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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사상과 그의 시 정신
김정오
우리의 현대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 다만 상당히 오랫동안 서구문학의 모방이나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용하던 시대도 있었고, 난해시가 아니면 대접 받지 못하던 시대도 있었으며, 이야기 조의 시가 사랑 받던 시대도 있었는가 하면 70년대의 목적성을 띈 참여문학의 열기가 너무도 뜨거웠었던 적도 있었다.
그 후 80년대 해 머리(年頭)에 신경림의 글말 (詩語)에서부터 민중시(民衆詩)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비롯된 후 활발하게 저항적 순수시 운동도 펼쳐지게(展開)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또 다른 여러 갈래의 시운동도 여러 모습(多樣)으로 펼쳐 왔었다. 그러나 아무리 현대 시가 발전하고 놀라운 변천과 변화가 있을 지라도 이를테면 순수시이거나 저항 시 혹은 민중시이거나 통일을 열망하는 그 어떤 시들도 그들 시의 깊은 내면에는 윤동주의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문학적 사상이 함께 맥맥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그 어떤 시인 치고 윤동주의 “서시”(序詩)적 사상과 삶이나 “십자가”적 시정신과 “별 헤는 밤” 같은 아름다운 시 정신을 사랑하지 않을 시인이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윤동주의 모든 시적 사상이 우리나라의 많은 시인들의 시 사상 (詩思想)속에 잠언적(箴言的)영감으로 녹아(溶解) 흐르면서 시적 감명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아니 시를 아끼는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시속에 흐르는 이 아름다운 정신을 사랑하지 아니할 사람이 그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 윤동주는 우리 민족의 본질적 사상을 그 짧은 시속에 담아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심어놓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너무도 짧게 살았지만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장엄하게 살다가 간 그의 삶과 그의 시 세계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인과 그 시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자들과 평론가들과 후학들에 의해 수 백 편이나 되는 논문과 평론과 평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필자는 윤동주의 시집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최초로 14억 중국인들에게 알렸던 몇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일을 위해 1994년 중국 연변대학교의 고적연구소 소장 최 문식 교수와 한민족 역사문화 연구소를 맡고 있는 필자가 연변대학교의 박 문일 전 총장과 정판용 부총장 권 철 교수 및 관계자 몇 분들과 함께 그 역사적인 일을 끝낸 후 감격했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외람 된 줄 알면서도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시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미 알려진 사실도 많지만 여기 그의 삶을 다시 조명해 본다.
북간도 명동촌과 윤동주 일가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동북부에 자리한 당시 만주국 간도성(지금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명동 촌에서 이곳 명동중학교 교원인 윤영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아우 윤일주교수와 외사촌이면서 그와 함께 소학교 6년간을 함께 공부했던 시인 김정우 (金楨宇)교수의 회고록 그리고 일본 후꾸오카 감옥에서 함께 옥사한 윤동주의 고종 사촌 송몽규의 조카이며 소설가인 송우혜님이 쓴 윤동주 평전을 토대로 또 필자가 몇 차례 가서 본 북간도 명동 촌(明東村)의 유래와 자연 환경을 살펴 정리해 본다.
명동 촌은 1900년대에 와서 교육과 종교와 독립운동 등의 모든 면에서 관북일대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명동 촌의 역사는 1889년 2월18일 두만 강변의 도시 회령, 종성 등에 살던 네 가문의 학자 집안 스물 두 집의 가족들 141명의 대 이민단이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종성에서 고을 어른(頭民)인 성암(省菴) 문병규(文秉奎)의 가문 남평 문씨 40명 그리고 맹자를 만 번(萬番)이나 읽은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의 가문 전주 김씨 31명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南道薦; 본명 南宗九)의 가문 7명 그리고 회령에서 동학도(東學徒) 였으며, 주역을 만 독(萬讀)한 분으로 실학사상에 투철했던 소암(素岩) 김하규(金河奎) (김신묵 여사의 부친) .김해 김씨 가문 63명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먼저 돈을 모아 선발대를 보냈다. 그리고 동한(董閑)이라는 청국인 대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인 후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자 돈을 낸 만큼 땅을 나누어 가진 후 조선 사람들의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가장 먼저 공동 부담금에서 학전(學田;또는 교육전)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따로 내놓은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금을 교육 기금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문병규, 남도천, 김약연, 김하규,등 이들 네 분은 각자 고향에서 후세들에게 교육을 시키던 훌륭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나이가 많은 문병규 남도천 두 분은 뒤로 물러나고 그 대신 김하규 (당시38세) 김약연(당시32세) 과 남도천의 아들 남위언이 학당을 열었다. 그리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책을 사다가 학동들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문병규의 증손이며 문익환 목사의 선친인 문재린(文在麟,1896-1985,)목사는 김약연 선생에게서 직접 들었다면서 이들의 북간도 이민동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1.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잘 살아보자.
2.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삶으로써 옛 우리 땅 간도를 다시 우리 땅으로 만들자
3.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자..
한편 윤동주의 증조 할아버지 윤재옥씨의 가문 파평 윤씨 18명은 명동 땅에 대 이민단이 들어온 다음 해인 1900년 많은 땅을 사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윤동주의 집안은 이곳에서 가장 잘사는 집안이 되었다.
그 후 동주의 외삼촌 규암(圭巖) 김약연 선생이 1901년에 규암재 (圭巖齋)라는 사설학교를 설립하고 한학(漢學)을 가르치기 비롯했다. 그로부터 5년 후1906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상설(李相卨)선생과 이동녕 (李東寧)선생이 명동 촌에서 30리 떨어진 용정 촌(龍井村)에다가 서전 의숙(瑞田義塾)을 설립하고 신학문을 가르치며 민족주의 교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설선생이 고종의 어명을 받고 해아 밀사(密使)로 떠난 뒤에 서전 의숙은 문을 닫게 되었다. 이때 규암재는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명동서숙(明東書塾)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명동서숙(明東書塾)이 문을 열게 됨으로써 명동 촌이라는 고을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1909년 명동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로 발전시켰다.
1년 후 1910년 우리나라가 강제로 일제에 합병 된 후 서울로부터 기독교 청년학관에서 공부한 정재면 (鄭載冕)선생을 교사로 초빙했다. 이때부터 김약연 선생과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연 선생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교회당을 만들고 학교를 서양식 벽돌로 짓게 되었다. 마을에는 비로소 활기가 넘쳐흘렀고, 신문화 운동의 싹이 움트기 비롯했다.
