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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인류의 문명은 찬란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요. 이 여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가 닿는 곳은 강물이 흐르고 그가 이르지 못하는 곳은 모래 바람 뿐입니다. 인간은 오르지 못하는 아주 높은 곳, 그는 빗방울 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도시를 지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지상의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었습니다. 지구의 모든 연약한 운명들이 물과 함께 살아갑니다. (인도, 간디 동상),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매년 3월이면 이곳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곡물 가루를 준비합니다. 서로에게 곡물가루를 뿌려주는 거대한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시기, 자신의 소원도 중요하지만 혹독한 계절을 견뎌낸 모두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신이 굽어보는 인간은 한없이 작습니다. 그들은 그저 목마른 존재들입니다. 인도 홀리 축제의 마지막은 물로 완성됩니다. (호스로 물을 뿌림), 누구나 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모르는 사람도 하나가 됩니다. 비와 바람을 염원한 인도인들, 겨울 내내 건조했던 이곳에도 조만간 몬순이 불어올 것입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지만 땅 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어디든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 물은 끝없는 고통입니다.
텐 세르게이/카자흐스탄 고려인: 제 이름은 텐 세르게이입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시던 제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은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아랄 해/Aral Sea),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쌀을 재배했습니다. 아랄 해에서 고기도 많이 잡았습니다. 고려인들 중에는 선원들도 많았습니다. 아랄 해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호수입니다. 단지 크기가 커서 바다라고 불리는 것 뿐입니다. 아랄스크(Aralsk)-아랄 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아랄 해에는 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생선도 많이 잡았고, 그 생선을 가공해서 소련 전 지역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큰 생선 공장들도 있었습니다. 아랄 해에서 소금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선 90년 넘게 천연 소금을 얻어 왔습니다. 소련시절에는 꽤 유명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여름에는 매일 아랄 해에서 살았습니다. 아침 마다 갔습니다.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다시 아랄 해로 갔습니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지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3년 뒤 제가 아랄스크로 돌아왔을 때에는 더 이상 이곳 아랄스크에서는 아랄 해를 볼 수 없었습니다.
내레이션: 세계에서 네번째로 컸던 호수, 구소련은 연안농사를 위해 아랄 해로 흐르는 강물을 마구 끌어다 썼습니다. 불과 수십년 만에 아랄 해는 이전 크기의 10분의 1도 남지 않았습니다. 어부들은 가끔 배를 잃어버립니다. (모래 사장에 녹슬고 널부러져 있는 배들), 하지만 바다를 잃어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이곳 어부들은 바다를 잃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물이었습니다. 이제 항구도 없습니다. 두 세시간 마른 땅 위를 달리고 다시 물살을 헤쳐야만 가까스로 고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랄스크는 물을 잃어버린 도시입니다. 이제는 세르게이의 유년 시절도 아랄 해의 물도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물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은 다른 어딘가에서 되풀이될 지 모릅니다. 물은 고체 액체 기체 3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끝없이 순환합니다. 빙하와 만년설도 차가운 공기를 만나 굳어진 물입니다. 잡을 수 없는 수증기와 구름도 모두 물의 다른 이름입니다. 인간이 만나게 되는 물은 대부분 액체상태로 흘러가는 물입니다. 물이 흐르는 곳에 비로소 인간은 먹을 수 있습니다.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부터 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물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씻고 마십니다. 사실 우리 몸의 70%는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잘 느낄 수는 없지만 숨 쉬고 움직이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 몸 내부의 물을 순환시키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갈증이 나면 그것은 우리 몸에서 새로운 물의 순환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스티븐 솔로몬/저널리스트, <물의 세계사> 저자: 우리는 물 속에서 성장합니다. 인체의 70%는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물입니다. 지구가 물의 행성이라고 불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은 인류에게 진정, 정말로 없어서는 안되는 자원입니다.
