다 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유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이방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입장에서 형제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전도 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디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어디 어디에서 교회를 세우고 ….” 바울은 결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한 메시지의 주제는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되어진 사건 전부가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놀랍게 이루신 일, 그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든지 이런 신앙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두고 “내가 한 것이다”, 혹은 “누가 한 것이다” 하고 공치사를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9절에서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내 입을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가 가진 재물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내가 당한 많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고,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나를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약 5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은 다양한 이방 지역들에서 생겨난 교회들과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셨던 기적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제2차, 3차 전도여행 중에 거쳤던 도시가 전체 45개 도시였고, 거리는 모두 11,000km에 달했습니다. 바울은 이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증언했을 때에 야고보를 비롯하여 그곳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결코 바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 선교를 향한 바울의 뜨거운 열정과 수고를 격려하거나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간혹 보면,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자신이 영웅이 되는 방식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그릇된 행동입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의 증언을 듣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의 기쁨에 찬 찬양은 결코 마지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빈말로 끝나버리는 습관적인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이방인 전도에 대한 결과와 바울이 가져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힘에 겹도록 모금한 구제헌금이라는 선물에서 복음 전도의 생생한 열매를 보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조상의 유전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 때문에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와 장로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예루살렘 사람들이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까지도 역시 이 나쁜 소문에 휩싸이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 보면, 바울의 선교 보고를 다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그들이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서 염려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2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보면, 바울이 오순절이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시점은 유대인들 최고의 명절인 오순절 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지내기 위해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유대인들 가운데에 개종한 수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신약성경이 확정되기 이전이었고,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관계가 신학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기는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전통은 절대적으로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들은 아직도 유대교에 매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동안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당시에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동일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열성’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열정적으로 타오르다, 끓어오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어떤 일에 대단한 열심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것이 ‘율법’이라는 단어와 결합했을 때 이들은 모두가 율법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성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간단하게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에 괄호를 하고 한 마디 넣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예수는 믿으나 여전히)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골치가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사도행전 15장 5절에 나오는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유대의 전통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후에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의 율법과 할례 문제를 놓고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금하는 것 이외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율법의 굴레를 씌워서도 안 된다고 결의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정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신념과 주장은 바울이 개척한 여러 이방인 교회에서 계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인한 바울에 대한 적대감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조심스럽게 바울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적대시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21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바울이 제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의 의무를 지우지 않았던 것은 바울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절에 의하면,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자식을 유대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디모데가 앞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할례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율법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측면은 구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 가운데에 어떤 인간도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전제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두 번째 측면은 전통과 관습과 관련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전통과 관습의 출처가 모두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울 역시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했음은 물론입니다.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태어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던 것도 앞으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디모데로 하여금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관계가 신학적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과도기의 상태에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기독교는 유대적 기독교로서 모세의 율법과 유대의 전통이 동일하게 강조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세의 가르침, 즉 할례와 풍습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변절이며, 배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 ‘할례’와 ‘풍습’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도 잘 보여집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임을 나타내는 외적 증표로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는 백성들 가운데서 끊어진다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인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할례를 행해야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모인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울이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유대인들마저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세를 배반한 배신자라는 거짓 소문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배반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성경에서는 ‘배교’, ‘변절’이라는 뜻으로 참된 종교에 대한 변절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동안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을 배교자로 간주해서 죽이려고 했던 유대교의 유대인들이 퍼트린 거짓 소문이 여과 없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유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이방 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본보기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가 어떻게 어디선가 잘못되어서 “유대 사람들도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소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출애굽의 영웅이자 민족 최고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배신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심한 적개심을 표출했습니다. 자칫하면 바울을 모세의 배신자로 오해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큰 화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본문 2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야고보와 장로들도 바울이 모세를 배반했다는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와 장로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그 소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고보와 장로들의 믿음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깊이의 차이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숙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단지 소문만으로 자신이 믿어야 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들었던 소문을 가지고 자신이 마치 재판관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판단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깊은 마음과 속사정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속단하고 판단함으로써 서로를 오해하고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들려오는 소문만으로 한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고 판단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울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불식시킬 방책이 시급하게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오해함으로써 적대시하는 수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화난 군중들이 바울을 향하여 몰려올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의 이 말 속에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킬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는 다급함이 배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오해를 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판인데, 이런 사람들을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결국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타협안을 내놓는데, 그것이 본문 23절과 24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3절과 2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마침 그때 예루살렘 교회에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이 네 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서원 기한이 끝나려는 참이었습니다. 