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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경 비잔티움 제국의 최대판도, 보라색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때 회복한 영토 | |||||
공용어 | 그리스어 | ||||
수도 | 콘스탄티노폴리스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면적 - |
붕괴전 최대 3,500,000 km2 | ||||
인구 - |
붕괴전 최대 34,000,000 추정. (4세기) | ||||
주요 민족 | 그리스인 | ||||
종교 | 동방정교회 | ||||
통화 | 노미스마 | ||||
성립 | 330년 | ||||
해체 | 1453년 5월 29일 | ||||
초대 황제 | 콘스탄티누스 1세 306년-337년 | ||||
최후 황제 | 콘스탄티누스 11세 1449년-1453년 | ||||
성립 이전 | 로마 제국 | ||||
해체 이후 |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
비잔티움 제국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 바실레이아 톤 로마이온) 또는 동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Orientale 임페리움 로마눔 오리엔탈레)은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首都)를 둔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이었으나,
천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비잔티움 시대는 보통 395년부터 1453년까지로 본다.
비잔티움 제국은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랍 및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까지 하였다.
명칭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래 이름이었던‘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에서 유래하였다.
동-서 로마의 궁극적인 분리 이후 서방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기 싫어하여
이 나라를 ‘비잔티움적인’ 제국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것을 영어식으로는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따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이라 부르고 있다.
정작 비잔티움 제국은
언제나 스스로를 ‘비잔티움’이 아니라 ‘새로운 로마’를 자처했다.
비잔티움 제국 정부는
자국을 그냥 ‘로마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Basileia tōn Rōmaiōn)’이라고 불렀으며
비잔티움 제국이라 불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그 주민들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스스로 그리스인(그리스어: Ἕλληνες|헬레네스)이라고 하지 않고
로마인(라틴어: Ρωμαίοι|로마이오이)이라고 불렀다.
또한 자국을 ‘로마인의 영토’라는 뜻의 ‘로마니아(그리스어: Ρωμανία|Rōmani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에는 거의 완전히 그리스화하였다.
황제의 명칭도 '바실레우스'(그리스어로 '대왕'의 뜻)로 바뀌었으며,
정부의 구성이나 복식, 군 편제 등도 모두 그리스식으로 변모하였다.
제국의 영토도 대부분 그리스 문화권에 한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제국 인구와 문화의 대부분도 그리스인의 그것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문명 세계 모두를 지배하는 대제국’이며
‘하느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는, 지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 이데올로기는 천년에 걸쳐서 관철되어졌으나,
한편으로 정치체제는 주위나 국내의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변화시킬 줄도 알았다.
강건한 이데올로기와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성을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
제국이 천년의 긴 세월에 걸쳐 존속할 수가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닐까 말하는 학자도 있다.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수준 높은 이념과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거기에 종교적 권위와 오리엔트적인 전제 정치를 더하여
매우 엄격한 전제군주적 황제권과 관료 정치를 시행하였다.
비잔티움의 황제는 원로원, 시민, 군대에 의해 추대되어 지상을 책임지는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제국은 천국의 예표이며, 최후의 심판이 올 때까지 정통 기독교 신앙을 지키도록
하느님이 임명한 단 하나의 후견인으로서 사도들과 대등한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정치·군사·종교 등에 대해 무한적인 절대 권력을 휘둘러왔으며,
제국의 백성들은 스스로 황제의 노예임을 자청하며 오로지 그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종교
세속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하는
교황지상주의를 제창한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세속의 우두머리인 황제가
교회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겸하는
황제교황주의(cäsaropapismus)가 발달한 동방 정교회를 국교(國敎)로 믿었다.
동방 정교회는 황제의 지배 하에 있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영향력은 그리 대단치 않았으며,
각 나라별로 교회의 자립화가 이루어져 있다.
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이자,
교회의 수호자로 믿어져 왔다.
비잔티움 제국의 활발한 선교로
대부분의 동유럽권(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슬라브 민족)과
일부 중동권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자연스레 정교회의 본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교회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례, 결혼, 장례 등 개개인 생활의 중요한 순간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신학, 예술, 경제, 정치, 외교 등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
비잔티움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
그 위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통해 유지한 비잔티움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비잔티움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경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서유럽과는 달리 고대 이래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국영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다른 나라와의 무역 등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12세기 이후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공업의 발전에 밀려나 제국의 국내 산업은 쇠퇴하여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한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의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별로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라기보다는 서유럽의 기술이 후퇴한)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2세기부터는 서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농업 기술이 개선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눈에 띄게 낙후되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東)·서(西)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의 모체가 되는 동쪽의 영토는
다키아, 마케도니아, 아시아, 폰투스, 오리엔트, 트라키아, 이집트 각 지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 영토는 서쪽 영토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制度)>에 의해 통합되었다.
즉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모든 영토는
민정과 군정의 각각 독립된 양두(兩頭) 지배를 받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규모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와 마찬가지로 특별행정구로서
거리의 치안 유지, 식량 확보, 시민의 재판권, 상업 활동 규제와 보호 등
시민 생활에 관한 모든 행정상의 처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독이 맡았다.