내레이션: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마실 물을 찾아 헤맸습니다. 사실 물의 대부분은 우리 발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지하의 물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사막에서 낙타들이 걸어감), 얼핏보면 개미가 파놓은 구멍같습니다. 카나트(Qanat)/이란, 하지만 이것은 물을 찾기 위한 인간의 절박한 노력이 만들어낸 거대한 자취입니다. 고대부터 이란 사람들은 카나트라는 우물을 팠습니다. 모래는 물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깊은 땅 속 까지 파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멍을 파고 흙을 퍼올리는 고된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강물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곳, 오로지 인간의 땅만이 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나트는 단순한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카나트는 우물이면서 동시에 수로였습니다. 땅 속 어둡고 깊은 곳에서 사람의 손으로 물길을 일일이 만들어야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이 구멍 하나의 크기가 10미터가 넘습니다. 인간의 마을까지는 수십킬로미터 이어졌습니다. 수십미터 땅 속, 엄청난 압력의 물을 막고 있는 암반에 다달으면 가장 나이 많은 단 한 명이 지하에 남았습니다. 홀로 남은 이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암반을 팠습니다. 마침내 암반이 깨지고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물이 뿜어져 나옵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걸고 얻어낸 물이 마을까지 흘러왔습니다. 만일 물이 없었다면 이 메마른 땅에는 아무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도 마찬가지 였을겁니다. 물이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경험적 지식, 그리고 암반을 깨는 인간의 땀과 노력, 카나트는 생존을 위한 기술이었습니다.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티븐: 카나트는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무더운 환경에서 널리 퍼졌는데요. 카나트의 좋은 특징 중 하나는 윗부분이 덮여 있어서 물이 증발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을 저장하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물이 증발해서 대기중으로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건조한 환경에서는 물이 매우 귀합니다.
내레이션: 인류의 4대 문명은 큰 강을 끼고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경계를 넘어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만나는 정복과 교류의 역사는 이곳 지중해로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잊혀지는 한 왕국이 있습니다. 터키 중남부 2000미터가 넘는 산 정상에는 인공산이 하나 있습니다. 넴 루트산/터키 아디야만주, 큰 돌을 일일이 깨어가지고 만든 다음 50미터 높이로 쌓아올린 것입니다. 수천 수만의 목숨이 단 한 사람을 위해 바쳐졌습니다. 영원한 왕국을 꿈꿨던 한 미치광이 왕의 무덤입니다. 산 정상에는 무덤을 지키는 거대한 석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몸통을 잃은 두상들이 말없이 서 있습니다. 이곳은 2000년전 콤마게네 왕국 안티오쿠스(Antiochus) 1세의 무덤입니다. 동양과 서양을 모두 제패하리라 믿었던 왕, 안티오쿠스 1세는 아버지는 페르시아 혈통, 어머니는 알렉산더 대왕의 혈통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아시아의 평원과 유럽의 지중해,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이 높은 곳에 자신의 무덤을 건설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폴론(Apollon), 헤라클레스(Hercules), 제우스, 그리스의 신들과 함께 안티오쿠스는 불멸을 꿈 꾸었습니다. 1000년의 바람이 붑니다. 물을 가지지 못한 문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문명과 만나기 위해 그들은 광야와 산맥을 건너고 했습니다. 헤라클레스와 악수하는 안티오쿠스 1세, 강물의 축복도 바다의 풍요로움도 가지지 못했던 험준한 왕국의 왕 안티오쿠스 1세,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답게 메마른 바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고별이었습니다. 콤마게네 왕국을 무너뜨린 세력은 바로 로마인들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물은 로마로 흘러들었습니다. 로마 제국 대부분의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물의 제국이었습니다. 고온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 수도교/터키 이스탄불, 로마인들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혹독한 여름을 견뎌야 했습니다. 제국이 커질수록 더 많은 물이 필요해졌습니다. 바로 이 수도교가 로마의 물줄기였습니다. 수도교는 로마제국의 도시 곳곳에 효과적으로 물을 끌어왔을 뿐만아니라 공학적으로도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수킬로미터를 달려도 낙차가 고작 불과 몇 미터에 불과할 만큼 정교한 기울기를 유지한 수도교는 로마 공학의 승리입니다. 로마 수도교는 지중해 서쪽 스페인 땅에서도 발견됩니다.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 강물은 이 수도교를 거쳐 세고비아 시내로 흘러듭니다. 흐르게 할 수 있다면 불순물은 가라앉히고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을 끌어올리는 동력은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뛰어난 건축공학을 통해 물을 흐르게 하였습니다. 수도교의 물줄기를 멈추게 하지 않기 위해 로마인들은 산을 뚫기도 했습니다. 물이 물을 건널 때도 있었습니다.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이용하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을 보내는 구조,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이 치솟아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흘러오는 물이 앞의 물을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스티븐: 덜 종교적인 맥락에서 볼 때 로마와 다른 지역의 물 공급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정통성의 표시였습니다. 오늘날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정부가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부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치적 정통성이 부족해지는 것이죠. (지하저수지/터키 이스탄불),
내레이션: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최초로 수도국을 설치했습니다. 물은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을 저장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단순한 공학기술이 아니라 강력한 통치기술이었습니다. (다라댐/터키 다라), 물의 제국 로마가 이 변방에 까지 물을 정수하고 저장하는 대규모 시설을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계 최초의 아치형 물 저장 시설), 로마의 물을 먹는 자는 누구나 로마인이기 때문입니다. (펄 아카데미 (Pearl Academy)/인도 자이푸르), 인도 자이푸르에 있는 한 패션 디자이너 학교입니다. 40도의 가까운 날씨, 하지만 놀랍게도 실내 온도는 20도 대를 유지합니다. 건물 지하에 있는 물이 에어컨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잘리(Jali)-인도-이슬람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격자무늬의 벽), 잘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은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식혀 줍니다. 에어컨을 대신하는 인도인들의 지혜는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훨씬 큰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운 듯 합니다. 찬드 바오리 (Chand Baori)/인도 라자스탄주, 깊이 3500여 개의 계단, 13층 건물높이에 달하는 이 계단식 건물은 인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찬드 바오리는 9세기에 만들어진 인공저수시설입니다. 라잔스탄 주는 인도에서도 가장 메마른 지역 중 하나입니다. 이와 같은 계단식 우물이 집중적으로 발달했습니다. 밑에서 솟는 샘물과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합쳐지는 구조, 이 계단식 우물의 물이 항상 차갑게 유지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하 30미터의 흙이 우물의 온도를 낮춰줍니다. 계단식 우물은 자연스럽게 물의 거처이자 사람들의 쉼터였습니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과학의 원리를 품고 있었습니다.
