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천 리(길부,천동) 길천1리(길부)
<위치 및 환경>
이 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구안국도 5호선을 따라 의성방면으로 약 6km지점에서 (문흥정미소 맞은편)우측으로 남대천의 길천교를 건너 약 0.5km를 가면 동으로는 태봉산, 남으로는 용락산,서로는 묵반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북향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앞을 흐르는 남대천과, 마을 상곡내 용락산으로 흘러 내리는 소화천과, 평소에는 건천이지만 새들,앞들,양수장과 비옥한 농토의 젖줄기이기도 하다. 1500년경 순흥안씨가 개척하였으나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명맥만 이어왔다. 1592년경 파평윤씨가 입향하였고, 뒤이어 평택임씨가 입향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농사는 주로 수도작물,원예작물,축산업 둥이며 특히 원예작물은 면관내에서도 우수마을로 고소득 작물이다. 70,80년 전에는 96호가 살았고, 해방 후에는 80여 호가 살았으며, 지금은 54호에 117명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길부라는 말은 살기좋은 언덕이란 뜻이다.
<마을이름(지명)유래>
(1)유래 마을 유래는 서남쪽 하곡내(下谷內)가 자연풍치가 좋고 생긴 모양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여 있어, 사람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적지여서 사찰의 유허지라는 설이 있었으며, 그 당시는 길곡리라고 하는 설도 있다. 또한 마을 앞을 흐르는 남대천이 서남쪽 언덕을 지나 흐르면서 수심이 깊고 둑이 높아 외부에서 볼 때 곡내를 둘러싼 언덕이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좋은 언덕이란 뜻에서 길부라고도 한다.
(2)전설-경덕왕의 태가 든 석감 마을 동편에 조문국시대 때 경덕왕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석감이 있고, 석감 속에는 태를 담은 그릇이 있다.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손을 넣어 저어보면 쇠붙이 소리(그릇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석감 위에는 미륵이 세워져 있고, 우리가 있을 때는 미륵이 빛이 백색으로 변한다. 또한 불임여성들이 잉태나 득남을 원할 때, 미륵 앞에 빌면 소원성취한다는 설도 있다. 과거 태봉산에 산소를 쓰면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설에 뭇사람들이 묘 쓰기를 원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저지로 쓰지 못하였다. 당시 권력을 행사하던 의성의 고을 원님이 묘를 쓰고는 미륵의 목이 부러졌고 그 후손들은 망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석감 속의 보물은 도굴당하였고 미륵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으나 넘어져서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석감의 형태만 남아있다. 또 이 산에서 돌이 떨어지면 큰 돌은 대인, 작은 돌은 소인이 죽는다는 설이 있다. 이는 함부로 산을 훼손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2) 주요지명 (1) 들 ○ 앞들 : 마을앞에 있는 들로서 64년 경지정리 150두락, 61년 양수기 설치를 하였으며, 그 옛날에는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무, 배추의 특산지로 가을 수확기에는 각 지방 실수 요자들이 모여 들어 성시를 이루기도 하였다. ○ 지겁들 : 50두락 하곡지 이용 ○새들: 80두락 ,62년 양수기 설치
(2) 산 ○ 태봉산: 조문국시대 때 왕의 태를 묻었다고 전함. 해발215.7m
○ 용락산 : 용이 떨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산세가 험하여 마을 사람들의 성격이 급하며, 산능선이 등으로 뻗었다고 하여 사두혈이라 한다. 산하마을의 샘을 5개나 파고 마을 동편에 돌을 모아 개구리 형태로 돌무더기를 만들었는데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 무등산 : 하곡지내에 있다. ○핏키산: 하곡산 옆에 있다.
(3) 하천 ○ 남대천 : 동에서 서로 흐르는 대천이며, 홍수시에는 범람하여 새들이 침수된다.
○ 소화천 : 폭우시에는 유수가 되고 평소에는 건천이다.
(4) 저수지 ○ 하곡지 : 서남족 50두락
○ 상곡지 : 상곡내 10두락
<주요사건 및 자랑>
(마을을 빛낸 인물) ♠ 열부 : 박순희 파평윤씨 33대손 윤성모의 처 구산박씨는 평생 남편에게 여자의 도리를 다 함으로서 1949년 의성군 유림의 협조하에, 문흥리 산 58번지 창열각을 건립하고 열부로 명명받게 되었다.
