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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양성과 하나됨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부 각각 다르게 생겼다. 지금 여기 우리 형제들이 모여 있는데, 얼굴이 제각기 다르게 생겼다. 삼라만상이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겉은 전부 다르게 생겼다. 만일 우리가 겉으로 살게 된다면 전부 다른 사람이다. 생기기를 다르게 생긴 것처럼 겉 인간은 표면적인 인간은 전부 다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몇 가지로 분류하면 될까?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분류된다. 엄밀하게 따지면 50억의 인구가 있다고 하면 50억 개로 갈라야만 된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전부 다 면밀하게 아주 정확하게 분석하여 한 묶음 한 묶음으로 똑 같은 것끼리만 고른다면 몇 개로 고를 수 있을 것인가? 50억 인구가 있다면 50억 개가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일란성 쌍태아라고 하더라도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똑같이 생겼는데도 점이 하나 더 있어도 더 있고, 머리털이 하나 더 있어도 더 있다. 똑같은 것은 절대로 없다.
겉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되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거지고 무리다. 어떻게 우리가 얼굴이 전부 다르게 생긴 얼굴을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 전부 낯가죽을 벗기는 성형수술을 하여 일정하게 만들어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마네킹을 만들 때 공장에서 찍어내니까 그것은 100개든지 1000개든지 똑같이 만들 수가 있지만 사람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수가 없다. 이것을 크게 가르던지 작게 가르던지 마찬가지다. 50억 개로 가르나 30억 개로 가르나, 그것을 셋으로 가르나 둘로 가르나 역시 마찬가지다. 둘로 갈라놓으면 50억 개를 25억씩 갈라놓은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같지만 25억 개 속에 또 25억 개가 들어있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그냥 무더기로 밀어서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의 둘로 갈라버린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역사는 노동자와 착취자(사장)의 투쟁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투쟁이다. 그러면 지배자와 피지배자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지배자가 25억이고 피지배자가 25억이라 하더라도 지배자 속에 또 25억 개의 지배자가 있다. 피지배자 속에 또 25억 개의 피지배자가 있다. 사람을 획일적으로 몇 개로 가를 수도 없고, 어떤 모양으로 분류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다 다르게 생겼다. 삼라만상이 전부 다르다. 곤충학자나 동물학자는 너무 많기 때문에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 분류를 했다. 종별로 유별로 분류를 했다. 분류를 했어도 다 똑같은가? 똑같지 않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사람들이 둘로 만들려고 생각하거나 또 하나로 만들려고 생각할 때 어떤 문제가 생겨났는가? 그러면 성형수술을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을 모두 한 얼굴로 만들거나 두 얼굴로 만들거나 모두 세 얼굴로 만든다고 생각을 해보자. 여기에 100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 설사 그것이 80 얼굴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얼굴 가죽을 다 벗겨야 된다. 90개의 종류로 가른다 하더라도 얼굴 가죽을 다 벗겨야 된다. 그런데 그것을 만일 두 개로 가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얼굴 가죽을 다 벗겨야 되지 않겠는가? 뼈까지 깎아야 되지 않겠는가? 사람의 생각이 어찌하면 하나로 만들까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러 개가 있으니까 통솔이 불가능하다. 제각기 자기 말을 하고, 제각기 자기 생각을 한다면 통솔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영웅들이 나와서 획일화시켰다. 하나로 만들어 일제히 한 말만 들을 수 있도록 한 가지 생각만 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 코를 다 2cm로 만든다면 1mm만 높은 놈도 전부 깎아내어야 되고, 낮은 놈은 붙여야 된다. 그러니 이것이 만일 물건 같으면 물건은 그렇게 해도 생명이 없는 것이니까 깎든지 녹이든지 붙이든지 상관이 없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인격을 어떻게 깎아서 높이거나 붙일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살리는 일이 아니고, 죽이는 일이다. 사람을 기계화시키는 일이다. 물질화시키는 일이다. 인간을 물질로 본 사람이나 인간을 기계로 본 사람이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인간을 생명을 본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인간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서는 또 인간을 존중할 사람이 없다. 인간을 존중한다면 사람을 둘로 가를 수도 없고, 셋으로 가를 수도 없고, 넷으로 가를 수도 없다. 인간을 존중한다면 있는 대로를 존중해야 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이니까. 살아있는 것을 우리가 만일 존중하고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살아있는 채로 귀중하게 생각해야 된다. 이것을 획일화시킬 수가 없다.
세계의 모든 영웅들은 나와서 자기 마음에 맞도록 획일화시켰다. 자기 생각에 맞도록 획일화시켰다. 자기 의사에 맞도록 획일화시켰다. 이것을 전체주의라고 한다. 사람이 다 다른데 획일화시켜 놓았다. 어떤 한 사상을 위해서 어떤 한 이념을 위해서 모든 사람은 똑같은 말을 해야 되고, 똑같은 생각을 해야 되고, 똑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놓았다.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기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기계주의란 비인간주의다. 인간주의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생물이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것을 획일화시킨다는 것은 기계화시키는 것이고, 기계화시킨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사람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획일화시킨다는 것은 죽음을 주는 것이다.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그렇다. 한 가정 안에 아이들이 모두 있다. 가정의 비극이 일어난 집이 이런 집인데, 아버지가 아들이 다섯 명이 있는데 아버지 의사와 고집이 강력하다. 아버지 이념이 뚜렷하다. 그 자녀들을 어떤 한 가지 목적으로 한 가지 방법으로 한 가지 생각으로 키우려고 한다. 획일화시키고 있다. 그러면 그 중의 한 놈은 같은 놈이 있을 수가 있다. 물론 같지도 않고 비슷한 것이다. 그렇지만 또 그렇게 못하는 놈도 있다.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부모가 고집이 너무 세거나 부모가 너무 강력하거나 한 가지 방향으로 일변도를 한다거나 하면 반드시 가정 안에는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성격이 큰 놈 다르고 둘째 다르고 셋째 놈 다르고 다 다르다. 다른데 이것을 획일화시켜 버리면 여기서 어떤 놈은 문제가 생겨버린다. 튕기는 놈이 있는가 하면 꼬부라지는 놈이 있다. 약한 놈은 꼬부라지고 강한 놈은 튕기는 것이다. 어떤 집에 가보면 아이들이 튕겨서 달아나는 집이 있고, 어떤 집에 가면 풀이 죽은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렇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적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목사님들 가정에 문제가 많았다. 왜 문제가 많았는가? 아버지는 목사인데 아들은 형편없는 놈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 아들이 저 모양이라고 사람들이 그런다. 왜 그 모양이 되었는가? 사람들이 모두 목사 아들이니까 이래야 된다는 획일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전 교인이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중에 순한 사람은 그것을 적응한다. 그런데 성격이 좀 괄괄한 놈이 있으면 튕겨 반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이다. 레닌이다. 다 기독교 가정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튕겨버린다. 반발을 해버리고 만다. 다른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교육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한다. 아버지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려니까 항상 획일적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면, 어떤 아이는 적응을 하는데 어떤 아이는 튕겨버린다. 대부분 목사 가정을 보면 딸들은 교회를 잘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아들들이 문제가 생긴다. 이 아들은 양성이기 때문에 누르면 튕기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획일화시키려고 하면 튕기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이니까 속을 썩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남이라고 생각해보라. 남과 남이 사는데 획일화를 시키려고 하는데 튕기려고 하면 참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살육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학살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숙청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 중의 비극이다. 동물들은 아무리 야만적이라도 자기 종족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은 없다. 호랑이가 호랑이를 잡아먹거나 사자가 사자를 잡아먹거나 개가 개를 잡아먹는 일은 별로 없다. 오직 사람만 사람을 잡아먹는다. 사람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다. 아무리 악한 놈도 아무리 사나운 놈도 자기 종족끼리 죽이지는 않는다. 사람만 자기 종족끼리 죽인다.
