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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와 자본주의에 대한 小考 (11)
Whatever is produced in haste goes easily to waste
Saadi (Mushrif-ud-Din Abdullah) (1184? – 1283/1291?)
이란에 대하여..
샤트 알 아랍 수로(水路) (Shatt al Arabs Waterway)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끼고 흐르는 바그다드, 그리고 이 강들의 유역은 6, 7천년 전 수메르 그리고 바빌론이 숨쉬고 약동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요람입니다. 이 두 개의 유서 깊은 강은 현재 이라크의 알 쿠르나(Al Qurrnah)라는 곳에서 합쳐져 흐르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페르시아만에 흘러 들어가는 곳까지의 약 200km에 달하는 수로를 아랍어로는 Shatt-al-Arab(Stream of Arabs)라고 부릅니다. 이 수로 양쪽에는 이라크와 이란의 중요한 항구가 각각 두 개씩 있습니다. 이라크의 바스라와 움 카스르(Umm Qasr), 그리고 이란의 코람샤와 아바단이 그것들입니다. 수로의 남단 약 130km 정도가 양국 국경을 구성하는, 우리의 임진강과 비슷합니다..
원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는 이 수로보다 훨씬 서쪽에서 페르시아만에 진입했었다고 합니다.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고, 좁은 곳은 40m 정도 넓어야 800m 정도의 폭을 갖고 있는 이 수로는 이란 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카룬 강의 퇴적작용으로 늘 준설을 해야만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현재 이란과 이라크의 전신인 페르시아와 오토만 제국이 1639년 수로 이용권에 대한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래 늘 양측의 분쟁을 유발해 온 악명 높은 곳입니다. 후세인이 1980년 이 수로의 독점적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란을 침공하여 발발된 이란-이라크 8년 전쟁은 그 도발의 원인도 수로였지만 양쪽의 헤아릴 수 없는 살육전도 바로 이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란을 이야기하려는 시점에 웬 물길(水路) 이야기인가 하시겠지만, 나름의 소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란/이라크의 8년 전쟁이 한창이던 80년대 중반, 저는 호르무즈 해협의 방파제에 서서 대기 중인 거대한 유조선들의 불빛을 보며 깊은 회의에 잠겼던 일이 있습니다. 과연 이곳 호르무즈와 북쪽의 샤트 알 아랍이 이란과 이라크, 아니 중동 산유국 석유의 대부분이 드나드는 출구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수로 주변에 젊은이들의 시체가 산을 쌓았을 것인지??
영국과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과 그들에 조종 당하는 정치권력의 야욕이 아니라면 양국의 젊은이들이 8년씩이나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상의 어리석음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확신은 사실 지금도 떨칠 수 없습니다. 아니, 2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야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간악하고 잔인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프칸과 이라크에 뿌려진 피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오랜 숙적 이란의 피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란은 무엇이 문제인가?
알렉산더가 잠깐, 징기스칸의 몽고가 잠시 짓밟았다 해도, 이란은 서쪽으로 그리스 동쪽으로 지금의 파키스탄까지 지배했던 제국의 후예들입니다. 현재 이슬람 신정(神政, theocracy)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은 인종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아랍이 아닙니다. 이란이란 말이 아마 아리안의 후예란 뜻일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바빌론과는 또 다른 문명의 한 요람이며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입니다.
문제는, 지금 또 다시 그들의 지정학적 위치와 자원으로 인해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앵글로 자본주의 제국의 사냥감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헌팅튼 같은 자는 이란도 포함해서 문명의 충돌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란은 독자적 문명 세계에 속한 국가이며, 문명의 충돌과는 전혀 상관없는 약탈의 제물이 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을 뿐입니다. 이란이 뭘 잘했다는 이야기보다, 미국이나 영국이 몰아가는 세계가 너무나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란의 20세기는 에너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현재 이란 핵 문제를 안보리에 회부하려는 움직임의 원인과 정확한 맥락 역시 지난 세기 역사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약한다 해도 한 자리에서 모두 설명 드릴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지난 세기 이란의 역사 가운데 AJAX 작전 (Operation Azali, 공식 작전명- TP AJAX)이란 것을 화두로 잡아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요.
