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 명당 박응주(반남박씨 시조) 묘소 위치 :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 공에 대한 정확한 생몰 기록은 없으나 대략 1200년대(高麗 고종)로 추정되며, 호장이라는 벼슬은 마을을다스리던 행정관을 말한다. 나주지방은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을 끼고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그 사이로 구릉들이 물결치듯 일어섰다 가라앉아 예로부터 명당들이 많던 곳이다. 조선8대명당 가운데 하나인 벌명당도 이곳에 있다. 호장 박응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朴宜는 풍수선생을 찾아가 부친 묘자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풍수 역시 평소 박응주로부터 은덕을 입어온 터라 좋은 자리를 잡아주기 위해 영산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미산에 올라 산세를 살피던 중, 반남면 흥덕리 지금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천기를 누설한데서 오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안절부절 하다가 정혈처에서 10m 위쪽에다 자리를 잡아주고 돌아갔다. 상주 박의는 풍수의 태도가 이상하여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하인을 시켜 곡절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지관이 집에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오늘 박호장의 묘자리를 보다 기막힌 명당을 찾았으나 천기를 누설하면 화를 입을까 두려워 혈처에서 위쪽으로 묘를 쓰게 하였소”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박의에게일러주었다. 박의는 그제야 지관의 참 사정을 알았지만 아비를 위해 지관이 알려준 곳보다 10m 아래 정혈처를 파게 하였다. 뒤늦게 현장에 참여한 지관이 깜짝 놀라 자신이 일러준 대로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자리는 아껴두고 더 양지바른 이곳에 쓰려고 한다.”고 둘러대자 풍수는 하는 수 없다고 하면서 한 가지청을 꼭 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곳에 묘를 쓰되 내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땅을 파시오”
그러나 일꾼들이 풍수의 말을 무시하고 땅을 파던 중 새만한 큰 벌들이 튀어나와 집에 가던 지관에게 달려들어 쏘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런 사연으로 호장공의 묘소는 벌 명당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후손들은 풍수가 벌에 쏘여 죽은 고개에 蜂峴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풍수의 넋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潘南朴氏 홈페이지http://www.bannampark.org/
호장공의 묘소는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하였는데, 깨끗하게 정돈된 묘역을 보면 반남인들의 이곳에 대한 지극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조 묘가 그렇듯 이곳도 풍수적 환경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묘소까지 도달하는 용맥이 지나치게 넓게 퍼졌으며, 생동감이 없다. 우측 봉현에서 부는 바람은 정확하게 묘소를 위협하고 있으며, 곳곳에 박힌 암석은 땅속의 상태를 짐작케 한다.
한편 백호는 잘 감아준 듯하나, 청룡은 미덥지 않아 수구가 길게 뚫려있다. 이점이 불편하였던지 청룡의 끝자락에 저수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으나 마른 나무에 물주기일 뿐이니, 이곳도 기존의 여느 조선8대명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 박소(1493-1534), 시조 박응주의 10代孫 야천墓의 전설 야천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합천으로 내려 간지 5년 만에 돌아가셨다. 선생은 생전에 경북성주에 사는 眞操堂 李光(1485-1551)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다. 야천선생은 임종직전 부인 남양홍씨에게 말하기를 “성주 이진사댁에 나의 죽음을 알리고 묘 자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였다. 소식을 접한 이진사는 미투리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도착하니 야천께서는 이미 운명한 다음이었다. 그 즉시 뒷산에 올라 살피던 중 어느 곳에 이르자 큰소리로 야천선생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야천이 어질면서도 장수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해 좋은 당을 구득하였다”하고는 내려와 영전에서 통곡을 하였다. 이진사는 홍씨부인과 상의하여 장사는 六月葬(6개월 후 장사)으로 날을 정하고 말하기를 “이 땅은 후손에서 고관대작이 이어지는 터이다”하고 예언하였다.
한편 야천선생은 가난하여 외가(파평윤씨)의 도움으로 가사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는데, 이때 외가에 초상이나자 야천선생의 묘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홍씨부인이 대답이 없자 “너희들은 이진사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겠지만 나는 부탁도 못하니 양보하라”고 강력히 압박하였다. 홍씨부인이 이 사실을 이진사에게 전하니 이진사 말하기를 “부인의 딱한 사정은 이해하나 그러한 묘 터는 다시는 구할 수 없습니다.”하며 묘책을 일러주었다. 묘책은 외가댁에 일단 그 자리를 양보해 주고 장사 전날 밤 광중에 물을 갖다 부으라는 것이다. 이진사의 묘책대로 하자 윤씨들은 장사 날 아침에 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이진사도 별수 없구나” 하면서 운구행렬을 돌렸다고 한다. 그 후 그 터에 무사히 야천의 묘를 쓴 홍씨부인은 이진사가 經書 강의 차 한양으로 가게 되자 다섯 아들을 데리고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홍씨부인은 자식들을 유조인, 유조순, 성제원, 이중호 등에게 수학시켰고 오형제가 모두 급제하여 가문에 큰 대도가 열렸으며, 榮華가 이어졌다. 潘南朴氏 홈페이지http://www.bannampark.org/
묘소 입구에서 바라본 주산의 형태는 매우 역동적인 모습이다. 특히 주산에서부터 묘소까지 3-4차례의 기복을 거치고 있는데, 목표지점에 이르러 불현듯 잰걸음으로 조절하는 모습이다. 마치 느릿느릿 걷다가 귀한 것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니, 이를 고서에서는 산세가 빠르다고 표현하였다.
