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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秋毫)를 태산(泰山)에 겨눌 수 있다'를 읽고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글 '추호(秋毫)를 태산(泰山)에 겨눌 수 있다'라는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술자리나 야유회 등지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뜻을 같이하고 한솥밥을 먹는 가정이나 직장, 심지어는 회의석상에서 조차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는 일들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죠^^
對面共話(대면공화하되) 心隔千山(심격천산이니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 사이에는 천 개의 산이 놓여 있다’
공자(BC552~479)가 말했습니다.
和而不同 同而不和(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군자는 화합하나 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周而不比 比而不周(군자는 주이불비하고 소인은 비이부주이니라)
군자는 두루 사귀되 편을 가르지 않고, 소인은 편을 가르되 두루 사귀지 못한다.
공자 맹자시대가 지난 후, 1,000여년이 지난 중국에서 성리학이 발달했는데
이런 글귀를 읽었습니다.
同中有異, 異中有同(동중유이, 이중유동)
같은 가운데 다름도 있고 다른 가운데 같음도 있지만(同中有異, 異中有同), 같은 것만 보고 다르다는 점을 소홀히 하다가는 큰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경귀로 씌여진 말 같습니다.
사서오경의 인의예지와 삼강오륜의 유학(儒學)을 신유학(新儒學)으로 계승 발전시킨 성리학(=道學)의 단초가 된 중용(中庸)의 첫 구절입니다.
「天이 명한 것을 <性>이라 하고,
性을 거느려 나가는 것을 <道>라 하고,
道를 닦음을 <敎>라 일컫는다.
道라고 하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으면 道가 아니다.」
」
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천명지위성이요 솔성지위도요 수도지위교니라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도야자는 불가수유이야니 가리면 비도야라
중국에서는 宋代의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현(程顯), 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이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맹자(孟子)의 학맥을 이어왔습니다. 중국 유가(儒家)의 전통을 도학(道學)으로 계승 발전시켜 왔고, 이렇게 이어져 내려온 도학의 계통을 도통(道統)이라 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한훤당 선생이 중국의 성현에 비견하는 도통(道統)의 길을 걸으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위한 우주관과 인생관을 확립한 도학자(道學者)로 이름을 떨쳐 후학들이 문묘에 종사토록 임금님께 상소(館學請從祀文廟疏*註1)를 올렸습니다.
14세기에서 15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를 보면 갑자사화, 무오사화 등 정쟁(政爭)이 극에 달했던 그런 시대였나 봅니다, 극한으로 치닫던 훈구파(勳舊派)와 신진사림(新進士林)들과의 대치국면과정에서 조선은 임지왜란(1592-1598)도 겪었습니다. 전란을 겪은 사림(士林)들은 조선에서 존경받고 학덕 깊은 선비 다섯 분을 오현(五賢)으로 추존(推尊)했습니다. 그리고 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운동을 줄기차게 펴나갔습니다.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1454-1504,단종2년-연산군10년) 선생이 조선 5현(五賢)의 첫머리 선비 즉 조선 최고의 선비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신 때는 광해군 2년이던 1610년입니다.
문묘에 종사된 다섯분은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1450-1504,세종32년-연산군10년),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성종13년-중종14년),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성종22년-명종8년),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연산군7년-선조4년) 등으로 이분들을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18賢은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등 신라와 고려시대 4賢과 김굉필 등 위의 5賢 외에,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등 9현까지 모두 열네분이 조선시대의 선현들입니다
자! 이제, 조선 최고의 선비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남긴 몇 안 되는 글들 중에 ‘추로가병여태산부|秋毫可竝旅泰山賦'를 소개합니다. 한번 읽어 보시죠^^
추호(秋毫)란 가을 짐승의 털이란 말인데, 가을철이 되면 짐승들이 묵은 털을 벗고 새 털이 나기 때문에 가늘디가늘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추호를 태산에 겨눌 수 있다'
秋毫可竝旅泰山賦(추호가병여태산부)
아아 우뚝한 태산은 만 길이나 솟아서 높은데,
가느다란 추호는 겨우 형상이 있는 둥 마는 둥 이름뿐이네,
큰 엄청난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멀리 동떨어졌네,
어찌하여 이백의 호탕한 생각은 추호와 태산을 같이 볼 수 있다는 하였는가
나는 알겠노라, 천하의 물질은 원리가 있고 갈래가 있다.