오퍼레이션 에이잭스 또는 트로이 전쟁
아약스 또는 에이잭스 작전은, 1953년 8월 영국과 미국의 첩보기관들이 합작하여 닥터 모하메드 모사데그(Mohammed Mossadegh) 총리의 이란 민주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모하메드 레자 샤 팔레비(Mohammad Reza Shah Pahlavi)를 이란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복권시킨 비밀 작전 입니다. 아약스(Ajax)는 히딩크가 이끌고 있는 페에스베(PSV)의 오랜 라이벌인 암스텔담 축구클럽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축구클럽이든 비밀 작전이든, 그것은 트로이를 공격한 그리스 용사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CIA와 영국 MI6의 눈에는 당시 이란 민간 정부가 트로이고 자신들은 그것을 공격하는 ‘영웅적 용사들이다’ 라는 의식이 담겨있는 작전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드 스타일 영웅들에게 트로이의 헬렌 같은 존재는 무엇이었을까요? 세계 매장량의 10%에 달하는 이란의 석유 말고 무엇이었겠습니까? (당시는 10%가 아니라 아마 30% 정도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이란 석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 또는 앵글로 이란 석유 회사란 이름으로 영국의 품에 깊이 안겼던 미녀였는데, 이란이 돌연 더 많은 로열티를 내지 않는다면 되찾아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영국은 로열티도 더 못 주겠다 헬렌도 못 찾아간다 버텼고, 이란 의회는
그 일 주일 전, 기술적 이유로 석유 국유화를 반대하던 장군출신 국무총리는 2차 대전 후 이란에 군림하는 외세를 축출하자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일원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이란 의회는 그 다음 달 79 대 12 라는 압도적 다수로 닥터 모사데그를 총리를 지명했으며, 젊은 왕 팔레비는 모사데그의 인기를 감안할 때 그의 총리지명을 재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총리 자리에 오르자 모사데그는 곧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실천에 옮겨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AIOC를 접수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오래 전 빼앗기다시피 팔려 간 헬렌을 대영제국으로부터 되찾아 온 패리스 즉 이란의 민족진영과 모사데그가 믿는 것은 국내 여론이나 이슬람 지도자들의 지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란 북쪽의 아제르바이잔이나 쿠르드족을 교두보 삼아 이란으로 팽창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스탈린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어느 정도 영국을 견제해 주길 내심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영국이 이란 석유를 독식하고 있는 것을 미국 또는 미국의 메이저들이 꼭 달가워했을 까닭이 없기에 이란의 기대가 근거 없는 짝 사랑이었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당시 이란 좌파 민족주의자나 이슬람 지도자들의 안이한 상황 판단과 대책 없음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처칠이 이끌던 당시 영국 정부는 즉각 헬렌 구출 작전에 돌입합니다. 당장이라도 함포를 쏘아 갈기며 들어가 엎어 버리고 싶었겠지만, 남의 눈, 특히 소련과 미국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두 가지 작전을 동시에 구사합니다. 하나는 트로이 봉쇄 작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을 설득해 협력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작전이 바로 앞에 기술한 샤트 알 아랍의 이란 항구 아바단을 대영제국 함대가 봉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바단 사태(Abadan Crisis)
영국은 자신들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아바단 정유 시설에서 나오는 석유 제품의 수출만 봉쇄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란의 모든 원유 수출까지 봉쇄한 것입니다. 설사 그렇지 않았다 해도 당시 이란 석유 제품 모두가 거의 영국을 시장으로 하고 있었으니, 이란으로선 당장 연 1억불 이상의 수입원과 시장이 사라진 것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란 경제에서 이것은 엄청난 비중이었습니다. 석유산업이 하루 아침에 수입은커녕 매달 천 만불 가까운 적자를 야기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란의 돌발적 경제난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치명적 경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이란 국민들은 여전히 모사데그를 지지했습니다. 의회 역시 1952년 모사데그의 연임을 승인합니다.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여러 특단의 조치들이 불가피함을 느끼고, 왕에게 필요한 권한과 자신의 개혁을 위협할 수 있는 군부 통제권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를 젊은 샤 팔레비가 거절하고, 모사데그는 즉시 사임합니다.
