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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시대
중국의 역사는 신화시대부터 시작된다.
천지개벽 때 우주에서 달걀모양을 하고 처음 저절로 생긴 사람을 반고(盤古)라 하는데 천지의 왕이 되었다. 이어서 생긴 천황(天皇)은 갑을병정(甲乙丙丁...)의 십간을 만들고, 지황(地皇)은 해와 달과 별(日月星辰)을 만들고, 인황(人皇)은 산과 강(山川)을 만들었다.
다음, 유소씨(有巢氏)가 나와서 집짓기를 하였다. 이어서 수인씨(燧人氏)는 불로 음식을 하고, 새끼를 꼬아 기록하고, 복희씨(伏羲氏)는 음양팔괘(陰陽八卦)와 문자를 만들었다. 복희씨가 1150세를 살다가 죽고 여동생 여왜(女媧)가 뒤를 이었다. 여왜는 머리만 미녀인 사람이고 몸은 뱀이었는데 사람을 낳게 하고, 화신(火神) 축융(祝融)의 도움으로 공공씨(共工氏) 강회(康回)를 쳐서 자리를 지켰다.
그 후 일만년동안 여러 천자가 다스리다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대에 이르러 농사짓는 법을 만들고 백초(百草)의 약효로 의약을 만들었다.
왕위는 황제의 손자 전욱(顓頊), 전욱의 생질 곡(嚳), 요임금(당요, 唐堯), 순임금(우순, 虞舜)으로 계승되었는데 이들을 오제라 한다.
주나라의 왕은 희(姬)씨 성으로 천자(天子)라 하는데 왕이라는 명칭은 주왕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주왕실 아래에는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 등의 통치계급이 있었다. 통치자들은 왕실 친족이지만 친족이 아닌 경우도 있었는데 주요 지역은 주왕실의 중요 친족을 분가시켜 영주를 시켰다.
공작과 후작급 귀족은 땅을 받아 다스렸고, 백작․자작․남작 계급은 공작이나 후작에게서 다시 땅을 분배받아 다스렸다. 통치귀족이 다스리는 땅을 봉토(封土)라 하고,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던 것을 분봉(分封)이라 하는데 이런 통치 방법을 봉건제도라 한다. 공작과 후작들이 다스리는 나라는 제후나라(諸侯國)라고 한다
제후나라에서도 친족을 분가시켜 땅을 주고, 원주민과 호족도 봉건시켜서 땅을 주었다. 제후국에서 소영주는 대부(大夫)를 시키고, 대부 중에서 대신이 된 자를 경(卿)이라 한다. 땅은 경과 대부만 주고, 사(士) 계급과 일반 백성은 주지 않았다.
봉건제도는 혈연에 의한 종법(宗法) 제도인데 천자의 형제, 사촌, 육촌, 삼종(三從), 조카, 당질(堂姪), 재당질(再堂姪), 삼당질(三堂姪), 삼촌, 당숙(堂叔), 재당숙(再堂叔), 삼종숙(三從叔) 등과 같은 친척에게 땅을 주어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종(宗)은 같은 조상을 가진 집안을 말하며, 본가를 종가(宗家)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맏이만으로 이어져 온 본가는 대종(大宗), 즉 큰집이고, 오다가 갈려서 나간 방계(傍系)는 소종(小宗), 즉 작은집이다. 종가의 맏이만으로 이어져 내려온 사람을 종손(宗孫)이라고 한다.
중국의 대종은 주나라 왕실(王室)로, 주나라 왕은 중원 최고의 통치자이므로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라 하며 대종손이고, 주나라를 종주국(宗主國)이라 한다. 소종은 각 지역으로 땅을 분봉받아 나간 공작과 후작이 다스리는 공작국(公爵國)과 후작국(侯爵國)들인데, 왕이라 칭할 수 없었다. 예로서, 제(齊)를 다스리는 공(公)이나 후(侯)는 ‘제공(齊公)’ 또는 ‘제후(齊侯)’라 하였고 나라라 하지 않았다. 예로서, 제(齊)를 제(齊)라고 하지 제나라(齊國)라고 하지 않았으나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하여 제후들이 독립하기 시작한 뒤로는 ‘나라’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하였다. 즉, 주나라에서 파견된 자들이 주나라에서 독립하여 각기 대장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공자(公子)란 공작이나 후작의 친족 남자, 공녀(公女)는 친족 여자를 말하며, 제후의 아들딸, 또는 친족의 아들딸을 일컫는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따지면 왕자와 공주를 말한다.
주나라 천자의 성씨인 희(姬)씨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왕족이므로 주나라 왕실과 성이 다른 제후들은 주나라 천자의 공녀를 부인으로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주나라 공녀들은 대부분 성이 다른 제후들에게 출가하였는데 출가할 때 나라 이름에 ‘- 희(姬)’를 붙여서 칭하였다.
예로, 주나라 공주가 제나라로 시집가면 제희(齊姬)라고 하였고 남편이 장공(壯公)이면 부인을 장희(壯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영희(英姬), 순희(順姬)와 같이 아무나 쓰는 이름이 되었다. 공주(公主)라는 말은 한나라 시대 이후에 쓰기 시작하였다.
대종이면서 중앙 왕실의 천자인 주나라 왕은 방계 소종인 제후들에게 여러 의무를 부과하였다. 소종은 주나라의 여러 일에 참석하고, 부르면 가고,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경과를 보고하였다. 주나라의 국가적 사업에도 인력을 보내고,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도 군대를 보내고, 주나라에 공물도 납부했다. 작은집인 제후나라들이 큰집인 주나라를 섬긴 것이다.
주나라와 제후국들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섬겼다. 종묘(宗廟)는 역대왕(天子)의 위패를 모신 왕실 사당이고, 사직(社稷)은 나라에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종묘사직은 조정과 나라를 의미한다.
주왕실은 큰집인 종가(宗家)이므로 종묘(宗廟) 제사를 올릴 때는 분가(分家)한 여러나라 제후들을 불러 역할을 할당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고, 충성을 확인하였다. 당시는 제사를 통하여 정치를 수습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였다.
제사에 쓰이는 희생물 중 소는 대뢰(大牢), 개와 양, 돼지는 소뢰(小牢)라 하였는데 원래는 개고기를 썼다. 제사 지낼 때 읽는 축문은 ‘흠향(歆饗)하시옵소서’ 즉, ‘즐겨 드시옵소서’라고 하는데, 원래는 향(饗)자의 밑에 먹을 식(食)자가 아니고 개견(犬)자가 있었다( 향 ). ‘개고기를 바치니 즐겨 드시옵소서’라는 것이었다. 향(饗)자는 잔치에서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잔치 때 개고기를 먹고 즐기라는 의미였다.
헌(獻)은 ‘바치다, 드리다’라는 뜻인데, 개(犬)를 잡아 솥(鬳)에 넣어 삶아서 종묘제사에 바치던 것(進獻)을 의미한다. 개는 갱헌(羹獻)이라고도 하는데 개를 잡아서 국(羹)으로 끓여서 제사에 바치던(獻) 것이기 때문이다. 염(厭) 자는 제사 지낸 후 개고기를 배가 터지게 먹어서 싫증 난다는 의미와, 개(犬) 고기(肉)는 맛있다(甘)는 의미가 있다.
가축을 담당하던 관리들은 장관급으로 식용견은 구가(狗加) 및 견사(犬使), 소는 우가(牛加), 말은 마가(馬加), 돼지는 저가(豬加)라는 직책이 담당하였다.
춘추열국은 서로 투쟁을 하였으나 제후국들은 종묘 제사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였다. 그때 제후국의 대신들은 자기 나라 권리를 주장하며, 제후의 나이, 주왕실과의 촌수, 제사 행사에서의 역할, 건국(建國) 등의 고사(故事) 내력 등에 따라 서열이 매겨졌다.