정재면 선생은 신학문과 함께 명동 촌에 최초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북간도의 기독교는 서양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힘으로 전파된 것이다. 같은 해에 16세 된 윤하연의 아들 영석 (永錫,1895-- )이 규암 선생의 누이인 김용 (金龍,1891--1947)과 결혼한다. 김용은 도량이 크고 인품이 너그럽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학자 집안 출신답게 처신 또한 조신했다. 손재주까지 타고나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서 그 고을 일대의 처녀들은 시집갈 때 김용이 지어준 새 옷을 입고 결혼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단 삯바느질이 아니라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지어준 것임1)
그 후 북경 유학을 다녀 온 영석이 명동 중학교의 교원으로 재직 중이던 1917년 12월30일 윤동주가 태어나게 된다. 한편 동주의 할아버지 윤하연은 윤재옥씨의 4형제 중의 맏이였는데 풍체가 당당하고 도량이 크신 분이었다. 기독교에 입교한 몇 년 후에 장로가 된 그는 학자는 아니었으나 너그럽고 인자하였으며, 위엄이 있어서 집안과 마을에서 존경을 받았다. 규암선생이 선비로서 지역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다면 윤하연 장로는 실질적으로 가문과 교회와 마을의 모든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면서 화목한 가운데 이끌어 갔던 뛰어난 지도자였다. 결국 이렇게 훌륭했던 두 지도자의 가문이 핏줄로 연결된 것이다.
한편 명동 학교에는 황의돈 (黃義敦) 장지영 (張志暎) 박태환(朴兌桓: 周時經 著 “朝鮮語文法(유고)”正音社版 卷一 “朝鮮語文典音學”의 서문을 쓰신 분)선생과 당시 최세평이라는 가명으로 군사 교육과 체육을 가르쳤던 김홍일 (金弘壹)장군 등 여러 애국지사들이 교사로 초빙되어 부임했다. 윤동주는 9살 나던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여기에서 나라 사랑과 민족정신을 철저히 배우게 된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당숙인 윤영춘(尹永春) 선생도 그 학교의 교원으로 있었고, 함께 졸업했던 동급생 14명 중에는 고종 사촌인 송몽규(宋夢奎)와 외사촌인 김정우(金楨宇,圭巖선생의 조카 시인)와 당숙인 윤영선(尹永善,의사) 그리고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있었다. 특히 이들 중 고종 사촌인 송몽규와는 특별한 인연으로 마지막까지 후쿠오카 감옥에서 며칠 사이를 두고 함께 옥사한다. 이들은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후 함께 중국인 학교인 대납자(大納子)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을 다니고 졸업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패(浿),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만남도 여기서 이루어진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 입니
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
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
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잼”,‘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래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가 이 시를 쓴 것은 1941년 9월경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씌어진 작품들로는“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序詩)” “간(肝)”등이 있었다고 그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정병욱 교수가 증언하고 있다. 이시는1931년 대랍자(大拉子)라는 곳에 있던 중국인 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소년기를 회상하면서 쓴 시이다. 타향에서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각가지 상념에 쌓여, 그로부터 꼭10년이 지난 1941년에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더 크고 웅장한 내일의 이상을 노래한 이 시는 앞부분은 현상을 감상적이고 직서적(直敍的)으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나 끝 부분은 고뇌에 차 있으면서도 확고한 신념과 믿음으로써 소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별은 동경하는 이상 세계를 상징한다.
그의 시 마지막 연의 네 줄은 싯귀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일제 억압인 겨울이 끝나고 광복의 봄이 오면, 부활(復活)과 재생(再生)의 풀이 무성할 것이라는 예언 그대로 이루어 젔을 뿐만 아니라. 북간도 용정 뒷산에 묻힌 동주의 무덤 위에 해마다 봄이 오면 파아란 잔디가 돋아났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 명동촌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에 공산주의자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중류이상의 주민들이 모두 용정으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여기에서 시인 박태진 (朴泰鎭)과 만나게 되고, 동양사와 국사를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명희조 선생은 한문과 국사와 동양사를 가르첬는데, 그는 우리의 국사를 동양사와 세계사의 관련 속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현실을 똑바로 알게 해 주었으며, 조국의 광복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윤동주의 생애와 명동촌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 촌의 자연 경관은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고을이다.. 널직한 들판을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져 있는 그 일대에 여러 마을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서 명동 촌이라고 한다. 이곳은 동북서로 완만한 호선형 (弧線形) 구름이 병풍처럼 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곳은 원래 청국인 들이 살고 있을 때는 ‘동가지팡“(董家地方) 부걸라재 (명동촌의 서북쪽으로 비들기 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뜻; 우리 한인들은 선바위라고 함) 라 부르는 용정 쪽의 골짜기 입구에 커다란 바위 셋이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면서 찬바람을 막아 주고 있다
그 바위들 뒤쪽으로 우리 조상들이 당나라 군사나 수나라 군사들과 한판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직한 곳으로 짐작되는 산성이 있다. 지금도 , 화살 같은 유물들이 가끔 발견 되는 곳이다. 그리고. 동쪽에서 뻗어 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 고개인 오봉산과 살바위라는 뾰죽산 들을 솟아 내면서 서남쪽으로 맥을 이어 가고 있고, 마을 앞으로도 드높은 산들이 겹겹이 준령을 이루며 선바위를 스쳐 지나간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명동 촌이란 여러 마을을 합쳐 두루 불리어진 고을 이름이다. 우리 한인들이 들어가 살면서 동네 이름들을 모두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강북에 학교 촌, ,세호 동네, 용암 촌, 장재 촌, 중영 촌 등이 대략 1킬로미터의 간격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고,. 강남에도 대략 이 정도의 간격으로 큰 사 동(뱀골) 작은 사 동 수남촌 등의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동주의 집은 학교 촌 입구의 첫 집이었다. 동주의 할아버지가 손수 벌채하여 지은 정 남향의 집으로 마을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이 한가롭다. 타작마당, 북쪽 울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으며,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시(詩) 자화상 (自畵像)에 영향을 준 물맛 좋기로 이름난 수 십 길도 넘는 우물이 있고, 그 우물가에서 보면 저 만큼 동북쪽 언덕 중턱의 가랑나무 우거진 야산 기슭에 교회당과 고목나무와 그 위에 올려 져 있는 종각이 보인다. 그리고 그 건너편 동남쪽으로 큰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이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동주는 소년 시절에 과수원의 울타리로 되어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먹으면서 꿈을 길렀고, 이 우물을 드려다 보면서 시상을 길렀다고 시인 김정우님은 증언한다.