N.S. 라토레/인도 아요이안대학 건축학과 교수: 그 기술은 증발냉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물은 증발하면서 많은 열을 소모합니다. 기체가 될 때 많은 열이 방출된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공기가 물과 만날 때, 공기는 물로부터 많은 열을 빼앗아가고, 증발이 일어납니다. 그 기술은 ‘증발냉각’이라고 불립니다. 라니 키 바브(Rani-ki-Vav)/인도 구자라트주,
내레이션: 깊은 우물입니다. 이 계단식 우물은 사원을 닮았습니다. 사암을 깎아 만든 각가지 부조암과 정교한 기둥들이 우리의 눈을 사로 잡습니다. 사실 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빛은 시간의 흐름이고 차가움은 공간의 깊이 입니다. 라니 키 바브는 11세기 구자라트주의 왕비가 만든 계단식 우물입니다. 흘러내린 빗물이 이 안에 가득 채울 때 빛의 여신은 물의 여신이 되었습니다. 풍요로운 물을 찾느라고 인간의 삶을 노래하는 것, 그것이 이 우물을 만든 왕비의 꿈이었을까요. 아마도 이 거대한 우물의 물이 수많은 인도인들의 타는 목을 적셔 주었을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물을 길들이지 않았습니다. 강물을 대신하는 빗물과 샘물, 그들은 그저 두 손 모아 그 물을 모았습니다. 중세 이슬람 지구 최고의 도시는 아라비아 반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6천 마일 이슬람 대제국의 서쪽 끝, 그곳은 바로 오늘날의 스페인 코르도바였습니다 (스페인 코르도바),
필립 호프면/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 기업경제학과 석좌교수: 만약 저를 서기 900년으로 데려다준다면 제일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유럽입니다. 특히 서유럽이요. 혼란스럽고 모든 영역에서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과학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습니다. 코르도바에는 있었지만 유럽에는 없었습니다.
내레이션: 10세기 당시 유럽에는 인구 만명이 넘는 도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명이 넘었습니다. 세네카 (기원전 4년~기원후 65년), 로마제국 시절부터 이곳은 지식의 땅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의 과학과 철학, 인도의 수학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백내장 수술을 했던 알가페기, (모하메드 알 가페기(?~1165년)), 천년을 이어온 의술이 이곳 코르도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 탈무드의 철학을 집대성한 마이모니데스(1135~1204년)도 이곳 출신입니다. 유럽이 암흑의 시대였을 때 코르도바는 찬란한 문명중심이었습니다. 코르도바 도서관이 당시 소장하던 도서는 60만 권으로 프랑스 전체가 보유한 책보다 많았습니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대성당, (코르도바 메스키타 대성당), 종교의 선택은 자유로웠고 이슬람인, 기독교인, 유대인, 누구나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만민평등주의의 이념을 실현한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슬람 양식이라고 알고 있는 이 말굽 모양의 아치는 사실 서구표적의 건축양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스키타 대성당의 이름은 로마인들이 남기고 간 기둥이 다시 쓰인 것입니다. 종교와 언어는 달랐지만 문명과 지식의 빛은 같았습니다. 누구나 그 빛의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알안달루스라고 부르며 780년 동안 통치했던 이 땅에 이슬람인들은 또 하나의 선물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과달키비르강(Quadalquivir River), 코드로바의 과달키비르강, 이 낡은 물레방아는 이슬람인들이 이 땅에 남긴 위대한 유산입니다. 크고 정교한 물레방아입니다. 흐르는 강물로 곡식을 빻거나 주민들이 씻고 먹는 물을 퍼올렸습니다. 알보라피아(Albolafia) 수차, 인간의 근육과 동물의 팔다리를 대신하는 물레방아는 인류 최초의 엔진이었습니다. 무엇 보다도 이슬람인의 물레방아는 물의 힘으로 망치를 두드려 종이의 원료가 되는 펄프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펄프는 책이 되고 책은 지식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은 이슬람의 물기술이 낳았습니다. 만일 이슬람인들의 물레방아가 없었다면 유럽의 르네상스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로버트 마르크스/미국 휘티어대학 역사학과 교수: 아랍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 철학자의 모든 고전들이 있었고 로마인들이 남긴 문헌들도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들이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철학을 서유럽의 전통으로 살려냈습니다. 이후 그것은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인들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알함브라/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붉은 성이라는 이름의 알함브라는 이슬람 최고의 건축물이자 인류 최고의 유산입니다. 이슬람 무어인들의 마지막 항전지 안달루시아에 남겨진 그들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알함브라는 난공불락의 성채였습니다. 100미터가 넘는 언덕 위에 자리잡아 이사벨라 여왕의 대군을 7개월 동안이나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78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주름잡았던 무어인들은 이 성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천국의 열쇠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갔습니다. 성채 안으로 들어서면 전쟁의 포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알함브라는 성채이기 전에 은밀한 정원이었습니다. 신을 찬미하는 신전이기 전에 인간이 만들어낸 덧없는 천국이었습니다. 섬세하게 새겨진 돌기둥에 물빛이 일렁일 때마다 알함브라는 속삭입니다. 물과 건축이 어우러진 풍요의 상징, 알함브라는 인간이 꿈꾸는 마지막 쉼터였습니다. 이제 무어인들의 눈물은 말라 버렸지만 분수의 물줄기는 여전합니다. 