국가 정치의 중추인 궁정에서는
재상, 재무대신, 궁정재무장관, 궁정장관, 시종장 등이 황제를 도와 업무를 처리하였다.
원로원은 황제의 공식 자문기관으로서 정권 교체나 제위가 비게 되었을 때,
또한 새 황제의 등극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통치체제가 지배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대외적으로 언제나 2가지 정면(正面) 작전을 세워야만 하였다.
즉 동쪽의 사산 제국과는
전시대부터 계속하여 전투 상태에 있었으며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전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일시적 평화조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다.
또 발칸 반도에서는
4세기 고트족의 남하, 계속되는 국내로의 게르만족의 침입, 5세기 중엽 훈족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들은 모두 성벽에 의해 막을 수가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는 옛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를 되찾기 위한 원정군이 조직되었다.
554년에 지중해의 섬들과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왕국의 일부를,
555년에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각각 제국령으로 편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6세기 후반 이들 지역에 다시 이민족이 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영토 확보에 힘썼다.
그러나 6세기 후반의 대외적 위기는 북쪽의 다뉴브 전선에서 시작되었다.
즉 대서방(對西方) 정책과 대동방(對東方) 정책에 쫓긴 제국은
도나우 강을 건너 남하해 온 아바르족을 막을 수가 없어 마우리키우스 때 발칸의 주요 도시 시르미움,
신기두눔이 차례대로 함락되었다.
결국은 발칸 반도의 슬라브화가 시작되어
제국의 행정망은 끊기고 통치기능은 크게 후퇴하여 7세기 변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시대의 속령 통치 방식 및 중앙집권체제 안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대외정세 변화에 촉구된 군사력의 강화와 문관 세력의 약화이다.
군사력의 강화는 제국령의 양두 지배에서 테마 제도로의 전환이며,
문관 세력의 약화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에서
군사와 세무를 중시하는 로고시트 제도로의 전환이다.
이들 모두 옛 로마적 행정제도에서 변신한 것이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리우스의 치하에서 비롯된 국령의 전체적 저하를 보충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지방 영지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제도는 점차 정비되어서 마케도니아 왕조의 번영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제국의 성운은 테마 제도의 성쇠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지방 호족 및 중앙의 고급 관료, 군인,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대토지 소유자층이
중소자유농민층을 흡수하여 테마 제도를 침식하였으며,
거듭되는 대외 위기에 따른 내정의 혼란이 테마 제도의 기능을 위협할 때 제국의 성운도 흔들렸다.
대토지 소유자층의 증대는 이미 8세기 무렵부터 현저하게 나타났다.
9세기 초, 니케포로스 1세는 대토지 소유자층의 재력을 강제적으로 정부에 되돌리려고 하였다.
10세기의 로마노스 1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은 중소자유농민 농지의 전매, 기증, 유증을 금지하여 대토지 소유자층의 증대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납세의 연대제 강화, 대토지 소유자의 선매권 금지 증의 보호책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을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국 국세에 의한 수입 확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1세기 초대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인 로마노스 3세가 종래의 보호책을 폐지하고 대토지 소유자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쳐 중소자유농민층이 몰락하기 사작하였다.
또한 7세기~9세기에 걸쳐 외적들의 침임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중앙정부 내부에서는 군사와 세무 관계를 다루는 부국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들 부국장은 정치의 중추를 차지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 아래의 여러 관료들과 교체되었다. 즉 로고시트 제도가 등장한다. 이것은 원래 회계 담당을 뜻한다. 이 제도의 중심은 회계국장이며 외무대신직과 내무대신직을 겸하는 역체국장과 함께 큰 권력을 가졌다. 그런데 관료 기구의 정비와 함께 황제는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을 이 관료 기구의 요소에 두어 이것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정 기구의 개조는 대외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그 첫 번째 요인은 7세기 전반부터 시작하여 9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이슬람과의 싸움이며, 두 번째 요인은 불가르족의 등장이다. 7세기 중엽에 발칸 반도 북부에 나타난 불가르족은 제국령 안에 최초의 독립 국가인 제1차 불가리아 왕국을 세웠다. 세 번째 요인인 슬라브족은 일찍부터 남하하여 정주하고 있었는데 독립국가를 만들지 않고 선주민인 그리스계 주민들과 융화되어 그리스 민족을 슬라브화하였다. 그러나 9세기 초에는 슬라브족에게 점령된 지역을 그리스 남부에서 탈환하기 시작함에 따라 슬라브족이 그리스화 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9세기 중엽에는 나중에 키예프 공국을 세우게 되는 루스족이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나타났는데 988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 때 동방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함에 따라 키에프 대공국도 동유럽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대외 위기를 극복하고 행정·국방 기구의 정비와 중소자유농민층의 번영을 배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바실리우스 2세 때,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연안지대, 다뉴브 강 이남 발칸 반도를 다시 제국령으로 편입시키키는 등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최대 영토를 얻었다.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에서는 혼란이 거듭되고,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노르만족이, 도나우 강 유역에서는 페체네그족이, 동쪽에서는 신흥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가 제국을 위협했다.