그런데 후임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영국과 재협상할 뜻을 밝혔고, 그러자 이란 전역에서 치열한 반대 시위가 일어납니다. 2차 대전 이후(사실은 20세기 초부터), 이란석유에 눈독을 드리고 입맛을 다시는 전승국들의 오만 때문에, 반사적으로 이란 민족주의 정치세력이나 좌파 사회주의 이념이 크게 고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민중의 거센 반발에 놀란 샤는 즉각 총리를 해임하고 다시 모사데그를 불러 총리에 임명합니다. 더불어 그가 요구했던 앞에 말한 권한들도 허용합니다.
힘을 얻은 모사데그는 일종의 토지 개혁과 집단 농장 시스템 같은 사회주의적 좌파 정책들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친위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왕정파 장성들을 대거 옷을 벗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사데그의 정책적 조치들은 당시 왕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그룹과 이란 판(版) 하나회라고 할 수 있는 일단의 정치 군인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도 가져옵니다. 민중적 인기와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 때문에 모사데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그들은 영국과 미국의 첩보 기관들과 은밀하게 접촉하며 쿠데타 음모를 키워갑니다.
한편 처칠은 미국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모사데그를 그냥 두면 이란은 스탈린이 집어 먹게 된다는 것이 공작의 명분이고 전반부였다면, 미국 메이저들에게 이란 석유 이권을 당근으로 은밀하게 거래한 것은 미국의 동조를 이끌어 낸 공작의 실체입니다. 그 담합 내용은 정권 전복 비밀 작전이 성공한 뒤, 1954년 팔레비 이란이 앵글로 이란 석유 회사를 컨소시움 형태로 바꾸면서 적나라하게 밝혀집니다.
그때까지 영국이 독점해 온 AIOC 이권의 40%를 미국 5개 메이저에게 각각 8%씩 나누어줍니다. 나머지는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이 40%, 쉘이 14% 그리고 프랑스의 CFP가 6%를 갖습니다. 사이 좋게 말입니다. 쉘은 거의 영국 자본이었으며, 프랑스 국영 석유는 떠들지 말아 달라는 조건으로 불로 소득을 챙긴 것입니다. 부연하면, 영국과 미국이 공개적으로는 이란 정책 노선을 비난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제각기 이란 정권과 석유 이권 막후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에이잭스 공작의 요체
이 작전은 영국 MI6가 미국 CIA에 모사데그 정권의 전복을 위한 협조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1953년 4월 당시 CIA 국장 알렌 델레스가 작전 예산을 승인하며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모사데그를 축출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실행됩니다. MI6와 CIA에 의해 수립된 작전의 수행은 당시 CIA 근동/아프리카 과장이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의 손자 커밋 루즈벨트 주니어(Kermit Roosevelt Jr.)가 테헤란으로 날아 와 직접 지휘합니다.
크게 보아 이 작전은 3가지 세부 계획과 한 가지 비상대책을 기초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는 이란 왕 팔레비에게 얼마 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모사데그의 권한을 회수하고 해임하라는 설득인데, 정치상황의 전개를 주시하던 왕은 처음에 그들의 말을 고분고분 수긍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곧 설득되어 쿠데타 공작의 일익을 담당한 작전 요원처럼 움직이게 됩니다. 디-데이 직전엔 CIA 권고를 따라 로마로 일시 피신까지 합니다.
작전의 둘째 가닥은 왕을 지지하는 이란 민중과 모사데그의 정책 노선을 지지하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간하고 충돌시키는 것입니다. CIA의 교묘하고 대담한 마타도어 공작으로, 모사데그는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권력 중독자라는 모략적 공격을 당하게 되며, 그 결과 이란 전역에서 군주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충돌하는 총체적 혼란이 일어납니다. 상황이 이렇게 조성되자, 반대파들은 더욱 치열한 혼란을 조장하여 군부 쿠데타의 상황적 타당성을 조작해 나갔습니다.