공작국의 공(公)이 주나라 천자를 방문할 때는 9의 수에 맞추어 알현하였다. 즉, 아홉치 환규(桓奎, 옥으로 만든 둥근 홀)를 잡고 아홉치 깔개를 깔고 면류관과 의복은 9장(九章, 아홉가지 무늬)을 입고 구유(九斿, 아홉깃발) 깃발을 세우고 구치(九就, 말이 수레를 끄는 9가닥 가슴끈)로 말을 장식하고, 9승(九乘, 아홉대)의 수레를 끌고, 9명의 수행원을 끌고 9뢰(九牢, 아홉상)의 상을 바치고, 대문에서 주나라 천자까지 90보 거리를 두었다. 천자는 공작에 대하여 향례(饗禮)에서 9헌(9번 술 올리기)을 하고, 사례(食禮)에서 구거(九擧 9번 들기)를 한다. 당연히, 공작보다 급수가 낮은 후작은 7, 더 낮은 자작과 남작은 5의 수에 맞추어 천자를 알현하였다. 급수가 낮은 후작과 자작, 남작의 알현에는 이보다 적은 수로 응대하였다.
당시의 주나라 예법서인 주례(周禮) 책을 보면 우리나라 제례나 상례, 격식, 혼례 등의 예법이 주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장례 때 눈물이 안 나와도 어른들이 ‘어이어이’하며 큰소리로 곡을 하라고 닥달하는 것은 주나라 때부터 내려 오는 상례(喪禮)가 그렇기 때문이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모이는 제사에서 첫 번째로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은 가장 지위가 높은 자 몫이므로 당연히 주나라 왕인 천자이지만 두 번째로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을 비롯하여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 九獻官)까지는 주나라 종실과의 촌수와 패권에 따라 다툼이 벌어지고 서열이 매겨졌다. 그리고, 제사가 끝난 다음의 향연에서도 중원 맹주역할을 하는 제후나, 주나라 왕실과 가까운 촌수, 고사내력을 아는 자 등이 큰소리를 쳤다.
우리나라 종친회의 세향이나 제사에 장관이나 대기업회장 등 힘센 자가 회장(覇王)이 되어 큰소리치며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내가 아헌관이다, 네가 종헌관 하라” 하며 다투는 모습과 똑같았다.
주나라왕인 천자나, 제후들이 죽었을 때도 상을 치르면서 역시 같은 모습으로 시끄러웠는데, 천자가 죽는 것은 붕어(崩御), 제후(諸侯)가 죽는 것은 훙(薨), 대부(大夫)가 죽는 것은 졸(卒), 선비(士)가 죽는 것을 불록(不祿)이라고 하였다.
춘추시대가 되자 혈연으로 이어진 종법은 힘을 잃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군주 자리를 뺏고, 신하가 주군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많아졌다.
주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것은 유왕(幽王) 때문이었다. 가뭄으로 흉년이 이어져 백성들의 고초가 심하였으나 유왕은 신경쓰지 않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아 백성들은 대한 불만이 많았다.
유왕은 태자인 의구(宜臼)를 폐하고 애첩 포사(褒姒)가 낳은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웠다. 대신들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왕실 내부에 알력이 생기고 유왕과 제후들의 갈등이 심해졌다.
기원전 771년 폐비 신후(申后)의 아비 신후(申侯)가 회(繪)나라와 견융(犬戎)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오자 유왕은 여산(驪山)으로 피해 봉화를 피웠으나 제후들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포사를 즐겁게 하려고 아무 일이 없는데도 봉화를 피워 제후들을 여러번 골탕먹였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봉화불이 장난인 줄 알고 더 이상 달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산은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서안) 남쪽에 있다.
그래서 회나라와 견융의 군대는 주나라 도읍인 호경(鎬京)을 쳐서 유왕을 죽이고 포사를 납치하였다. 그런데, 진(秦)나라의 양공(襄公)이 서융을 몰아내고 호경을 찾아주었다.
이때부터 주왕실의 권위는 떨어져서 제후들은 주왕실을 무시하고 실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입을 몰아내고 주왕실을 받들자는 명분은 섬겼다. 주왕실을 쓰러뜨리기는 쉬웠으나, 대역죄인으로 합동공격받기 때문에 시도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래서 주왕실은 남아 있었다.
주평왕의 천도 후 춘추전국시대에 들어 주왕실의 통치 영역과 힘이 줄어들고 제후들은 강해졌다. 그래서 실력을 가진 제후들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주왕조가 힘을 잃어서 통제력이 없어진 다음부터 힘있는 나라 제후가 패자로 등장하여 천하를 호령하였다. 그래서 가장 힘센 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힘으로 누른 다음 주왕조를 섬기면서 제후들을 모아서 충성을 하라는 동맹을 결성하였다. 중원 제국을 위협하는 오랑캐의 격퇴와 중원의 질서를 유지하자는 명목이었는데 그를 통해 주나라 왕실에서 ‘그대가 패왕(覇王)이요’하고 인정받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고 숙원이었다. 그래서 춘추시대에 하루도 빠짐 없었던 전쟁은 주로 패왕이 되려고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주나라 왕실과 주나라에서 갈려 나간 제후국들은 주나라 왕실 자손이 아니거나 천자를 인정하지 않는 초(楚)나라나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을 오랑캐라고 하여 무시하였으나 그들 나라의 힘이 커져서 주나라 왕실과 제후국들을 위협하게 된 다음부터는 중원의 패권국으로 인정하였다.
주나라 초기에 천여국이나 되던 제후나라의 수는 싸움과 이합집산을 통하여 10여개국으로 줄었다. 그중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을 든다. 송양공과 진목공 대신에 오(吳)나라 합려(闔閭)와 월(越)나라의 구천(勾踐)을 들기도 한다.
첫번째 패자인 제나라의 환공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도움으로 패자가 되어 기원전 651년(제환공 35년) 규구(葵丘, 하남성 상구)에서 제후들을 모아 동맹하였다.
동맹은 힘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에게 충성을 하라는 서약을 받고, 중국 대륙의 대장 나라 노릇을 하는 것이다.
송양공은 기원전 639년(송양공12년) 제나라, 초나라와 송나라의 녹토(鹿土, 안휘성 阜南의 南)에서 동맹하고, 우(盂, 하남성 睢縣)에서 제후들을 만났다.
초나라의 장왕은 기원전 597년(초장왕 17년) 필(泌)의 싸움에서 진(晋)나라를 물리치고 동맹하여 패자가 되었다.
그후 천하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나라와 서쪽의 진(秦)나라가 서로 견제하는 사강의 시대가 되었다.
춘추시대에 가장 강한 나라는 진(晋)나라와 양자강 유역에서 성장한 초나라이다. 초나라는 장강 남쪽의 오(吳)나라의 약진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이야기는 춘추시대 말 초나라로부터 시작된다.
楚나라
주인공 오자서는 주왕실의 권위는 쇠퇴하였지만 아직 제후국들이 주왕조를 떠받들고 있던 춘추시대 말(기원전 559~485) 사람이다.
초나라는 장강(長江, 揚子江) 중류 일대에서 시작되었으며, 시조는 오제 중의 하나인 전욱(顓頊)의 4세손 육종(陸終)의 여섯번째 아들 수련(秀連)이다.
중원에서는 초나라를 남쪽의 오랑캐로 취급하였고, 초나라도 주나라 제후국을 거부하여 스스로 왕국(王國)이라 하며 웅(熊)씨 성을 썼다. 웅역왕(熊繹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 성왕이 제후국으로 인정했으나 겨우 자작(子爵)을 준 데 지나지 않았다. 초나라도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틈만 나면 중원을 쳤기 때문에 중원에서는 초나라를 누르는 제후를 패왕으로 인정했다.
