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군 득량면 청포해변. 필봉 비탈길에서 내려다본 해안길이 득량만 쪽빛 바다와 어울러져 더욱 아름답다. |
굽이치는 득량해안에 공룡의 탯자리
길은 10리 방조제 만나 명품쌀 키우고
보이는 것은 쪽파밭… 득량만 가득 넘실대는 매운향
전남 남해안이 다 그렇지만 특히 율포에서부터의 바다는 어느 곳보다 큰 호수다. 왼쪽으로는 고흥반도가, 앞에는 득량도, 금당도가 대양의 물결을 막아 거대한 호수를 만든다.
당분간은 이 득량호(?)를 껴안고 돌아야 한다. 장흥 회진에서부터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올라온 이 해안은 오늘(2006.11.16)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는 득량호를 끼고 고흥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버스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율포 삼거리마트를 출발한다. 율포는 모래톱에 서서 보는
것 보다 장군재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봐야
한다. 소나무숲이 반달처럼 감싼 해수욕장, 푸른 물결위에 뜬 저 곳이 득량도다.
멀리 고흥 팔영산이 망토처럼 구름을 두르고 하늘에 떠 있다.
율포를 떠나 장군재 ‘경치 좋은 길’을 넘어 만나는 첫 마을 금강을 지나 동백 승강장.
승강장 곁에 ‘보성녹차토마토’ 박스가 쌓였다. 출하하기 위해 내놓은 모양인데 지키는
사람은 없다. 순후한 땅이다.
‘녹차토마토’에서 보았듯 보성에서는 모든 것이 ‘녹차’로 통한다. 녹차 명산지로서의
명성은 오래 전에 굳혔고,
녹차해수탕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지도 오래다. 요즘에는 음료에서부터 떡, 과자에까지 녹차가 들어갈 정도니,
바야흐로 녹차전성시대다.
1938년 일본 녹차 전문가들이 최적지라며 인도에서 차 종자를 가져다 심은 것이
시초라니 보성녹차의 역사도 70년이 되었다.
최근 들어 이 녹차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한 가지 불만이 있다. 티백이 아닌
우려먹는 찻잎 가격이 너무 비싸다.
찻잎을 찻주전자에 우려 마시는 것과 티백을 우린 것과는 맛과 향, 정취가 전혀
다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찻잎이 한 통에 몇 만원이니 나처럼 새벽마다 1ℓ 이상 마시는 사람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된다.
현재 보성에서 재배되는 녹차가 전국 생산량의 40%에 달한다고 한다. 재배면적도
엄청나게 늘었고 많은 부분에서
기계화도 되었으니 값도 좀 내렸으면 쓰겠는데 소갈머리 없는 소린가.
금강마을, 통샘을 지나 당산 버스승강장. 저 앞에 방조제가 보인다. 갈 수 있을까.
지도를 살피는데
마을 쪽에서 소형 트럭이 나온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운전대를 놓고 내려선다.
방조제로 갈 수 있느냐니까 갈 수 없다고,
큰 길로 가라고 말리는데 술 냄새가 확 풍긴다. 저런, 어제 밤에 걸쳤구나.
“그나저나 어디를 가는 길이요?” 하며 내 손에 들린 지도를 기웃거리더니,
“움마, 여기가 우리 동네고 여기가 여기네”하며,
내가 들고 있는 볼펜을 달라더니 우리가 서 있는 삼거리를 찍는다.
“지도 한 번 좋네. 어디서 산다요? 아무나 살 수 있다요?”
지도 공포증이 여기에도 있구나. 하기야 해변 마을이라 어렸을 때부터
‘등산복 차림에 지도를 들고 어정거리는 사람’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터이니 그럴 만도 하다.
지도를 접어 출발하려니까 “좋은 여행 되십시오” 젊은이가 먼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 부르릉 떠난다.
내가 걸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던 방조제가 천포(泉浦)방조제다.
큰 길 저 위쪽엔 천포리가 있어 이곳이 회령면과 통합돼
회천면이 된, 1914년 이전에는 장흥 땅 천포면 지역임을 알려준다.
석간에서부터 쪽파밭이 많이 눈에 띈다. 스프링클러는 파밭 가운데 서서 휫휫
물춤을 추고, 주먹주먹 하얀 꽃을 들고
배수로 가득 들어선 갈대는 갯바람에 정신없이 내둘린다.