작전은 계획대로, 모사데그 노선에 불만을 품은 왕정파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모사데그를 체포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CIA는 일주일 만에 샤 팔레비를 불러 다시 자리에 앉힙니다. 그 후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26년간, 이 이란 왕은 철저한 친미노선과 악명 높은 비밀경찰 SAVAK을 앞세운 공포 철권 통치를 실시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 CIA는 그의 독재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후견인이었습니다.
쿠데타 이전에 이미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 해산권을 확보한 모사데그는 원한다면 공화정을 선포하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시간을 보내다 체포되었습니다. 자신을 권력욕에 사로잡힌 잠재적 독재자로 몰아 가는 상황에서 설사 공화정을 원했다 해도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체포된 그는 반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3년을 감옥에서 보냅니다. 그 후, 1969년 죽을 때까지 그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CIA가 디자인하고 성공시킨 쿠데타는 처음부터 결코 이념이나 이념적 블록의 대립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나 인권이 동기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힘을 바탕으로 강탈한 이란 석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영국과 그것을 나눠 먹고 싶어 하는 미국이 그들의 욕심을 이념과 인권으로 호도했을 뿐입니다. 이런 일이 비단 이란에서만 또는 1953년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닙니다.
과테말라, 쿠바, 그리고 칠레의 경우도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70년대 발표된 처치 보고서나 피노체트의 행적을 검토하면, CIA가 아옌데를 살해한 근본 동기가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님은 이제 미국조차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1953년 이후 26년간, 팔레비 통치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 이었으며, 이란의 정체성이나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는지는 생략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란의 비극적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요?
힘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악이며 그것과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정열이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무엇으로 얼마나 잘 준비하여 맞서 싸웠는가 하는 점입니다. 1951~1953년의 이란 종교 지도자들과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어리석게 행동했습니다. 순수한 신앙적 신념이나 민족주의적 이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술, 전략적 대응과 투쟁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고 무모했으며 결국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결과론적 역사비평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정반대의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와 민중의 질곡을 불러 온 그들의 정열과 희생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아도 현실적 힘의 존재를 과소평가한 어리석음의 결과이며, 혹평한다면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이념을 과도하게 확신하고 벌인 싸움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50년 전 이란 종교 지도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민족주의 좌파 세력, 그리고 닥터 모사데그와 같은 현실 정치인의 사상적 정당성이나 인간적 정의감과 정열을 폄하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과도하게 서두르고 무모하고 전투를 전재한 그들의 현실적 오류나 서투름에 그들의 신념과 정열만큼 오만과 어리석음의 성분이 존재했다는 지적입니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일정한 열매와 함께 부작용과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실패할 경우, 그 대가는 종종 그러한 시도 자체의 정당성을 물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와 반동을 초래합니다. 그러한 피해와 반동의 희생자가 결국 그들이 구원하고자 했던 민중이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혁명과 개혁은 순수성과 정열만으로 타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 순수와 인간적 정열만큼, 아니 그 이상 치밀하고 냉정한 전술 전략적 준비가 없다면, 성공해도 운이 따랐을 뿐이며 실패한다면 위험하고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불장난이 되는 것입니다.
이란의 1953년은 우리 나라의 4.19와 유사한 역사적 이벤트입니다. 그것은 각각 이란과 한국의 역사적 평가 대상이며, 긍정과 부정의 요소가 모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란의 1953년은 26년 팔레비 압정과 그 후의 전쟁과 강화된 신정정치에 이어지는 역사적 변곡점입니다. 한국의 4.19는 그 후
잠시 중간 휴식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2시간 후에 11-2가 계속됩니다.
50여 년 전 이란의 정권을 무너뜨린 CIA 주도 쿠데타는 그 후 미국의 국내 정치, 이란/이라크의 1980~1988년 전쟁, 후세인의 흥망, 그리고 현재 이란을 코너로 몰고 있는 미국의 외교노선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맺게 됩니다..