초나라 17대 무왕(武王)은 기원전 706년(초무왕 35년)에 수(隨)나라를 쳐들어갔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겨지다가 주나라 왕실 세력권을 공격한 것이다. 수나라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수주시(隨州市) 수현(隨縣) 일대이다. 무왕을 이은 문왕(文王) 때는 도읍을 영(郢)으로 옮겼다. 기원전 638년(초성왕 34년)에는 패자를 자처하는 송양공(宋襄公)을 사로잡고 홍수(泓水 하남성 柘城縣)에서 격돌하여 송양공을 죽였으나 성복(城僕, 하남성 복양) 전투에서 진문공(晉文公)이 중원 패자가 되어 이끈 송․제․진(宋濟秦) 연합군에게 크게 패해 중원진출이 좌절되었다.
진나라 문공이 죽자, 초나라는 문공의 영향에서 벗어나 장왕(藏王) 시대에 북진정책을 계속하여 위세가 크게 강해졌다. 장왕은 기원전 597년(초장왕 17년) 필(邲)에서 진나라와의 싸움을 바탕으로 패왕이 되었다. 필은 하남성(河南省) 무척(武陟)의 황하강의 남쪽이다.
장왕은 세력이 강하여지자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였고, 초나라를 따른다고 맹세한 정(鄭)나라가 맹세를 어기고 진(晉)나라에 붙자 노하였다.
“정나라를 친다.”
장왕은 정나라를 쳐서 항복시켰다. 진나라는 정나라에 원군을 보냈으나 중도에 정나라가 이미 초나라에 항복한 것을 알았다. 그러자 주장(主將)이 말하였다.
“이제 소용없으니 돌아가자.”
부장(副將)이 말하였다.
“무슨 말씀이오! 명을 받고 왔으면 끝까지 싸울 일이요.”
“안 된다. 정나라는 이미 초나라에게 항복하였고, 우리 힘만으로 초나라를 이길 수 없다.”
“어쨌건 나는 군사들을 이끌고 진격할 것이오.”
둘은 서로 싸우다가 필에서 초나라의 지시를 받은 정나라 군사와 부딪쳐서 패하였다.
장왕은 진나라와 정나라를 공격하였으나 복종시키기만 하고 없애지는 않았다. 장왕은 기세가 올라 천자국인 주나라 도읍 낙양(洛陽)에서 열병식을 하여 주왕실에 시위를 하며, 주왕실에 대하여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었다.
당시 주정왕(周定王)은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칙사로 보내 장왕을 위로하였다.
장왕이 물었다.
“주왕조 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알고 싶소이다.”
이 솥(鼎)은 고대의 순우(순임금) 시대에 전국 구주(九州)의 구리를 모아 만든 보물로 하(夏)나라에서 상(商, 殷)나라, 주나라로 전해진 천자국(天子國)의 상징이었다. 장왕이 그 솥의 무게를 물어본 것은 허약한 주나라가 그 솥을 가질 수 없으므로 초나라가 천자국인 주나라를 대신하여 가지고 중원을 다스리겠다는 뜻이었다.
칙사인 대부 왕손만이 말하였다.
“천자는 덕으로써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솥의 유무나 크기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천자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의미였다.
장왕의 아들 공왕(共王)은 장왕보다 영민하지 못하였고, 패왕은 아니었으나 삼십년이나 재위하였다. 공왕은 초(招, 강왕), 위(囲, 영왕), 비(比), 석(晳), 기질(弃疾, 평왕)의 다섯 자식을 두었다.
초공왕은 태자를 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태실(太室) 뜰 가운데에 구슬을 묻어 놓고 정확하게 구슬 위에서 절하는 아들을 태자로 뽑자. 그 곳이 가장 정성 들여서 절을 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절을 하거나 치성을 드리는 것도 한두번으로는 안 되고 많이 해 본 자만이 정확한 위치를 잡아서 하게 된다. 초공왕은 그것을 보려 한 것이다.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는 척도였기 때문이다.
“아들 다섯 모두 목욕재계하고 태묘로 와서 선왕묘에 참배하라.”
공자초는 구슬을 넘어서 더 안으로 들어갔고, 공자위는 팔이 닿았을 뿐이고, 공자 비는 엉뚱한 데로 갔고, 공자석도 지나쳤다. 공자기질은 어려서 궁녀에게 안겨 왔는데 아장걸음이지만 정확하게 구슬 위에서 넙죽 절하였다.
“너 밖에 없구나.”
그래서 초공왕은 기질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런데 너무 어려서 아직 태자로 할 수 없으니 우선 장자 초를 태자로 뽑자.”
그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은 평범하여 패자가 되지 못하고 재위 십오년만에 죽었다. 강왕의 장남 원(員)을 겹부(郟敷)라고도 하는데 강왕에 이어 544년(초겹부 원년) 즉위하였다.
초왕이 된 겹부가 명하였다.
“숙부 위(囲)를 영윤(令尹)으로 삼는다.”
영윤은 국무총리로, 병력 지휘권을 가진 힘센 자리인데 숙부위의 힘이 강하여 할 수 없이 시킨 것이다.
영윤위(令尹囲)는 정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신 오거(伍擧)가 파견되어 있었다. 오거는 오자서의 조부이다.
어느날 초나라에서 영윤위에게 사신이 왔다.
“대왕께서 병에 걸려 위중하다 합니다.”
영윤위가 오거를 찾았다.
“먼저 얘기한 대로 내 뜻을 펴는 데 이번이 호기다. 그대가 나를 도와줘야겠다!”
“드디어 결행하시렵니까? 함께 목숨을 걸겠습니다.”
영윤위는 오거와 초왕자리를 뺏기로 모의한 것이다.
영윤위는 조카 초왕겹부의 문병을 핑계로 궁에 들어가서 초왕겹부를 목졸라 죽였다. 재위 사년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라 시호(諡號)도 없었다. 영윤위는 초왕겹부의 어린 아들 막(莫)과 평하(平下)도 죽였다.
영윤위는 다른 나라 제후들에게 초나라 정변을 설명하는 사신을 보냈다. 가기 전에 사신들에게 오자서의 조부인 오거가 물었다.
“누가 초나라의 사직을 이어받을 것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터인가?”
“영윤위님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오거가 말하였다.
“그러면 안 되고, ‘공왕님의 아들 중 영윤위님이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고 대답하게”
“어째서지요?”
“영윤위님에게 찬탈자라는 인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네.”
사신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공자비는 형인 영윤위가 즉위하면 자기도 죽일 것이라 생각하여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기원전 540년(초영왕 원년), 영윤위가 초나라 이십육대 영왕(靈王)으로 즉위하였다.
영왕은 욕심 많고 권력지향적이라 영왕 때 골육상쟁과 폭정, 과욕의 길을 걸어 장왕이 이루어 놓았던 성과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538년(초영왕 3년)에 영왕은 각나라로 사신을 보냈다.
“사신들은 각나라로 가서 제후들에게 동맹한다고 알려라.”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왕과 제후들은 힘을 과시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여러나라 대표를 불러서 자기를 따르게 하는 동맹을 하였다. 동맹을 하면 패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영왕이 말하였다.
“제후들을 모이라고 하여라”
그때, 오거가 영왕에게 말하였다.
“하(夏)나라왕 계(啓, 禹의 아들)는 균태(鈞台, 하남성 禹州市 陽翟)에서, 은나라 탕왕(湯王)은 국도(國都)인 경박(景亳, 하남성 偃師)에서, 주나라 무왕(武王)은 맹진(盟津, 하남성 孟顯의 西南)에서, 성왕(成王)은 기양(岐陽, 섬서성 岐山)에서, 강왕(康王)은 풍궁(豊宮, 섬서성 鄂州)에서, 목왕(穆王)은 도산(塗山, 安徽省 懷遠)에서, 제나라 환공(桓公)은 소릉(召隆, 湖北省 襄陽 북쪽)에서, 진나라 문공(文公)은 천토(踐土, 하남성 廣武)에서 제후들과 동맹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어느 곳에서 어떤 식으로 동맹하려시는지요?”