산 모통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詩, 自畵像 全文)
이 시는 성찰적 고백적인 성격의 시로서 나르시시즘적 경향의 시이다.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하여 수선화가 되었다는 그리스의 신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바탕을 두고 그것과 맥이 통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물속의 사나이가 있고, 그를 들여다보는 “나”가 있다. 이 둘은 둘로 나누어진 자아 속에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을 거듭하다가 화합하는 과정을 거치는 변증법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시이다.
그런데 동주의 2년 후배였던 장덕순 교수는 이 시를 설명하면서 동주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 남에 대한 애정은 곧 자신에 대한 자학(自虐)으로 변모하는 인생관이 그의 시작 여러 곳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시속에서 전자의 “그 사나이는”외톨로 된 동주 자신이고 후자의“그 사나이”는 인류(人類)의 일원인 동주 자신이라고 정의하면서 자기 이외의 모든 동포의 행복을 기원하면서도 자기를 준험한 산맥임을 자학하는 그의 희생의 휴머니티가 나타난다고 하였다.2)
“이제 네게는 森林속의 아늑한 湖水가 있고
내게는 險峻한 山脈이 있다.(사랑의 전당(殿堂))
또 그의 집 왼편에 있는 대문을 나와서 큰길로 향하면 그 동북쪽 언덕에 교회당이 있다. 그리고 뒷산 큰 바위 위로 떠올라 쫓아온 햇빛이 우거진 가랑 나무 숲 속에 자리한 고목나무에 올려 져 있는 종각과 첨탑 (尖塔)위의 십자가를 비추고 있었다는 시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윤동주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눈을 떴을 것이며, 십자가와 같은 아름다운 시를 썼을 것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가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 십자가(十字架) 전문)
이 시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기독교적 수난 의식과 속죄양(贖罪羊)의식의 바탕 위에서 씌어진 시이다. 이시는 당시의 상황을 어두운 밤으로 인식하고 고난을 짊어지려는 자기희생의 의지로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결의에 찬 신념의 목소리를 낸 시이다.
이 시를 장덕순 교수는 윤동주의 자아 부정의 인류애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시라고 하면서 예수처럼 전 인류의 구세주를 의식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의 포근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시3)라고 했으며 백철은 ‘당시의 민족 수난의 현실에 대하여 시인이 혼자서 그 비극을 치르는 일을 자원하고 나선 그의 순교자적인 심정과 염원이 잘 나타나 있는 시4)라고 했다.
또 박두진은 이 시를 “그의 시중에서도 그의 모두를 가장 상징(象徵)적으로 대표하는 백미 (白眉)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십자가에 나타난 시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순절정신(殉節精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정신은 그대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지워진 영예롭고 막중한 부담으로서 육박해 오고 있다. 그의 시와 생애가 우리 민족시사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시대와 시대의 변천을 초월해서 불후의 가치를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역설한다.5)
여기서 다시 김정우님의 윤동주의 고향 자랑을 정리해본다. 명동 촌에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 진달래 개 살구꽃 산 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방울꽃들이 시새워 피고 앞 강가 우거진 버들 숲 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 속에 파 뭍인 무릉도원이 된다는 것이다. 또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이 장관이었고, 가을이면 멀고 가까운 산과 들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들판이 황홀하였으며, 겨울에는 산과 들의 나목의 앙상한 가지들이 삭풍에 울부짖고, 은색 찬란한 설야 속으로 옥색 어름 판이 구비 구비 뻗으면서 선바위 골로 빠지는 풍경은 실로 절경이었으며, 폭설이라도 내릴라치면 노루 떼 멧돼지 떼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면 온 마을은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달나무 팽이 돌리기 썰매타기 스케이트 지치기 매를 갖고 꿩 사냥하는 것 따라 다니기 등 명동촌의 추억은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역사적인 고장에서 어찌 윤동주 같은 훌륭한 시인이 안 나올 수 있을 것인가.?
7.일본인들조차 사랑하는 윤동주의 시 정신
그러나 그의 성장기와 교육받던 시기 또 시를 쓰던 시기와 그가 1943년 일경에 채포 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나던 1945년의 그 시기는 한마디로 우리 민족으로서는 최악의 암흑기였다 그런 시절을 살아가면서 시를 썼던 그는 민족의 한을 시로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관에 대한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 세계를 은유로서 개탄하는 그의 시어 속에서 그의 삶의 세계가 넉넉히 드러나 있다 그의 그러한 삶의 세계를 우리는 그의 시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이 마구 유린되고 더럽혀 지던 인간의 나성적 폭력에 의한 욕망만이 팽배해 있던 어둡고 답답한 세태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의 모습을 시를 통해서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그 세태를 원망하면서도. 오직 조국의 자연과 깊은 신앙심에서 울어 나오는 신(神)만을 일편단심 의지하면서 피를 말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의식 속의 아픔과 고뇌 그리고 그 시대의 찢겨지고, 버려진 처참한 내적 갈등을 시로서 형상화 시켰다. 다만 직선적인 시어로 표출하는 대신 우회적인 비유를 들어 묘사함으로서 충격과 아픔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상투적인 수사법적 구성을 뛰어넘는 야생마적 기질도 용인될 수 있었고,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하고 치밀한 감각적 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수사법을 구성했다.