마산, 화당, 화죽삼거리, 묵산, 회천동초등학교를 지나 연동. 슈퍼에서 물 한 병을
사들고 나오니 바닷물이 문턱 아래 출렁인다.
필봉기슭까지 바다를 끼고 도는 도로는 한가롭다. 바다는 푸르고 바닷물은 넘실대니
흔들흔들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오가는 차도 거의 없는 길. 바람이 거세다. 모자가 턱에 맨 끈을 졸라매며 발목 잡힌
새처럼 퍼덕대고,
바람에 떠밀린 낙엽들은 도로를 휩쓸며 우우 몰려간다. 내 발목에 감겼다가 늦었다는 듯 달음박질치는 놈도 있다.
쪽파밭이 참 많다. 온 들판을 진초록으로 덮었다. 필봉 고갯길을 내려가 객산마을을
지나고 청포마을 고갯길을 오르니
다시 푸른 득량만이 펼쳐진다. 고흥반도가 바로 저 건너다. 바닷가에 선 은빛바다펜션이 외롭다.
청포는 회천면 마지막 마을이다. 여기서 고개(나중에 선소에서 들으니 이 고개를
객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라 해서 객산굴고개라고 부른다고 했다.)를 넘으면 선소(船所), 공룡알 화석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공룡알과 알이 담긴 둥지는 유리함 안에 단정히 담겨 있는데. 공룡 새끼는 부화돼
떠나버린 빈껍데기란다.
이곳 해안 3㎞ 구간에서 확인된 둥지가 10개에, 지름이 9~15㎝인 알이 100여개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어느 배에선가 아까부터 뽕짝이 간드러지게 흘러나온다. 뽕짝은 포구의 구색이다.
선창에 간드러지게 울려 퍼지는 가락이
척척하게 감긴다.
시간도 되었고 노래도 있고, 여기서 도시락을 까자. 아까 만난 중년이
선소에 식당이 없다고 했다.
식사를 제 때 해야 피로가 덜 하다는 것을 걸으면서 깨달은 뒤부터 비상용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다.
막 도시락을 까는데 “누군데 여기서 밥을 묵소?”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선소에 사는 할아버지인 모양이다.
잘 되었다. 지도에 ‘만경대’라는 지명이 ‘선소’와 함께 적혀 있다니까,
“먼 말인지 모르것소. 만경대 그런 것 없어요. 여기가 이순신 장군이 배를 만든
선소요, 선소” 한다.
내가 앉아 있는 곳, 공룡알 전시장 앞으로 바다가 움푹 들어와 마치 호수처럼 보인다.
여기가 정유재란 때 충무공에게 내준 마지막 전선 12척이 있던 곳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호수에 숨겨두었던 것일까.
이웃 청암마을이 고향이라는 소설가 박응순씨는 충무공과 관련된 얘기가
이 일대에 많다고 했다.
군사들이 활 연습을 하던 활터가 있고 부상병을 치료하고 재활훈련을 했다는 자리도
전해진다고 한다.
조선조 명종 때 이곳에 군영을 개설해 장졸 243명이 주둔했고, 항상 3백석이 넘는
양곡을 비축했다는 기록을 보면
꽤 규모 있는 군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득량은 어디를 보나 쪽파다. 지금 수확이 한창이다. 천 평도 훨씬 넘을 듯한 밭에 엎드려 파를 뽑던 수십 명의 아주머니들이
일제히 일어나 손을 털며 밭머리로 나간다. 점심을 먹으려는가 보다. 일어섰던 한 아주머니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엉덩이를 까 내린다. 하얀 엉덩이가 드러난다. 길손쯤은 안중에 없다는 듯 볼 일을 보고 바삐 밭둑으로 나가는 아주머니.
그림이다. 길가에 뒹구는 늙은 호박, 파란 쪽파와 파가 뽑혀나간 검은 밭고랑의 조화,
옹기종기 둘러앉아
점심을 드는 아주머니들, 바람에 부대끼는 갈대…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아름다운 우리네 풍경이다.