영왕이 말하였다.
“제환공이 소릉에서 제후를 모이게 한 방식으로 하자. 장소는 초나라의 신(申, 河南省 南陽)으로 하라.”
정나라에는 명재상인 현인(賢人) 자산(子産)이 있었다. 본명은 국교(國僑), 자(字)는 자산으로, 공손교(公孫僑)라고도 하였다.
정나라에는 목공(穆公, 기원전 627-606)에게서 나온 일곱 가(家)인 칠목(七穆)이 있었으며 그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했는데 그중 재상인 정경(正卿) 사씨(駟氏) 및 양씨(良氏) 가문의 힘이 강하였다.
그에 대하여 공실(公室)과 하급 대부(大夫), 사(士) 등의 불만이 쌓였던 터에 기원전 565년 진을 비롯한 제후국 군사가 쳐들어 오자 사(士)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집권하고 있던 자사(子駟, 駟氏의 가장) 등 대신을 죽이고 간공(簡公)을 옹립하였다.
그때, 자산의 아버지 자국(子國)은 사마(司馬, 국방장관)였는데 사들에게 죽었다. 자산은 가(家)를 방비하고 공관으로 가서 사들을 쫓아내고 간공을 구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자산은 실권을 잡았다.
자산은 기원전 538년(정간공 28년)에는 농민에게 평균 할당량으로 매기던 군사비를 경작지 넓이에 따라 부담시켰다. 기원전 536년(정간공 30년)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성문법을 만들고 청동기 솥에 명문(銘文)으로 새겨 넣어 백성들에게 알렸다.
자산은 이같이 현명하고 실리에 밝아서 정나라는 신(申)의 동맹에 참가하지 않았고, 조(曹)나라, 주(邾)나라, 노(魯)나라, 위(衛)나라 등 작은 나라들도 정나라의 영향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전한 동맹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왕은 동맹하여 조부 장왕과 같은 패왕이 되었다고 교만하여졌다. 그러자 오자서의 조부 오거가 간언하였다.
“걸왕(桀王)은 유잉(有仍, 산동성 濟寧市 남)의 동맹을 하였지만 유민(有緡)은 등을 돌렸습니다. 주왕(紂王)은 여산(黎山, 하남성 商丘市 虞城縣)의 동맹을 하였으나 동이(東夷,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 우리도 동이의 한 부류였다)는 이 동맹에 등을 돌렸습니다. 주나라 영왕(靈王)은 태실(太室, 嵩山의 별명)의 동맹을 하였으나 수적(戍翟)이 등을 돌린 역사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숭산은 오악(五岳) 가운데 중악(中岳)이라고 하며 준극(埈極), 태실(太室), 소실(小室) 세 봉우리가 있는데 동쪽 봉우리가 태실이다. 소실봉에는 소림사(河南省 登封縣)가 있다.
영왕이 말하였다.
“지금 어느 제후가 감히 내게 등을 들리겠는가? 힘을 보이면 따르지 않던 제후들도 당연히 따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인가 하나 쳐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오나라가 어떨까?”
초영왕은 동맹을 믿고, 본보기로 한 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오거가 말하였다.
“오나라에는 임금을 죽이고 제나라에서 도망간 경봉(慶封)이 있으므로 명분이 좋습니다. 거기다가 오나라는 우리 초나라의 원수입니다.”
경봉은 제경공(齊頃公) 시절 제나라에서 재상을 지내고 반역하다가 오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오왕여매(餘昧)가 받아들여서 초나라를 사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초영왕은 대부 굴신(屈申)과 속국인 서(徐, 강소성 徐州市)나라의 임금에게 명하였다.
“오나라를 쳐서 주방(朱方, 江蘇省 丹徒, 鎭江)의 영주로 있는 경봉을 잡아오라.”
굴신과 서나라 임금은 오나라를 쳐들어갔다. 초나라가 쳐들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던 주방 사람들은 초군에게 허물어졌다. 굴신과 서나라 임금은 경봉을 묶어서 초영왕 앞에 무릎을 꿇렸다. 초영왕은 귓속말로 경봉에게 말하였다.
“내가 시키는 대로 ‘나는 제나라에서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힌 놈이므로 여러분은 나같은 놈과 맹세하지 말라’고 자백하라.”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그러자 경봉이 크게 소리쳤다.
“여러 나라 대부들이여! 초영왕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자는 초공왕의 서자이면서, 조카인 임금을 죽이고 임금 자리를 뺏은 놈이므로 결코 이런 놈과 동맹하지 말라고 하시오!”
이 말에 모여있던 제후의 사절들과 군사들이 웃어댔다. 초영왕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여봐라! 도끼(斧)로 당장 이놈의 목을 쳐라.”
수하가 도끼로 경봉의 목을 쳐서 떨어뜨리자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역적이 역적을 죽이는구나.”
초나라가 오나라에 쳐들어와서 경봉을 잡아다가 죽인 일로 오왕여매는 크게 노하였다.
“여봐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극읍(棘邑,臨淄區 田旺村 ), 역읍(轢邑), 마읍(麻邑, 湖北省 麻城县)을 쳐라.”
이때부터 오나라는 초나라와 건뜻하면 싸웠고, 초나라 편을 든 월나라와 오나라의 사이도 나빠졌다.
공자기질은 제(齊)나라에 가 있다가 돌아왔다. 초영왕은 공자기질에게 명하였다.
“진나라를 쳐라!”
중원제후국들이 초나라의 기세에 겁을 먹자 초영왕은 득의하였다.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려 왔는데 이제 내가 천하를 다스려서 천자가 되어야 한다. 여봐라! 태복(太卜)은 내가 언제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될지 점을 쳐 보아라.”
태복이 거북이 껍질을 구워서 점을 쳤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으로 괘가 나왔습니다.”
“그까짓 점이 무어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안 맞으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옆에 있던 채나라의 채유(蔡侑)가 거들었다.
거북이 껍질을 불에 구우면 껍질 안쪽으로 많은 금, 즉 균열이 생긴다. 그 금이 많은 문양에 따라 길흉의 점을 치는데, 그 문양으로부터 갑골문자를 만들어냈다.
제나라 상대부 안영(晏嬰)의 자는 평중(平仲)이었다. 그래서 안평중이라고도 하였다. 안영은 제경공(齊頃公)의 분부로 초나라에 친선을 강화하러 사신으로 갔다. 초영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제나라는 중원에서 가장 강성하다고 하니 안평중에게 창피를 주어 우리 위세를 높여야 겠으니 그대들도 그리 알거라. 안평중은 오척도 안 되지만 말재주가 놀랍다고 하니 미리 한가지씩 준비하였다가 망신을 주어라.”
태재(太宰) 위계강(蔿啓疆)은 동문 옆에 오척도 안 되는 구멍을 뚫고 안평중을 그리로 들어오게 하였다. 안평중이 성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수비병이 말하였다.
“옆의 구멍으로 들어 오십시오.”
“이것은 사람이 출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출입하는 구멍이다. 초나라가 개만 사는 개의 나라라면 내가 여기로 들어가겠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나라라면 사람이 들어가는 문을 열어라.”
위계강은 망신을 주려다가 도로 망신을 당하고 동문을 크게 열었다.
안에서 커다란 수레를 타고 산같이 거대한 두 장수가 무장을 하고 안영을 맞았다. 안영을 위세로 꺾고, 안영의 체구가 작은 것을 놀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친선하기 위해서 온 것인데 어째서 군인이 맞는가?”
궁에 신하들이 늘어서서 안영을 맞았다. 투성연(鬪成然)이 골탕을 먹이려고 시작하였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세운 이래 제환공이 천하의 패권을 잡은 정도로 강성하였는데 이제는 쇠하여서 다른 나라들과 싸우느라 날이 새고 아침엔 진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우리 초나라를 섬기는 등 큰나라만 찾아다니며 복종하느라 군신이 모두 정신이 없겠소.”
