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성의 눈으로 공부하는 성경모임
내용 : 누가복음 4장
일시 : 20년 6월 10일
참석자: 정은선, 김양미, 최미리, 한문순, 김지은, 이인미, 유선희, 김현경, 정미형 (총 9명)
올해 첫모임을 줌으로 6월에 했다. 누가복음 4장을 읽었다. 한 장 전체를 읽는데 집중하기 어려워 끊어서 읽자는 의견도 있었다.
예수님이 시험 받는다
본문 구절 중 ‘예수는 성령을 받고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았다’. 이 구절이 새롭게 생각된다는 모람이 있었다. 우리는 시험에 빠지기도 하는데 예수님이 시험을 받는다는게 무슨 의미일까? 왜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안좋게 생각될 수 있는 시험을 당하는지, 시험의 필요가 질문됐다. 그러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분이 아닌데 그럼 시험은 자기가 느끼는 건데 평상시에는 나에게 왜 이런 시험이 오나 하며 통과할 생각하지 않고 ‘시험이 없었으면’ 한단다. 예수님도 시험당하시는데 우리가 시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건 생각해볼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문제제기된다.
시험의 의미
예수님이 광야로 가니까 시험을 당했다. 일반적으로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있는 곳으로 여기고 마귀와 하나님은 쫓는 것이 다르고, 마귀는 하나님의 길과 반대되는 세력으로 여겨진다. 사람에게 빵, 권세, 특출난 능력을 두고 마귀는 자기를 섬기게 하는데 이 세 가지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욕구로 갈등하게 될 때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벗어나게 살 때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시험당할 때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신건데 우리가 살면서 시험당한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이에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가령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인데 실제적으로 관계하는 사람, 가족들이 당신은 욕심많다, 자기 중심적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시험거리야’ 생각하게 된다. 거리가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 ‘상대방이 왜 나에게 저런 얘길하지?’생각하게 되지만 가까운 사람일 경우 인정이 안되고 마음에서 튕겨져 나와버린다. 며칠 지나면 그 얘기들이 접수되고, 그렇게까지 억울하지도 않은데 왜 자꾸 사람들의 얘기가 안받아들여질까, 성령이 가득했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까?
시험의 필요
한 모람은 가족과 얘기나누고 맺힌 게 풀리지 않은 어머니를 보며 든 느낌이 문선생님께 들었던 얘기인데 “사람이 너무 약해”라는 거였다. 자기 상처가 많아 다른 이를 원망하면 내 상처에 잡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몰라 갈등한다. ‘내 상처에 대해 니가 왜 몰라’ 이것이 갈등의 시작이라면 내가 나를 제대로 보면 자신의 두려움과 상처에서만 보는게 아니니 ‘다른 사람은 이랬겠다’ 하면서 성장해 나갈 거다. 이런 과정을 우리가 알트루사에 와서 겪어나가는데 우리가 아무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거나, 어렵지 않고 갈등할 수 있을까? 이런 면을 본다면 갈등이 다른 말로 시험이 꼭 필요한게 아닌가. 사람의 성장이 이런 과정이라 본다는 얘기다.
시험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시험을 당할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하나? 시험이 끝나고나면 ‘내가 이래서 시험을 당했나’ 싶은데 시험당할 때는 많이 힘들어서 원망이 많단다.
그러자 재차 내 상처에 파묻혀 상대가 못보일 때는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하나 라는 질문이 온다. ‘나는 풀고 싶어서 접근하는데 상대는 말하기 싫으면 하나님하고 있으면 되나, 이웃과는 어떻게 풀렸는지 알게 되지?’ 한 모람은 자신의 경우 배우자와 이러했는데 매우 오랜시간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자신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그러니 내 관점에서 상대에게 함부로 내리는 판단을 하지 않으며, 상대를 제대로 보는게 아닐테니, 관심가지고, 이해하려 지켜보려는 과정을 가졌다. 그 과정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둘째 모람은 말했다. 왜 저런 표현을 하지? 나는 이렇게 표현했는데 왜 저렇게 받아들여? 왜 그럴까? 이해가 안되요.” 하지만 자신이 이런 모습을 상대도 봐주니 해결하며 지낸다. 자기 중심일 때 스스로에게 못났다 자기평가하지 않고 내가 그럴수 있다 인정하며 지내려고 한다.