이것이 인간의 잔학성이다. 왜 이렇게 잔학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다 다른 인간을 자기 뜻으로 관철시키려고 했다. 획일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잔인성이 나오게 된다. 동물들은 획일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잔인성이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의 밥이 아닌 한은 잔인하지 않다. 아무리 호랑이나 사자라도 배고플 때가 아니면 절대로 잡아먹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냥 죽여서 내버리는 법이 없고, 꼭 배가 고파야 잡아먹는다고 한다. 토끼가 아무리 자기 앞에 와서 얼른거려도 배부를 때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잔인하게 보이는 것은 잔인이 아니고, 자기 양식을 먹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볼 때 잔인하게 보이는 것이다. 호랑이가 토끼를 물고 가는 모습을 보면 잔인하게 보인다. 그들에게 그것은 양식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기 양식이 아니다. 죽여 쓸모도 없다. 그런데 죽여 버리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을 사람이 억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주신 대로 받지 않고, 그것을 자기가 다시 개조하려다가 그렇게 되었다. 인간이 무엇을 손 대어놓으면 어떤 것을 손 대어놓아도 모든 것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잘해놓아도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처럼 사람은 생명에 만일 손을 대면 그것은 반드시 생명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겉으로의 우리 인간, 표면적인 인간, 육신으로의 인간, 다시 말하면 밥을 먹고 사는 인간, 그 인간은 다 다르다. 그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이런 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인가? 그것을 다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다. 코가 납작한 사람도 인정되고, 코가 높은 사람도 인정되는 사회라야 사람이 살기가 좋다. 키가 큰 사람도 인정되고, 키가 작은 사람도 인정되는 사회라야 사람이 살기가 좋다. 꼭 키 큰 사람만 산다거나 키 작은 사람만 사는 사회가 악질적인 사회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왜? 키 큰 사람만 사는 사회에서는 키 작은 사람은 다 없어져야 된다. 키 작은 사람만 사는 사회에서는 키 큰 사람은 다 없어져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악해지는 사회가 된다.
표면적인 세계는 육신의 세계는 획일화될 수가 없다. 하나로 될 수가 없다. 하나로 만들어놓지도 않았다. 다 각기 다르게 만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 다르게 만들어져있다. 사람들은 뭔가 나와 다르면 불안하다. 나와 같으면 안심이 되고 나와 다르면 불안하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면 아이들끼리 만나서는 두려움이 없이 그냥 사귄다. 그런데 자기보다 큰 어른을 만나면 경계를 하게 된다. 일단 경계하고 보다가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되겠는지를 봐서 그 다음에 접근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크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아이보다 작은 인형을 사다주면 전혀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실제 사람만한 큰 인형을 사다주면 놀래버린다. 자기와 다르기 때문에 겁을 먹어버린다.
사람은 자기와 다르면 불안해진다. 그래서 불안공포증에 걸린 사람들이 그 얼굴을 전부 똑같이 만들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똑같이 만들어야 자기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전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이상하게도 불안이 있는 사람이다. 왜 모두 똑같아야 되느냐는 것이다. 얼굴이 다 똑같지 않게 생겼는데도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로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분열된다. 사람은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하나로 만들려고 하면 분열이 생긴다. 절대로 하나가 된 역사가 없다. 우리 인류가 내려오는 동안에 인류가 하나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반드시 하나가 되었는가 하면 다시 분열되고, 하나가 되었는가 하면 또 다시 분열되었다. 금새 하나가 되었는가 했는데, 금새 또 분열이 되었다. 왜냐하면 표면적인 인간은 다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지극히 간단한 진리다. 다르게 생겼으니까 다를 것이다. 생기기를 다르게 생겼으면 머리통도 다르게 생겼다. 뇌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면밀히 조사해보면 똑같은 뇌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지문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생각도 없다.
표면적인 인간은 육신으로서의 인간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상하게도 하나가 안 되면 불안하다. 그러니 이것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 하나가 되어야만 편안이 되고, 하나가 되어야만 안심이 되고, 하나가 되어야만 평화가 되는데, 겉이 모두 다르게 생긴 것처럼 하나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봐도 하나가 안 되고, 저렇게 봐도 하나가 안 된다.
그래서 결국 표면적으로 하나를 만들어놓은 세계를 가보면 몽둥이로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총과 칼로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인간의 이율배반성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속 깊은 곳에서 안식을 원하고 평화를 원하는데 그것은 하나인 것이다. 하나여야만 평화가 온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야 안심이 되는 것처럼 같아야만 안심이 된다. 그런데 다 다르다. 다른 것을 합해보려고 생각하니까 싸움만 일어나고 안 된다.
이 싸움을 영원히 계속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이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투쟁의 역사가 아니고, 내면적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가 되려는 자기의 소원과 하나가 될 수가 없는 현실과의 투쟁이다. 이 투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투쟁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하나가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히 투쟁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투쟁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초기 단계에서는 투쟁을 하다가 다음 단계에 가면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투쟁은 계속 한다. 영원히 계속 하게 된다. 그 근본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만 생각하면 일단 투쟁을 끝내고 나면 평화가 올 것 같지만 생겨먹기를 다르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일치가 되지 않는다. 하나가 될 수가 없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식이 오지 않고 평안이 오지 않는다. 평화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싸우게 된다. 성경은 말하기를 오직 사람의 마음은 전쟁뿐이라고 했다. 왜 전쟁뿐인가? 이래서 전쟁뿐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으로 산다면 우리는 이 투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투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너와 내가 다르다고 하는 이 차이를 메꾸려고 하는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맞추어 보자거나 네 얼굴과 내 얼굴을 맞추어 보자는 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노력은 영원한 저주의 노력이다. 이것은 시지푸스의 신화와 같은 저주이다. 아무리 올려도 올려도 다시 굴러 내려가 버리는 돌멩이를 올리고 있는 저주받은 시지푸스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역사는 계속 반복을 해왔다. 표면적으로는 발전을 해 온 것 같으면서 내면적으로는 계속 똑같은 일을 반복해왔다. 바깥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속 내용은 똑같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이것은 인간 본성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얼굴이 다르면 생각도 다르다. 얼굴은 그 사람 신체의 대표적인 곳이다. 신체를 표현하는 곳이다.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간이 좋은지 나쁜지, 폐가 좋은지 나쁜지, 콩팥이 좋은지 나쁜지를 구별할 수 있다. 지금 콩팥에 무슨 병이 들었는가를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의학에서는 안면착색법이라고 해서 얼굴을 보고 진찰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병이 전부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있다. 명의라면, 그 사람들 말이 재미있는 말이지만 신 밑에 성, 성인 같은 경지에 이르면 그냥 보고 안다는 것이다. 만져볼 필요도 없고 두드려볼 필요도 없고 눌러볼 필요도 없고 그냥 보고만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면 그렇다고 한다. 얼굴이 오장육부를 표현하고 있는 기관이다. 그러면 얼굴이 다르다는 말은 우리의 오장육부가 다 다르게 생겼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뇌도 다 다르다는 뜻이다. 뇌가 다르면 생각하는 구조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고 다 다르다. 그 세포 하나하나가 기계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포 하나가 다르면 다 다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100개의 뇌 세포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고 100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101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아홉 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10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 다른 세계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평화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율배반이다. 만들어지기는 다르게 만들어졌고, 원하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되니까 이것이 이율배반이다. 이 이율배반의 모순이 해결되는 유일한 장소가 십자가다. 그 안에 가서 모두 하나가 되게 되어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고 했다. 이방인도 부르고 유대인도 부르고 남자도 부르고 여자도 부르고 다 불렀다. 다 불렀는데 다 다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그 안에서 교제가 되더라는 것이다. 다 다른데 각기 모두 교제를 해봤는데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그 안에서 교제가 되더라는 것이다. 묘한 요술 상자처럼 그 안에만 들어가면 교제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참 신기하다. 이것은 역사이래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누가 얼굴을 똑같이 만들겠는가? 그렇다고 누가 사람 속에 깊이 들어있는 일치에 대한 소망을 버리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안에 와서 교제케 하더라는 것이다. 교제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 신기한 비밀이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다. 예수의 비밀이다. 거기에 와서 모두 하나가 되더라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들어보면 얼굴이 다 다르게 생겼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얼굴이 분명히 다르다.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생각이 다 다르다. 뜻이 다 다르다. 소망이 다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것이다. 다른 것이 어떻게 그 안에 있겠는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라는 식으로 그 안에서 어떻게 다른 것이 견디어내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라고 한다. 그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것에서 모두가 있더라는 것이다. 평화로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 나는 하나님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예수 안에 있지 않는 것이라고 사람은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는 그 말이 아니다. 물론 1차적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서 예수 안에 있고라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거나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거나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거나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당신은 하나님에게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하면 내가 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고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자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하는 말은 그 운명 안에 있고, 그 생명 안에 있고라는 말이다.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사람이 되었다. 그 안에 있고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도 흙으로 짓지 않고, 생기를 불어넣지 않고, 사람이 된 사람은 하나도 없고라는 뜻이다. 믿거나 안 믿거나 하나님을 알거나 모르거나 인정을 하거나 안 하거나 간에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었다는 그 안에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 말을 바꾸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했다. 이 말이 아멘하고 받아들여진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기 때문에 그 말이 얼른 받아들여지고, 하나님 말씀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그 말이 쉽게 들려지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내 일 같지 않고, 내 위치 같지 않다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을 이방인에게 말한다면, ‘너희는 네가 모르는 그 누구에게로부터 나서 너는 흙이라는 운명 안에 있고’라고 하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라는 운명 안에 있고’라고 하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숨이 코에 붙은 속에 있고’라고 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는 그 속에 있고’라고 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뜻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우리가 다 분열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은 것이 분열되어 있다. 우리가 표면적인 것은 다 분열되어있다. 무슨 이유인지 다 갈라져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운명은 갈라져있지 않다. 우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여기서 흙인 사람도 있고 돌인 사람도 있는가? 그렇지 않다. 다 흙이다. 어떤 사람은 숨이 코에 붙어있고, 어떤 사람은 숨이 발바닥에 붙어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은 다 숨이 코에 붙어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전부 오늘 밤에 영혼을 도로 찾으면 나는 안 갈 권리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 똑같다. 그 운명 안에서 우리는 다 똑같다. 다 하나인 것이다. 둘이 아니고 하나다.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둘이다. 육신의 눈으로 관찰할 때 둘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운명 안에서는 하나다.