그의 한편 한편의 시들을 보면 대게가 새로운 경이요, 감격이며, 신과의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문맥의 흐름 또한 나름의 리듬이 독특하고, 소박하면서도 순수한 비유와 은근한 함축미 또한 얼마나 격조 높은가. 결국 윤동주의 시는 사랑의 참된 뜻을 우주 창조 정신으로 승화시키면서 영생력을 품은 자연 현상의 특성으로 압축귀결 시킨 수준 높은 작품들이다. 그리고 푸르렀던 산을 붉게 태우는 가을의 화신, 꼭꼭 얼어붙었던 차가운 한 겨울에 온몸을 녹여주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처럼 또, 아름답게 비추는 산봉우리의 지고한 햇살처럼 비유와 상징을 나타내는 시와 이미지의 순결성은 마치 성경의 시편 속에 나타나는 시의 정신을 짙게 풍겨 주는 듯 우리의 시를 더한층 높은 경지로 발돋움시키면서 신성한 미학의 실현을 이룰 수 있는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문장의 간명성이나 서정성이 그의 마음을 저장하고 조화하여 생명 화하는 기능 즉 글월의 순발력은 차라리 우리를 슬프도록 아름답고도 독특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 있다. 게다가 너무도 젊은 나이에 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시인의 한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너무도 순결하고 아름다운 시와 시인의 마음을 한국 사람으로서 어찌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다. 일본인들조차“ 윤동주는 어지러움 속의 순결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윤동주의 사랑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한 예로 2002년 봄에 한국을 찾은 일본의 윤동주 추모회 회장인 일본 후쿠오카대 니시오카겐지(西岡健治. 57.)교수는 그가 한국에 도착한 제일 첫마디 소리로 “윤동주는 우리의 친구이고, 아들이며, 오빠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북 경산대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일본에서의 윤동주 열기”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윤동주의 시와 억울한 죽음을 지금 우리의 가슴 속에 뜨겁게 살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순결한 삶을 추구한 윤동주는 우리의 영원한 친구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는 애틋한 자기 연민과 사랑을 평범하고 쉬운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어(詩語)는 나약함이 아니라 강한 모성 같은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라고 할까요! “별 헤는 밤” ”서시‘ ”십자가‘에는 순결하고 헌신적인 자신의 삶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라고 덧 붙였다.. .연세대에서 국어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10년 동안 세종대에서 강의를 한 후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해부터 100여명의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을 만들고 수시로 모임을 갖고 있다. 그리고 1995년 윤동주 추모회로 한 단계 높여 조직을 다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 시인이 숨진 후쿠오카 형무소의 뜰에서 첫 위령제를 올린 뒤 해마다 2월이면 윤동주가 공부한 도시사(同志社)대학의 시비 앞에서 추모식 을 열고 있다6)
뿐만 아니라 일본의 기독교 단체의 이누가이 미쯔히로(犬養光博)목사(1939년생)도 가도 게이지(加藤慶二)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해 받은 유서를 공개하면서, “서시(序詩)“ “별헤는 밤“은-내가 좋아하는 시입니다.”저항시인“ 윤동주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꾀했다 하여 붙들려 가서 일본의 패배와 조선의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한글로 시를 쓰고 ,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맹세하면서 죽어갔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살아 가고자 했던 윤동주를 죽인 것은 일본인과 일본 정부였습니다.7) 라는 통한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다카도 가나메(高堂度)(1932년 생)라는 극작가도“나는...연세대학교 구내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詩碑)를 찾아가 둘러보고 왔습니다. 거기에는 서시 (序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서시 (序詩)는 1941년 11월20일에 씌어진 시입니다 .50년 전에 씌어진 시가 오늘도 싱그럽게, 오늘에 씌어진 시처럼 내 영혼을 뒤흔들어 줍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내 가슴에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일본인인 내 가슴을 도려내고 마구 쥐어뜯어 마음에 아픔을 안겨 줍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 시커멓게 갈앉은 죄와 더러움이 정화되고, 내 마음속에 있는 아픔과 괴로움이 위로 받아 이 나에게도 새로운 만남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주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캠퍼스를 걸으면서 나는 윤동주의 발소리를 듣고 윤동주의 체온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우러른 하늘을 쳐다보고, 그의 피부를 스친 바람을 느끼고, 그가 사랑하는 별을 환상으로 보고, 그가 좋아했던 코스모스를 바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은 시인 박두진(朴斗鎭)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늠름한 희생은 그 작품과 생애의 불멸의 가치와 더불어 일제의 만행과 침략, 군국주의 죄악사(罪惡史)를 언제까지나 고발하고 또 심판하고 있다.”
나 자신도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침략과 죄악을 증오하고 있습니다.(중략)한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나는 자신이 직접 범하지 않은 ‘만행’과 ‘침략’과 ‘죄악’을 원죄(原罪)로 받아 몸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윤동주를 학대하고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더러운 손은 바로 나의 것입니다. 나는 윤동주가 쓴 가장 원숙한 만년의 그 귀중한 시 원고가 일본 관헌의 손에 몰수되어 어쩌면 쓰레기처럼 소각되어 버렸을 것을 생각하면 마치 내가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자 해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원죄를 나는 평생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앞의 책P45-46참조)‘
이 외에도 구라다 마사이코(藏田雅彦)1947년생 도산( 桃山) 학원대학교수와 또 우지꼬 쓰요시(宇治鄕毅)1943년생 (국회도서관 사서) 씨와 모리다 스스무(森田進)1941년생 (혜천(惠泉) 여학원, 단기대학 교수)씨 그리고 기노시다 나가히로(木下長宏)1939년생 (경도(京都) 예술 단기대학 교수)씨 등이 윤동주의 시와 그 사상과 인간을 한없이 존경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윤동주 시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부키고; 伊吹鄕역>)가 출판되었는데 시인 아라키 노리코씨의 해설로 정평 있는 고등학교 신편 현대문(新編現代文; 치쿠마 쇼보) 교과서 pp137-147에 실려 있다.
한국인의 시가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인“.<모리다 스무스(森田進)>교수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젊은이들의 혼속에 윤동주의 시 세계가 널리 퍼져 나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논다.‘고 했다8).
일본 교과서에 실린 글 중 윤동주의 작품은 생략하고 내용 일부만 소개한다.
한국에서 좋아하는 시인은‘하고 물으면 흔히 윤동주’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20대가 아니면 결코 쓰지 못할 그 청렬(淸冽)한 시풍은 젊은이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오래 살수록 부끄럼 많은 인생을 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이런 시를 쓰기는 어려워진다. 시인에게는 요절 (夭折)의 특권이라는 것이 있어 젊음이나 순결을 그대로 동결 시켜버린 듯한 청순함이 후세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게 마련이며, 펼치면 항시 수선화 같은 향기가 피어오른다. 요절이라고 했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질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1945년 패전의 날을 겨우 반년 앞둔 만 27세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유학 곧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겼고, 독립운동의 혐의로 시모가모(下鴨)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로 이송된다. 거기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주사를 계속해서 맞았다고 한다. 운명하기 직전에는 모국어로 무어라고 크게 소리치고 숨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슨 말이었는지 일본 간수는 알 수 없었다.(중략) 통한의 심정 없이 이 시인에게 접근할 수는 없다.(이하약)(앞의 책 PP231-241참조)
얼마나 위대한 시인이면 일본의 고등학교 정규 교과서에 실리도록 하여 감수성 많은 고등학생들에게 윤동주를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 했겠는가? 지금도 계속해서 윤동주의 시와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다.
그 증거로 한 예를 본다. 2002년 8월31일 서울 장충동 한국 현대 문학관에서는 “윤동주 시를 읽는다. 라는 주제로 2002년 한일 독자 교류의 모임”이 열렸었다. 그때 이 모임에는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도꾜)”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데쓰코(楊原泰子)도 참여했다. 그는 평소 윤동주의 시를 무척 좋아해서 항상 그의 시집을 가까이 놓고 살았다. 그러는 중에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을 보게 되었다. 그 책에서 릿쿄 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모양에 대해서 쓴 글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같은 대학 출신인 그는 1942년의 릿쿄 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져보게 된다. 그것은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의 윤동주의 사진을 보면, 당시 신사 머리라고 불렀던 긴 머리 모양이었다. 그런데 1942년 7월 릿쿄(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귀국한 그의 머리는 빡빢 깎은 머리였다. 이 궁굼 증을 풀어 보기 위하여 그는 신문을 모두 뒤져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신문의 4월초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 결국 윤동주가 머리를 짧게 깎게 된 것은 학교 측이 강요한 단발령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윤동주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면 윤동주의 머리 모양이 변한 것까지 알아보았겠는가?
