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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의 소명 이야기
2012년 3월 16일
뭐 하는 사람?
정만은 분당 샘물기독학교 행정실장 일을 하고 있다. 동시에 학교 수업도 하는데 다름이 아닌 노작수업이다. 정만은 흙을 좋아해 밭농사를 조금씩 지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행정실장일로도 바쁜데 노작 수업까지 해야 하니 이만저만 할 일이 많은 게 아니었다. 아이들 수업을 위해 미리 풀도 뽑아 놓고 모종을 다시 심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시간에 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행정실장의 일이 거의 ‘소사’(小事)같다는 말도 듣는다. 또 지금 살고 있는 판교의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샘물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다.
경남 거창 생(生)
정만은 경남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 1345번지(김천동)에서 태어났다. 우리말로 장팔리를 속칭으로 ‘곰실’이라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가족 카페 이름이 ‘곰실이가(李哥)’이다. 정만은 1957년 10월 29일에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거창에서 사립학교였던 샛별초등학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다. 1964년인데 당시 시험을 쳐야 입학할 수 있었다. 20-30명 정도의 반이었으니까, 굉장한 혁신학교였다. 당시 영어도 가르쳤고 교복도 있었다. 빵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동네 아줌마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학교였다. 정만의 별명이 ‘씨오마씨’였단다. 뜻은 시어머다. 친구들끼리 뒹굴고 놀다가 보면 싸움이 일어나는 데 이때 정만은 친구들과 놀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가 참견과 정리를 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정만의 삶에서 그런 모습이 남아 있을까!
부산 송도
정만의 집은 거창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토성국민학교로 잠깐 학교를 다녔다. 송도에서 버스를 타면 삯으로 5-7원이 들었다. 그런데 송도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학교가 있는 자갈치 시장 근처에 내리면 2원이 들어 돈을 아낄 수 있었다. 1년 정도 다니다가 송도국민학교로 다시 전학을 해 졸업했다. 중학교는 추첨을 통해 들어갔다. 대신동의 대동중학교로 갔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경남고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동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쳤다. 자퇴 사유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두발자유를 외치며 데모를 했다가(74년 쯤)가 퇴학처분을 당할 시점에서 학교를 스스로 나왔던 것이다. 당시 집안도 어려웠다. 형님 셋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집은 가내 수공업을 하고 있었는데 힘들 것 같아 학교를 그만 둔 것이다. 아버지는 ‘그래 잘 생각했다! 고등학교는 2년만 다니면 된다!’라고 대답하셨단다. 당시는 학교 다니는 것이 싫어 허락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마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집에서 일을 많이 했다.
대학 학보사 기자
그런데 일도 지겨웠다. 정만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하고 싶었다. 집에서 공부할 여건이 되질 않아 목사님 댁에서 하루 종일 공부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3-4시간을 이어 공부했단다. 그 결과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동기들하고 나란히 대학에 들어갔다. 충청북도 청주까지 가서 검정고시를 보고 76년 경희대 문리대 국문과에 합격했다. 어릴 때 ‘국어박사’, ‘사회박사’라는 별명을 자주 들었던 탓에 선택한 학과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학과수업을 거의 못 듣고 학교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졸업은 국문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학보사 일에만 전념했다. 대신 근로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학비에는 보탬이 되었고 졸업도 하게 되었다. 집안이 어려워 장학금이 꼭 필요했었다. 그러다가 군에 입대, 62훈련단 182지단 제 1훈련대(예비군훈련부대)에 있다가 인사 서기병(대대장 당번병)으로 군 생활을 했다.
첫 직장
군 제대 후 4학년에 복학해서 공부하다가 그 해 11월 18일 아남산업 비서실 홍보담당자로 추천받아 입사를 했다. 아남시계, 알펙스, 카리타스 시계를 판매하는 광고판촉과장을 끝으로 퇴사하고 대홍기업(롯데그룹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아리랑 TV’에서 일했다. 사보를 발행하기 위해 전국 지점을 방문해 사람을 만나 인터뷰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전국 출장을 다니면서 맛 집을 출입하게 되면서 식도락으로 훈련되었다. [전국 맛 집 666]같은 책을 사서 별 표시를 해가며 미식가로 변모해 갔다. 아리랑 TV에서는 광고 영업을 했다. 프로그램 기획을 하기도 했다. 영어방송이 생소했기에 스폰서 유치가 굉장히 힘들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영어로 장학퀴즈를 만들면 좋겠다’ 싶어 ‘퀴즈 챔피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출연자들이 영어로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다. 이것을 하면서 기업으로부터 스폰서십을 따와 실적을 올려야 했다. 그 후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일했다. 쉽게 말하면 백수이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기독교 대안학교로 건너와 일하고 있다.