우리를 불러서 그리스도 예수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미쁘시다는 말은 변함이 없이 성실하다는 뜻이다. 영원히 똑같다, 변함없이 똑같다는 뜻이다. 표면적인 모든 것은 변화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운명은 변화가 없다.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모두 운명은 변하지 아니한다. 내가 사장이 됐기 때문에 운명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기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는 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운명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타고난 능력과 타고난 재능을 통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참 운명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흙이라는 것이 운명이다. 사주팔자가 다 다르다고 한다. 사주팔자를 구분하면 사람마다 똑같은 사주팔자가 없고 다 다르다고 한다. 한 날 한 시에 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사주팔자가 다 다르다고 한다. 설사 한 날 한 시에 났다고 해도 실제적으로 사주팔자는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사주팔자라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다 변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이 운명은 변화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변화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배운다고 흙이 돌로 변하겠는가? 우리가 많이 가졌다고 해서 흙이 나무로 변하겠는가? 절대로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모든 원소가 불변하는 것처럼 사람의 운명도 변하지 않는다. 생명도 역시 변하지 않는다. 개의 생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개다. 사람의 생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이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표면만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표면이 변화되는 것도 인위적인 것만 변했다가 안 변했다가 하는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고 그냥 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흙 안에 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것처럼 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져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너희가 아담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도 성경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아담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전에 아담 안에 있었던 것같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간 일도 없고 온 일도 없다. 나간 일도 없고 들어간 일도 없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너희가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더니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옮겼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옮겨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흑암의 권세에서 옮겨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갔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내가 만일 들어갔다면 들어간 사람도 있고, 안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사에 달려있을 것이다. 내가 만일 나왔다면 나온 사람도 있고, 안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사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나온 사람도 없고, 들어간 사람도 없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했다. 이 불변의 법칙 속에 우리가 있다. 내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법칙 안에 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만일 하나님 말씀을 안다면 이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이 무지다. 없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가 아니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무지다. 여기 흥룡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다. 흥룡 초등학교가 없는데 모르는 것은 무지가 아니다. 분명히 있는데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다. 우리는 작년에 이 학교가 있는 것을 알았다. 작년에 우리가 알기 전부터도 있었는데, 우리는 작년에야 비로소 이 학교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작년 전까지 우리는 무지했었다. 작년부터 우리는 유지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만 고정되어 있다. 우리의 지식은 내가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내가 알고 모르는 것과 이 흥룡 초등학교가 있는 것과는 관계가 없이 전혀 무관하다. 단지 내가 이 흥룡 초등학교가 있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이런 좋은 수련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알면 이렇게 좋은 곳에서 쉴 수가 있지만 모르면 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만일 모른다면 우리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무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두 지식을 찾으려고 하고, 지혜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알아도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찾아도 무지해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우리는 흙 속에 있다. 생기 속에 우리가 있다. 혼 속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숨이 코에 붙은 인생 속에 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그렇게 믿겠다고 할 수도 없고, 나는 그렇게 믿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이것은 그런 사실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이다. 똑똑한 사람이나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무엇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못하겠다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다 사실은 똑같다. 사실은 똑같이 하나다.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사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는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것이다. 그분이 영원히 불변하는 속에 우리를 놓고 우리로 하여금 교제케 하시는 그 하나님이 아주 성실하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분은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것이다. 둘로 갈랐다가 셋으로 갈랐다가 넷으로 갈랐다가 다섯으로 갈랐다가 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다고 했다가 저것이 옳다고 했다가 한다. 이것이 거짓말이다.
역사는 흘러오면서 이것이 옳다고 할 때도 있었고, 저것이 옳다고 할 때도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시다. 이것이 옳다거나 저것이 옳다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한다. 너희는 훌륭하다거나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똑똑하다거나 똑똑하지 않다거나 영리하다거나 미련하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미쁘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는 하나로 발견이 된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만일 없다면 우리는 하나로 발견될 수가 없다. 하나이지만 하나로 발견될 수가 없다. 눈이 없다면 물건이 있지만 발견이 안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가 없다면 그 운명이 없다면 우리는 같으면서도 하나이면서도 하나로 발견되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것으로 발견이 되니까 우리는 똑같으면서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다. 너는 지배자고 나는 피지배자라고 우기는 것이다. 너는 가진 자고 나는 가지지 못한 자라고 우기는 것이다. 너는 아는 자고 나는 모르는 자라고 우기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니까 우리가 다 하나였다. 거기서 발견되니까 다 하나로 발견되는데, 우리가 다 자기 생각 안에서 발견되니까 전부 다르게 발견되어, 두뇌의 뇌세포가 전부 다른 것처럼 얼굴이 다른 것처럼 다 다르게 생각되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남이 죽어도 자기 죽음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니까. 그 죽음이 왜 그런가? 그것은 육신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그 사람과 나는 개별적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동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몸이 갈라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남의 사정을 다시 말하면 나와 개별적인 육신의 사정을 내가 알아차릴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 육신의 사정을 좀 알아 달라거나 왜 내 육신의 사정을 몰라주느냐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다. 그것은 모르게 되어있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다르게 아는 것이다. 꼭 나와 같이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알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모르게 되어있는 일을 보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을 소를 보고 왜 네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느냐, 이 좋은 성경말씀을 읽어주고 있는데 왜 못 알아듣느냐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것이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것이다. 소 귀에 경을 매일 읽어야 소는 눈만 껌벅껌벅 하고 있다. 아무리 잘 읽어도 그렇다. 똑같은 일이다.