데스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윤동주의 릿쿄 대학시대”라고 정리하여 “한일 독자교류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전해 주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 전쟁으로 전시 체제아래 있었던 릿쿄 대학에서는 군사훈련을 위해 육군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하여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하여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겼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의 도꾜와 후쿠오카와 교토 등지에서는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매년 윤동주의 기일이면 모여서 꽃다발을 바치고 그를 기리면서 시를 낭송하는 추모의 밤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쿠(愛澤革)는“일본 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일본인들 가운데 윤동주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중에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과 도꾜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1997년부터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 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 고 말하고 있다.9) 일본의 압제에 맞서 저항했던 한 사람의 시인이 그를 죽게 한 그 나라 사람들에게서조차 영원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훌륭한 시인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꿈 많은 사춘기 시절 중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동문수학했던 문익환 목사도 윤동주의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그에게 와서는 풍파는 잠을 잤고 다들 양같이 유순하고 호수같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넋 속에는 남모르는 깊은 격동이 있었다. 호수같이 잔잔한 해면 밑 깊은 데는 아무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해류의 흐름이 있듯이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 -중략 -그의 눈은 언제나 순수를 찾아 하늘을 더듬었건만 그의 체온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과장 없이 고백할 수 있다. 그의 깊은 데서 풍겨 나오는 인간적인 따뜻함을 나는 아직 아무에게서도 느껴 본 일이 없다. 고 그러기에 그가 차지하고 있던 나의 마음 한구석은 다른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국 땅 만주에서도 신경(新京)의 거리를 헤매다가 해방의 종소리를 듣던 그 정오에 내 마음 견딜 수없이 쓰리게 한 것은 동주 형의 환상이었다.-중략-
그에게 와서는 모든 대립은 해소되었다. 그의 미소에서 풍기는 따뜻함에 녹지 않을 얼음이 없었다.-중략-그는 민족의 새 아침을 바라고 그리워하는 점에서 아무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것을 그의 저항정신이라 부르는 것이리라......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10)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시인 윤동주는 우리들 가슴속에서 영원히 함께 살고 있다.
8.윤동주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한 사람의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기까지는 반드시 훌륭한 인물들이 뒤에 있었다. 우선 윤동주도 그의 가족사의 뿌리만 보더라도 본가 외가를 막론하고 좋은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그런 가족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성장기에도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또 훌륭한 교수님들을 만난다. 최현배. 이양하. 손진태. 정인섭. 하경덕, 민태식, 김두헌 교수님들이 그들이다. 특히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최현배 교수님으로 부터는 한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가슴깊이 심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 분은 틈만 나면 “여러분들은 나라를 사랑하라. 자기를 구하려거든 먼저 겨레를 구하는 일에 나서라. 세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동주는 연전 입학 전부터 최현배를 흠모하고 <우리말본>을 소중히 여기면서 책상 위에 꽂아 두고 우리말의 성음(成音)과 구조를 익혔다. 그의 시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말의 가락을 잘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외솔의 영향이 컸다“.11)라고 당시 연희전문하교에서 동문수학했던 유영교수는 밝히고 있다.
또 유현민 (兪賢民)은. 1941년 외솔이 일본어 사용을 비방했다는 구실로 종로서에 붙잡혀 갔다가 20일 간이나 문초를 받고 돌아 왔을 때의 일화를 이렇게 증언 하고 있다.
그때 학생들은 일제히 “선생님/하고 모두들 반가움과 분노에 얽힌 소리로 울먹이자 잠시 입을 떼지 않고 있던 외솔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못난이들 우는 이유가 뭔가!“ 교실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자네들은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갈 기둥과 대들보들이야. 다시 말하면 민족 갱생의 에너지들이란 말이야 그런 젊은이들이 고작 우는 얼굴들이나 하고 한숨만 쉬고 앉아 있어 이 못난 이들,/ 퇴페주의를 당장 버리지 못해 그 무기력하고 어두운 얼굴을 버리지 못하느냐 말야.12)“
그리고 영문법을 강의하던 하경덕 교수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결국 일본 유학을 갈 때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하교수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이다.
이양하 교수님은 또 다른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분은 수필가이며, 시인인 동시에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크게 날리던 분이었다. 말이 서투르고 더디면서도 깊이 있는 강의, 무게 있는 학식에 모두 머리를 숙여 존경하며 따랐다. 그리고 윤동주는 그분의 지도를 받으면서 시의 깊이는 날로 더 깊어지고 완숙해져 갔다. 얼마나 이양하 교수를 존경하고 따랐는가는 그가 직접 친필로 써서 만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3권의 시집 중 한 부를 이양하 교수님에게 드리고, 나머지 두부는 친구 정병욱과 본인이 한 부씩 보관했겠는가!
다음으로 역사학의 손진태 교수와 음운학의 김선기 교수, 한문과 고전의 민태식 교수 그리고 회화를 가르치던 이묘묵 교수와 체육의 강낙원 교수 그리고 원더우드의 2세 원한경 박사와 유억겸 교수 이춘호 최규남 김두헌 교수님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또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정인섭 교수였다. .달변과 박학의 명 강의로 문학개론을 강의했던 정교수님이 학기말 시험을 글짓기로 대신 했다. 모두들 진땀을 쏟을 때 윤동주는 “달을 쏘다.”라는 글을 써냈다. 그 글은 후에 윤동주의 시집에 함께 실렸다.
그러나 윤동주의 문학적 영역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 시인이 있었다. 정지용(鄭芝溶) 시인이다. 윤동주는 정지용의 모든 시를 좋아 했다. 그 중에서도 압천(鴨川)의 시는 가장 좋아 했던 시이다.