원리는 만 가지를 뭉쳐서 하나가 되지만 갈래는 만가지가 달라도 문란하지 아니한다.
저 따지기 좋아하는 조그마한 지혜들은 다만 물건만 보고 원리는 빠뜨려 버린다
한치 한푼에서 차이점을 따지고, 너니 나니 하는 사이에서 얕고 깊음을 계교한다.
복잡스럽게 짦고 긴 것을 비교하여 다투어서 시끄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다행히 이 사람(李太白)이 홀로 깨달아서 한 냥 한 푼을 따지는 것을 비웃었네
손바닥을 보듯 한마디로 지적하여, 모든 사람의 어리석음을 깨트리고 밝은 빛을 드러냈네
하나에서 둘이 생긴 후에 물질은 만가지로 다르게 되었도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마침내는 환하게 근본이 같은 줄을 알 것이다.
추호가 아무리 작지만은 태극의 이치를 갖추었으며,
태산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역시 하늘이 만든 것.
그렇다면 물질로서만 볼 때에는 하늘과 땅도 하나의 물질이요,
물질의 원리로 볼 때에는 모든 물질이 다 무극(無極)이 도다.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 쫓아 천차만별로 현혹하는고,
혹은 대롱속으로 하늘을 측량하며,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것이 크니 저것이 작으니 하고 다투며, 그르니 옳으니 하며 시끄럽게 한다.
만일 이러한 기발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누가 우리들에게 알려주랴.
아아 훌륭하여라! 옥을 자르고 갈고 쪼고 문지름이도다.
비록 물질이 가지런하지 않지마는 그것은 바로 물질의 실정이 그러함이다.
혹은 갑절, 다섯 갑절, 혹은 열 갑절, 백 갑절 차이가 난다.
질서가 있고 분명하여 혼란되지 않는다.
자줏빛이 어찌 붉은 빛을 어지럽히겠으며, 피가 곡식과 혼동될 수 없는 법
만일 이것을 혼동하여 마찬가지라 한다면, 질서를 어지럽히며 도덕을 어지럽힐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출발점을 찾아보지 아니하며 그 끝을 묻지도 않았으니,
말만 크고 타당성이 없어서 그림자를 잡아매고 바람을 붙잡는 것과 같이 되었다.
噫噫라 崒乎泰山은 矗萬仞兮觴嶸이요
희희라 줄호태산은 촉만인혜쟁영이요
纖乎秋毫는 僅有倫而可名이라
섬호추호는 근유윤이가명이라
玆小大之不同은 宵與壤其逈隔이라
자소대지부동은 소여양기형격이라
夫何白也之浩蕩은 吐可竝之奇說고
부하백야지호탕은 토가병지기설고
吾知夫天下之物이 有理有分이라
오지부천하지물이 유리유분이라
理會萬而爲一이요 分萬殊兮不紊이라
이회만이위일이요 분만수혜불문이라
彼間間之小智는 徒見物而遺理라
피간간지소지는 도견물이유리라
析同異於錙銖하고 計淺深於汝爾라
석동이어치수하고 계천심어여이라
紛較短而量長하여 競呶呶而不止라
분교단이양장하여 경노노이부지라
幸斯人之獨詣에 嗤算兩而算星이라
행사인지독예에 치산양이산성이라
制一言而指掌하여 爍群昏以就明이라
제일언이지장하여 삭군혼이취명이라
日以一生兩之後에 物有萬其不同이라
일이일생양지후에 물유만기부동이라
然이나 推究其所以에 卒爛漫而同宗이라
연이나 추구기소이에 졸란만이동종이라
秋豪雖小나 具太極也오
추호수소나 구태극야오
泰山雖大나 天所作也라
태산수대나 천소작야라
然則自形而下兮로는 天地亦爲一物이요
연즉자형이하혜로는 천지역위일물이요
自形而下兮로는 物物皆爲無極也라
자형이하혜로는 물물개위무극야라
何世人은 遺本而遂末하여 眩千差與萬別고
하세인은 유본이수말하여 현천차여만별고
或用管而窺天하고 或用錐而指地라
혹용관이슈천하고 혹용추이지지라
爭此大而彼小하여 閙非非而是是라
쟁차대이피소하여 뇨비비이시시라
倘奇說之不出이면 孰開示夫我人고
당기설지불출이면 숙개시부아인고
猗歟那歟여 超群絶倫이라
의여나여여 초군절륜리라
雖然이나 物之不齊는 物之實也라
수연이나 물지물제는 물지실야라
或相倍蓰하고 或相什百이라
혹상배사하고 혹상집백이라
井井分明에 不混不雜이라
정정분명에 불혼불잡이라
紫豈可以亂朱요 稗不可以亂穀이라
자기가이란주요 패불가이난곡이라
苟混同以一之면 恐亂倫而亂俗이라
구혼동이일지면 공란윤이난속이라
惜乎라 不求其端하고 不訊其末하여
석호라 불구기단하고 불신기말하여
言有大而過當하여 如繫影而捉風이라
언유대이과당하여 여계영이착풍이라
발췌 : 국역 景賢綠(全) |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刊
한훤당은 「경현록(景賢錄)」이란 유집을 남겼지만, 선생의 글들은 갑자사화,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후환을 두려워한 가족들에 의해 불태워져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은 글들이 불과 17개 작품에 불과합니다.