남에게 내 육신의 사정을 알라고 하는 것은 우이독경이나 마찬가지다.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대로 알게끔 된다. 그러니 사람이 얼마나 답답한가? 그것이 자기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가? 그것이 자기 인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가? 그리고 그 인생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가? 그런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자기와 둘만 있어도 다른데 40억 인구를 어떻게 자기가 똑같이 만들겠으며, 40억 인구를 어떻게 일치가 되게 만들겠는가? 그것보다 어거지 생각은 세상에 없다.
나와 육신이 다른 사람을,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세상의 불가능한 일이라면 인류를 하나로 만든다는 것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가 안 되면 모든 것이 다 안 되는 것이다. 둘이 안 되는데 100명 1000명이 되겠는가? 둘이 하나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한 민족이 하나가 되겠는가? 민족이라고 해봤자 그것도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 자손의 한 민족이라고 한다. 한 땅덩어리에 살고 있으니까 한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도 지금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도 많고, 저 시베리아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도 많고, 동남아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도 많다. 한 민족이 아니라 다 다른 것이고 어거지로 한 민족이라고 맞춘 것이다. 우리는 피가 다 섞여있지 한 민족이 절대로 아니다. 모두 사람의 생각이다. 머릿속의 두뇌 세포가 생각하는 것이다. 기계적 작용에 의해서 나온 것이다. 인격적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 인생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한다. 그것이 어떻게 진리가 되겠는가? 거기서 어떻게 진리가 나오겠으며, 거기서 어떻게 옳은 것이 나오고 그른 것이 나오고, 거기서 어떻게 서로를 판단하겠는가? 내가 너를 판단하면 너는 나를 판단하지 않겠는가?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고 하면 너는 나에게 또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보고 옳다고 하고, 무엇을 보고 그르다고 하겠는가?
표면적인 사람을 가지고 육신의 사람을 가지고 물질적인 사람을 가지고 사람이라고 우기고 앉아있으면 우리는 얼마나 답답한 인생을 살아야 되겠는가?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는 불변하는 진리다. 너희는 창조자로부터 나서 지으신 자 안에 있고는 불변하는 진리다. 너희는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흙 안에 있고, 숨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그 숨 안에 있고, 그래서 숨을 가져가면 그만이고, 그 안에 있는 것이 영원한 진리이다. 영원한 사실이다. 온 인류가 그렇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이다. 진리이다.
이 진리의 터 위에 우리가 세우심을 입어야 우리가 정직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 편협하게 된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 대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 육신은 본능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게 되어있다. 육신 자체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육신 자체의 본질이 개별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나오게 된다. 자기 자체의 본질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렇게 나올 수밖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빛이라고 하는 본질은 밝은 것이니까 어디를 가도 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본질은 개별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통일이 불가능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라고 했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밖에는 우리는 하나로 발견될 수가 없다. ‘십자가 안에’라는 말은 우리의 운명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그 운명 안에서 밖에는 우리는 하나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 운명 안에서 우리가 하나로 발견이 된다면 우리가 각각이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왜 각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되었던가? 왜 그것이 우리의 고통이 되었던가? 왜 그것이 우리의 고독이 되었던가? 그 이유는 하나로 발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로만 발견이 된다면 1000개고 만개고 상관이 없다.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아름다운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각각 다르게 만들어놓았을까? 히틀러가 하나님을 만들었다면 그 하나님은 똑같이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전부 독일 사람만 게르만 민족만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히틀러가 하나님이라면 그는 세계 인간을 전부 게르만 민족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게르만 민족이 아닌 사람은 전부 열등한 민족이라고 하여 그 씨를 없애야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류가 장차 크게 발전하려면 우수한 민족이 씨를 퍼트려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친 것이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약한 사람들을 도태시켰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의사가 검사를 하여 튼튼할 것인지 튼튼하지 않을 것인지, 싸움에 나가면 이길 것인지 질 것인지를 검사하여 질 놈은 아예 도태시켜 버렸다. 이것이 스파르타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미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미친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얼마나 그 하나님이 어리석고 무지한 하나님인가! 우리 하나님은 다 다르게 만들어놓았어도 더욱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인데, 자기가 하나님 노릇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게르만 민족만 살리고 다른 만족은 다 없애자는 하나님이 된다. 우리 당만 살고 너희는 다 죽으라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모두 엉터리 하나님이고, 괴물 하나님이고, 사람이 신이 되려는 망상에서 생긴 것이다.
참 하나님이라면 그는 모두가 달라도 다른 것이 더욱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이다. 나무를 보라. 한 나무에 수많은 가지가 있고 많은 잎이 있다. 많은 꽃이 핀다. 많은 열매가 맺힌다. 그것이 안 되는 것이 있는가? 잘못된 것이 있는가? 전부 모양이 다르게 생겼다고 한다. 현미경으로 조사하면 잎마다 다 다르고, 꽃마다 다 다르고, 과일마다 다 다르게 생겼다고 한다. 달라서 뭐가 안 되는 것이 있는가? 누가 망했는가? 왜 그렇게 잘된 것을 가지고, 잘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왜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꽃을 만들어도 나무에 피어있는 꽃처럼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한다. 각각이 다른, 섬세하게 모두 다른 그 아름다움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런데 무슨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인가? 무슨 더 좋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인가? 그렇게 좋은 것을 놔두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놔두고 무엇을 어떻게 만든다는 것인가? 그러면 뽕나무를 베어버리고 거기에 기계적으로 플라스틱으로 뽕나무를 만들어 똑같은 꽃을 피게 만들겠다는 그 말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것이 모두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줄을 모르는 데서 나왔다.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나왔다. 우리가 다 하나구나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나왔다. 사람들은 만일 하나라는 것을 모르면 불안하다. 불안하기 때문에 획일화시킨다. 유능한 사람은 획일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무능한 사람은 획일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유능한 정치인은 획일화를 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무능한 정치인은 획일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획일화가 되면 편하고, 획일화가 안 되면 통솔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유능한 정치인은 획일화가 안 되어도 자기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참으로 전능하신 이라면 다른 것이 전혀 불안하지 않다. 그것이 오히려 아름답다. 오케스트라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있어, 많은 소리를 내고 있다. 여러 가지 소리들이 모두 합해서 화음을 이루고 있어, 그 화음이 듣기에 아름답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화음이다. 자연의 조화다. 다르면서 아름다운 것의 조화다. 독창이 아니고 합창인데 이 다르면서 아름다운 대 자연의 화음보다 더 웅장한 음성은 없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졸장부들이, 자기 생각이 좁기 때문에 자기가 너무 불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획일화가 안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로 발견되지 않으니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가 아니면 불안해진다. 아내와 남편이 결혼했다. 연애를 하여 그냥 좋다고 결혼했다.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왜? 같지 않아서 불안하다. 하나로 발견이 되지 않아 불안하다. 이상하다. 이것은 본능적이다. 하나로 발견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하나로 되게 해보려고 시도를 한다. 파 보기기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하고 끄집어 내보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하고 조사해보기도 하고 자기 생각과 같은지 조사해보기도 하고 두드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 산통 망치는 사람도 가끔 있다. 조사해보다가 망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권태기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권태기에 이르면 이상한 생각이 난다고 한다. 불안한 생각이 난다. 이 사람은 과거에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난다. 이 사람 속에 혹시 다른 생각은 없을까하는 생각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긁기 시작하여 파보고 건드려본다. 혹시 뭐 없었는가 하고 긁어본다. 자꾸 긁으면 순진한 사람이 내가 다 말하지 않으면 계속 긁을 것인데, 같이 살면서 말하지 않고 숨기고 살 수도 없겠다 하여 자기가 옛날에 이러고저러고 했다고 이야기하면 긁다가 기겁을 하여 가정파탄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나왔다. 알면 약이 될 줄 알았더니 알면 병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여기에 아직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명심해서 들어주기를 바란다.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병이라고 알아두기를 바란다. 알려고 하다가는 망할 것이라고 알면 된다. 모르는 사람이 지혜라고 알면 된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불안의 소치다. 자기가 불안하지 않으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자신감만 있다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옛날에 뭘 했던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만 좋아하면 그만 아닌가? 내가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한다. 속이 좁아서 불안한 사람들이 자기가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한다. 자신이 있으면 뭘 어쨌냐는 것이다. 자기와 잘 살면 그만인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안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 그 불안은 하나가 되지 않은 데서 오는 불안이다. 하나가 아니면 외로워진다. 사람은 고립을 싫어한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남에게 따돌림 받는 것을 싫어한다. 남에게 격리되는 것을 싫어한다. 소외되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안 때문이다. 아무리 소외되었어도 불안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전혀 문제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40억 50억 인구에서 유일하게 소외된 사람이다. 그보다 더 소외된 사람은 없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모든 인간으로부터 완전하게 소외된 사람이다. 더군다나 자기가 사랑해서 온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사람이다. 그렇지만 전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그 하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독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데 있었다. 사람이 불안한 것은 왜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로 발견이 되지 않아서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그 보수성을 극복하려고 젊은 사람들이 노력한다. 아무리 극복하려고 노력해도 본능적으로는 보수적이다. 모든 만물이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사람도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쥐를 가만히 보면, 마당에 먹이를 놔두고 기다리고 있으면 쥐 한 놈이 구멍에서 먹이가 있구나하고 내다본다. 그런데 나갈까 말까 한참 망설인다. 그래도 군침이 돈다. 가기는 가야 되겠는데 바로 가면 안 될 것 같은 것이다. 두발짝 나가보다가 다시 들어온다. 좌우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으면 여섯발짝 정도 간다. 다시 돌아온다. 또 아무도 없으면 열 발짝 정도 간다. 또 돌아온다. 또 아무도 없으면 마지막에 목표점까지 간다. 그런데 목표점까지 간 후에는 그 다음에는 안심하고 왔다갔다 하다가 덫에 걸리는 것이다.