테헤란 인질극과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
이란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지금과 유사한 두 가지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였습니다. 하나는 이슬람 신앙의 가치를 계승하고 주창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행사하는 실체적 권력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 경영을 담당하는 정치인들의 현실적 권력입니다. 이 두 권력은 때로 견제하고 때로 협력하며 균형을 잡아 왔습니다. 종교 권력이 너무 나가면 현실 정치권력의 은근한 반항이 있고, 현실 권력이 이슬람 가치를 무시하면 종교권력의 반발이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팔레비는 그 균형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란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 샤 팔레비는 ‘앵글로’ 라는 말이 상징하는 물질문명과 대중문화로 이란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이슬람 순수성을 짓밟은 폭군입니다. 때문에, 그런 팔레비도 물론 나쁘지만 그런 자를 앞세우고 이란을 타락의 길로 이끌며 국부를 빨아먹은 미국이 보다 큰 악이라고 보는 그들의 시각을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이란의 종교적 가치나 권력은 북한의 주체사상처럼 현실 권력을 신격화하고 민중을 세뇌하는 것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튼, 팔레비를 몰아내고 이란이 이슬람 신정국가로 유턴을 하자 사우디 등 주변 이슬람 국가 지도자들이 불안을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 그 불안의 본질은 이란이 새로운 이슬람 제국주의를 무기로 패권을 노려서가 아니라, 이란 종교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이슬람 신앙의 순수성과 자신들의 가식이나 탐욕이 비교되어 비난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실 사우디 아라비아 등 여타 중동 산유국 정권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종교적 권력과 족장의 가부장적 권력 사이에 적절한 견제나 균형이 없이 유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권력의 분할과 상호 견제를 요구하는 것은 정권을 노리는 쿠데타 음모와 다름없는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미국의 당시 중동에 대한 시각과 입장은 보다 노골적이고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석유 이권을 제공하여 이익을 보장해 주고, 석유로 벌어 들인 돈의 상당 부분은 다시 엄청난 무기 구입을 통해 미국으로 되돌려 주는 이란은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아주는 예쁜 오리였습니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인도양 방면 진출을 가로 막고 있는 강력한 첨병 역할까지 수행하니 팔레비는 모든 미국 종속국의 롤-모델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 충성스런 국가를 뒤엎은 이슬람 혁명은 자체로 미국에 도전하는 전쟁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이란이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옛날 쿠데타에 대해 사과까지 하라니, 미국으로선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슬람 혁명 지도자들은 1953년에 좌파 민족주의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범했던 나이브한 실수를 다시 반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과거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이란 급진 좌파와 종교 권력자들은 민족주의 노선의 초고속 질주를 선도했고, 그 결과 팔레비 26년 독재와 극심한 인권 억압을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현실 균형 감각을 지닌 민족주의 노선의 견해가 무시되고 급진적 이슬람 도덕 지상주의가 질주하며 다시 한 번 이란 민중 특히 젊은이들에게 불필요한 피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성급한 질주는 즉각 미국(럼스펠트)의 무기 지원과 격려를 받은 후세인의 침공을 야기했고, 무려 8년간 어떤 현실적 힘의 축적이나 개혁도 불가능한 소모적 전쟁에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1979년 11월 반미 선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연설로 피 끓는 젊은 대학생들이 자극한 호메이니는 실로 큰 역사적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을 보는 그의 시각 또는 이슬람적 가치 아래 이란 국민을 통합하려는 그의 철학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러한 옳은 시각과 철학을 현실 정치와 국제 관계 속에 접목하고 현실화 하는 대응 수순과 방법론이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테헤란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 들어가 인질을 잡고 미국이란 수퍼 파워와 맞대결하는 형태를 연출하여 그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든, 그들은 그로 인해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을 확실하게 초래했고 그 대가는 가혹하고 잔인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란의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균형을 잡게 되는 시점에서 이란의 지성에 의해 반드시 비판 받을 대목입니다.