5천여 명이 거주할 수 있었던 거대한 성, 이 붉은 성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는 비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슬람인들에게 물은 소중했습니다. 모래 바람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작은 정원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새가 울고, 꽃이 피는 곳, 물소리만으로도 지상의 모든 시름이 씻겨 나갔습니다. 천국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paradise 는 아랍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루이스 가르시아 뿔리도/스페인 말라가대학 건축학과 교수: 알함브라는 물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 보시는 모든 것들이 지어지는 데에는 물이 필요했습니다. 물은 앓람브라에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알함브라를 최초로 건축한 이슬람 왕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알함브라의 상수도 시스템), 알함브라는 강보다 100미터 높은 곳에 지어졌습니다. 6킬로미터 강의 상류로 올라가 아주 긴 수로를 만들어 알함브라까지 물을 끌어왔습니다. 알함브라에는 구석 구석 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앓람브라에 물이 넘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슬람인들의 뛰어난 물관리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주는 풍부한 물을 신의 선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의 선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인간의 몫이었습니다. 상류로부터 흘러온 다로강의 줄기는 산줄기를 돌고돌아 알함브라의 중심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아세퀴아 레알(Acequia Real) 수로, 그들은 이 수로를 왕의 수로, 아세퀴아 레알이라 불렀습니다. 이슬람인들은 알함브라 뒷산에 별도의 저수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수지에 모인 물은 알함브라의 구석 구석필요한 곳으로 배분되었습니다. 먼 곳의 물을 끌어와 저장하고 다시 내보내는 정교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물에 비친 알함브라는 아름답습니다. 이슬람인들은 떠나갔지만 물을 관리하는 그들의 기술은 이 땅에 남았습니다. 포화소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정원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해가 집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 알함브라, 고대 페르시아 로마의 물관리 기술은 아랍 세계를 거쳐 서유럽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인 모두가 증기기관차의 속도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시대를 찬미했습니다. 풍부한 석탄, 막강한 군사력,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대영제국의 심장 런던에 원인 모를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콜레라였습니다. 1831년 런던에서만 6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854년까지 세차례 발명해 총3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200년 전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흑사병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공기가 콜레라를 전염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취가 나는 데를 지날 때면 코를 막았습니다. 하지만 오염된 물이 콜레라를 옮긴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런던의 하수도와 제방은 1870년대에 건설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런던시민들의 오물은 템즈 강으로 바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당시 런던 사람들은 템즈 강의 물을 다시 가정의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공기가 콜레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과는 달리 콜레라의 확산이 물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존 스노우(1813년~1858년) 박사였습니다. 존 스노우는 재미 있는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콜레라가 발생했던 곳의 위치를 지도에 하나씩 표시해 보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런던 브로드 스트리트에 있는 물 펌프를 중심으로 콜레라가 집중적으로 발병했습니다. 원인은 물이었습니다. 존 스노우의 펌프가 있던 자리입니다. 사실 펌프 손잡이를 제거한 후에도 과학자들은 수인성 전염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1853년의 일이었습니다. 아주 오랫 동안 인간은 문명의 이름으로 물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왔습니다. 그래야 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리에 마을/일본 시가현), 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 그것이 이곳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입니다. 인구 백여 명의 작은 마을 하리에, 이곳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상수도나 하수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카바타 라고 불리는 아주 특별한 수도시설이 있습니다. 카바타 (Kabata) 시스템, 물은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둡니다. 대신 음식재료나 그릇을 씻을 수 있는 정도만 고이게 합니다, 그릇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는 잉어가 해결합니다. 물은 그저 아래로 흘러갈 뿐 아무도 물을 모우거나 물길을 막지 않습니다. 모우지도 않았기에 버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2000년 된 일본의 카바트 시스템입니다.