“초나라도 패권을 쥐었던 초장왕 이래 오나라에게 여러번 망신을 당하였으니 마찬가지가 아니오? 천하의 대세란 흥이 있으면 쇠가 있는 법이고 그런 변화가 천하의 자연스런 흐름이오. 제나라는 그런 대세를 읽어서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단련시키며 때를 기다리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나를 남의 나라에 구걸이나 하러 온 사람으로 취급하오? 그대의 선조 투곡오토(鬪穀於菟)는 천하대세와 변화를 잘 알던 명신이었는데 그대는 어찌 그러오?”
이번에는 왼쪽 선비 하나가 나섰다.
“그렇게 천하대세와 변화를 잘 알고 있다면 역적 경봉이 난을 일으켰을 때 절개와 대의를 위하여 죽은 자와 다른 나라로 떠나서 타협하지 않은 자들이 많았는데 그대는 어찌 역적도 치지 못하고 벼슬도 버리지 못하고 대의를 위하여 죽지도 않았소?”
“큰 뜻을 가진 자는 작은 절개에 연연하지 않고 큰 뜻을 펴는 것이오. 즉, 눈앞의 작은 일에 구애되어 큰 일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오. 임금이 나라를 위해 죽으면 신하들도 따라 죽어야 하지만 제장공(齊莊公, 기원전 734)이 죽은 것과 신하들이 죽은 것은 나라와 충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소. 죽은 자들은 개인적으로 임금을 따르던 아첨배들인데 내가 그런 무리들과 함께 죽었어야 옳겠소? 그리고 내가 제나라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하려고 함이었지 벼슬을 탐하여서가 아니었소. 변란이란 어느 나라나 있는데 신하들이 모두 떠나버리면 그 나라는 어찌 되겠소?”
그리고 말을 이었다.
“초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변란이 있을 때 모두 역적을 치고 대의를 위하여 죽었소?”
지금 있는 신하들은 초영왕이 조카 선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을 때 동조한 자들이었다. 그것을 비웃은 것이다.
그러자 오른 쪽에 섰던 선비가 나섰다.
“종묘사직을 보존하려고 하였다고 했는데 그런 자가 난이 일어났을 때 역적들을 구경만 하고 있었단 말이오?”
“득세를 한 네 가문과 경봉이 일을 꾸밀 때도 나만 휩쓸리지 않고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시세를 보아 움직인 것이오.”
왼쪽에 서 있던 다른 선비가 나섰다.
“대장부는 계략과 기개가 있어야 임금을 모실 수 있는데 그대는 인색하고 보잘 것 없어서 힘들겠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오?”
“비루먹은 말과 다 헤어진 수레를 타고 왔으니 하는 말이오. 거기다 음식도 서너가지만 놓고 먹는다고 하는데 정승이라면 그에 걸맞는 화려한 수레와 말을 타고 다녀야 하고 음식도 격에 맞아야 하오. 그렇지 못하므로 임금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것이오.”
“내가 제나라 정승에 앉은 뒤부터 모든 사람들이 굶주림과 헐벗음에서 벗어났소. 그리고 명령만 하면 따르는 수천 수만의 수하가 있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그로서 족하고 임금을 선양하는데 지장이 없소.”
낭와(囊瓦)가 나섰다.
“성왕과 탕왕은 키가 구척이었고, 용장들은 대부분 풍모가 크고 뛰어났소. 그대는 키가 오척도 안 되고, 닭모가지 비틀 힘도 없으면서 입만 살아서 말재주만으로 사람을 현혹하니 부끄럽지 않소?”
“저울 추는 작지만 천근의 무게를 달고, 배를 젓는 노는 물속에 들어가 있는 부분이 더 많소. 교여(僑如)와 남궁만(南宮萬)도 키가 크고 장사였으나 노나라와 송나라에 잡혀 죽었소. 그대도 키는 큰 것 같으나 교여와 남궁만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오.”
초영왕이 안평중에게 물었다.
“제나라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같이 작은 사람을 보냈나?”
“우리 제나라는 사신을 보낼 때 그 나라에 맞추어 보냅니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군주가 있는 나라로 보내고 군주가 대인이면 대인을 보내고 군주가 소인이면 소인을 보냅니다. 신은 제나라에서 가장 못난 소인이라 여기로 왔습니다.”
때맞추어 계획한 대로 병사들이 제나라 출신 도둑을 묶어서 데리고 왔다.
초영왕이 말하였다.
“제나라 사람은 다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가?”
“강남에 나는 귤나무를 북방에 가져다 심으면 탱자가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제나라 사람은 도둑질을 할 줄 모르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초나라의 풍토가 그래서 그런 것이지 제나라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자 초영왕은 더 이상 상대할 수가 없어서 안영에게 사과하고 말았다.
그후 초영왕은 제나라를 쳐서 이겼다. 초군에 의해 제나라 관기가 죽자 관기의 아들 관종은 초영왕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초영왕은 장화대 낙성식에 제후들을 초청하였는 데 노나라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은 데 대한 분풀이로 작은 나라인 진나라와 채나라를 없앴다.
진(陣國)나라 애공(哀公)은 첫부인에게 언사(偃師), 둘째부인에게 유(留), 셋째부인에게 승(勝) 세 아들이 있었는데 언사를 태자로 하였으나 둘째부인이 태자언사를 폐하고 유를 태자로 삼고 싶어 모략을 꾸몄다. 공자유의 태부(스승감)와 소부(스승)인 공자초(招)와 과(過)는 대부 진공환(陳孔奐)과 모의하여 태자언사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 소식을 듣고 진애공은 기원전 535년 목을 매어 죽었다.
공자초는 공자유를 즉위시키고 우징사(于徵師)를 시켜서 초영왕에게 고하였다.
“진애공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진애공의 셋째 아들 공자승이 초영왕에게 와서 울면서 하소연하였다.
“공자초와 공자과가 태자언사를 죽였습니다.”
“내가 듣기로 우징사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저런 죽일 녀석을 보았나. 여보아라. 우징서를 불러 오너라.”
초영왕은 대질심문을 하여 우징사가 거짓말을 한 것을 알고 목을 쳤다. 공자유는 무서워서 진후자리를 버리고 정나라로 도망갔다.
사건의 주모자인 공자초는 계략을 꾸며서 공자과의 목을 쳐서 초영왕에게 가지고 갔다.
“이번일은 모두 공자과가 꾸민 일이옵니다.”
공자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연극을 하였다.
“그러면 진공환의 목만 쳐라.”
초영왕이 공자초를 놓아주자 공자승이 다시 쫓아왔다.
“대왕님 공자초가 주모자이옵니다. 간악한 흉계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
“그러냐? 이런 괘씸한 것을 보았나, 여 봐라 공자초를 영원히 국외로 추방하라.”
공자승과 태자언사의 아들 공손오(公孫吳)가 초영왕에게 절을 하였다.
“은혜가 백골난망입니다.”
초영왕이 말하였다.
“너를 진나라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나 잔당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진나라를 초나라에 편입시키니 너희들은 초나라로 들어와 살아라.”
그래서 진나라는 없어졌다.
그다음은 채나라 차례였다. 초영왕은 채후반(蔡侯般)을 신(申, 하남성 信陽) 땅으로 유인하여 잔치를 열어 술에 취하게 한 다음 죽였다. 신은 삼관 밑에 있는 땅이다.
“채후반은 임금인 자기 아버지를 죽인 패륜무도한 자다”
이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채후반의 수하들은 초영왕에게 아무도 투항하지 않았다. 채후반의 덕이 높았기 때문이다. 초영왕은 공자기질에게 채나라를 치라고 하였다. 공자기질은 군사를 이끌고 채나라로 가서 도읍의 성을 둘러 쌌다.