♠ 효부: 김유분 진주강씨 25세손 강대욱의 처로서 시어미니의 질병을 7여 년간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로 1963년 2월 1일 동민 전체로부터 효부 표창장을 받았으며, 또 그해 3월 28일 의성군수로부터 효부표창장을 받았다.
♠ 이분선 파평윤씨 34세손 윤동섭의 처로서 5여 년간의 시어머니 병간호로 그 효행이 타의 귀감이 되어, 1991년 4월 30일 봉양면장의 효행상을 받았다.
<인물>
○ 윤국형(1543~1611) 파평인으로 자는 수부, 호는 달촌 선조 무진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형·호조 참판 공조판서를 역임했고, 가음 현리동의 오계서당에서 훈도로서 많은 인제를 배출하였고, 저서로는 문소만록이 있으며 1590년 춘산 빙계동에서 상경하였다.
○ 윤덕립 선조 12년 기묘(1579)생 인조 17년 기묘(1639)졸. 윤국형의 오남이며 통덕랑 1592년 길부 파평 윤씨의 입향조이다.
● <노거수> 현존하는 나무는 없고, 옛날에는 마을동북쪽 도래란 곳에 팔구나무가 있었고, 5월 단오에 그네를 뛰고 마을중앙에는 회나무가 있었는데, 하절기에는 동민의 휴식처로 이용하였으나 용도에 따라 베어 버렸고, 그외 느티나무는 세도가가 묘를 쓰고, 근처에 있는 노목을 소각하였다. 그 때 소각한 나무에서 큰 황새가 나왔다는 설이 있다.
● <주민의 의식구조>
과거 춘궁기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하고 밀가루로 술을 빚어 농주로 마셨으나, 생활이 윤택해짐에 쌀로 술을 담그고, 채소만 먹던 시절이 육류로, 초가지붕이 기와와 스레트지붕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는 현대식 양옥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의식주의 개선으로 주민의 의식구조도 한층 미래지향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 <옥계서당>
소재지:봉양면 길천1리 길붓 고려 태사 신달의 후예인 윤국형은 1543년(중종 8년) 6월 25일생. 아버지 희렴(증 이조판서)이 무오사화의 화를 피해 가음면 현리동으로 옮긴 때가 그 나이 세 살 때다. 처음 이름은 선각, 자는 수부, 호는 달촌, 본관은 파평이다. 그의 인품은 중후하여 신의로 일관, 옥계서당에서 학문을 익혀 생진양시에 합격하고, 25세 때 별시 문관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언을 거쳐 삼사 양전을 역임했다. 공은 맡은 직책에만 지성을 다할 뿐 도무지 영달을 탐하지 않았다 한다. 1583년(선조 16년) 사론(士論)이 양파로 갈려 시비가 분분할 때 공정한 입장을 지키다가 사퇴, 그후 장악원정을 거쳐 두해 뒤는 옥당에 돌아갔다. 임금이 날마다 유신들과 더불어 경사를 강론하며 정치의 정도를 논의할 때, 공은 강석에서 진언한 바 많았고, 1589년 좌승지로 상주 목사에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왜적 침입에 대비,무기를 정비하였으나, 이 해(1592년) 임진란이 발발 순찰사를 겸임하여 왜침 방어에 힘쓰다가, 서울이 이미 함락되자 이를 문책, 관직을 삭탈당했다. 뒤에 기용되어 충청도 순변사가 되고 1594년 판결사, 병조 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비변사 당상이 되어 난후 혼란한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유성룡이 공을 아껴 모든 일을 협의하였으며, 한성 우윤 겸 형조참판이 되었다가 유성룡이 물러날 때 함께 모함 당하여 파직되었다. 1606년(동왕 39년) 한성 좌윤을 지내고 1608년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 초에 공조판서에 까지 이르렀다. 1611년*광해군 3년) 8월 3일에 타계하니 향년이 69세, 부인은 평양 조씨. 공은 입조 40여년을 청렴과 충의로 진충 보국했고 저서에 [기축청건저야언],[문소만록] 등이 전한다. 그가 강학하던 옥계 서당은 뒤에 후손들이 많이 사는 봉양면 길천동에 이전되었고,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