미야케 스스무/일본 하리에 마을회장: 잉어가 먹을 만한 잔반은 흘려보내 먹게합니다. 하지만 더러운 국물이나 기름은 가능한 한 흘려보내지 않게 해서 하류 쪽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하류 쪽 사람들도 안심하고 사용합니다. 상류와 하류의 사람들이 서로 신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물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정원, 고산수(枯山水)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이곳에 물이 있다고 믿습니다. 강을 끼고 있는 높은 산,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본 세계가 펼쳐집니다. 순환하는 것은 가득 차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빈 공간을 향해 흐르고 끊임없이 밀려들고 밀려나갑니다. 지구의 모든 문명은 물과 섞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물도 우리를 거쳐가는 물도 모두 소중합니다. 우리는 모두 순환하는 존재들입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1456회 3부 물, 위대한 순환에서 정리).
① 인류의 문명은 찬란하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이 여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가 닿는 곳은 강물이 흐르고 그가 이르지 못하는 곳은 모래 바람 뿐이다. 인간은 오르지 못하는 아주 높은 곳, 그는 빗방울이었다. 인간들이 사는 도시를 지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지상의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었다. 지구의 모든 연약한 운명들이 물과 함께 살아간다.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다. 매년 3월이면 인도의 이곳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곡물가루를 준비한다. 서로에게 곡물가루를 뿌려주는 거대한 축제가 시작이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시기, 자신의 소원도 중요하지만 혹독한 계절을 견뎌낸 모두의 바람이 담겨있다. 신이 굽어보는 인간은 한없이 작다. 그들은 그저 목마른 존재들이다. 인도 홀리 축제의 마지막은 물로 완성된다. 누구나 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친구도 가족도 모르는 사람도 하나가 된다. 비와 바람을 염원한 인도인들, 겨울 내내 건조했던 이곳에도 조만간 몬순이 불어올 것이다. 천국은 하늘에 있지만 땅 위에도 있을 수 있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어디든 천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물은 끝없는 고통이다.
② 텐 세르게이는 카자흐스탄 고려인으로 1937년 조부모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당했다.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쌀을 재배했다. 아랄 해에서 고기도 많이 잡았다. 고려인들 중에는 선원들도 많았다. 아랄 해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호수다. 단지 크기가 커서 바다라고 불리는 것 뿐이다. 아랄스크(Aralsk)는 아랄 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다, 세르게이가 자랄 때만 해도 아랄 해에는 물이 많았다. 사람들이 생선도 많이 잡았고, 그 생선을 가공해서 소련 전 지역으로 보내기도 했다. 큰 생선 공장들도 있었다. 아랄 해에서 소금도 얻을 수 있었다. 이곳에선 90년 넘게 천연 소금을 얻었다. 소련시절에는 꽤 유명했다. 세르게이가 어렸을 때 여름에는 매일 아랄 해에서 살았다. 아침 마다 갔다. 집에 가서 점심 먹고 다시 아랄 해로 갔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다. 1982년 세르게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지로 공부하러 떠났다. 3년 뒤 세르게이가 아랄스크로 돌아왔을 때에는 더 이상 이곳에서는 아랄 해를 볼 수 없었다.