종교 지도자든 정치 지도자든 그들도 인간인 이상, 도덕적 순수성과 현실적 현명함을 동시에 갖추고 또한 구현하기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8년의 전쟁과 그 피해를 합리화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대가를 치른 결과, 이란이 결국 미국의 집요한 야욕에서 벗어나 안전과 평화를 구가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그 모든 피가 아무 의미도 없이 흘려진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같은 대상의 같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란의 문제가 무엇인가 라는 이 글의 화두는 이란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고, 북한에게 비유적으로 원용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오늘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 순결성과 이상적 이념만으로 모든 가용한 무기와 힘을 구사하는 악에 대항하여 승리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강한 힘을 지닌 악일수록 그것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악을 제압할 수 있는 현실적 힘과 전술 전략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신념은 선악의 전선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선이 명확해졌다고 전투나 전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와 패배가 선악의 판정이나 양자의 이상과 신념의 우월성만으로 결정된다면 좋겠지만, 현실 세계엔 그것을 판단하고 모두에게 승복하게 만들 수 있는 판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대개 그 판관의 자리는 우월한 힘의 논리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신념의 우월성은 분명 특정한 힘이며 더 큰 힘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선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거짓이 참된 이상이나 올바른 신념보다 훨씬 가공할 힘으로 나타나며, 그것들 또한 결집된 힘의 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 친일반민족 세력의 강고한 생명력을 고려할 때, 군부 쿠데타 세력이나 부패한 정치 모리배들을 분석할 때, 그리고 교묘한 조작과 이론으로 민중을 오도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매춘 행위를 볼 때 보다 쉽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설마 후세인 손에 생화학 무기까지 쥐여주며 이란을 공격하게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면, 호메이니는 애초에 미국을 그레이트 사탄이라고 부르지 말았어야 합니다. 미국이 도덕적 권위의 말 펀치 한 방에 나가 떨어져 포기할 상대로 보았다면 호메이니는 세상물정을 몰라 수 백만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호메이니는 자신의 종교적 및 도덕적 우월성에 과도한 자만심을 가지고 지나치게 서두르는 우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로선 내부의 힘을 결집한다고 한 행동이겠지만, 현실적으론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때이른 공격을 자초한 행동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제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후대들이 다시 석유자원과 핵 무기 개발을 무기 삼아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결하겠다는 것은 또 다시 그 서두름과 어리석음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이란이나 북한 또는 우리도 나름대로는 손자병법의 36계가 무엇인지, 또는 적의 피로함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뼈 속에 각인된 이해와 인식이 아니라면 그러한 설익은 상식과 서투른 적용은 그 보다 우월한 악의 교활함과 힘과 부딪힐 때, 무기력한 패배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평면적 비교가 아니라 근원적 차원에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 후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선악을 떠나 우리도 주변국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절대 서두르지 말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전술과 전략부터 모색해야 합니다. 어떤 힘부터 기르고 어떤 약점부터 보강해야 하는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성과 올바른 신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오만이거나 자기 기만입니다.
오만한 자세와 마음에선 냉정한 전술과 전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오만한 신념은 상대를 무시하고 지도자를 서두르게 만듭니다. 쓸데없이 자극하며 중구난방으로 날뜁니다. 강한 악을 상대하여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진정한 힘은, 냉정하게 상대의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겨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겸허한 자세로 키워 나가는 와신상담과 결의에 찬 노력에 의해 배양될 수 있습니다. 마음만 앞서 서둘러 나가는 것은 궁극적 패배를 부르는 영웅주의이며 결과적 배신인 것입니다.