초영왕이 채후반을 오라고 했을 때 의심한 채나라 공손귀생(公孫歸生)이 말하였다.
“가지 마시옵소서. 미심쩍은 데가 많사옵니다.”
“아니다 별일 없을 것이다.”
채후반은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 가려고 하였다.
“그럼 태자라도 세우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공자유(有)를 태자로 삼는다.”
초영왕은 채후반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채후반을 죽였다.
공손귀생은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진(晉)나라로 채유(蔡侑)와 태자유를 보냈다.
진소공(晉昭公)은 진나라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신하들과 상의하여 송(宋), 제(齊), 노(魯), 위(衛), 정(鄭), 조(曹) 여섯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궐은(厥憖) 땅으로 대표들을 모이라고 하였다, 진소공은 초나라를 쳐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나 초나라가 무서워서 모두 꽁무니를 빼고, 대신 초나라의 무도함을 질책하면서 물러나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편지를 받아 든 초영왕은 코웃음을 쳤다. 초나라 공자 기질은 채유를 잡아 가두고 채나라에 대한 공격강도를 높였다. 그러자 채의 태자유는 공손귀생의 아들 공손조오(公孫朝吳)를 공자기질에게 보냈다. 공손조오가 공자기질에게 말하였다.
“영왕은 모두 알다시피 선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화대를 짓느라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다른 나라를 친다고 병사들의 뼈를 다른 나라 들에 뿌리고,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작년에는 진나라를 쳐서 없애고, 이번에는 우리 채나라를 쳐서 없애려고 합니다. 이같이 영왕은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원수인데 공자기질께서는 어찌 무도한 일에 앞장서서 죄를 뒤집어 쓰고 계십니까. 공자께서는 슬기롭고 현명하셔서 어렸을 때 구슬 위에 멈추었던 분이라 선왕께서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 주려고 하셨고, 초나라 백성들도 영왕의 학정에 견딜 수 없어서 공자님이 왕위를 물려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저런 발칙한 놈이 있나. 여봐라. 저놈을 끌어내라.”
공자기질은 속으로는 공손조오의 말이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고 그 얘기가 초영왕에게 들어가면 안 되므로 공손조오를 쫓아내라고 한 것이다. 공손조오는 채나라로 돌아갔다. 태자유는 그후 여덟달동안 항복하지 않고 버텼으나 식량이 떨어져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공자기질은 채성을 함락시킨 다음 초영왕에게 태자유와 채유만 잡아 보내고 공손조오는 빼돌려서 심복을 만들었다. 영왕은 태자유를 잡아서 제사를 지냈다.
초영왕은 채유를 살려서 초나라에 두었는데 채유는 초영왕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남아 있으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초영왕은 공자기질을 채나라를 다스리는 채공(蔡公)으로 임명하였다.
초영왕은 기원전 552년(초영왕 8년)에 진나라와 채나라를 쳐서 초나라 것으로 만든 후 허(許), 호(胡), 심(沈), 도(道), 방(房), 신(申)등 작은 나라의 임금을 형산(荊山, 하남성 형주)으로 쫓아냈다. 그러고서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 이제 천하의 패왕이 되었으니 주(周)나라에 가서 천자의 상징인 구정(九鼎)을 가지고 오라.”
구정은 천자국의 상징이므로 힘없는 주나라가 가지지 말고 힘있는 초나라가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자 우윤이 말하였다.
“제(齊)나라, 진(晉)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는 중원에서 가장 강한데 우리 초나라에 복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나라에서 구정을 가져 오면 모두 합심하여 우리나라를 칠 것입니다.”
그러자 초영왕이 말하였다.
“서(徐)나라는 오나라와 친하다. 그래서 전에 오나라 치는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므로 먼저 서나라를 치고 다음에 오나라를 쳐서 힘을 보여 주겠다.”
초영왕은 서나라를 쳐들어가 서성(徐城)을 에워쌌다. 그리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건계(乾谿)에 주둔하고 대(臺)를 쌓고 궁을 지었다.
채나라 대부 공손귀생(歸生)의 아들 공손조오는 채나라를 독립시킬 기회를 찾으려고 채나라 총독으로 와 있는 공자기질을 잘 섬겼다.
초영왕은 신(申)에서 제후와 회동하고 나서 제나라 대부 관기(觀起)를 죽였는데, 관기의 아들 관종(觀從)은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관종은 책사(策士)로, 먼저 월나라 상수과(常壽過)에게 밀사를 보내어 초나라를 치도록 병을 일으키게 하고 진나라에도 밀사를 보냈는데, 채공(蔡公)인 기질의 명령인 것처럼 위장하여 태비를 제나라로 임명시켰다.
그 후 관종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정병을 이끌고 제나라를 칠 준비를 하였다. 공자기질은 관종군의 세를 보고 영왕을 거꾸러뜨리자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공손조오는 초영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공자기질에게 말하였다.
“영왕은 선왕을 죽여서 왕위를 빼앗은 자로, 장화궁을 짓느라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항상 다른 나라를 치느라고 백성들의 시체가 즐비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악착같이 부려먹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심이 떠났으므로 기질공자께서 그를 거꾸러 뜨리고 왕이 되십시요.”
관종은 이 같은 바탕을 만들어 놓고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관종은 공손조오와 함께 공자기질의 형으로 망명중인 초영왕의 동생 공자비와 공자석 둘도 끌어들였다. 공손조오는 채나라에 온 두 공자에게 말하였다.
“영왕은 허욕에 불타 서나라를 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아 초나라는 비어 있고, 백성들의 영왕에 대한 원망은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틈타 두 공자께서 거사를 하면 공자기질도 함께 움직일 것이고, 초나라에 있는 채나라의 채유가 나라를 찾으려고 동조하고, 교윤(交尹) 투성연은 공자기질과 친하여 힘을 보탤 것이고, 진(陳)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천봉술(穿封戌)도 달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세 형제는 채나라에서 결의를 하여 채나라 군사를 일으키고, 관종은 진나라 천봉술을 설득하러 갔으나 천봉술이 병으로 죽자 하징서(夏徵舒)의 손자인 하설(夏齧)이 진나라 거사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공손조오는 채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우군이 되고 하설은 진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좌군이 되어 초나라 영성으로 진격하였다. 기다리던 채유가 성문을 활짝 열어 주어 거의 싸움 없이 입성하였는데 투성연도 영접하였다.
영윤위파는 이들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영왕의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영윤위파는 태자녹(祿)이라도 데리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적에게 막히자 같이 자살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은 계속 심한 부역(負役)에 고생하고, 초영왕에 대한 원망과 한탄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도읍인 영(郢)은 초영왕이 자리를 오래 비운 데다 영왕에 대한 미움으로 이들 적군을 환영하여 저항이 없었으므로 관종은 초나라의 태자 녹(祿)과 피적(藣敵)을 쉽게 잡아 목매달아 죽였다.
관종과 공손조오는 원한을 갚았으나 초나라를 빼앗으려고는 하지 않고 기질의 형인 공자비를 초나라 왕으로 세우고, 공자석을 영윤으로 하고, 공자기질을 사마(司馬)로 하였다.
초영왕은 건계(乾谿)에서 초나라 도읍 영에서 초영왕의 태자 녹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놀라 마차에서 떨어지며 낙담하였다. 조카와 조카의 어린 자식들까지 목졸라 죽인 강심장이었던 그가!
관종은 병사들을 이끌고 건계의 영왕군을 포위하고 포고하였다.
“초나라는 이미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다. 빨리 귀국하는 사람은 죄를 묻지 않으나 늦게 귀국하는 자는 죄를 묻는다.”