③ 세계에서 네번째로 컸던 호수 아랄 해, 구소련은 연안농사를 위해 아랄 해로 흐르는 강물을 마구 끌어다 썼다. 불과 수십년 만에 아랄 해는 이전 크기의 10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어부들은 가끔 배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바다를 잃어본 적은 없다. 이곳 어부들은 바다를 잃었다. 눈 앞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물이었다. 이제 항구도 없다. 두 세시간 마른 땅 위를 달리고 다시 물살을 헤쳐야만 가까스로 고기를 만날 수 있다. 아랄스크는 물을 잃어버린 도시다. 이제는 세르게이의 유년 시절도 아랄 해의 물도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을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은 다른 어딘가에서 되풀이될 지 모른다. 물은 고체 액체 기체 3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끝없이 순환한다. 빙하와 만년설도 차가운 공기를 만나 굳어진 물이다. 잡을 수 없는 수증기와 구름도 모두 물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만나게 되는 물은 대부분 액체상태로 흘러가는 물이다. 물이 흐르는 곳에 비로소 인간은 먹을 수 있다.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부터 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물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씻고 마신다. 사실 우리 몸의 70%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 잘 느낄 수는 없지만 숨 쉬고 움직이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 몸 내부의 물을 순환시키는 과정이다. 갈증이 나면 그것은 우리 몸에서 새로운 물의 순환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④ 우리는 물 속에서 성장한다. 인체의 70%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물이다. 지구가 물의 행성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물은 인류에게 진정, 정말로 없어서는 안되는 자원이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마실 물을 찾아 헤맸다. 사실 물의 대부분은 우리 발 아래 있다. 하지만 지하의 물을 얻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란의 카나트(Qanat)는 얼핏보면 개미가 파놓은 구멍같다. 하지만 이것은 물을 찾기 위한 인간의 절박한 노력이 만들어낸 거대한 자취다. 고대부터 이란 사람들은 카나트라는 우물을 팠다. 모래는 물을 가둘 수 없었다. 인간은 깊은 땅 속까지 파고 들어가야 했다. 구멍을 파고 흙을 퍼올리는 고된 작업이 필요했다. 강물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곳, 오로지 인간의 땅만이 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나트는 단순한 우물이 아니었다. 카나트는 우물이면서 동시에 수로였다. 땅 속 어둡고 깊은 곳에서 사람의 손으로 물길을 일일이 만들어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 구멍 하나의 크기가 10미터가 넘는다. 인간의 마을까지는 수십킬로미터 이어졌다. 수십미터 땅 속, 엄청난 압력의 물을 막고 있는 암반에 다달으면 가장 나이 많은 단 한 명이 지하에 남았다. 홀로 남은 이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암반을 팠다. 마침내 암반이 깨지고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물이 뿜어져 나온다. 누군가의 목숨을 걸고 얻어낸 물이 마을까지 흘러왔다. 만일 물이 없었다면 이 메마른 땅에는 아무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동물도 마찬가지 였을거다. 물이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경험적 지식, 그리고 암반을 깨는 인간의 땀과 노력, 카나트는 생존을 위한 기술이었다.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카나트는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무더운 환경에서 널리 퍼졌다. 카나트의 좋은 특징 중 하나는 윗부분이 덮여 있어서 물이 증발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을 저장하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물이 증발해서 대기중으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건조한 환경에서는 물이 매우 귀하다.
⑤ 인류의 4대 문명은 큰 강을 끼고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경계를 넘어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만나는 정복과 교류의 역사는 이곳 지중해로부터 처음 시작되었다. 여기 잊혀지는 한 왕국이 있다. 터키 중남부 2000미터가 넘는 산 정상에는 인공산이 하나 있다. 터키 아디야만 주의 넴 루트산, 큰 돌을 일일이 깨어가지고 만든 다음 50미터 높이로 쌓아올린 것이다. 수천 수만의 목숨이 단 한 사람을 위해 바쳐졌다. 영원한 왕국을 꿈꿨던 한 미치광이 왕의 무덤이다. 산 정상에는 무덤을 지키는 거대한 석상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몸통을 잃은 두상들이 말없이 서 있다. 이곳은 2000년전 콤마게네 왕국 안티오쿠스(Antiochus) 1세의 무덤이다. 동양과 서양을 모두 제패하리라 믿었던 왕, 안티오쿠스 1세는 아버지는 페르시아 혈통, 어머니는 알렉산더 대왕의 혈통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시아의 평원과 유럽의 지중해,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이 높은 곳에 자신의 무덤을 건설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폴론(Apollon), 헤라클레스(Hercules), 제우스, 그리스의 신들과 함께 안티오쿠스는 불멸을 꿈 꾸었다. 1000년의 바람이 분다. 물을 가지지 못한 문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다른 문명과 만나기 위해 그들은 광야와 산맥을 건너고 했다. 헤라클레스와 악수하는 안티오쿠스 1세, 강물의 축복도 바다의 풍요로움도 가지지 못했던 험준한 왕국의 왕 안티오쿠스 1세,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답게 메마른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고별이었다.