우리 대통령은 그러한 겸허함과 결의 그리고 냉정함을 겸비한 지도자라고 믿습니다. 그가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고 넘어지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제시하는 길을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맞선 적들이 결집하고 대항하는 전선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며, 이 전투가 우리 마음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크고 작은 난관과 실패를 통해 분열하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겸허해지고 더욱 강해져야 합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애당초 개혁이니 혁명이니 떠들지도 말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어쨌든,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 난 해 11월 4일, 호메이니의 선동적 반미 발언에 자극된 일단의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 소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70명 가까운 인질을 잡고, 그들은 샤를 인도하고 1953년 닥터 모사데그를 축출한 CIA 주도(실제로는 영국 MI6 주도지만)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카터는 이란 석유 금수와 이란 해외 자산 동결 등으로 대응하며, 비밀 구출 작전을 두 차례 실시하나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납니다. 결국 중간에 풀려난 여자나 흑인 또는 환자를 제외한 50여명은 444일간 인질 생활을 하게 됩니다. 1980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초조해진 카터의 모든 인질 석방 막후 협상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 날에야 비로소 석방됩니다.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카터는 진실된 침례교도이고 훌륭한 목수이며 평화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재선 실패에 가장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이란이 아니라 미국 연준 즉 FRB의 살인적 금리였을 것입니다.. 아마 20%를 넘었을 것입니다. 지금 금리와 비교하거나 당시 유럽 금리와 비교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통령 잡는 금리’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정황을 미루어보면, 카터는 대체적으로 일루미나티에 충실하게 복속하지 않은 드문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카터의 재선을 막아야 할 그들의 절박한 사유였을 것입니다.)
헐리우드 배우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사람이 이제 둘이 되었지만, 당시 레이건은 소위 미국 주류 정치인의 반열에 올라 있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태생 미스터 유니버스 출신이 혹시 레이건처럼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그 역시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자본권력이 간택하여 워싱톤 무대에 데뷔시키는 것이지, 케네디 가문의 후광이나 터미네이터의 위력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레이건 팀에게 만일 80년 11월 대선 바로 전 달에 이란 인질이 석방되어 성조기 물결 속에 미국으로 돌아 온다면, 그것은 재임 중 대통령 즉 카터에게 크게 유리한 상황이 될 것은 불 보듯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일, 즉 10월의 경악(October Surprise)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야당을 위해서는 경제가 나쁜 것이 좋다는 식의 발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선 당선을 위해서는 자국민이 인질 상태에서 풀려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이 역적(미국의)같은 발상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잠재적 서프라이즈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마지막 작업은 아버지 부시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11월 대선을 불과 얼마 앞두고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그리고 비밀 경호원이 24시간 경호 하는 상황에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 부시는 몇 명의 인간들과 워싱톤 인근 공군 기지에서 CIA 특별기를 타고 어디론가 잠적합니다. 부시는 나중에 이 사라진 십여 시간의 스케쥴에 대해 전혀 납득할 수 있거나 증명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시간이 파리에서 이란 혁명위원회 최고위층 대리인과 약 2시간 정도의 비밀 회동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만나 무엇을 했느냐?
카터의 재선을 돕기 위해, 인질 조기 석방을 호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카터 라인에서 그 동안 문제 타결을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란에도 누가 되든 신임 대통령과 협상을 매듭짓는 것이 낫다는 파와, 카터가 결정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애타는 순간에 협상을 매듭짓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는 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카터를 버리고 레이건을 택했습니다. 