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裸木)을 바라보며
소정 하선옥
어제오늘은 바람도 쌩쌩 불고 날씨도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좀체 얼음을 볼 수 없는 거제도이지만, 춥다고 종종거리면서 어깨를 한껏 움츠렸나 봅니다. 오른쪽 옆구리가 당기면서 아픈 걸 보니…. 낡아가는 건 몸도 마음도 똑 같나 봅니다. 어디를 나서기만 해도 다시 여기로 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자동차 운전도 종일 하다 보면 저녁때쯤엔 힘에 부친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걸 보니. 그래도 다행인 건 예전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웬만한 일엔 상처도 잘 받지 않는 걸 보면 많이 무뎌지기는 했나 봅니다. 그냥 세상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있다는걸. 저 사람은 이랬었지. 이 사람은 그랬었지, 하는 마음. 누군가는 티끌 같은 가벼운 말로 바위 같은 큰 상처를 주고, 누군가는 배려하는 말 한마디로 말로 행복한 위안을 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바람 같이 스치는 말 한마디로 마음을 움직이는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지요.
나는 과연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어떤 느낌으로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었을까? 내가 느끼지 못한 채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듭니다. 이 또한 계절이 주는 느낌, 나목들이 벗은 몸을 보이고 가지들이 엉성한 뼈마디만 보일 때면 꼭 내 손가락 마디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한 번씩 후회하게 되는 되돌림 표 같은 생각입니다. 하루 후회하고 하루 반성하며 살라 했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나름 사느라고 열심히 힘껏 살았는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겸손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저 나목들은 추위만 견뎌내고 나면 다시 잎 피고 꽃피우겠지만 인간은 되돌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며칠 전 우리 일행 다섯 명은 남해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습니다. 맛난 것도 먹을 겸 해서. 그러다 남해 전망대에서 밧줄에 매달려서 유리 위를 걷는 무빙 워커를 타게 됐습니다. 무슨 객기로 그랬는지. 줄 하나에 의지한 채로 허공에 매달린 채 나이는 잊고 웃고 즐겼지만, 그날 밤 바로 나이가 말을 합디다. 어깨 옆구리 다리 안 아픈 데가 없더이다. 그래도 서로에게 위로랍시고 했든 말 중에 지금이 우리 나이에서 제일 청춘이라고.
얼마만큼 남았을까? 인간의 영역으론 알 수 없지만, 오늘 밤 갑자기 갈 수도 있고 십 년 정도 더 살수도 있겠지만 오늘가면 어떻고 내일 가면 어쩌라 싶습니다.
그래서 동백은 겨울에 피나봅니다. 아무도 꽃피우지 않으려 하는 겨울에 저토록 맑은 선명한 붉으므로 스러져 가는 생명들에게 따뜻함을 선사하고 싶었나 봅니다. 추위에 떨지만 이렇게 꽃피울 수 있음에, 나를 보는 만물들이 나를 보고 웃고, 나를 보고 희망을 품으라고. 빨강으로 따뜻함을 느끼라고. 지금 이곳은 봉긋 봉긋한 동백 몽우리와 활짝 핀 동백이 한창입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내가 정리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둘 생각입니다. 제일 먼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가서 생명 연장 거부 연명치료 거부신청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주변 정리를 해보렵니다. 또다시 봄을 맞을 수 있으면 다시 행복해지렵니다. 꽃은 못되더라도 잡초처럼 살다 가더라도 그래도 사는 동안만큼은 몸도 마음도 정결히 해 보려고요. 또한 희망의 끈도 놓지 않으려고요. 추운 겨울은 꼭 지나가게 돼 있고 겨울 지나면 봄이 오는 건 섭리이니까.
2023년 12월 19일 소정
첫댓글 생명연장 치료 거부 신청.
그런 것도 있었네요?
암튼 경이로운 선옥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