⑥ 콤마게네 왕국을 무너뜨린 세력은 바로 로마인들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물은 로마로 흘러들었다. 로마 제국 대부분의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마는 물의 제국이었다. 고온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 로마인들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혹독한 여름을 견뎌야 했다. 제국이 커질수록 더 많은 물이 필요해졌다. 바로 이 수도교가 로마의 물줄기였다. 수도교는 로마제국의 도시 곳곳에 효과적으로 물을 끌어왔을 뿐만아니라 공학적으로도 뛰어난 건축물이다. 수킬로미터를 달려도 낙차가 고작 불과 몇 미터에 불과할 만큼 정교한 기울기를 유지한 수도교는 로마 공학의 승리이다. 로마 수도교는 지중해 서쪽 스페인 땅에서도 발견된다.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 강물은 이 수도교를 거쳐 세고비아 시내로 흘러든다. 흐르게 할 수 있다면 불순물은 가라앉히고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물을 끌어올리는 동력은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뛰어난 건축공학을 통해 물을 흐르게 하였다. 수도교의 물줄기를 멈추게 하지 않기 위해 로마인들은 산을 뚫기도 했다. 물이 물을 건널 때도 있었다.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이용하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을 보내는 구조,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이 치솟아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뒤에서 흘러오는 물이 앞의 물을 밀어 올리는 것이다.
⑦ 로마의 물 공급은 정치적 정통성의 표시였다. 오늘날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정부가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부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정치적 정통성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최초로 수도국을 설치했다. 물은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을 저장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단순한 공학기술이 아니라 강력한 통치기술이었다. 물의 제국 로마가 이 변방에 까지 물을 정수하고 저장하는 대규모 시설을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로마의 물을 먹는 자는 누구나 로마인이기 때문이다.
⑧ 인도 자이푸르에 있는 한 패션 디자이너 학교, 40도 가까운 날씨, 하지만 놀랍게도 실내 온도는 20도 대를 유지한다. 건물 지하에 있는 물이 에어컨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잘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인도-이슬람 건축 양식은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식혀준다. 에어컨을 대신하는 인도인들의 지혜는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훨씬 큰 건물들이 있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운 듯 하다. 깊이 3500여 개의 계단, 13층 건물높이에 달하는 이 계단식 건물은 인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찬드 바오리는 9세기에 만들어진 인공저수시설이다. 라잔스탄 주는 인도에서도 가장 메마른 지역 중 하나다. 이와 같은 계단식 우물이 집중적으로 발달했다. 밑에서 솟는 샘물과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합쳐지는 구조, 이 계단식 우물의 물이 항상 차갑게 유지되는 이유가 있다. 지하 30미터의 흙이 우물의 온도를 낮춰준다. 계단식 우물은 자연스럽게 물의 거처이자 사람들의 쉼터였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과학의 원리를 품고 있었다.
⑨ 그 기술은 증발냉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은 증발하면서 많은 열을 소모한다. 기체가 될 때 많은 열이 방출된다. 뜨거운 공기가 물과 만날 때, 공기는 물로부터 많은 열을 빼앗아가고, 증발이 일어난다. 그 기술을 증발냉각이라고 한다. 깊은 우물이다. 이 계단식 우물은 사원을 닮았다. 사암을 깎아 만든 각가지 부조암과 정교한 기둥들이 우리의 눈을 사로 잡는다. 사실 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빛은 시간의 흐름이고 차가움은 공간의 깊이다. 라니 키 바브는 11세기 구자라트주의 왕비가 만든 계단식 우물이다. 흘러내린 빗물이 이 안에 가득 채울 때 빛의 여신은 물의 여신이 되었다. 풍요로운 물을 찾느라고 인간의 삶을 노래하는 것, 그것이 이 우물을 만든 왕비의 꿈이었을까. 아마도 이 거대한 우물의 물이 수많은 인도인들의 타는 목을 적셔 주었다. 인도인들은 물을 길들이지 않았다. 강물을 대신하는 빗물과 샘물, 그들은 그저 두 손 모아 그 물을 모았다. 중세 이슬람 시대 최고의 도시는 아라비아 반도에 있지 않았다. 6천 마일 이슬람 대제국의 서쪽 끝, 그곳은 바로 오늘날의 스페인 코르도바였다.
