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하는 날
나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도 못 가고 집에 할 일 없이 지내는 동안 나의 친구들은 벌써 1년 전에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린 나는 언제 저 아이들처럼 학교에 갈까를 매일 생각하면서 오늘도 먼 산만 힘없이 쳐다보곤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명조야 내일은 학교에 나하고 한번 가보자, 너도 학교는 다녀야 하지 않겠나 하시면 내일은 아침 먹고 학교에 가기로 어머니하고 약속하고 그날 저녁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학교 가니까 넘 좋아서 아니라 학교 가면 그 당시는 입학금과 월사금(수업료) 내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어린 나는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어머니와 나는 우리 집에서 3.5km 떨어진 가산초등학교로 갔다. 학교는 6.25사변에 소실되고 임시 천막 교실에 공부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상담한 선생님이 내일부터 학교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집으로 오면서 학교 앞 문방구에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 구입하여 집으로 왔다. 지난밤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아침에 보리밥 한 그릇 먹고 다른 아이들과 학교로 가는데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는 보자기에 어머니가 흩어지지 않도록 잘 싸주는데 문제는 신고 갈 신발이 문제였다. 검정 고무신이 다 떨어져서 뒤창이 없는 것이다. 신고 보니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어머니가 끈으로 묶어서 신고 학교로 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오늘 강명조 학생이 새로이 왔다. 서로 싸우지 말고 공부 잘 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교과서가 없어서 다른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자랑삼아 내가 보란 듯이 더욱더 크게 읽어 내려가니 어린 나의 마음은 가난이 죄인가 싶어 눈물이 났다.
옆 친구 책을 옆눈으로 보면 내 공책에 적는 대로 적어서 집에서 읽고 쓰고 하였다.…어린 마음에 나도 언젠가는 교과서를 사서 너희들처럼 소리 내어 크게 읽을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니면서 월사금(수업료)을 못 내서 다른 친구들은 공부하는데 나는 밖에서 벌을 설떼 소변이 마려워 그 자리에서 실례를 한 적도 몇 번인지 다 기억 못 한다.
내가 초등 3년에는 형이 열심히 노력하여 조그만 집도 새로 짓고 조금씩 집안이 안정되고 나도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줄로 걸어서 높은 곳에 있는 밥 소쿠리를 조심스럽게 내려서 우물에 가서 시원한 냉수 한 그릇에 보리밥 물에 말아서 풋고추에 된장 한입 먹고 물 마시고 했다. 꿀맛이지만,.그 보리밥도 배불리 못 먹고. 송아지 몰고 소 풀 먹이러 간다. 그 소는 빼내기 소입니다. 남의 송아지를 가지고 와서 그 소가 커서 송아지를 낳으면 큰 소는 소 주인이 가지고 가고 어린 송아지를 우리가 가지는 방법이다. 학교에 갔다 오면 보리밥 한 그릇 먹고 송아지 몰고 꼴망태 짊어지고 들로 송아지에게 먹이 주고 나는 꼴망태에 풀 베어서 짊어지고 집으로 와서 저녁은 어머니가 산에서 산나물 캐어 사 온 것을 풀죽을 먹는데 곡식은 없고 풀만이 배를 채우고 자고 학교 가고 오면 또다시 송아지와 꼴망태 나의 일상생활이 반복됩니다. 한번은 선생님이 너희들 집에 쥐가 많이 있응것이다. 내일 학교 올 때 쥐꼬리 3개씩과 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집에 와서 아무리 쥐구멍을 찾아도 쥐는 없고 다음 날 나는 빈손으로 학교에 가니 다른 몇 명은 쥐꼬리를 가지고 온 친구들도 있었다. 선생님은 쥐꼬리 준비 못 한 우리들에게 3시간 동안 손을 들고 벌을 세웠다.
겨울에는 난로에 불피우기 위해서 이틀에 한 번씩은 난로에 땔감을 가져와야 했다. 겨울에 손은 시린데 나무를 안고 가니 얼마나 추운지 손발이 얼어 터지는 그런 느낌이다.
또 보리 철이면 보리 이삭을 주어서 학교에 가지고 가고 또 벼 이삭 주어서도 학교에 가지고 가야했다. 만약에 안 가지고 오면은 선생님이 손바닥 10대 아이면 종아리 10대 맞으면 퍼런 줄이 얼마나 아픈지 안 맞아 보면 모른다. 학교 갈 때는 친구 여러 명이 같이 가고 학교서 돌아올 때는 나는 큰길로 오지 않고 냇가로 오면서 찔레순을 찾아서 끊어 먹으며 약간 풀 냄새가 나면서도 단맛이 났다. 그래도 조금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른 것 안 먹 본 사람은 모른다. 산에 가면 소나무 순 가지를 꺾어서 낫으로 껍질은 버리고 속 껍질만 먹으며 그리 단맛이 난답니다. 그런데 변 볼 때가 문제다. 소나무 껍질은 하나도 소화가 되지 않고 그대로 변으로 나온다
세월은 잘도 흘러 상급 학생이 되고 5학년부터는 그 반에서 1.2 등가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반장을 계속하면서 학교생활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선생님께서 강명조는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데 중학교는 어느 중학교를 가려고 하느냐 말씀하시길래 나도 모르게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못 가요 돈이 없어요. 선생님이 나의 어깨를 두드리시면서 돈이 원수로다 하시며 우는 나를 울지마라 언제가 너도 좋은 학교 갈 날이 올 것이라고했다.
다른 친구들은 자기 부모 잘 만나서 지방중학교도 가고 대구 중학교로도 가는데 나는 오전에 산에서 나무하고 오후에는 송아지와 꼴망태에 풀 베고 이런 날이 계속되던 해 형이 군대를 가게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어머니와 밭 농과 논농사를 짓기로 마음먹고 노력했으나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뒤지고 모심기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꼴찌로 심고 항상 남보다는 뒤처지는 농사였다. 그런데 어린 나를 더욱더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 위 자기 방에서 안 읽고 밖에서 나더라고 큰소리로 영어를 읽는다. 어린 나는 가슴이 찢어지듯 마음이 아팠다.. 또 명절이 되면 대구 갔던 친구들이 고향에 와서 자기들끼리 몽쳐 다니면서 노란 사스 입은 사나이 노래를 부르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밤이 깊도록 떠들었다. 친구들은 얼굴이 보름달처럼 희고 나는 태양에 거슬러서 검고 대구 친구들만 오는 날이면 잠이 잘 안 왔다 우리 마을은 산골 마을이라 산에서 나무를 베어서 장작으로 만들어 팔면 돈이 모인다. 집 주위에 산은 실지로 산 임자는 타지방에 있지만 남의 산을 관리해 주는 산지가 별도 있어 함부로 나무를 베면 산지기가 못 하도록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멀리 있는 도유림에서 나무를 베어서 팔고 하여 용돈은 조금씩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군에 갔던 형이 제대하고 나는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의 알선으로 대구 있는 국수 공장으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