지금의 학자들은 朝鮮朝에서 왜 한훤당선생이 중국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을 마스터한 ‘道學의 祖宗’으로 다시말해 조선 선비중의 최고의 선비로 부르게 되었는지 그것을 명쾌하게 밝혀내고 싶었으나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다른 조선의 선비들에 비해 그 연구 실적이 매우 초라했습니다.
최근 한훤당기념사업회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어느 학자는 한훤당이 왜 도학자인지를 실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선생의 유문 '추호가병여태산부|秋毫可竝旅泰山賦'를 제시했습니다.
선생의 부(賦)는 북송대(北宋代)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부터 시작된 송대의 성리학을 이태백(李太白)의 시와 연관시켜 지은 부(賦)로, 한훤당이 宋代 新儒學者들의 철학적인 논리를 계승하여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원리에 의해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은 물론이고 인류가 함께 지향해 나가야할 평화스러운 천하 즉 「大同社會*註2」 건설을 모색했던 道學者임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해석을 덧붙입니다.
■註1 《경현록 (天) 上 館學請從祀文廟疏》
『신들이 생각하옵건대, 나라는 道로 인하여 높아지고, 道는 학문으로 인하여 높아지는 것이니, 道學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진정한 학자가 나타나고 나타나지 아니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국가를 다스리면서 道에 근본을 두지 않느다든지, 道를 존중히 여기면서도 학문을 근본으로 하지 않으며, 학문을 하면서도, 진유(眞儒)를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또한 구차스러울 뿐입니다........
대개 道學이 중요함은 이와 같이 지극한 것인데 그것을 밝히는 것은 眞儒입니다. 眞儒로서 현달(顯達)하여 윗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이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요, 진정한 학자로서 현달하지 못하고 낮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는 공자(孔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가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 있어 임금이 됐기 때문에 직접 이를 실현함으로써 백성을 교화시키고, 그 정치가 시행되어서 천하가 태평하였으며, 아래에서는 스승이 된 까닭으로 전성(前聖)을 계승하여 후학을 깨우쳤으니, 그 가르침이 영원히 전해져서 만세토록 밝아졌습니다.
천하를 잘 다스린 사람은 덕택이 한 시대에 퍼졌고, 만세에 도를 밝힌 사람은 영원한 세대에까지 깨우쳐 인도(引導)하였으니 이들은 다 道로서 된 것이므로 영원히 우러러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에 퍼진 덕택은 그것을 입힌 사람도 그 보답이 한 시대에 국한되지마는, 만세에 道를 밝힌 사람은 그 보답이 만세에까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아, 이로써 학교에서 사묘(祠廟)를 세워 孔子에게 제향(祭享)을 드리게 되었고, 공자의 칠십 제자와 역대 여러 현인(賢人)으로 무릇 유도(儒道)에 공로가 있는 이를 종사(從祀)하게 되었으니 그 이치가 마땅합니다.