“못해!” 신앙
정만의 신앙을 특징하라면 ‘못해!’ 신앙이면 맞을 것 같다. 아버지가 33세에 장로가 되셨단다. 태어나기 바로 전쯤이었을 것이다. 집안 분위기는 매우 엄격했다. 거창 창남 교회를 시작하는 데 동참하셨고 부산에 있는 복음교회, 지금의 송도제일교회에서 봉사하셨다. 부산중앙교회,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했고, 가장 최근에는 강남일 교회를 개척하셨다. 이렇게 열정적인 아버지 아래서 거의 끌려다니다시피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에서 일인다역을 하면서 사역해야 했다. 땡땡이(?) 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릴 때 생각은 거창이나 부산의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보수적이고 주일성수하지 않으면 혼이 났다. 만화방도 금지였다. 형들이 만화방에 있으면 데리러 갔다가 자기도 같이 보다가 야단맞기도 했다. ‘타’라는 음료를 먹으면서 술 먹는 탈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술도 아니고 그냥 술에 타 먹는 보조음료였다고...... (하하하)
대학시절 학보사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은 학보사 기자를 ‘도깨비’라고 불렀다. 자기 교수님 이름을 잘 모르지만, 타 교수들을 더 잘 알았단다. ‘주지육림’(호사스런 술잔치)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당시 무협소설이 유행했는데, 정만은 그런 무협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정만의 별명은 ‘고풍의상’으로 불렀는데 아버지가 입으시던 롱코트 차림으로 다녔기 때문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흑면독필’ (얼굴이 검고 글을 잘 쓰지 못해)도 있었고, ‘사모정애’(정애라는 여자를 좋아해서), ‘구토달인’(술을 먹으면 잘 토해서 붙여진)이라 부르는 친구도 있었단다.
정만의 대학축제 파트너는 매번 바뀌었다. 여성편력?
군대 있을 때에는 매주 토요일에 면회 오는 사람이 달랐다. 순서를 잘 못 정해 줘, 하루는 세 명이 함께 면회를 와 우스운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결혼 후 1년 시댁에서 함께 살았는데, 시어머니가 아내에게 이 모든 얘기를 해 줬단다.
국문과를 다닐 때 시화전을 딱 한 번 했단다. 경희대 분수대 광장에서 했다. 흑석동 중앙대학교 앞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집에서도 같이 했다. 당시만 해도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업 논문도 신동엽 시인에 대해 썼다. 그런데 시인이 못됐다. 염세적인 사람이 되어 40이 되기 전에 죽겠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시인은 40이 되지 못하고 요절했기 때문이다. 지금 50 넘게 살고 있는 것은 시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ㅎㅎ
결혼
정만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정작 결혼은 선을 통해 했다. 두 번째 맞선이었다. 진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첫 번째 선은 인쇄소 사장이 소개한 아가씨였다. 정만은 당시만 하더라도 오만했다. 아가씨에게 ‘당신의 인생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더니 세속적인 대답을 해, 정만은 초면에 호통을 쳤단다. 그리고 아가씨를 내버려두고 나와 버렸단다.
두 번째 선은 처 고모부 댁에서였다. 지금의 아내는 당시 중학교 교사였다. 어머니가 따라 나오셔서 어떠냐고 물으셨다. 정만은 반대로 ‘저쪽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좋다고 한단다’라는 말에 정만은 ‘그럼 결혼하죠!’라고 말하고 부산 송도까지 택시를 타고 가 장황하게 설(舌)을 풀었다. 당시 아내는 ‘첫 만남에 뭐 이런 사람이 있느냐’라고 생각했단다.