민수기 6장 13절에서 15절에 의하면,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의 서원이 만기에 차게 되면, 그 사람은 일주일 동안 성전에 머물면서 정결 예식인 결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제8일째 되는 날에는 머리를 깎아야만 했습니다.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하기에 재정적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많은 비용이 드는 과정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네 명과 함께 성전에서 그들의 나실인 서원 만료 예식을 돕고 그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대신 부담하도록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시한 타협안은 이런 것입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만일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고,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유대인이 되려고 할 때에는 회개의 뜻으로 결례 기간을 가지는데, 최소한 성전에서 7일 동안을 머뭅니다. 그리고 30일 동안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에 잘못한 것을 다 회개하고 씻어버리고, 그 다음부터 당당하게 같은 유대인들 속에 들어가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바로 그 예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에 대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그릇된 오해가 풀어질 것이고, 바울이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며 전통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잘못한 것이 없지만 일단 잘못한 것으로 해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이 제안한 타협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방 지역에서 돌아온 바울은 결례를 행하였고, 성전에 머물면서 나실인 서원 기간이 끝난 네 명의 기간 만료 예식을 옆에서 도와줌으로써 자기도 역시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위대한 사도 바울이 단지 수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여론이 무서워서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고 마치 율법의 신봉자인 것처럼 서로 타협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때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더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나약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 바울이 어떤 심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까? 바울이 유럽 대륙인 고린도를 출발해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그가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성령님의 거듭된 예고에 얼마나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만류했습니까? 그렇지만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선포하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 바울이 무엇이 두려워서 자기 신앙의 양심을 저버리고 타협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야고보와 장로들이 이때 바울에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율법이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시인할 것을 요구했더라면 바울은 목숨을 걸고 거부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그저 주어지는 구원에는 어떤 경우에도 율법이 전제 조건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던 것은 그것이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요구했던 것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할 만큼, 그는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문제, 즉 윤리 문제나 혹은 생활 문제, 의식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를 해서, 내가 죄인이 되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울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에 대한 접촉점을 확대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증언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특권으로까지 인식되었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완전한 자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유자로서 많은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유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도리어 종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행동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없는 무할례자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인 진리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하지 않았지만, 비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사랑의 융통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누구와도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마음에서 엄청난 타협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협이기보다는 양보입니다. 양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충성이요,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고, 아무쪼록 교회를 평화롭게 하고,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타협안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에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던 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죽을 것도 각오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던 것은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성숙한 자세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성숙한 삶의 자세를 본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상대에게 자기를 맞추어주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삶의 자세는 마치 물을 연상하게 합니다. 물은 그 물이 담기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물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물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만, 담기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서 물은 계속 모양이 바뀌어집니다. 바울의 삶이 그와 같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께는 율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그리스도의 율법은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삼았던 유대인들의 율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그리스도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율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1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어지는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습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웃의 아내나 남편과 간음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살인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웃의 것들을 훔치려는 흑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서 율법은 완성됩니다. 바울이 언급했던 그리스도의 율법이 바로 이 사랑의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로 하여금 자기에게 맞추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를 상대에게 맞추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얻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이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것은 물의 특성이지만, 그 과정에서 물의 본질이 변질되거나 썩어서는 안 됩니다. 물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본질이 변질되거나 썩어버린 물은 아무리 아름다운 모양의 그릇 속에 담겨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살았던 삶을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삶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활짝 열린 마음이 한 면이라면, 또 다른 한 면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의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주기 위한 자기 절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서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의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서,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해서 신앙적으로 실족하는 사람이 없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을 그와 같은 자세로 살면서 자신의 삶으로 다른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본질은 곧 생명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듯이 복음의 본질을 포기하면 전부를 잃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비본질에 있어서는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본질은 너무 쉽게 타협하면서 비본질적인 문제들, 아주 사소한 문제는 생명을 걸고 다투고 분열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사랑의 융통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연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부러지지 않을 것이요”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함께 주 안에서 더불어 흘러가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바울처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다. 동시에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지켜주기 위해, 일평생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이 없게끔 주님 안에서 자기 절제의 거룩함을 입고 살아가십시다.
바늘구멍처럼 편협한 나의 마음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절제해야 할 것을 절제하지 못한 나의 삶으로 많은 사람을 신앙적으로 실족시키는 덫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바울처럼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사랑의 융통성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우리를 통해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의 역사가 새로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