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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지맥 10구간에서 걷게될 마루금 입니다
망덕산 ▶ 이배재고개에 이르기전(前) 봉우리 ▶ 이배재고개 육교 ▶ 358봉 ▶ 연리지 ▶ 갈마치고개(야생동물이동통로)
이배재고개에 이르기전(前) 1.0km를 남겨둔 봉우리에 붙여진 지명이 이배재 정상이랍니다
성남시 상대원동과 광주시 목현동 경계를 이루는 고갯길 정상을 이배재 정상이라 하는데
어쩐일인지 산봉우리 지명을 이배재 정상이라 이름 붙여놨습니다
(현위치 이배재전(前) 봉우리 -0.8km- 이배재고개)
말뚝 이정표에 표기하고 있는
<이배재 정상>이란 지명 표시 이름 입니다
이배재정상이란 봉우리에서 8분을 진행하니 이배재고개를 400m 남겨두었다는 이정표를 만나네요
위 이정표와 동일한 장소
이배재 고개로 가는 진행 방향~
뒤돌아 보고~
계속 진행 방향 입니다
이배재고개 육교가 내려다 보이는군요, 이젠 이배재고개 도롯길까지 내려가지 안하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배재고개 도롯길 위를 건널 수 있는 육교 입니다
성남시 상대원동과 광주시 목현동을 연결하는 고개로서
해발고도 300m상에 위치한 고갯길
이배(二 拜=절 배)재라는 명칭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하여 옵니다.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이배재는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또는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배재육교에서 바라본 광주시 송정동 방향
이배재육교에서 바라본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갈 수 있는 도롯길 입니다
지나온 육교를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이배재고개에서 바라본 성남시 일반산업단지
성남시 일반산업단지
이배재고개를 지난 위치에 군락을 이루는 있는 자작나무들
요즘 강원도 지역 여러 산을 산행하다 보면 자작나무가 곳곳에서 식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국립산림과학원에서는 여러 자작나무들 중에서 우리 기후 풍토에 맞고 생장 속도가 빠른 펜둘라 자작나무를 육성했는데
성장률이 다른 품종보다 약 40% 우수한 핀란드 남부 산으로, 자작나무 껍질은 거의 기름기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썩지 않으므로 신라시대의 고분 속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지요.
자작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치밀해서 조각재로 많이 쓰이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국보 팔만대장경의 일부가
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져서 그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벌레가 먹거나 뒤틀리지 않고 현존하고 있습니다.
뒤돌아 보고~
오른쪽 아랜 자작나무가 군락지는 현위치로 이배재고개에서 100m 이동해온 위치 입니다
이배재고개에서 100m 이동해온 위치의 이정표이며 위 사진과 동일한 위치 입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한 위치 입니다
뒤돌아본 이배재고개쪽 방향 입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 합니다
검단산 이동통신 중계소
358,5봉
358,5봉의 이정표
이배재고개를 지나온지 1.0km되는 지점 입니다
뒤돌아 보고~
진행 합니다
연리지에 다 왔군요
옛날에는 연리지를 효성이 지극한 뜻으로 나타냈으나, 지금은 부부간의 끝없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며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에 비유하기도 하는
중국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가 널리 알려저 있지요
연리지(連理枝)란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짙은 부부애를 비유하는 뜻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 또는 남녀간의 사랑으로 연리지와 연관하여 가장 많이 회자되고 연상케하는
중국 당나라 제6대 황제(재위 712 ~ 756년)인 현종은
재위 초기 수십년은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는데 재위 후반기에는 자신의 며느리이자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와
애정행각으로 정사(政事)마저 등한시하여 나라가 쇠퇴의 나락으로 들어서게 하였지요
중국 당나라 제5대 황제 예종은 3남인 이융기(李隆基)를 황태자로 봉한 후 재위 2년 만에 황제 자리를
물러주었는데, 이 이융기가 제6대 황제 현종(玄宗)이며,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였습니다
현종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고락을 함께 해온 왕씨(王氏)를 황후에서 폐하고, 무혜비(武惠妃)를 후궁으로 삼았지요.
무혜비 황후는 자신의 소생인 수왕(壽王)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현종에게 다른 왕자들을 중상모략으로 꾀하였으나
자신의 소망인 수왕을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해에 죽음에 이르게 되지요
무혜비 황후도 잃고, 무혜비의 모함에 각각 배다른 세 명의 왕자들을 억울하게 죽게 한 슬픔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현종은 마음에 드는 미녀를 전국에서 찾아 보았지만 끝내 미녀를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저 있는데
묘하게도 무혜비의 소생인 수왕(壽王) 이모의 비 양옥환(楊玉環 = 楊貴妃)이었다고 합니다
현종은 자기 아들의 안해이며, 며느리인 양옥환을 차지하기 위해 수왕과 이혼토록 하고, 도교 사원(道觀)에 머물게 하였다가
양옥환을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貴妃 = 중국
양옥환(楊玉環)이 본명인 이 여인이 바로 양귀비(楊貴妃)이며, 그때 현종의 나이 61세, 양귀비는 27세였습니다.