어쨌든 10월 1일 선을 보고 12월 29일에 결혼을 했으니 3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했다. 정만의 직장이 서울이고 아내의 직장이 경남 남해이니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결혼할 때까지 6번 만났다.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결혼한 셈이다. 결혼 해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앙적 배경, 결혼 예비학교, 성경읽기 등등을 하지만 당시에는 세속적인 생각으로 결혼한 것 같다.
신앙의 고민
첫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한별이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의 깊이나 삶과 신앙이 일치되지 않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혼 20년 정도 지나서 아내가 말하기를 결혼 생활 10년 참 힘들었다고 했다. 정만은 집안과 아내를 돌보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기도 했다. 80년대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직장이 우선이었다. 고과에서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직장위주로 돌려야 했다. 결혼식을 12월 29일에 한 이유도 종무식 이후 1월 4일까지의 휴일을 사용하기 위해 잡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순진하고 멍청했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회사 생활에만 몰두했다.
서울 강남일 교회에만 다니다가 스스로 신앙의 독립을 위해 교회를 떠났다. 그런데 실제적인 계기는 우스운 것이었다. 목사님이 정만에게 반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교회를 옮겼다. 결과적으로 신앙의 독립을 하게 된 셈이다. 아버지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가고 봉사하는 것은 신앙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결단이었다.
그즈음에 형제들 가운데, ‘가지 많은 집안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평안치 못했다. 정말 의지해야 할 사람은 예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아버지와 집안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분당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평촌 근처에 살았는데(의왕시 포일동), 분당 신도시 아파트 추첨에 당첨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12-13년 살다가 판교 추첨을 하는데 당첨이 되었다. 넣으면 당첨이었다. (하하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늘 용돈이 부족해 힘들어 하던 아들이 하루는 이렇게 말했단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집에 부동산의 복은 주시지만, 동산에는 왜 안 주실까?’라고 했을 정도였다.
성숙
대홍기획에서 담당했던 광고주(의뢰인)는 대한항공, 바로크가구, 피아트 자동차, 롯데를 담당했다. 롯데 햄을 담당했을 때는 살이 많이 쪘다. 롯데칠성을 위해 일했을 때는 ‘롯데 따봉’을 만들 때 함께 했다. 광고영업, 개발, 유치하는 일을 했다. 당시 대홍기획을 다닐 때가 제일 잘 나갈 때가 아닌가 한다. 독일, 이태리, 스위스 출장도 다녔다. 당시 받던 연봉을 지금도 회복을 못하고 있다. 1990년 전후 연봉을 지금도 회복 못하고 있다. 인간적으로는 잘 나갔지만 신앙적으로는 피폐하고 힘든 시기였다.
컨설턴트로서 일하면서 5년 동안 실패를 하고 나니 깨닫게 되었다. 그러기 전 아리랑 TV에서 일했는데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었다. 사표를 내라는 전화를 받고 올라와 사표를 냈다. 그러나 자신감이 있었다. 인맥과 경력을 믿고 회사를 하나 차렸다. 선배와 함께...... 결과는 참담했다. 집 저당 잡혀 대출 낸 돈을 사기 당했다. 5년 동안 수입이 없었다. 돈은 자꾸 쓰는 데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오늘은 방문 한 짝 나갔다’라고 넋두리하며 지내야 했다. 1억 2천까지 대출을 하기도 해야 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은 잘 아는 성경구절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18절 구절을 보면서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명퇴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일어서는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잘 나가던 시절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었다.
당시 독수리기독중고등학교로부터 행정실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독수리학교에서는 정신을 차려 열심히 일했다. 4년 정도 일했는데 학교가 새벽월드교회 건물에서 분당동으로 옮기면서 전력투구를 했다. 주일에도 공사장에 들러 보고, 새벽기도 마치고 오면서도 관심을 가졌다. 학교는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그 생각을 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좋지 않은 결말을 얻은 것을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을 고치라고 사인을 주신 것으로 본다.