압천(鴨川)
압천 십리(鴨川 十里ㅅ )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물 소리.....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어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 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 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십리(鴨川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 (‘압천’전문)
윤동주는“정지용 시집”의 빈칸에다가 붉은 색연필로 “ 걸작(傑作)”이라고 써놓았다. 그만큼 매혹되었다는 뜻이라고 송우혜님은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압천(鴨川)의 기법과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하로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로 시작되는“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1937.1>라는 시를 써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동지사 대학을 다닐 때 경도시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곳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경도는 704년 이래 일본 평안조(平安朝) 천년 왕도로서 명소와 사적 고적 등이 많은 도시다. 그가 그렇게도 좋아 했던 정지용이 6년간을 지내면서 동지사대학을 졸업 했다. 또 경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흐르는 그 압천(鴨川)을 매일 등하교 시간에 건너 다녔다. 그가 그토록 심취했던 정지용의 시 압천이 바로 거기 있다는데 더욱 감격한 것이다.13)
9.동시(童詩)의 누리(世界)
윤동주는 그 동안 상당히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시들을 많이 써왔다. 그러다가 1935년 12월에 “조개껍질”이라는 동시를 발표했다.
사실 윤동주는 동시를 숭실 중학 시절부터 쓰기 시작했다. 윤동주가 1935년 9월 은진중학교에서 숭실 중학으로 전학하게 된 것은 고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상급학교의 진학 때문이었다. 5년제 중학교를 나와야 만이 대학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동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시기에 시 10편 동시 5편을 썼다. 이 가운데 <공상>은 숭실 학회지 숭실활천(崇實活泉)에 실려 그의 시중 최초로 활자화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겨우 7개월간의 숭실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그것은 신사 참배 때문이었다. 그는 .당연히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시위를 한 후 1936년 3월 동맹 퇴학을(2년 후 페교 된다.)하고 용정으로 돌아 왔다 다시 좌절감으로 빠져 들게 된다. . 퇴학 전 1936년 3월에 만든 시<종달새>에서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 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가슴이 답답하구나./“하며 고뇌에 찬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하는 수없이 그해 봄 예전에는 가기 싫어하던 친일계의 광명학원 중학부에 4학년으로 편입하여 2 년 후 5학년을 마치고 졸업한다.
그럼 여기서 윤동주의 최초의 동시 “조개껍질“을 살펴본다.
조개껍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소리
(1935.12.)
윤동주는 이 최초의 동시를 발표한 후 잇따라 동시들을 발표한다. 시에 있어서도 쉽고 아름답고 구체적인 시어들을 진솔한 감성을 바탕으로 엮어 나간다. 현재 우리에게 심어진 윤동주 시의 특색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쓴 작품이 동시 병아리이다.
병아리
<뾰,뾰,뾰,
엄마 젖 좀 주>
병아리 소리.
<꺽,꺽,꺽,
오냐 좀 기다려>
엄마 닭 소리.
좀 있다가
병아리들은
엄마품속으로
다 들어갔지요,
(1936.1.6.)
그리고 이 시에 이어서“오줌싸게 지도”와 “기와 장 내외”가 36년 1월중에 발표되고 뒤를 이어 “비둘기“가 2월10일에 발표된다. 그렇게 해서 1935년 12월부터 1938년 5월까지 총32편의 동시가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많은 동시를 쓰게 된 이유를 송우혜님은 정지용의 영향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정지용의 제일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1935년 10월27일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당대 가장 유명했던 이 시인이 총89편의 시를 묶어 낸 그의 첫 시집은 한국 문단사에서도 찬란한 빛을 발하지만 윤동주의 시에 대한 의식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평생을 두고 가장 존경했던 시인이 정지용이었다. 그것은 그가 정지용의 시집을 밑줄 그어 가면서 정독했다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지용의 시중에서도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인 ”압천(鴨川)” ”향수(鄕愁)” ”카페 프란스“등의 시들이 제2부에 속해 있고 ”해바라기씨“ ”三월 삼질날“ ”별똥“ ”지는 해“등 동시들과 민요조 시 23편을 묶어 제3부로 독립시켜 제 2부와 당당히 어깨를 겨누게 했다는데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 그것이다14)
정지용의 동시 몇 편을 본다.
해바라기 씨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 나면
이슬이 내려와 같이 자고 가고 .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해ㅅ빛이 입 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깩‘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별똥
별똥 떠러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지는 해
우리 오빠 가신 곳은
해님 지는 西海 건너
멀리 멀리 가셨다네,
웬일인가 저 하늘에
피ㅅ빛 보담 무섭구나‘
날리 났나, 불이 났나.
아무튼 정지용의 위대한 문학적인 영향력은 윤동주의 문학적 영역을 동시(童詩)의 영역으로 까지 확대 시키게 되었고, 또 매우 뛰어난 작품들까지 남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윤동주의 연구가이며 그의 숭배자인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일본국회도서관 사서>는 윤동주는 본래부터 동시(童詩)가 그의 시정신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총 32편의 동시 중에서 무려 22편이 광명학원시절에 쓴 것이며, 윤동주의 시 총111편에서 차지하는 동시의 비중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래부터 윤동주의 가슴 속에 동시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는데 정지용의 동시를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후 많은 동시를 쓰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정지용이 불을 지른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윤동주의 동시 세계는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그 첫째는 자연과의 만남이다. <나무> <바다하늘도> <겨울> <눈> <조개껍질> 등이 그것이고.
그 두 번째는 자기 주위에 있는 생명들 특히 동물과의 만남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거기에는 <산울림> <귀뚜라미와 나와> <거짓부리> <닭> <개> <참새> <병아리> 등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정의 풍속도 특히 가족 사랑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는<애기의 새벽 > <버선본> <편지> <빗자루> <,햇빛 . 바람> ,<오줌싸개 지도>등이 그것이며,
네 번째는 민중의 삶을 그 주제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는 <해바라기 얼굴> <무얼 먹고 사나 > <굴뚝 >, <고향집>등이 그것이다.
윤동주의 동시 중에 사람과 동물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있는 평화롭고도 넉넉한 삶의 누리(世界)를 그려 놓은 아름다운 동시 한편을 <우지고 쓰요시(宇治鄕毅)>는 윤동주가 가장 깊이 추구하던 시 세계라고 평했다.15) 여기 그 동시 <봄>을 소개한다.