시험 통과
조지 플로이드 얘기가 나왔다. 최근에 백인경찰이 흑인이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려는 걸 총을 꺼낸다고 보았다. 백인과 흑인이 워낙 갈등이 심하니까 백인이 흑인을 무서워한다. 폭동을 일으킬 수 있고, 폭력을 쓸 수 있고, 나를 어떻게 해버릴 수 있다는 오해가 있다. 그 오해로 목을 눌러 사고가 났다. 사람이 너나 할 것없이 상처를 잘 받을 수 있는데 상처받아서 서운해하고 힘들어하고 또는 공격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상대의 상처받은 마음을 이해못하면 ‘아! 이거 되게 악하구나’ 쉽게 판단한다. 내가 공격당한다 생각되면, 두려워져서 방어적으로 나오니까 더 심해진다. ‘약해서’를 ‘악하다’고 규정하는 건 너무 다른 해석이다. 그런데 내가 시험에 들어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는, 내가 어떻게 될 거 같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는 상대의 상처, 약한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니까 자기 두려움에 반응하는 행동을 해서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 내가 두려움없이 사태를 볼려고 해야 있는 그대로 보이겠다. 상대의 상처,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이면 상대에 대한 태도가 저절로 달라지게 된다. 앞의 두 모람(배우자를 오랜시간 지켜보아 이해하고, 배우자와 서로 조금씩은 이해하게 된)은 상처를 벗어나 본 경험을 얘길 한 거 같고, 그랬을 때 상대가 거기에 대해 다른 반응을 한 거라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시험을 통과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끝까지 상대가 잘못이야 난 잘못한거 없어 이렇게 되는게 아니었다.
성령의 도우심
예수님이 시험에 성령(Holy Sprit)에 이끌려 성경으로 답했다. 성령을 받았다는 이미지가 강력하게 사역하는 모습과 연관되게 생각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는 세속적인 힘과 성령의 능력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음이 더해졌다. 세속적인 힘은 세상에 제대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성경대로) 사는 모습을 통해 안볼 수 없고, 인정 안할 수 없는 힘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서로간 관계에서 성령,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연결되는 존재로의 인간과 ‘가깝다’ 라 표현할 수 있는 ‘성령’에 대해 정리했다.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다른 위격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우리가 서로 하나라고 표현되기도하고, 서로가 서로를 다안다고 할 만큼 가깝다. 여기에 대한 인간경험이 없으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성령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없겠다는 우리의 논의를 어떻게 해봐야할지 어렵게 생각됐는데 성령받음의 경험과 연결하여 얘기를 들었다. 성령의 강력한 이미지와달리 실제체험은 자신의 실제모습을 낱낱이 알게되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모습대로 거칠게 살지않도록 조절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얘기로 하고나니 말의 생소함, 이론정리의 어려움도 해소했다.
이 모든 걸 주어진 성경공부시간에 했다! 서로 질문하고, 말하고, 들어주는 가운데 상대방을 더 이해하게 되고, 우리 사이에 성령이 역사한다고 생각됐다. 질문생각하느랴 틈이 생길 때도 있지만 그 틈도 하나의 진동처럼 우리에겐 있었다. 섬세한 성경공부시간이라고 꼭 만나야 한다고 개학을 미뤘던 것이 후회되고 아까웠다.
첫댓글 좋은 시간이었군요.
긴 기록 여러 번 수정하고 정리해줘서 고마워요~
성경공부방을 좋아하는 게 제 글보다 조금 더 중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