그 후 메시야 서점을 형으로부터 인수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을 하면서 성직자들이 신앙과 삶에 있어서 일치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서대문구 남가좌동 서점의 거래교회 대부분이 미자립교회 목사들이었다. 100명 이상의 교회는 별로 없는데, 목사와 사모님이 주 고객인데 거래를 하면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고 말았다. 돈을 받지 못한 것들이 많다. 서점에서 파는 주일학교 용품이 뻔했다. 10원 20원짜리 물건도 ‘더 비싸다’고 해 힘들었다. 마음의 수양을 많이 했다. 신앙과 삶의 일치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가 샘물학교의 부름이 있어 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아내가 서점을 맡아 4년 동안 고생을 했다. ‘서점은 아내를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라고 농담하기도 한다. 정만은 6개월 정도 밖에 서점 일을 하지 않았다.
나의 밭
정만을 이룬 것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많은 것 같다. 7남 2녀중 6남이다. 밑으로 여 동생 2명과 남동생 2명이 있다. 누님이 일찍 한 명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첫 아내는 일찍 돌아가셨다. 친 어머니로 보면 5남 2녀 중에 4째이다. 아래위로 셋 이다. 그러다보니 정만은 집안의 대소사 때 중재를 많이 하는 입장이다. 아내는 ‘그만 나서라’라고 말리기도 한다. 스스로는 중재를 잘 하고 있다고 보는데 아내는 그렇지 않다.
국문과를 다닌 것도 학보사 다니면서 한 주에 원고를 몇 십장씩 써야 했다. 사보 기자를 할 때는 책자 형태로 매달 나와야 했다. 원고지로 100매 정도 써야 했다. 그만 둘 때에는 거의 혼자 일을 했다. 그러나 본인은 시인이 되어야 했는데 잡문을 써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광고란 무엇인가? 널린 알린다는 뜻이다. 상품판매를 위한 ‘광고’는 결국 소비자들의 지갑을 여는 것이다. ‘홍보’는 마음을 여는 것이다. ‘Advertising’은 광고이고 ‘Agency’는 광고회사인데 여기서 배운 것은 기획력, 대인관계, 접대능력, 네트워킹, 돈 관리이다. 어떤 광고주는 매달 여자들과 술을 먹어야 다음 달 결제를 했다. 성매매도 알선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신앙적 갈등도 있었기에 동료들과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양주와 비슷하게 하려면 생수와 콜라를 섞어 마시기도 했다. 그랬더니 이가 나빠졌다.
광고회사를 떠나게 된 계기는 신앙인으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광고 실적을 올리려면 사실과 달리 부풀려야 하는 일이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외 출장을 다니기도 하며 월급도 많아 부러움을 받는 직장이었는데 신앙인으로 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광고 분야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은, 다른 방식이 있을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참 힘들었다.
행정이란?
행정은 기획이다. 기획은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이다. 법과 규정과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문장화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딱딱하고 경직되기 쉽기 때문에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또 협상하고 중재하고 추진하며 대화로 풀어내야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행정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
나의 오늘
베풂이 무엇일까? 정만은 베푼다는 것은 나눔과 섬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힘든 일이다. 어느 날 생각해 보니, 남이 하기 싫은 것을 내가 먼저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기이다. 오늘 아침에도 욕실에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끼어있는데 강의 핑계를 대고 그냥 나오면 되지만 ‘내가 먼저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해도 풀백(Full Back)을 한다. 전부 다 공격만 하면 수비는 누가 하나? 그래서 풀백 자리에 있다. 그러면 공격수들이 놓치는 것을 방어한다는 생각도 베풂과 섬김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농사를 해 보면 ‘심은 대로, 가꾼 대로 거둔다’가 맞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지금 비정규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취직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해도 번듯한 직장에 지원하고 싶어 한다. 남들 보기에 꿀리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아니라고 변명하지만 정만이 보기에는 그렇다.
요즘 생각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것은 화평, 평화가 아닌가? 기쁨과 감격이 퇴색되어 가고 있더라.
불평이 많은 것은 감사가 없기 때문인데 은혜를 알지 못하면 감사가 없다는 생각이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이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비로소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했다. 신구약을 한 글자로 요약하면 ‘사랑’이다. 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정만에게는 숙제이다.