봄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롱가롱,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1936.10
10“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의“시집 출판
한편 1946년 2월16일 윤동주의 집에서는 그의 1주기 추도식을 거행했고, 그해 6월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19세의 몸으로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형의 친구들이었던 강처증, 정병욱 등을 찾아가서 형의 유품을 찾아냈다. 특히 정병욱이 소중하게 보관했던 친필 필사본의 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돌려받아 1948년 1월10일 정음사(正音社)에서 유고시집을 발간했다. 정병욱이 아니었더라면 우리의 위대한 시인 윤동주의 존재와 그의 명시들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가 해방 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친구 강처증의 역할이 컸다. 강처증은 당시 경향신문사 기자로 있으면서 1947년 2월13일자 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를 실었다. 그것도 당대의 최고 시인이며 경향신문사 편집국장이던 정지용의 시 해설까지 덧붙였던 것이다. 비록 r가 세상을 떠난 후이지만 화려한 등단이었다. 친구 강처증의 힘이 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윤동주의 친구로서 정병욱과 강처증은 우리 문단사에서도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로부터 3일후 1947년 2월16일 동주를 그리워하는 강처증, 정병욱 등 윤동주의 친지 30여명이 서울 소공동 풀라워 회관에 모여 민족시인 윤동주의 3주기 추도회를 열었다.16)
그때 정병욱 등은 윤동주의 시 필사본의 원본을 복사해서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연희전문시절 함께 공부했던 유영교수는<창(窓) 밖에 있거든 두드려라 -東柱. 夢奎 두 영(靈)을 부른다.>라는 애절한 추모 시를 낭송했고, 김삼불은 동주의 시를 문장심리학의 학설을 인용하여 세밀히 분석하면서 시의 문귀들을 품사별로 조사하여 통계를 내고 이를 소월의 시와 비교하면서 소월의 시를 넘어 섰다고 증명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특별히 참석했던 정지용은 이를 반박하였다. “민족의 얼을 시에 담고 순교로 겨레 앞에 쓰러진 시인의 아름답고 귀한 시를 자로 재고 칼로 쓸고 잘라 요리 달고 저리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니냐!”고 하며 그 나름대로 총괄적인 찬사를 보냈다. 이 자리에서 유시집(遺詩集) 발간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정지용은 경향신문 편집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동주의 시를 빛 보게 해주었고, 오늘날 빛나는 암흑기의 별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17)
그 다음 해인 1948년 1월10일 드디어 윤동주의 시집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발간되었다. 여기에 정지용은 서문을 썼고, 강처증은 발문을 썼으며, 2주기 추도식 때 낭송했던 유영의 추도시가 들어있었다. 특히 정지용의 서문은 명문장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강처증의 발문은 윤동주와 친구들 사이에 얽혀 있던 우정의 자취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로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다시 1955년 10주기를 맞아 그의 아우 윤일주(尹一柱)의 선백의 생애(先佰의 生涯) 등을 후기로 실은 증보판 이 간행되었다. 그 후 1979년 8월20일 다시 . 그로부터 31년 후인 1979년 8월20일 다시 정음사에서 동생 윤일주 교수가 엮은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중판이 발간되었다. 그 책에는 평론가 백철교수의 “암흑기(暗黑期) 하늘의 별”이라는 글과 시인 박두진 교수의 “윤동주의 시”, 그리고 만주 용정에서 같이 동문수학했던 문익환 목사의 “동주형의 추억”, 장덕순 교수의 “인간 윤동주”, 그리고 친동생 윤일주 교수의 “선백(先伯)의 생애(生涯)”라는 글이 실린 “ 시집이 정병욱(鄭炳昱)교수의 후기로 엮어져 나왔다. 그 밖에도 수많은 출판사에 서 수도 없이 많은 시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현재 시판 되고 있는 시집에는 이런 글들이 모두 빠져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지면 관계로 정지용의 서문 일부만 옮겨본다.
11.정지용의 <서문>
서(序)__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 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病)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叱咤)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詩人) 윤동주(尹東柱)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
겨우 30 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됨에 관한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피(虎皮)를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 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이 지나친 병노(病,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그의 유시병원 (遺詩 “病院)”의 일절(一節)
<중약>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이라는 구(句)가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抒情詩)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 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孤獨)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도 없이 /일제(日帝)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중략)
일제헌병(日帝憲兵)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白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間島)에 누어있다.(이하약)
1947년12월 28일 지용
12.송몽규와 윤동주의 운명적 삶과 죽음
윤동주와 송몽규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송몽규 부친은 송창희(宋昌羲,1890-?)선생이다 그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은 후 1916년 봄 명동촌의 지도자였던 윤하연 장로의 딸이자 윤동주의 큰 고모가 되는 윤신영(尹信永)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17년 9월28일 송몽규(宋夢奎)가 태어났고, 그 석 달 뒤인 12월 30일에 윤동주가 태어났다 그래서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종 사촌형이 된다. 이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쌍둥이처럼 함께 지내면서 명동소학, 은진중학, 연희전문을 같이 졸업하고 함께 문학을 했으며, 마지막 일본유학까지 함께 떠났다. 그리고 후쿠오카감옥에서 죽음까지 같이 했다. 송몽규의 아버지 창희 선생은 뒷날 칠두구(七頭溝) 소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대랍자촌 (大拉子村) 의 촌장이 된다. 창희 선생의 6촌 동생 창빈은 홍범도장군 부대의 독립군으로 있다가 1920년에 전사하고 그 밑으로 창근은 일본을 거처 1931년 미국에 유학,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학박사가 되고 한국신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한 분이다.
송몽규는 9살이 되던 1925년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등 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 동안 다니다가 졸업하고, 다시 그들과 함께 1932년 4월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3학년이던 1935년 1월1일자 동아일보에 <술가락>이라는 꽁트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해 봄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는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갑자기 중국으로 떠났다. 당시 만주는 형식적인 독립국이었으므로 중국은 외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2 1월28일에는 중.일 양군이 제1차 상해사변에서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사건이 있었다. 또 1933년 1월1일부터 중. 일 양군이 산해관(山海關)에서 전투가 일어난 후 5월31일에야 정전이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 국민군과 공산군 간에 벌어진 내전이 치열하여 중국 전역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또 1933년 10월5일부터 1934년까지 장개석 국부군은 1백만 대군으로 제5차 공산군 소탕작전을 벌이다가 그해 11월에 형식적으로는 내전이 끝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송몽규는 그 와중 속으로 들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송몽규는 이런 소용돌이 속으로 왜 들어갔을까?