훗날 백거이(白居易 = 백낙천)가 장한가(長恨歌)에서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에 빠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양귀비의 친족에게 권력조차 넘겨주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던 현종은 명신들의 충성어린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하고 양귀비의
언니들 세 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 하고, 사촌인 양국충(楊國忠)을 재상 자리에 앉히며 그외 친척들도 고관으로 임명하는데
이때부터 천하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지요. 755년, 절도사(군대
안녹산(安祿山)이 간신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현종은 양씨 일족과 함께 촉(蜀 = 사천성)으로 피신하려 하려 가는 도중 섬서성 마외역(馬嵬驛)에서
황제를 호위하고 가던 근위군 병사들도 반란을 일으켜, 국난을 일으킨 원흉은 양씨 일족이라 하며 양국충을 비롯한 양씨 일족과
양귀비도 죽여야 한다고 현종을 윽박질러, 양귀비를 목 졸라 죽이게 되는데, 그때 양귀비의 나이 서른여덟에 살해되자.
실의에 빠진 현종은 황제 자리를 황태자인 숙종(肅宗)에게 넘겨주고 사천으로 피난하였다가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자신의 거처에 지난날에 사랑을 나눠던 양귀비가 그리워 잊지 못하고 초상화을 걸어 두고선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이렇게 노래하었다하지요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 806년 때 백거이가 지은 장편 서사시로서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일컬어지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또 한 사람인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으로
현종과 전 황후인 무혜비 사이에 태어난 열여덟째의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양귀비와의 사랑을 읊은 노래라 합니다
751년 칠월 칠석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화청궁을 거닐며, 사랑을 나누다가 밤하늘에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 무렵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지요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을 계속할 뿐 잠자코있다가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 합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허무해 지고 서글퍼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 귀절마다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였다지요.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고~
비익조는 날개가 한쪽뿐이어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날개가 결합되어야만 날 수 있다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며~
연리지는 뿌리는 둘이지만 나뭇가지가 서로 엉키듯 합쳐저 마치 한 나무처럼 하나같이 자라게 된다는 데서
남녀 사이의 사랑 혹은 부부간의 깊은 애정과 지극한 사랑을 뜻하는 말로 쓰여지게 되였지요
현종과 양귀비는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이렇게 맹세하였던 것이지요
(臨別殷勤重寄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량심지)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이를
백거이(백낙천)는 장한가에는 이렇게 싯귀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 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맹세~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751년 칠월 칠석날 현종(唐, 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만나 화청궁을 노닐며 장생전에서 아름답고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양귀비가 죽은 후 밤낮으로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못 잊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사랑의 맹약을 이렇게 시로서 읆조렸다 합니다
연리지 앞에서 부부간 또는 남녀간의 사랑이
알콩달콩하게 영원히 이뤄질 수 있도록 맹세하는 곳인가봐요
연리지 쉼터
뒤돌아 보고~
뒤돌아본 위 위치와 동일 합니다
원통나무 계단길을 오르면
뒤돌아 보고~
갈마터널을 200m 남겨둔 위치 입니다
묘지를 지나 갈마치고개로 가는 길 입니다
뒤돌아 보고~
여지껏 검단산길 제2구간을 걸어 왔는듯한데
검단산길 제2구간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저 혼돈이 일어 납니다
제2구간 경계선을 지나와서 뒤돌아 보니
성남누비길 제2구간으로 검단산길 구간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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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방향 입니다
갈마치고개 터널 윗쪽 왼쪽은 야생동물이동통로이며, 오른쪽으로 등산로 통로가 이어 집니다
지금 갈마치고개 터널 위를 진행하고 있는 왼쪽 숲은 야생동물이동통로이니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는 곳입니다
뒤돌아 보고~
야생동물이동통로 곁에 산꾼이 다닐수 있는 통로 입니다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진행 방향~
뒤돌아 보고~
지금부터 영장산 구간이 시작 됩니다
제2구간(검단산길)과 제3구간(영장산길)
경계선을 지나와서 뒤돌아 보고~
위 사진과 동일한 위치 입니다
뒤돌아 보고
갈마치고개와 망덕산을 한 앵글에 담아봅니다
갈마치고개 터널 윗쪽은 야생동물이동통로이지요
조금전 지나왔던 갈마치고개 터널 윗쪽의
야생동물이동통로를
뒤돌아 보고~
검단지맥 11부에서
갈마치고개 ▶ 영장산 정상 ▶ 거북터 ▶ 곧은골고개 ▶ 새마을연수원 갈림길까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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