山勢速卽速發, 緩卽興遲 (산세가 빠른즉 속발이요, 느리면 흥함이 더디다)
대체로 주산에서 혈처까지의 기복변화는 1~2차례로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곳처럼 3~4차례 반복되는 곳은 흔치 않은 현상인데, 짧게 밀착되는 기복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來龍의 힘이 강하고 역량이 큼을 의미한다. 이는 저장할 기맥이 많기 때문에 길게 줄을 서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上砂送多其地大 下砂收密其地久 (위에서 많은 산을 보내면 대지가 되는 것이며, 아래에서 긴밀하게 거두어 주면 그 땅이 오래 갈 것이다)
야천 묘소의 바로 위에는 고령박씨 묘소가 있으나, 어떠한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으로는 두 묘소 중 어느 곳이 정좌인지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나하나 풀어가면 서 점검해 보겠다.
이곳에서는 우선 전순이 어디로 진행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전순은 주룡의 진행을 마무리 하면서 좌향의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선뜻 B를 전순이라 하기 쉽다.
그러나 B는 위에서 보내 주는 기맥의 역량에 비해 넓게 흩어진 형상을 하고 있어 뚜렷한 下合을 이루지 못하였다. 반면에 A는 짧지만 통통하고 매끈한 상태이니 A가 전순이 된다. 즉 전순의 흐름으로 보면 야천 묘소는 좌선룡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고령박씨의 위에서는 작은 현무정을 지었는데, 우측가지가 길고 좌측가지는 짧은 상태이니 고령박씨는 우선룡으로 맥이 들어오는 상태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야천묘소의 산꼬리(전순)는 좌선룡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서인데, 기맥이 차분하게 마무리를 하려면 반드시 입수룡과 전순의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
즉 이곳처럼 입수까지 도달이 우선룡이라면 당판을 만들고 남은 전순도 우선룡으로 끝맺음을 해야 한다. 만약 우선룡으로 왔는데 좌선룡으로 끝맺음을 한다면 그것은 계속 진행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에 혈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령박씨 묘소는 아직 기맥이 최종적으로 머문 곳이 아니라는 뜻이며, 좌선룡으로 또 한 번의 입수처를 형성해야만 전순과의 향배가 일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아니면 고령박씨 묘를 쓰면서 훼손된 것인지 현 상태에서는 야천 묘소 위에서 좌선룡의 입수처를 확인할 수는 없다.
아무튼 이와 같은 방법을 고서에서는 전순증혈이라 하는데, 이러한 까닭에 이곳의 정좌는 고령박씨가 아니라 야천 묘소가 되며, 좌향도 B를 향하지 않고 A를 기준한 것이다. 만약 B가 전순이었으면 야천 묘소의 좌향은 현재의 亥坐가 아닌 乾坐가 되었어야 한다. 당시의 풍수는 이렇듯 미세한 좌향선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결국 그림 B는 전순이 좌선룡으로 회전하자 이를 받쳐주는 역할(요도)인데, 이와 흡사한 경우를 남원 황균비 묘소에서 경험한바 있다.
더욱 절묘한 것은 나지막한 백호C가 전순을 휘감아 주면서 脈遇水止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만약 이 백호가 없었다면 기맥은 속도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으며 길게 늘어지고 말았을 것이니, 이 모두가 한 치의 오차 없는 물리적 현상이다.
백호C와 야천 묘의 가운데는 계곡이 형성되었는데, 그곳의 형태가 일반적인 골짜기처럼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매끈하게 형성되었다. 계곡의 형태를 보고 능선의 상태를 짐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음양의 조화라 하였다. 한편 야천 묘의 좌측에서 시작된 가느다란 능선은 묘 앞을 크게 휘돌아 안산을 이루었는데, 우측에서 발원한 물을 명당 가득히 채우고는 다시 하명을 기다리듯 읍하는 형태가 되었으니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형상이다.
외산들은 겹겹이 물의 흐름을 단속하고 멀리 문필봉은 친절하게 조응하니, 오로지 하나의 혈을 위해 모든 산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모습은 일찍이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若攬而有也 (마치 끌어 당겨서 있는 것과 같다)
이곳이야 말로 반남인의 흥성을 이끈 吉地가 아닐 수 없는데, 문중마다 이러한 陰地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최소한 백년은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뉘라서 풍수를 부정하겠는가... 반남박씨는 조선조에 문과급제자 215명과 정승 7명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박소의 후손에서만 127명의 문과급제와 5명의 정승이 나왔으며, 宣祖妃 의인왕후와 4명의 부마를 배출하여 명문가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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