사람이 보수성이 있다. 왜? 안정을 갖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보수성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본능이다. 모든 만물이 전부 안정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정을 이룰 때까지 불안한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세계는 모든 화학적인 세계는 전부 안정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안정이 될 때까지 움직이다가 안정이 되어야만 고정이 된다. 플라스틱 그릇을 만들 때 눅눅하게 녹아있는 그릇을 가지고 그릇을 만들어놓으면 흐물흐물하기 때문에 안정제를 쓰게 된다. 고정될 수 있는 약품을 써서 안정이 되도록 만든다. 그 안정제가 우리몸에 해롭다는 것이다.
만물은 모두 안정된 상태라야 보존이 된다. 자기 보존의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래서 사람은 안정이 될 때까지 불안한 것이다. 그 안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나인 데서 안정이 온다. 사람은 하나로 발견된 데서 안정이 온다. 돈을 많이 벌어놓고 안정을 해야지. 지위를 어느 정도 얻어놓고 안정을 해야지. 일을 어느 정도 해놓고 안정을 해야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해놓아도 안정이 안 된다. 하나로 발견이 돼야만 안정이 된다. 너와 내가 하나로 발견이 될 때 안정이 된다. 내가 안정을 얻지 못했던 것은 인간과 인간관계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관계라는 것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 발견이 안 되기 때문에 안정이 안 되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로 발견이 돼야만 그때 안정이 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내가 하나로 발견이 돼야만 안정이 된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하나님과 내가 안정된 것을 발견하지 못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안정이 깨져버리고 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안정이 깨질 때, 만물과 나 사이의 안정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 속에 들어있는 이 본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과의 안정을 원하는 데서 나왔다. 하나님과 하나인 것이 발견되지 않아서 불안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안정을 가질 수가 없다. 속에서 안정이 안 되면 그로 말미암아 증상이 나오게 된다. 모든 정신병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전부 불안에서 나온다. 일치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불안이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우는 사람도 있고 날뛰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불안이다. 불안이 여러 가지 방향으로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그 사람의 기질에 따라서 그 사람의 습관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표현은 다르게 나온다. 그렇지만 근본은 전부 불안이다. 그래서 모든 약은 안정제다. 간단한 일이다. 모든 약은 다 안정제고 다른 것은 전혀 없다.
왜 그렇게 불안한가? 인간은 다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사람은 원칙적으로는 다 정신병자다. 다 불안하니까. 단지 정신병이라고 할 만큼 정도가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어딘가에서 하나로 발견돼야만 그때 안식이 된다. 이 근본이 어디인가?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인 자리가 발견되는,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는 그것이 발견되는 그때 안식이 되게끔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하나될 수 없다. 어떤 것으로도 하나될 수 없다. 어떻게 표면으로 하나가 되겠는가? 근본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이 하나가 되면 밖의 다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밖의 다른 것으로 문제가 된 사람은 전부 근본에서 하나로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밖을 하나로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안에서 하나된 자리를 찾아야 된다. 방법을 바꾸어야 된다.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것이 일치하지 않아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일치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다 같아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나와 네가 지위가 같아져야겠다. 나와 네가 재산이 같아져야겠다. 나와 네가 집이 같아져야겠다. 처마 끝만 하나가 틀려도 불안하다. 처마 끝이 하나는 뾰족하고 하나는 둥글어도 다르면 불안하다. 불안이 극도에 이르면 지극히 적은 것도 다르면 불안하다. 이 불안이 심화되면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전부 생각하기를 저 집 지붕과 우리 집 지붕이 똑같아야 내가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너는 왜 그렇게 야단이냐고 하면, 봐라 저 집 지붕과 우리 집 지붕 꼭대기가 다르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을 똑같이 만들려고 생각한다. 저 사람과 내가 얼굴이 다르지 않느냐? 그래서 그렇다는 것이다. 저 사람과 내가 가진 것이 다르지 않느냐? 저 사람과 내가 먹는 것이 다르지 않느냐? 그래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40억 인구를 똑같이 하겠는가? 오늘 아침 식사를 배식하게 될 텐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문제가 복잡하다. 밥알을 일일이 셀 수도 없는 일이고, 국물을 일일이 저울 그램으로 잴 수도 없는 일이고, 문제가 복잡하다. 그렇게 되면 피곤하게 된다. 정말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처럼 인생이 피곤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해결이 없다. 해결은 뿌리에서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에서 자기가 발견되어야지 거기서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는 끝이 없는 세계에서 헤맨다. 둘이 겨우 어떻게 하여 맞추어놓았더니 또 하나를 만나니 또 다르다는 것이다. 또 맞추려고 애를 써서 맞추어놓았더니 또 만나면 또 다르다. 절대로 맞추어질 수가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바깥에 있는 환경을 똑같이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똑같이 만들었다고 해서 불안이 없어지는가? 그렇지도 않다. 자기가 본질적으로 하나로 발견이 안 되기 때문에 그 불안은 여전히 마찬가지다.
십자가가 없이는 인류는 구제불능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인류는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싸우는 이유는 내 민족과 네 민족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 옆에 있는데 항상 불안하다. 왜 그런가? 일본이 우리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라면 우리가 불안할 필요가 없다. 한 민족이니까 쳐들어오지 않고 싸움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불안하지 않을 것인데, 이민족이니까 우리는 불안하다. 그렇다고 우리와 일본을 한 민족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일본 사람들이 일본과 한국을 일본은 內고 우리 한국을 外라고 하여 내외일치운동을 했다. 조선과 일본은 근본이 같으므로 우리는 한 민족이니까 일치하자고 하여 침략했던 것이다. 그들의 불안에서 나온 야망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반드시 표면적인 이유에 앞서서 내면적으로 불안이라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왜 세계 전쟁을 일으켰는가? 독일의 위치가 불안해서였다. 다른 나라들 속에 있는 독일의 위치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불안하면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난다. 누군가가 불안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균형을 맞출까하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못사는 나라에게 차관 원조를 하거나 무상 원조를 하는 것도 너무 못사는 놈이 있으면 내가 불안하다. 전쟁이 일어나니까 할 수 없이 주어야 된다.