득량만 속바닥은 폐그물이며 육지에서 흘러온 쓰레기로 심란하다지만
해면은 쪽물을 풀어놓은 듯 짙푸르다.
원곡, 봇등을 지나 득량만방조제 입구 발금이에 선다. 해변에 집들은 늘어서 있는데
사람은 그림자도 없다.
입출항신고소 문도 잠겼다. 발금이? 이름이 특이하다.
마침 승용차가 건물 사이 빈터로 들어가고, 젊은 아주머니가 내린다.
쫒아가 발금이가 무슨 뜻이냐니까
“몰라요. 어른들이 발김이 발김이 합디다” 하고는
집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되게 싱겁네.
득량면사무소 위성도 계장이, 바다에 발을 쳐 잡은 고기가 금덩이라 그런 지명이
생겼다더라고 알려준다.
득량면 금능리 발금이에서 고흥군 대서면 신흥리까지 이어지는 득량만방조제는
10리 길이다.
방조제 둑 위로 올라섰으나 바람이 너무 거세 걸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간척평야 너머로 보이는 저기가 예당일 것이고
저기는 조성이리라. 지도로 대강 지역을 어림잡으며
방조제 아래로 난 시멘트길을 걷는다.
수로에는 수초와 갈대가 우거졌고 비스듬히 쌓인 방조제 옹벽에는
갈대, 쑥대, 억새, 칡넝쿨이 헝클어졌다.
갈대는 옹벽을 타고 내려와 시멘트 길을 가로지르며 틈만 있으면 뿌리를 내린다.
생명력이 놀랍다.
중수문이라고도 부르는 득량만 제2방조제 배수갑문 삼거리에 횟집들이 있다.
한 집에 들어가니 50대와 6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신다.
오늘 밤 잠자리가 난감하던 참이다. 신흥에는 숙소가 없고, 예당이나 조성으로
나가야 할지, 벌교로 가야할지,
지도를 펴들고 물으려는데 50대가 “거 뭐요? 바쁜데 치우시오” 한다.
60대가 나서서 어디로 가느냐,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다.
내 걷기여행 얘기를 하니 몇 년생이냐고 묻는다.
걷는 길에 나이를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묻는 방법이 제각각이다.
직접 나이를 묻기도 하고 무슨 생이냐, 무슨 띠냐, 지금처럼 몇 년생이냐고 묻기도 한다.
42년생이라니까 “아이고, 훨씬 선배시네” 하는데 50대가 끼어든다.
“아따, 아랫도리가 빳빳허요 잉. 내 ×도 나는 한 나잘만 걸으면 뻗어부러”
이런 싸가지. 오늘의 목표지점인 신흥마을이 눈앞이다.
지도를 챙겨 횟집을 나오는데 50대가
“신흥 간다고라우? 기다리시오, 내 차 태워 줄테니께” 한다. 조금 전의 거친 말이
미안해 그러는가 본데,
냅두게 이 사람아. 차 탈 일 없네. 미안하면 맥주나 한 잔 권할 일이지.
하기야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한 재미다.
타관을 걷는 나그네에게 이런 풍경을 그려
뒷날 말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 고마운 일 아닌가.
(전 무등일보 편집인·주필)
첫댓글 군농리에서 4년을 근무했지요 비포장 도로를 따라 털털버스를 타고 다니며 보아왔던 경치들이 글에서 읽읜 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언제 가봐도 아름다운 우리 고향 회천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서 아른거리는데 이번 설날도 내려가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그리다 말았습니다
고향에 가지못한 서운한 마음을 친구로통해 위로가 많이되었다네... 정말 고맙네~~~오늘 성민친구가와서 우리집에서 다들모였어. 원규 형환이 신호 우리광주팀들 고향 이야기함서 많이웃었지...
장군재풍경과 득량만의 쪽빛바다가 시원하게느껴지는 멋진그림이네. 이훈이란 여행가를 방송과책에서 몇번봤는데 우리들의고향을 아름답게 소계를해줘서 고맙기도하고 부럽기도하고...20카페 쥔장께서 조~은 글과 그림들을 발췌해서 이렇게 여러사람들을 기쁘게해주니 고마울따름이네........열시미 꾸려나가세...!
네(?) 면의 고향을 (純) 그리워하며! 맥주보다는 막걸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