나의 꿈(비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를 돌보라고 했다. 미혼모와 다문화 가정과 노인을 섬기는 일을 하고프다. 또 정만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가? 소명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다. 잘못하면 팔자소관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주 = 연월일시를 말한다. 팔자 = 갑자년 무진월 임신 일 경인시를 말한다. ‘사주팔자는 날 때부터 타고 난다’라는 운명론으로 간다. 소명도 운명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들려주고 싶은 말
1) 뭐든지 읽고 배우고 익히자!(박학다식) 많이 읽어야 다른 사람의 삶도 간접으로 습득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중고등학교 때 방학에 소설 전집류를 많이 읽었다. 심지어 등창이 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다. 최근에 회심을 했다는 이어령씨 책을 고등학교 시절에 많이 읽었다. 지난 겨울에도 6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지금도 책을 읽지 않으면 허전하다고 느껴진다.
2) 소명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더라.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가 소명에 철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명 강의도 직업을 생각해야겠지만,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3) 염려 대신에 기도를 하기를 바란다. 샘물학교 체육대회를 계획하면서 실내체육관을 대관하려고 시도했는데 어려웠다. 수원에 경기도립 인재개발원에 실내체육관이 있었다. 한 달 전에 인터넷으로 대관하면 된다고 했다. 아침에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장소를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서 보니 장소가 참 좋았다. 담당자에게 전화 해 보니 어림도 없다고 대답했다. 기도를 할 때는 될 것 같았는데...... 다시 전화를 통해 자료를 주면서 다시 시도했다. 계획표를 보내달라고 말해 보냈더니, 다음 월요일에 빌려주겠다고 답신이 왔다. 그것도 무료로 가능하게 되었다. 염려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믿는 자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기가 걸려도 기도한다.
4) 가훈은 “진실과 사랑”이었다. 당시 드라마 중에 “사랑과 진실”가 유행했는데 그것을 빌린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지만, 옳은 것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진실이 우리 삶을 통해 일어나게 되길 정만은 바란다.
[질문]
유연성이 정만의 성품에 잘 어울린다고 보이지만, 정확성과 엄격성의 성품, 상반된 두 가지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고신의 엄격한 가정에서 훈련 받았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려고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그리고 지금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하고 있나?
=>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는데 과거 아버지 교회에 다녀갔더니, 한 성도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아들이라도 참 힘들지?’라고 물었다고 할 정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두 가지 성품이 혼재되어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힘들어 하고 어려워한다. 초임 과장일 때 별명이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였다. 과원들 업무 훈련시킬 때 집에 데리고 와서 가르쳤는데 나중에 말하기를 ‘그 때 배운 것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삶의 극단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수도 있다. 몇 년 사귀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런 선입견이 있다. 나름대로 넘나들기 위해 노력하기는 한다.
2. 다우리 교회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다우리 교회의 패션 감각의 수준을 높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것은 아이들이 케리비언 베이에 갔을 때 충격이었다. 사진을 전송해 주었을 때 좋아하게 되었다. 나도 늙으면 그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축구를 하는데 삶은 축구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느끼기에는 도깨비 쪽이다. 누구와 얘기해도 그럴 것 같고 어른과 만나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이다. 그런데 그런 면이 있을 것 같은데 폭넓은 감각에서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주는지?
=> 다 얘기하면 안 되는데...... 남겨두는 신비가 필요한데..... 어제 선교사가 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 은혜란 큰 통에 물과 같더라. 물이 맑든 흐리든 큰 통에 물이 가득 찬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물이 빠져나가고 바닥이 보이면 찌꺼기만 보이더라. 너무 사람이 밑바닥까지 다 보이면 추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더라. 밑바닥까지 보이라는 질문은 아닐 것일 것.....
패션의 키워드는 ‘차별화’이다. 차별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언밸런스이다. 패션 감각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믹스 앤 매치(Mix & Match)를 잘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 옷과 저 옷이 많이 튄다. 그런데 스카프를 걸치니, 중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롯데에서 일할 때 본인이 제일 튀었다.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했다. 노력을 한 것이다. 아내가 제일 싫어한다. 다양한 경우를 경험하면서 저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게 되고 도울 수 있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리 준비를 하면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잘 응대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50이 넘으니 되더라.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