사람은 같지 않으면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우리는 바깥에서 같지 않은 세계에서 같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같은 데가 있다. 하나인 데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 하나이다. 거기가면 우리는 다 하나이다. 어느 사람이든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다 하나이다. 세상의 말 속에서는 다 다르지만 하나님 말씀 속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이다.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십자가 밖에는 일치할 수 있는 데가 없다. 운동을 한다고 하나가 되지 않는다. 운동을 할수록 갈라지는 것이다. 화학약품을 타서 저으면 저울수록 갈라진다. 가만히 놔두어야 안정이 될 것이다. 저절로 붙을 곳에 가서 붙고 화합할 곳에서 화합하여 저절로 반응을 일으켜서 안정이 될 것인데, 계속 저어서 운동을 시키면 절대로 안 된다. 운동하면 분열되어 버리고, 가만히 있으면 안정이 된다. 그런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놔두고 볼 수가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왜 불안한가? 하나로 발견이 되지 않아서다. 자기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하나로 발견되면 고립이 없다. 그러면 불안하지 않게 된다. 빈 집에 혼자 있다가 누가 한 사람 오면 안심이 된다. 둘이 있으니까 그렇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면 안심이 된다. 그러면 그때는 두리번거리지 않게 되고 왔다갔다 하지 않게 된다. 몽둥이 들고 다니다가 뭣 들고 다니다가를 하지 않게 된다. 내가 기숙사에 있을 때인데, 두 명이 같이 침대를 놓고 있는데, 그 사람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머니는 권사라고 한다. 충남 사람인데 늦게야 공부를 시작하여 머리는 좋아 열심히 1년 동안 공부를 했더니 성적이 팍 올라서 1등을 하게 되어 희망적인 사람이 되었다. 옆에 사람들이 너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유학도 갈 수 있겠다고 했다. 이 사람이 욕심이 생겨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이 이상하게 약해져버렸다. 불안초조병에 걸렸는데 나는 설마 그런 줄을 몰랐다. 기숙사가 외딴 기숙사로 방갈로처럼 생겼는데, 산을 지키기 위한 만들어놓은 수위실겸 기숙사로 우리 둘만 있었다. 하루 저녁에는 나에게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뭐가 불안하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아주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침대에 매트리스 밑에 과도를 넣어놓고 잔다고 보여주었다. 꼭 누가 올 것 같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불안하면 어떻게 사나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름방학에 내려가더니 그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다시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불안한 것을 보고 놀랐다. 사람이 저렇게 불안하여 어떻게 사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는 조금씩 다 불안이 있다. 그것이 모두 어떤 환경을 만나면 불안해져버린다. 평소에 좋은 환경이 있을 때는 괜찮다가 나쁜 환경을 만나게 되면 좀 불안한 환경을 만나게 되면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다 병을 갖고 있다. 누구든지 정신병이 될 수 있는 소인을 다 갖고 있다. 다행히 환경을 그렇게 극단적이 되지 않아 발병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이다. 만일 우리도 같은 환경에 처하면 같은 증상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기 속에 자기라고 하는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내 육신은 분명히 아버지에게서 왔으니까 아버지에게서 왔는데, 자기라고 인간이 따로 있다. 그 자기라고 하는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끝도 시작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자기의 생각이 불안하고 사상이 불안하고 마음이 불안하고 다 불안한 것이다. 어디서 온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같이 있어야 된다. 같이 있을 자가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친구를 만들게 되고, 동료를 만들게 되고, 당을 만들게 된다.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은 나는 아블로파다, 나는 게바파라는 사람들이 생겼다. 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아블로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느냐? 게바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느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네가 왜 그렇게 당을 지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아니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분당을 만들었느냐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 분당을 만들었던 것은 불안한 이유다. 안정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안정이 되면 분당이 필요치 않다. 혼자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
갈보리 산에 혼자 서있는 예수는 혼자라도 전혀 불안이 없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과 하나로 발견되기만 한다면, 사람은 원천적으로 원인적으로 불안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해결책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 한 운명 안에 있다. 가죽은 달라도 한 운명 안에 있다. 모양은 달라도 우리는 한 운명 안에 있다. 다른 것은 우리가 조화를 이루기위해서다.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이다. 더 귀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쓰실 때는 더 아름답게 쓰신다. 엄지손가락도 있고 새끼손가락도 있다. 엄지손가락이 새끼손가락에게 이르기를 너는 왜 가늘디 가늘게 생겼느냐? 새끼손가락이 엄지손가락에게 이르기를 너는 왜 둔하게 생겼느냐?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귀가 간지러우면 가는 손가락이 필요하고, 내가 몸이 아프면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야 시원하기 때문에 쓸 때 가보면 새끼손가락은 새끼손가락대로 필요하고, 엄지손가락은 엄지손가락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지으신 이가 아니면 사용할 자가 아니면 아무리 봐도 둘이 똑같지 않구나. 왜 똑같지 않게 생겼을까? 엄지손가락을 갈라서 새끼손가락에 붙이고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엄지손가락에 이어야겠다는 생각한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가만히 놔두고 보면 쓸 데가 있다. 자기는 지은 자가 아니니까 모른다. 모르니까 하나님이 쓰실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기다려야 되는데, 성급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뚝뚝 잘라다가 여기다 붙이고 저기다 붙이면 뭐가 되겠는가? 쓰고 싶을 때 가보면 귀가 가려운데 들어가겠는가? 안 들어간다.
사람이 모든 것을 망친다. 인간의 조급한 마음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왜 조급한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왜 불안한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지 않아서 그렇다. 모든 병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데서 생겼다. 모든 병을 치료하는 것은 십자가뿐이다. 그 약밖에는 다른 약이 절대로 없다. 모든 정신병자에게 쓰는 약은 안정제이듯이 모든 인간에게 쓰는 약은 십자가밖에 없다.
천하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밖에 없다. 부처님도 있고 공자님도 있지 않느냐? 왜 예수밖에 구원이 없느냐? 그렇지 않다. 석가모니도 십자가 앞에 와야만 하나로 발견되고, 공자님도 십자가 안에 와야 하나로 발견이 된다. 공자님에게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는 내게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한다. 석가모니에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게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말한다. 석가모니와 공자님이 하나로 발견되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와야 하나로 발견이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석가모니보다 나으냐 못하냐는 문제가 아니다. 공자님보다 나으냐 못하냐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운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운명이다. 모든 사람은 다 그 안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의 고향을 찾게 된다. 거기에 와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천하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말한다면, 물론 우리가 하나로 발견되면 다시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로 발견되지 않아 다르게 보이거든 나도 인정하고 너도 인정하자. 그것이 가장 지혜롭고, 그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고, 그것이 가장 공평한 일이다. 너도 인정받고 나도 인정받자.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자.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하지 말고, 내가 옳은 것처럼 너도 옳을 수 있고, 네가 그른 것처럼 나도 그를 수 있다. 그렇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님 세계의 겸손이다. 인간 세상의 겸손이다. 왜? 다 같으니까. 어차피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니까.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고 했지만 내가 또 너에게 잘못할지 모르기 때문에 오랜 경험을 가진 인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이렇다고도 못하겠고 저렇다고도 못하겠구나. 시간이 흘러보니까 옳다는 것이 그를 수도 있고, 그르다는 것이 옳을 수도 있어지더라. 역적이 충신이 되기도 하고, 충신이 역적이 되기도 하더라. 그러니 속단할 수는 없으니 좀 기다려보자.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명한 일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이 자기 안에 탁 들어오면 그거야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르면 다를수록 좋은 것이다. 다르면 다를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는 더욱 공급을 받게 되니까. 나와 틀린 사람을 통해서 나는 생명이 더욱 충만해지게 되니까. 나는 찬송이 더욱 넘치게 되기 때문에 있을수록 좋은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있을수록 더 좋다. 더 여러 가지 사람이 있을수록 더 좋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수록 더욱 좋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가 있으면 이상하게도 우리의 찬송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것이 교회의 풍요이다. 바울이 혼자 있을 때와 교회와 같이 있을 때가 달랐다. 이상하게 풍요롭더라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 있을 때와 여러분과 같이 있을 때가 다르다. 여러분과 같이 있으면 풍요롭다.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더욱 풍요롭다. 이보다 좋은 것은 없지만 만일 아직도 귀가 열리지 않아서 안 되거든 그것은 인간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인간의 지혜는 무엇인가?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는 것이다.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된다. 검은 놈도 인정하고, 흰 놈도 인정하고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진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절대적인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우기면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결국은 사람 죽일 일밖에 생기지 않으니까, 사람 욕할 일밖에 생기지 않으니까, 원수질 일밖에 생기지 않으니까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자. 물론 마음에는 100% 맞지 않지만 그래도 50%만 되어도 30%만 되어도 아니 20%만 되어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이것이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지혜이다. 이것이 중용지도(中庸之道)다. 이리 치우치지도 말고 저리 치우치지도 말고 가운데를 따라 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노련하게 생각한 생각이다. 젊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혈기왕성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이것은 뾰족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젊었을 때부터 늙었을 때까지를 수만번 반복하면서 경험한 인류의 자습서에서 나온 것이다. 그 연습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이보다 더 지혜가 없다. 역사가 오래된 민족을 보면 그런 민족들은 극단적이지 않다. 많은 역사를 경험했다. 뒤집고 뒤집히고, 역적이 충신되고 충신이 역적되는 일을 계속 되풀이 했다. 원수를 지고 또 원수를 맺고 하는 일을 되풀이 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럴 일이 아니구나. 원수라고 하더라도 죽이지는 말자. 가두어만 놓자가 되었다.