미국을 그레이트 사탄이라고 부르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레이건이나 낸시의 팬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부시의 이런 반역 행위는 그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방장관이 된 럼스펠트와 그 보좌관 딕 체이니가 후세인을 꼬드겨 이란을 침공하는 것, 그리고 안보보좌관 포인덱스터나 올리버 노스 같은 자들이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밝혀진 바처럼 이란에 무기를 공급하는 사건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악한 행위가 레이건이 디자인하고 지시한 것은 분명 아니라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시 레이건의 최측근들, 즉 캘리포니아 마피아라고 불리는 일군의 인재들이 부시나 럼스펠트 등과는 따로 놀았다는 정황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에드윈 미즈 법무?, 슐츠 국무 그리고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 같은 인물들이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마피아의 멤버들인데, 레이건만큼은 아니지만 이들도 워싱톤의 정치 동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순진한 인간들입니다. 지금 부시 주변엔 온통 석유 냄새 물씬 풍기는 자들로 가득하지만, 당시 레이건 주변에서 이들이 풍기는 냄새는 벡텔 같은 대기업 영업이나 관리 조직 냄새였지, 일루미나티 같은 음습한 자본권력의 냄새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레이건은 재임 1기 말엽부터 심각한 치매 증상을 보였고, 2기에 들어가서는 거의 감추기 힘든 알츠하이머 중증 환자였습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 청문회와 관련하여 참모들이 조작된 시나리오를 코치하면 실제로 자신이 그 시나리오처럼 행동했던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며, 연설 중에 옆에서 낸시가 고개를 숙이고 살짝 다음 말을 가르쳐 주어야 말을 이어 갈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지금 딕체이니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국 부통령이니 뭐니 하는 평을 받지만, 그것은 부시 시니어를 제외하고 평가할 때 맞는 이야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시 시니어는 대통령급 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8년 동안 사람들은 부시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크게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지 않고 움직이는 것 - 이것이 일루미나티의 가장 중요한 덕성이자 속성입니다. 부시 시니어는 레이건 시대와 자신의 임기를 더해 도합 12년 동안 실질적 대통령에 가까웠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루미나티 자체에 가장 근접하게 동화된 인간입니다. 지금 부통령을 하는 자가 그 시절 국방장관 보좌관을 했고, 그때 국방장관은 부통령이 된 옛날 자신의 보좌관 명령계통에 들어가서 다시 국방장관을 하고 있습니다. 유엔 대사로 나가있는 볼튼이나 세계 은행 총재로 나가있는 울포위츠 같은 자들도 모두 그 시절이나 그 이전부터 텍사스 크로프드 목장의 부시 왕조에 복무한 자들이며, 일루미나티 아젠다를 수행하는 일꾼들입니다.
현존하는 미국 권문세가 가운데, 케네디 가문을 누르는 집안이 부시 가문입니다. 그들에게 비록 케네디 형제 같은 외견상 화려한 전설은 없지만, 그 실질적 권력의 역사와 힘은 케네디가를 휠씬 능가합니다. 케네디가는 비극과 좌절의 배역이라면, 부시가는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챙기는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대통령 12년, 부통령 8년을 해먹고 있지만, 나타나지 않은 이력과 행적까지 살펴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조지 워커 부시의 할아버지 프레스콧 부시에 의해 일어난 부시 가문, 그리고 그들 부자 사이에 끼어 8년 동안 백악관에 주민등록을 가졌던 클린튼의 범죄와 일루미나티 유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요즘 쓰나미나 카트리나 구제를 위한 모금 행사에 그들이 세트로 천사 행각을 벌이는 것을 보면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Epitaph)가 정말 시대적 통찰력이라고 느껴집니다. 참고로 클린튼과 부시는 동격도 아니고 정치적 적수도 아닙니다. 아버지 부시가 조직의 2인자라면 클린튼은 그 밑의 소두목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당을 달리하지만, 그들이 일루미나티 조직의 충성도 순위를 다투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를 따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미국이 어떻게 이란을 조지려 하는지 아는 대로 말씀 드리고, 이란과북한의 함수관계에 대한 생각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래서야 언제 코카 콜라 이야기를 하고, 언제 댄브라운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글 맨 앞의 경구는 13세기 이란의 시인 사디가 한 말입니다. 세익스피어와 비견되는 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시인이고 구도자이며 교육자였던 사디의 시에 다음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미국 뉴욕 유엔 빌딩의 Hall of Nations에 銘刻 되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모두 형제이고 한 몸이라는 뜻이겠지요..한 사람 또는 한 나라가 아프면 모든 사람 또는 모든 나라가 아프다는 의미의 이 말은 유엔의 모토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 시를 걸어 놓은 나라와 그 시인의 나라를 잡아 먹으려 하는 나라가 동일하다는 아이러니를 극복한다면 말 입니다.
Of one Essence is the human race,
Thusly has Creation put the Base;
One Limb impacted is sufficient,
For all Others to feel the Mace.
첫댓글 인쇄로 뽑아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골피님이 힘좀 쓰셨네요
먹가님 글 기다리다가 제 목이 1센티미터는 빠졌을 겁니다.
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