1071년 로마누스 4세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제국의 위협 세력으로 떠오른 셀주크 투르크를 침공했다. 전쟁 초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지닌 비잔티움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밀린 보수에 대한 불만으로 제국 영내를 약탈한 독일계 용병들의 반란, 투르크 계열의 유목민족의 이탈, 분산시킨 병력의 패배, 호위대를 지휘하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배반, 결정적인 순간에서 명령계통의 혼란 등 겹쳐진 악재로 비잔티움군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군의 4만 병력에 크게 패배한다. 이어 셀주크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주요 병력 제공 지역이었던 아나톨리아 등 동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제국을 철저하게 와해시켰다.
11세기부터 천천히 시작된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 현상은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상징된다. 그 원인은 국내 봉건화의 진행과 함께 셀주크 투르크, 십자군,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등이 초래한 외세의 압력에 있었다. 국내 봉건화의 현상은 11세기 초의 콘스탄티누스 9세 통치하의 프로노이아 제도(토지를 매개로 한 황제와 신하의 주종 관계) 성립이었다. 당시 면세 특권이 부여되어 있던 대토지 소유자층의 영지, 징세청부인에게 임대로 내놓은 토지, 프로노이아로서 지급된 토지는 징세에 있어 치외법권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토지의 증가는 한편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의 납세 부담을 증가시켰으며 이것은 곧 전자의 증대와 후자의 몰락이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국고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상·경제상의 변혁은 행정·국방에도 영향을 끼쳤다. 테마 제도는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의 주요 부분이 11세기 중엽 제국령에서 벗어남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층에게 돌아갔다. 황제들도 거의 다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대토지 소유자층의 발언권은 커져갔으며 반대로 황제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내란과 반란, 세력 확장을 위한 음모와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1세기 후반의 축소된 제국령에서는 군사령권 2명이 전 영토를 2개의 군구로 나누고 자국군 대신 외국인 용병대가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불안한 국내 정세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대외 위기였다.
11세기 후반 노르만족의 진출은 제국의 이탈리아 남부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으며, 1071년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소아시아 중앙에 룸 술탄국의 수립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동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군사 원조를 의뢰하고 그 보상으로 제국령 안에서의 무역 및 면세 특권을 주었다. 더욱더 혼란을 초래한 것은 페체네그족, 마자르족 등 이민족들의 대거 남하와 약탈이며 세르비아 왕국의 번성과 제2차 불가리아 왕국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외세의 압력이 정점에 이른 것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미 제1차 십자군이 제국령을 통과하였을 때 서유럽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생긴 오해는 반감과 혐오와 적의로 변하였는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그 정점에 달하였다. 그리고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을 기도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이것을 계기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단행하기 위하여 십자군에 가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십자군에게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설립되었다.
수도를 빼앗긴 옛 비잔티움 제국 세력은 니케아 제국, 에피루스 공국, 트레비존드 제국등 곳곳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 망명 정권 가운데 하나인 니케아 제국은 불과 반세기 사이에 주변의 외적들을 무찌르거나 화친을 하였으며, 1259년 미카일 8세에 의한 팔라고니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그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리고 1261년 미카일 8세는 옛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 제국으로부터 탈환하여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를 열어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3세기 후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노리는 반(反)비잔티움 세력에게 시달렸다. 앙주 가문의 책동으로 옛 보두엥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나섰는데 미카일 8세는 1282년에 일어난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국내 봉건화에 따른 악폐는 더욱 심해졌으며 행정의 혼란, 경제활동의 부진, 외국인 용병의 증가는 신민들의 세금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러한 내정상의 악순환은 외정상의 실패로 이어졌다.
가장 큰 실패는 14세기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소아시아의 부르사에 수도를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니코메디아와 니케아 두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당면했음에도 국내에서는 제위계승문제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136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가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옮기자 비잔티움 제국은 해상으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에, 육지에서는 오스만 제국에게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작은 나라로 전락하였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으며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와 헝가리를 물리치자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세력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통일을 조건으로 로마 교황청을 통해 서유럽으로부터 군사원조를 얻으려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무라드 2세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날로 심해졌으며, 1453년 봄 술탄 메메드 2세는 농성군의 10배나 되는 병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여 5월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어 아테네, 모레아, 트레비존드 제국이 차례대로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하였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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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년 |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을 통일하고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다. |
325년 |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다. |
330년 |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하다. |
431년 | 에페소스 공의회가 개최되다. |
451년 | 칼케돈 공의회가 개최되다. |
532년-537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Αγία Σοφία/성스런 지혜)을 짓다. |
541년-543년 |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 손실을 입다. |
552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하다. |
730년-753년 |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성상파괴칙령이 내려져 성상파괴운동이 전개되다. |
843년 | 성상논쟁이 종결되어 성상파괴칙령이 파기되고 성상공경이 재수립되다. |
1014년 |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리아를 정복하다. |
1054년 |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다. |
1071년 |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패배하다. |
1204년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점령되다. |
1261년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미카일 8세에 의해 수복되다. |
1453년 |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 전장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전사하고 제국이 멸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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