모택동은 자기의 정적이라도 가두어만 놓았지 죽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등소평은 자기의 반대자를 죽이지는 않고 가두어놓는다는 것이 있다. 왜? 어느 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자기도 또 갇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은래는 장개석을 피난시켰다. 싸우는 중에 그 사람을 살려서 보냈다. 왜냐하면 자기가 또 언제 포로로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이다. 이것이 노련한 중국 사람의 지혜이다. 그 사람은 전쟁이 나도 달리지 않는다. 왜 달리지 않는가? 땅덩어리가 크다보니까 달려보았자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가겠는가? 급하니 가만히 앉아있으면 조급하고 못 견디겠으니까 우선 걸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대로도 지혜가 있어야 된다. 사람대로도 지혜가 없으면 용렬하여 그만 될 것을 안 되게 망쳐버리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길은 어느 길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못하면 차선으로 망하지 않으려면 가장 현명한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될 때까지 망하지 않고 있으려면 그런 정도의 지혜는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영원히 구제를 못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용렬하게 잘못 생각하여 목매어 죽어버리면 구제를 못 받게 된다. 용렬하게 남을 죽였다가 되면 구제를 못 받게 되니까 아직은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 안에 부딪혀오지 않았고, 아직은 하나님 말씀이 오지 않았거든 혹시 올지도 모르니까 기다리는 마음으로, 혹시 구제의 가능성을 기다리고, 그리고 인간적인 지혜라도 배워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배워서 나이 많은 역사에게 지혜를 배워서 거기서 지혜롭게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다. 왜냐하면 나도 인정하고 너도 인정하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사는 길이다. 너는 죽고 나는 살면, 그렇게만 될 것 같지만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너는 살고 나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너도 살고 나도 살자. 서로 살려주자. 그런 사람은 그래도 사는 수가 있다. 6.25사변 때도 보니까 한쪽이 살려주니까 인간이니까 은혜를 갚느라고 다음에 살려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죽인 편은 다 죽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참 순한 사람이다. 내 선배인데 사람이 참 착한 사람이다. 여자같이 생겼다. 얼굴도 예쁘게 생겼고 성격도 곱다. 그런데 6.25사변이 났을 때 중학교 5학년이었다. 지금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이라도 나이는 많아 스물다섯살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6.25사변이 나니까 사람들이 술렁술렁하고 왔다갔다 했다.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의 어렸을 때니까 몰랐다. 수군수군하는 소리를 들어보니까 어디서 밀고 내려온다고 한다. 조금 있으면 금방 해방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어디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람이 그때 어린 나이였는데 이상하게 경찰서에 잘못 붙들려가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우리 사촌 형님집의 형수의 생질이다. 그분이 데려다가 간호를 하여 살려놓아 학교도 그 집에서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6.25사변이 나니까 우리 세상이 왔다는 생각이 났을 것이다. 술렁술렁하기 시작하더니 나는 그 뒤로 피난을 가버리고, 그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총을 얻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총을 주었을 것이다. 총을 가지고 어디를 찾아갔는가? 자기를 때리던 경찰관의 집을 찾아가서 일곱 식구를 총살을 시켰다. 완전히 자기 매 맞은 원수를 갚았다. 그 다음에 다시 경찰이 수복하여 들어왔다. 그 사람 집도 식구가 일곱 명인데, 그 사람이 장남인데,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을 다 데려다가 논바닥에 세워놓고 다 죽여버렸다. 두 집이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이 사람은 산에 들어가 마지막까지 투쟁하다가 배고프고 혼자 고립이 되어 도저히 살 길이 없기 때문에 총을 메고 어느 주막으로 들어갔는데, 신고를 하여 붙잡혔다. 이 사람은 공주형무소에서 15년 징역을 받았는데, 사람이 원체 본성이 착실하여 거기서 모범수가 되어 10년으로 감형이 되었다가 또 8년으로 감형이 되어 나왔다. 지금은 전주에 살고 있다. 사람은 본성이 참 착한 사람이다. 원한 때문에 두 집이 멸문을 당했다. 애매하게 부모들이 다 죽었다.
그러니까 원수를 맺으면 언제 또 원수를 맺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총 가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총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도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집이 한 두 집이 아니다.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때 이런 비극이 엄청나게 벌어졌다. 이것이 모두 성급한 사람들이 용렬한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이다.
이것이 만일 역사에서 지혜를 배웠더라면 노련한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배웠더라면 그래도 밉지만 참고 원수지만 그래도 참고 기다렸으면 그래도 자기가 매 맞은 것만 끝나고 두 식구가 다 살았을 것이다. 자기 집 일곱 식구는 살았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분을 못 이겨 원수를 갚은 결과 자기 식구가 다 죽었다. 하나도 살지 못하고 말았다.
역사 속에는 이런 일이 수없이 많다. 이런 일을 본 사람들은 여기서 지혜를 배워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지혜다. 하나님 나라의 지혜가 아니고, 세상 지혜다. 내가 세상 지혜를 가르쳐주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것을 주고 싶지만 100의 하나라도 안 되거든 그래도 세상 지혜라도 가지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데, 언젠가 하나님 구원을 기다리는데 필요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면 기다리라고 할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것이다.