초영왕의 진영은 동요하며 병사들은 영왕을 버리고 조국으로 되돌아갔다. 영왕의 측근도 모두 떠났다. 초영왕은 굶으며 유랑하였는데, 우(芋)라는 마을의 장인 신무자(申無字)의 아들 신해(申亥)가 영왕을 거두었다. 신해는 신해의 아버지가 두 번이나 왕명을 거역하였는데 영왕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은 것에 은혜를 갚은 것이다. 쇠약한 초영왕은 신해의 집에서 죽었다. 신해는 딸 둘을 초영왕과 함께 순장(殉死)시켰다. 기원전 529년(초영왕 12년)의 일이다.
초나라 도읍영에서는 공자비가 초왕이 되었다. 그런데 두려운 소문이 돌고 있었다.
“영왕이 대군을 이끌고 습격하여 보복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초영왕을 무서워하여 이 소문에 거리가 텅 비었다. 영왕이 죽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초나라를 빠져나갔다. 공자비는 조카 녹이 살해되는 것을 묵인하였으므로 영왕이 오면 큰일이었다.
공자기질은 영왕이 역습을 할 것이라고 소문냈다. 공자비를 겁주기 위해서였다. 소문은 매일 사실처럼 다가왔다.
관종은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공자비에게 말하였다.
“기질을 죽이지 않으면 나라를 잃고 화를 당할 것이오.”
공자비는 떨면서 말하였다.
“형제를 죽일 수는 없소.”
“사사로운 정은 버려야 하오. 대왕이 그를 살려도 동생인 기질은 그렇지 않을 것이오. 기질을 죽이시오.”
그러나 공자비는 공자기질을 죽이려고 하지 않아서 관종은 위기를 느끼고 초나라를 떠났다.
초나라 사람들은 초영왕이 보복하러 온다는 소문을 믿어서 밤에 무슨 소리라도 나면 영왕이 왔다고 놀라며 소동을 일으키는 날이 계속되었다.
공자기질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뱃사공에게 배를 띄워 장강을 오르내리면서 영왕이 되돌아 왔다고 소리치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놀라서 소동이 일었다. 공자기질은 사람을 시켜서 초왕비와 영윤석 두 형에게 거짓말로 고하였다.
“영왕이 돌아왔는데, 사마(司馬, 弃疾)를 죽이고 바로 여기로 올 것이므로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불같이 노하여 당할 수 없습니다.”
초왕비와 영윤석은 이 말을 믿고 모두 자살을 하였다. 초왕비는 재위 십여여일만에 자살하였으므로 초왕으로 치지도 않는다.
형 둘이 죽자 기질은 왕위에 올라 이름을 거(居)로 고쳐 웅거(熊居)라 하였는데, 이 사람이 초평왕으로 기원전 528년(초평왕 원년)의 일이다. 이같이 영왕의 동생으로 오남 중 막내인 기질이 형들을 제치고 초나라 왕위에 올랐다.
초평왕은 공자에 대한 예를 갖추어 형들을 장사지내고 투성연을 영윤으로 하고 양개(陽匃)를 좌윤(左尹), 백극완(白郤宛)을 우윤으로 삼고 조오와 하설을 하대부(下大夫)로 삼았다.
공손조오와 채유는 벼슬을 마다하고 나라로 돌아가면서 말하였다.
“우리가 대왕님을 도와 초나라를 친 것은 대왕님의 힘을 빌어서 채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한 일념이었습니다. 대왕께서는 보위에 오르셨으나 채나라는 아직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나라와 채나라를 독립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초평왕은 두 나라를 독립시키고 형산으로 쫓아보냈던 여섯나라 임금도 자기 나라로 귀국시키고 보물도 모두 돌려 주었다.
초평왕은 간신 비무극(費無極)을 총애하였다. 투성연(鬪成然)은 간신 비무극의 참소에 말려서 죽고, 뒤를 이어 양개(陽疥)가 영윤이 되었다. 비무극은 초평왕에게 언장사(鄢將師)를 추천하자 우령(右領)을 삼고 총애하였다.
오맹부
당시 중원대륙에는 동맹이라는 것이 있어서 각나라 제후들이 모여서 가장 힘세고 정의로운 나라 제후를 맹주로 뽑았다. 주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대신 패왕을 뽑아 주왕실 대신 중원의 질서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651년(초성왕 21년) 제환공은 제후를 규구(葵丘, 하남성 商丘市 民權縣)로 불러서 동맹하였다. 이때 주왕은 경사(卿士, 재상) 주공공(周公孔)에게 문왕(文王), 무왕(武王) 제사에 올리는 마른 고기를 보내고, 패왕으로 대접하여 당하에서 절하는 것을 면제하였으나 제환공은 당하에서 절하여 예를 표하였다. 이때 동맹으로 약속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불효자는 죽이고 태자를 바꾸거나 첩을 처로 하지 않는다.
2. 현인을 존경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키우고 훌륭한 인물을 드러나게 한다.
3.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애들에게 자애롭고 다른 데서 온 선비나 손님을 보살핀다.
4. 사(士)는 관직을 세습하면 안 되고, 관의 임무는 겸직하면 안 되고, 사는 반드시 우수한 자를 뽑고, 군주라도 함부로 대부를 죽이면 안 된다.
5. 제방을 마음대로 고쳐서 수리(水利)를 독점하면 안 된다. 다른 나라 사람이 곡물을 구입하는 것을 막으면 안 된다. 사람을 봉건할 때는 맹주에게 보고해야 한다.
규구에는 동맹비와 동맹대가 남아 있다.
기원전 562년(진도공 11년) 진도공(晉悼公)을 중심으로 노(魯), 송(宋), 위(衛), 조(曹), 제(齊), 거(莒), 주(邾), 설(薛), 기(杞), 소주(小邾) 나라의 제후가 호(毫, 안휘성 商丘)에서 동맹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동맹국은 서로 매년 곡물을 비축하여 기근에 서로 대비한다.
2. 산이나 강의 생산물을 한 나라만 독점하면 안 된다.
3. 죄인을 감추어 주면 안 된다. 나쁜 일은 바로 취소해야 한다.
4. 재난이나 내란에 협력하며 착한 자와 나쁜 자의 기준은 통일하고 왕실을 돕는다.
5. 이 동맹을 따르지 않는 나라는 쳐서 멸망시킨다.
당시는 진(晉)나라가 중원의 맹주였다. 중원의 맹주국은 몇 년에 한번씩 각국 제후들을 불러 모아서 동맹을 하곤 하였는데, 겉으로는 천자국인 주나라를 섬기기 위한 결의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원에서 가장 힘센 패권국이 다른 나라에 대하여 힘을 과시하면서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晋)나라가 내분으로 힘을 쓰지 못하자 진(秦)나라가 나섰다.
진애공(秦哀公)은 중원제국에 진나라 임동(臨潼, 서안시 臨潼區)에서 동맹을 하므로 중원제국 17개국 나라 제후들에게 모이라고 통보를 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오자서가 초평왕을 수행하였다.
임동은 진시황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때 오자서는 진애공에게 칠성검을 받고 맹부(盟府)로 임명받았다. 오자서의 문장은 백리해(百里奚), 무(武)는 진희배(秦姬輩)를 능가하였다. 오자서가 당시 위나라 용사 괴외(蒯聵)를 주먹으로 쳐서 이기고, 노나라의 용사 변장(卞莊)을 발로 차서 물리쳐서 17개국 군주를 보호하여 무사히 귀국시킨 무용담은 중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자서는 초나라 오사(伍奢)의 아들로 오상(伍尙)이라는 형이 있다. 조부인 오거(伍擧)가 초장왕(莊王, 기원전 613~591) 때 직간(直諫)을 한 충신 집안으로 오사도 직간을 하는 충신이다.
십칠개국 제후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날 한시에 모이기 힘들었다. 그들은 십여일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각지에서 모였다. 한 나라의 제후가 올 때마다 먼저 온 제후들이 성대하게 환영을 하며 서로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권을 다투는 자리이므로 속으로는 알력이 심했다.
