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꿈도 변하는 모양이다. 음악 공부를 시작한지도 어언 50년…. 그 사이 꿈도 여러 번 바뀌었다. 학창 시절에는 힘들고, 어렵고, 외로움 속에서도 오로지 세계 제일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생각에 연습과 연습, 그리고 또 연습뿐이었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도 해보았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도 해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꿈도 차츰 바뀌었다. 세계 제일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세계 제일의 바이올리니스트를 키우는 훌륭한 선생이 되겠다고…. 무엇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그 후론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학생 때문에 울고 학생 때문에 웃고, 학생이 연주를 할 때 내가 더 긴장을 하고, 학생이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면 내가 더 기쁘고, 어쩌다 야단을 치게 될 때 내가 더 속상해 지는 걸 보면 내 스스로도 “영락없이 선생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무대 활동보다 가르치는 일에 더 의미를 느끼며, 국제적으로도 연주가로서 보다는 학생을 잘 키우는 선생으로 더 알아주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세계 제일은 아닐지 몰라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가르쳤다고 자부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꿈은 또 다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손으로 키운 우리의 젊은 음악가들이 국제무대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는 꿈이다.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마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동을 하면서부터 일게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퀸 엘리자베스 바이올린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비롯하여 수많은 국제콩쿠르에서 심사를 하면서 우리나라 학생들의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번 느끼는 감정이지만 세계 최고의 신예 음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 학생들을 보면 자랑스럽다는 차원을 넘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그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는 항상 혼자말을 한다. “그래 너희들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다”
세계는 무한 경쟁의 시대로 변했다. 이제는 개인의 힘만으로 국제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려워졌으며, 음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의 경우 가능성이 보이는 신인은 국가나 대기업에서 후원을 하며,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뒤받침해주고 있다. 우리도 키우는 일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단 날개는 곧 태극기가 되어 세계의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의 젊은 음악도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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