분명히 주님은 오신다. 분명히 때가 이르면 주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분명히 주의 구원이 이를 것이다. 지금은 몰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날이 돌아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하지 아니할 것이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알 것을 알고 있다. 그냥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니까 금방 오실 것이니까 처녀 딸을 가진 자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임박한 환란으로 인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소리가 왜 나왔겠는가? 곧 구원에 이를 것이니까 지금 시집을 보낼 것인지 안 보낼 것인지 고민하고 있지만 곧 구원에 이를 것이다. 곧 주님이 임박하게 왔으니까 강팍한 사람이 누그러지게 될 것이고, 무지한 사람이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깨닫게 될 것이고, 은혜를 망각했던 사람이 다시 찾게 될 것이고, 이 시간이 곧 올 것이니까 금방 올 것이니까 조금만 참으라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강림이 불원(不遠)했다. 금방 올 것이니까 참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간절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내가 분명히 확신하기는 말씀을 듣다보면 깨달을 날이 온다. 깨달을 날이 올 것인데, 지금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사탄에게 가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멸망의 길로 가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참으라는 것이다. 주 예수의 강림이 곧 있을 것이니까, 구름을 타고 곧 오실 것이니까,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고 찌른 자도 볼 것이니까, 반대하던 자도 시인하게 될 것이고 모른다고 하던 자도 알게 될 것이고 싫다하던 자도 좋다고 할 것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라는 것이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시리라 하신 분이 오실 것이다. 잠시 잠깐 후면 곧 오시리라 하신 분이 오실 것이다. 우리는 기다려야 된다. 멀리 기다릴 것이 아니라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잠시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금방 우리에게 올 것이니까, 임박해 올 것이니까 죽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것이다. 자살하려고 생각한다면 조금만 참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의 구원이 곧 임박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확실하다. 이것은 우리의 신념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 신념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증거가 나타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열매가 되어 우리 앞에 확실한 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신념의 희망과는 다르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할 것으로 믿는다는 그 신념과는 다르다. 대학은 떨어질 수도 있다. 나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것과 다르다. 부자가 안 될 수도 있다. 거지가 되고 쇠고랑을 차고 부도수표를 낼 수도 있다. 이것은 자기 신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확고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증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험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오실 날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실 날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의 말씀이 내게 임할 것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우리에게 임할 것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보고 답답하거든 그 사람에 대해서 기다리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도 주의 강림이 불원(不遠)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기다리자는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도 기다리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강림이 불원(不遠)하기 때문이다. 그가 오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니까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니까 찌른 자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니까 기다리자는 것이다. 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받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해서 증거 받은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불러 세웠나니 하는 말씀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언제 꼭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不遠)하다. 머지않아 오게 된다.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우리는 지금 주로 더불어 교제하면서 이 말을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이 말을 한다.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갖고 이 말을 한다. 이렇게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소망도 아니고, 우리의 희망 사항도 아니고, 우리가 그냥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우리의 확실한 푯대이다. 우리에게 주신 증표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오실 날을 기다려야 된다.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야 된다. 우리를 향해서 오시는 이를 향해서 우리가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내가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생각하든지 생각하지 않든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기독교인이든지 기독교인이 아니든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그래서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복음은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도 새로 만들 일은 없다. 새로 창조할 일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풍성한 세계다. 너무나 풍요로운 세계다. 사람이 모두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에 허덕여서 있어도 가난하고 없어도 가난하고 쌓아놓고도 가난하고 모아들이고도 가난하다. 모아도 모아도 배가 부르지 아니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아귀와 마찬가지다.
아귀는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하고 몸은 집채덩어리만 하다고 한다. 저주받은 한 인생의 윤회하는 도장을 설명을 했는데 아귀 같은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몸은 고래덩이만 하고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하니 배가 찰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아무리 먹어도 하루 종일 먹어도 배가 안 찬다. 인생을 비유해서 그렇게 말했다. 육도를 윤회하는 동안에 아귀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인생은 아귀 속에 있다. 그 사람들이 말한 대로 진짜로 아귀 속에 있다. 아무리 모아도 모아도 차지 않고, 먹어도 먹어도 차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무엇을 고치면 되고 무엇을 고치면 되고 다 이론은 좋지만 아무도 배부르다는 사람은 없다. 만족하다는 사람은 없다. 잘됐다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말씀이 없어서 하나님의 이 풍요로운 세계가 감추어져있기 때문에 모두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모두 가난한 것이다. 그래서 모두 불행한 것이다. 그래서 마치 뭐가 없는 사람처럼 허덕이는 것이다. 한 번도 뭘 먹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껄떡이는 것이다. 한 번도 뭘 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해보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것을 주었는데, 우리가 살다 살다 살아도 다 살지 못할 것을 주었는데, 우리가 다 파먹어도 파먹지 못할 것을 주었다. 단양에 가면 시멘트 산이 있는데, 500년을 파먹는다고 한다. 산 덩어리가 전부 시멘트라 언제 다 파먹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것도 언젠가 가보니까 산이 반쯤 팍 무너지고 말았다. 이 앞의 산만큼 높은 산이 얼마나 시멘트를 파내었는지 지금은 반 중턱쯤 내려와 버렸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것은 그런 것과 다르다. 끝없는 보화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하나님 말씀을 알기만 하면, 깨닫기만 하면, 우리처럼 풍요로운 인생은 없을 것이다. 우리처럼 하나님을 감사할 존재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내가 믿으니까 있고, 내가 안 믿으니까 없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믿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못 믿는 것이다. 그 못 믿는 사람에게 당신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미련한 것이다. 그리고 뻔히 있는 사실을 있다고 말하는 일이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이다.
전도라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고 하는 것이 전도이니까 이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전도의 미련한 것을 동원하여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미련한 소리를 계속 한다는 그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으니까 말씀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사람이 하도 어리석으니까 하나님이 할 수 없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또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이것이 사실이다. 어느 날 눈이 떠져 발견되기만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 나는 그 운명 안에 있었구나. 나는 그 생명 안에 있었구나.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 나도 역시 그 사람이었구나.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 십자가가 저 먼 갈보리 산에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었구나. 내 운명 안에 바로 십자가가 있었구나. 그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남의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무 십자가가 아니고 쇠 십자가가 아니고 금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 십자가가 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이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안정하는 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구나. 임마누엘이구나. 그렇게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 인생의 모든 불안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생의 모든 불안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가 허튼 짓을 하던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해야 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인생의 임무를 하게 된다. 사람 본래의 사명을 이행하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말 못하고 죽은 무덤이 되지 않고, 다 하고 죽은 무덤이 될 것이다.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게 생겼는가? 나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은 좋은 것을 많이 가졌는데, 좋은 것을 못 가지고 있는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나는 너무나 많이 가졌구나. 나는 너무나 많이 받았구나. 그런 사람이 된다. 저 사람 집은 저렇게 좋은데, 내 집은 왜 이렇게 나쁜가 하던 사람이, 내 집은 왜 이렇게 좋은가 하는 사람이 된다. 저 사람 것은 저렇게 좋은데, 내 것은 왜 이렇게 나쁜가? 떡도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식으로 항상 그랬던 사람이 내 떡처럼 큰 떡은 없구나 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
그러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경찰서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혁명을 무엇 때문에 하겠는가? 노사분규를 무엇 때문에 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고 있겠는가? 다 내 떡보다 남의 떡이 커 보여서 그렇다. 남의 떡이 내 떡보다 커 보이는 한은 항상 불안하다. 남의 것이 내 것보다 좋게 보이고, 뭐든지 다 그렇게 보이니까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아귀처럼 아귀의 인생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아귀는 물을 먹어야 되니까 하수도에서 산다고 한다. 다른 것은 목구멍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배가 차지 않으니까 물을 먹어야 된다. 그것도 맹물만 먹고는 살지 못하니까 그래도 쌀뜨물이라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하수도 구멍에서 사는 것이다. 스님들은 자비심을 동원하여 아귀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밥을 먹은 후 밥그릇을 손으로 싹싹 씻어먹는다. 왜냐하면 밥풀을 남겨놓으면 설거지를 하다가 밥풀이 내려가면 아귀 목구멍에 걸려 그것마저도 못 먹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자비로운 대자대비한 부처님께서 아귀의 인생을 불쌍히 여겨서 깨끗이 씻어먹으라는 것이다. 물만 내려가도록 해야 그래도 아귀가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귀 인생이 되어서 되겠는가? 하나님 당신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인생이 되어야지 왜 이렇게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가 하는 인생이 되어서 되겠는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이 말씀이 영원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 기 도 ]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소망 없는 세상에서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세상에서 주님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보여주시고 이미 결정되어진 것을 보여주시고 거기서 우리가 변치 아니하는 사실을 보게 하여주시고 요동치 않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시고 거기서 우리가 요동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불변하는 약속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당신을 향해서 우리가 달려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고 그 달려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미 얻었다하는 것도 아니고 다 이루었다 한 것도 아니며 그렇지만 주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이 확실하기 때문에 달려간다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나그네와 같이 경주자와 같이 지금 우리가 주 앞에 섰습니다. 주님 우리 길을 재촉하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 앞에 이르도록 축복하여 주셔서 당신의 음성을 우리가 귓가에서 듣게 하여 주시고 마음속에서 듣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생명 속에서 깨달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