드디어 본회의 날 진애공이 말하였다.
“멀리서 오느라 노고가 많았소. 이번의 동맹도 전번의 동맹에 이어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주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지금 대로 우리 나라를 맹주국으로 인정해야 하겠소.”
그러자 초평왕이 말하였다.
“그것은 안 되오. 진나라에서 맹주국을 하여 왔다고 하나 각나라 제후들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맹주로 다시 추대할 수는 없는 일이오.”
진나라 편인 위공이 말하였다.
“무엇이라고? 그럼 진나라 말고 맹주국을 할만한 나라가 어디에 있으며, 그만한 힘을 가진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오왕요가 말하였다.
“힘으로 따지자면 초나라와 우리 오나라도 얼마든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
진나라를 섬기는 노나라에서 진나라 편을 들어 반대하였다.
“두 나라는 주왕실을 떠 받드는 나라도 아니고, 백성들도 남방의 오랑캐이고, 주나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주나라를 보호하고 섬길 수 없으므로 맹주국이 될 수 없소.”
“옳소.”
“옳소!”
많은 나라 제후들이 진나라 편을 들었다. 그러자 진애공이 말하였다.
“그럼, 주나라 천자에게 바치는 보물을 먼저 내시오. 그에 따라 평가를 하도록 하겠소.”
각나라 제후들은 진애공의 횡포가 싫었으나 앞장서서 내색을 하는 대표는 없었다. 그러자 제나라 대부 안평중이 나섰다.
“제후들의 모임은 절차와 형식이 있으므로 우선 절차와 형식을 정한 다음 그에 따라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진애공이 반갑지 않은 내색으로 말하였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공명정대한 맹부(盟府)를 뽑아서 다툼이 생기면 공정한 판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먼저 맹부를 뽑아서 그 사람이 보물을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진애공이 떫떠름한 어조로 말하였다.
“여러 제후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그럼 누구를 맹부로 뽑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갑자기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였다.
“저는 노나라의 용사 변장(卞莊)인데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노나라는 진나라 편이었다. 그러자 초평왕이 나섰다.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런 중요한 자리를 맡으려고 하는가?”
“일찌기 곰을 때려잡은 일이 있사옵니다.”
“우리나라 오자서는 호랑이를 잡은 일이 있네.”
그러자 진애공이 나섰다.
“그러면 두 사람을 대결시켜서 이기는 자를 택하기로 하자”
그 말에 오자서와 번장은 서로 대결을 하였다. 오자서가 번개같이 번장을 발로 차자 번장은 나가 떨어져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오자서가 말하였다.
“누구 또 없소?”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서 나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위나라 용사 괴외(蒯聵)요. 나도 누구에게 져 본 일은 없소.”
그도 오자서와 붙었으나 한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오자서가 말하였다.
“누구 또 없소?”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나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진(秦)나라의 희배(姬輩)요”
그러자 오왕료가 말하였다.
“맹부는 맹주국 사람이 하면 안 되오. 다른 나라 사람이 해야 공정하오. 그러므로 진나라 사람은 안 되오.”
그러자 오자서가 말하였다.
“상관 없습니다. 이왕 나왔으니 겨루어서 그 결과에 승복하기로 하지요.”
그러자 더 이상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자서는 희배를 번쩍 들어서 던졌다. 희배는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
진애공은 오자서가 자기 편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오자서를 맹부로 하기로 하오. 오자서는 이 보검을 받고 공정한 판정을 내리도록 하라.”
진애공은 칠성검을 오자서에게 내렸다. 오자서가 무릎을 끓고 보검을 받은 다음 말하였다.
“맹부를 맡아서 모든 일을 공정하게 판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법을 어기는 자는 이 검으로 목을 치도록 하겠습니다.”
진애공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제후들의 목을 칠 수 있도록 회의 장소 뒤에 병사들을 숨겨 놓고 있었다. 제후들은 그것을 짐작하고 있어서 진애공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애공이 말하였다.
“그럼 먼저 천자께 바치는 예물부터 내도록 하시오.”
각제후들은 보물을 바쳤다. 그러나 채나라와 초나라는 보물을 가져 오지 않았다. 그러자 진애공이 힐책하였다.
“어이하여 천자에게 드리는 예물이 없소? 이렇게 불경한 일은 없는 것이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오자서가 답하였다.
“채나라는 나라가 척박하여 보물이 안 나는 곳이고, 맹주자리를 탐하는 것도 아니니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초나라는 어찌 예물이 없는 것이오? 이것은 천자와 맹주국인 진나라를 무시하는 것 아니오?”
초평왕이 말하였다.
“초나라도 맹주자리를 탐하지 않소. 그래서 예물보다는 친선과 화목, 천자님께 대한 충성으로 대신하겠소.”
진애공은 초평왕이 아무리 맹주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물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생각하여 목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오자서가 버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오나라도 제대로 된 선물을 내지 않아서 결국 맹주는 다시 진애공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원의 나라들은 주나라 왕실 왕족들이 제후를 하고 있어서 주나라 천자를 섬겨야 하지만, 오나라와 초나라는 친족이 아니라 섬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제후국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므로 주나라와 제후국들을 약올리려고 선물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이다.
진애공은 중원맹주인 자기를 무시한 나라들과 그들 편을 든 나라 군주들을 혼내 주고 싶었다.
진애공은 제후들이 가는 길에 몇몇 마음에 들지 않는 제후들과 초평왕 및 오자서의 목을 베려고 군사를 배치하였다. 오자서가 진애공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말하였다.
“제후들이 올 때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갈 때 다시 그런 일을 당하면 우리를 불러 놓은 진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닐 터인 즉 대부 백리해와 희배님께서 동관 밖까지 제후들을 안전하게 전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애공이 말하였다.
“한 나라를 호령하는 제후들이 어찌 그런 도둑 나부랭이들을 무서워한단 말이오? 어쨌든배웅하도록 하겠소”
진애공이 시키는 대로 백리해와 희배가 함께 전송하러 나오자 매복하고 있던 진애공의 수하들은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제후들이 동관을 나가자 희배는 부하들과 함께 칼을 쥐고 오자서를 겨누었다.
“오자서야. 다시 한번 겨루자, 내가 너를 이기면 너의 목을 치고, 제후들 중에서도 우리 애공님에게 불경하였던 자들의 목을 치겠다. 네가 이기면 너를 무사히 보내 주마.”
오자서도 칼을 빼 들었다.
오자서와 희배가 어울려 수합을 싸웠을 때 오자서가 치는 칼에 희배의 칼이 날아갔다. 오자서는 희배의 목에 칼을 겨누고 말했다.
“너희 진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소인배들이냐! 아무리 졸렬한 자들이라도 약속을 한 것이므로 제후들의 손끝하나 건드리지 마라. 너는 우리와 함께 사흘을 더 같이 가야 하겠다.”
오자서는 백리해와 희배를 인질로 삼아 진나라 병사들이 쫓아올 수 없는 거리까지 간 다음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래서 각나라의 제후들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는데 이일로 오자서의 이름은 중원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다.
이일로 초평왕은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를 상대부(士大夫)로 삼고 연(連)땅을 주어 연공(連公) 칭호를 내렸다. 오자서는 열가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평왕은 오자서를 삼보조대장군(三保大將軍) 번성(樊城, 陽樊)의 태수(太守)로 임명하였고, 형인 오상은 초나라 요충인 당읍(堂邑, 강소성 南京市 六合区 북쪽)을 다스리는 대부로 봉하고 당군(堂君) 칭호를 내렸다.
이하 생략 - 원본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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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하소설 답게 인간군상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고 흥미있게 읽었으며, 감동이있었습니다.
한자가 많아 모르는 뜻을 찾으면서 읽었는데 원본으로 다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