송몽규는 거기서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성향상으로는 “김구파“에 속한 것이다. 송몽규가 임시정부의 산하 군관하교에 간 것은 은진중학교의 은사 명희조(明羲朝)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는 장개석 총통이 1933년 김구에게 장래의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을 양성하라고 준 격려금으로 세워진 학교였으며 1년 과정으로 일본육사출신이며 독립군인 이 청천 장군과 그 부하들이 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요시찰 인물로 감시되고 있었으며, 1936년 4월10일 중국 산동성에서 체포 된다. 그리고 . 본적지인 웅기 경찰서로 압송 됐고, 거기서 8월까지 심문을 받은 뒤 석방된다. 그 후 용정 윤동주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한다. 그리고 2년 후 1938년 2월26일 대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이때 윤동주도 광명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했다. 은진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헤어 졌던 이들이 연희동산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동주와 몽규의 동창이었던 전 연세대 유영교수는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한다.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있기도 하겠지만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마치 쌍둥이 같았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학원에 왔으니까 자연 학창생활도 같은 길을 걸었다.(중략) 동주는 말이 적고 행동이 적은데 반해 몽규는 말이 거칠고 ...행동 반경이 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시를 같이 공부하고 창작을 같이 하였다. 그러한 성격은 시에서도 역시 나타나서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 차이가 한 번도 어떤 불화나 틈을 벌이게 한 것을...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18)
윤동주와 송몽규가 연희전문을 다니던 시절은 가장 암흑기 시절이었다. 입학 바로 전에 시작된 중일(中日)전쟁은 그 전선이 점점 확대되었고, 조선에서는 황민화(皇民化)정책 이라는미명 아래 조선민족에 대한 우민화 (愚民化)정책이 날로 더 해 갔다. 그때 그는<새로운길;1938.5.10)을 비롯해서 많은 수작을 썼다 .입학하던 1938년에 시 8편 동시 5편 산문 1편을 썼으며 .1939년에는 5편 산문 1편을 남겼고. 그해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1939.1.))와 시’유언(1939.2.16.)을 발표했다. 1940년엔 시 3편만 쓰게 된다. 다시 1941년에 이르러 시 16편 산문 1편을 쓰게 된다. “중학교 시절이 습작기라면 이 시기의 것은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중학시절이 기교적이며 구상적(具象的)이었다면, 이 시기의 것은 서정적이며, 상징주의 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19)
그 후 1941년 12월2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 4년을 마치고 졸업한다. 그리고 송몽규는 1942년 4월1일 일본 경도제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했고, 윤동주는 같은 해 4월2일 동경의 입교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한 학기를 마치고 윤동주가 경도의 동지사 대학으로 전학해 옴으로 1942년 가을 학기부터는 송몽규와 윤동주가 다시 만나 한 도시에서. 지나게 된다. 그리고 고희욱(高熙旭)과도 만나 일제의 압정과 민족의 앞날에 대해 깊이 괴로워한다.
윤동주의 교또 행이야말로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교또는 그의 마지막 배움의 터전이 되었고, 일제의 마수에 걸려든 비운의 땅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다음해인 1943년7월14일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의 고로깨에게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사상범인 것이다. 특히 윤동주는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데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송몽규는 그보다 먼저 7월10일 체포 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3년 12월6일에 검찰국에 송치되어 1944년 2월22일에 기소되고, 1944년 3월31일에 재판을 받아 징역 2년이 선고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판결을 받은 후 곧 후쿠오카(福崗)형무소에 이감된다.
윤동주는 처참한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1944년 6월 이래, 한 달에 한 장씩의 엽서를 고향으로 보냈다. 그 엽서 중에는 영화 대조 신약성서(英和對照新約聖書)를 보내달라는 부탁도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매월 오던 엽서가 1945년 2월 중순부터 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약물 주사를 맞는 가운데 1945년 2월16일 3시36분 오전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치면서 만27세 2개월 만에 윤동주가 옥사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옥사한 그날은 미 공군기들이 처음으로 일본 본토를 공습한 날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고, 재산이 파괴 되었다. 그들의 야욕이 결국 반년 후에는 그들의 나라까지 망하게 하고 말았다. 윤동주가 죽은 지 여러 날 만에 “2월16일 동주 사망“이라는 전보가 왔다. 동주의 사망 열흘이 지나서야 후쿠오카에 도착한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이미 죽은 동주보다 아직 살아 있는 송몽규를 먼저 만났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20대의 한국 청년 50여명이 주사를 맞으며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말끝을 흐리던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지 22일 후인 1945년 3월10일 뒤따라 옥사한다.
“동주의 유해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아버지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윤하연과 가족 친지들은 한줌 재가 되어 돌아온 동주의 유해를 놓고 장례식을
치른다. 그 장례식에서 자화상(自畵像)과 새로운 길을 낭독했다“20).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송몽규의 장례식을 치렀다. 가족들은 용정의 겨울이 풀리는 5월 초순 따뜻한 날에 동주와 송몽규의 무덤에 때를 입히고 꽃을 심어 단장했다. 그리고 묘비를 세웠다.
윤동주의 묘에는 시인 윤동주 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다. 이것이 윤동주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이 붙인 처음 일이다. 그리고 송몽규의 무덤 앞에는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靑年文士 宋夢奎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지금 그들은 용정에 있는 동산(東山)의 중앙교회 묘지에 대각선으로 멀지 않은 곳에 나란히 묻혀있다.
13.마무리
한국의 국민들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서 사랑 받고 있는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 그의 시는 중국에서 필자가 앞장서서 1996년 중국어로 번역하여 중국어판 윤동주 유고시집이 나왔다. 그리하여 14억 중국인들이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의 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연변의 조선족들은 윤동주의 이름만 나와도 눈물을 글성 거리면서 사모하고 있다.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명시들은 서서히 중국 전역으로 퍼져 들어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애송하고 있다. 그뿐이랴 그가 억울하게 죽어간 일본에서도 일본어로 윤동주 시집을 번역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를 읽고 있다. 또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까지 만들어 날로 그 모임의 수는 늘어가고 있다.
더구나 이바라키 노리코가 번역한 윤동주의 시(詩)들과 그를 예찬하는 글들이 고등학교 현대문학 교과서에 실려서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읽히고 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그들은 윤동주가 붙들려 갈 때 압수당했던 그의 일기장도 시작(詩作)원고도 모두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는 것을 우리 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 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어 말살 시대에 끝까지 모국어로 시를 써냈다고 하는 매서운 의지가 은유적 독립 운동”이라고 표현하면서 저항시인으로 존경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자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술이며,, 더욱이 의미 파악이 까다로운 시라는 비유야말로 권력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 민예당 P125)
지금 우리는 윤동주를 만나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명시들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어 외롭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제2 제3의 윤동주는 계속 이어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은 백성들 앞에 희망을 알리는 시들과 또 예언을 알리는 시들을 줄줄이 발표해 오고 있다. 이건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이 나오기까지는 그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의 뒷 밭침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 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았다.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영광 있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첫댓글 원장님의 방대한 글 꼼꼼히 정독하며 읽었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글을 읽는 동안 마치 윤동주의 일생 속으로 들어 간 듯한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한 애국 청년시인의 삶과 죽음을 알고 나니 이번 역탐이 더욱 뜻깊은 듯 합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일본 역사 탐방을 다녀 와서 읽으니 더욱 새롭습니다.~ 교수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