신 등이 살피건대 道學의 전함은 孟子이후에는 적막하게도 천여 년 동안이나 계승하는 사람이 없었다가, 宋나라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비로소 다시 그 단서를 열어 놓았고, 그것을 넓게 밝힌 것은 정현(程顯)과 정이(程頤)였으며, 그것을 집대성한 사람은 주희(朱熹 1130-1200)이니 진정하 유학자의 융성함이 이 때와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육경(六經)의 道가 이때에 와서 天地와 같이 높아졌고, 사서(四書)의 취지가 이때에 와서 일월(日月)과 같이 밝아졌으니, 대개 이때에 이르러 유도(儒道)의 발전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에는...........한사람도 유도(儒道)를 제창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동방의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행하게도 황천(皇天)이 돌보셔서 이에 유종(儒宗)을 탄생시켰으니,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말에 자질이 뛰어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을 지니고 性理學을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었으며, 깊이 스스로 깨달음이 있어 강론이 뛰어났고, 심오한 뜻을 남몰래 깨달아 은연중 옛 학자들과 합치되었으며, 충효(忠孝)의 큰 절조(節操)는 명성이 당시를 진동시켰습니다. 상제(喪制)를 마련하고 가묘(家廟)를 설립하는 것을 모두가례(家禮)에 의거하였고, 모든 문화적인 제도는 모두 그가 고쳐서 제정한 것이었으며,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실시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고, 도학(道學)을 밝혀 후학을 열어주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학문은 주돈이(周敦頤)나 정이(程頤)보다 등급이 있음이 사실이나 공로로 말하면 그들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道로써 자임하며 은연히 정몽주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은 바로 김굉필(金宏弼)입니다. 그는 기국(器局)이 단정하고 성행(性行)이 깨끗하며, 성인(聖人)의 학문에 뜻을 철저히 가져 힘을 기울였으며, 몸을 가짐은 위의(威儀)가 있고, 일을 처리함은 법도가 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는 어디든지 경(敬)으로써 하며,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간절히 타이름은 지성(至誠)에서 우러났으며,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먼저 《小學》과 《대학》으로 가르치어, 규모가 정함이 있고 절목(節目)이 차례가 있으며, 인도하여 가르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어지러운 때를 만나 환란(患亂)을 겼어도 이에 대처하기를 태연히 하였으며, 독실함과 공경함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아니하여 죽은 다음에야 그만 두었습니다.
그 문하에서 배운 사람들은 이 도학의 꼬투리를 듣게 되어 그를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에 견주었으며, 지금의 학자도 그 덕행(德行)을 문예(文藝)보다 귀하게 여기고, 경술(經術)을 존중하며,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좋아하며 싫어하는 대상을 분명히 판단하시며,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아시고 기강(紀綱)을 바로잡고 풍화(風化)를 선양(宣揚)하고자 하시는 것도 그 실은 김굉필(金宏弼)의 힘에 기인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일월과 같은 밝음을 넓히고 건강(乾剛)한 과단(果斷)으로 결정하시어 덕음(德音)을 넓게 나타태시고, 정몽주와 김굉필로 하여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특별히 윤허(允許)하심으로써 동방(동방) 만세(萬世)에 道學의 중요함을 밝혀 주십시오, 그렇게 하여 이 백성에게 존숭(尊崇)할 바가 있음을 알게 하시면 유도(儒道)를 위하여 다행이겠습니다.』
■註2 「大同社會」 : 《禮記》 第九 <禮運>
「대도(大道=仁)가 행해지면 천하는 공익을 위하게 되나니,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신의를 강구하고 화목을 닦아나가게 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섬기지 아니하며, 자신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노인들에게는 안정된 노후를 보장하며, 장년들에게는 모두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하며, 어린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며, 불상한 과부와 고아 및 병든 사람은 모두 보호받도록 하며, 남자에게는 직분이 있게 하며, 여자는 시집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재물이 땅에 내버려지는 것이 아쉽지만 반드시 자신의 창고에 보관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원망하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 그렇게 여기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특한 권모술수는 저절로 없어져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며, 도적들과 난적들이 없어질 것이므로, 대문을 잠그지 아니하고 생활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회의 환경을 대동(大同)이라 한다.[출처:홍우흠(洪瑀欽 영남대 명예교수)의 한훤당의 道學에 대한 試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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