⑩ 10세기 당시 유럽에는 인구 만명이 넘는 도시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명이 넘었다. 로마제국 시절부터 이곳은 지식의 땅이었다. 그리스 로마의 과학과 철학, 인도의 수학도 연구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백내장 수술을 했던 모하메드 알 가페기(?~1165년), 천년을 이어온 의술이 이곳 코르도바에서 시작되었다. 유대교 탈무드의 철학을 집대성한 마이모니데스(1135~1204년)도 이곳 출신이다. 유럽이 암흑의 시대였을 때 코르도바는 찬란한 문명중심이었다. 코르도바 도서관이 당시 소장하던 도서는 60만 권으로 프랑스 전체가 보유한 책보다 많았다. 종교의 선택은 자유로웠고 이슬람인, 기독교인, 유대인, 누구나 어울려 살았다. 그야말로 만민평등주의의 이념을 실현한 최초의 도시였다. 우리가 흔히 이슬람 양식이라고 알고 있는 이 말굽 모양의 아치는 사실 서구표현의 건축양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메스키타 대성당의 이름은 로마인들이 남기고 간 기둥이 다시 쓰인 것이다. 종교와 언어는 달랐지만 문명과 지식의 빛은 같았다. 누구나 그 빛의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알안달루스라고 부르며 780년 동안 통치했던 이 땅에 이슬람인들은 또 하나의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코드로바의 과달키비르강의 이 낡은 물레방아는 이슬람인들이 이 땅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크고 정교한 물레방아다. 흐르는 강물로 곡식을 빻거나 주민들이 씻고 먹는 물을 퍼올렸다. 인간의 근육과 동물의 팔다리를 대신하는 물레방아는 인류 최초의 엔진이었다. 무엇 보다도 이슬람인의 물레방아는 물의 힘으로 망치를 두드려 종이의 원료가 되는 펄프를 만들었다. 이게 펄프는 책이 되고 책은 지식이 되었다. 유럽의 지식은 이슬람의 물기술이 낳았다. 만일 이슬람인들의 물레방아가 없었다면 유럽의 르네상스는 없었을지 모른다.
⑪ 아랍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리스 철학자의 모든 고전들이 있었고 로마인들이 남긴 문헌들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들이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철학을 서유럽의 전통으로 살려냈다. 이후 그것은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인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붉은 성이라는 이름의 알함브라는 이슬람 최고의 건축물이자 인류 최고의 유산이다. 이슬람 무어인들의 마지막 항전지 안달루시아에 남겨진 그들의 눈물이기도 하다. 알함브라는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100미터가 넘는 언덕 위에 자리잡아 이사벨라 여왕의 대군을 7개월 동안이나 버텨낼 수 있었다. 78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주름잡았던 무어인들은 이 성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천국의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갔다. 성채 안으로 들어서면 전쟁의 포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알함브라는 성채이기 전에 은밀한 정원이었다. 신을 찬미하는 신전이기 전에 인간이 만들어낸 덧없는 천국이었다. 섬세하게 새겨진 돌기둥에 물빛이 일렁일 때마다 알함브라는 속삭인다. 물과 건축이 어우러진 풍요의 상징, 알함브라는 인간이 꿈꾸는 마지막 쉼터였다. 이제 무어인들의 눈물은 말라 버렸지만 분수의 물줄기는 여전하다. 5천여 명이 거주할 수 있었던 거대한 성, 이 붉은 성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는 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이슬람인들에게 물은 소중했다. 모래 바람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작은 정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새가 울고, 꽃이 피는 곳, 물소리만으로도 지상의 모든 시름이 씻겨 나갔다. 천국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paradise 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⑫ 알함브라는 물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지어지는 데에는 물이 필요했다. 물은 앓람브라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알함브라를 최초로 건축한 이슬람 왕조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함브라는 강보다 100미터 높은 곳에 지어졌다. 6킬로미터 강의 상류로 올라가 아주 긴 수로를 만들어 알함브라까지 물을 끌어왔다. 알함브라에는 구석 구석 물은 마르지 않는다. 앓람브라에 물이 넘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슬람인들의 뛰어난 물관리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주는 풍부한 물을 신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의 선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인간의 몫이었다. 상류로부터 흘러온 다로강의 줄기는 산줄기를 돌고돌아 알함브라의 중심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아세퀴아 레알(Acequia Real) 수로를 왕의 수로라고 불렀다. 이슬람인들은 알함브라 뒷산에 별도의 저수지를 만들기도 했다. 저수지에 모인 물은 알함브라의 구석 구석 필요한 곳으로 배분되었다. 먼 곳의 물을 끌어와 저장하고 다시 내보내는 정교한 시스템이었다. 물에 비친 알함브라는 아름답다. 이슬람인들은 떠나갔지만 물을 관리하는 그들의 기술은 이 땅에 남았다. 포화소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정원에는 꽃이 피어난다. 해가 진다. 인간이 인간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 알함브라, 고대 페르시아 로마의 물관리 기술은 아랍 세계를 거쳐 서유럽으로 전해졌다. 19세기 초반 영국인 모두가 증기기관차의 속도에 열광하고 있었다. 누구나 시대를 찬미했다. 풍부한 석탄, 막강한 군사력,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대영제국의 심장 런던에 원인 모를 전염병이 돌았다
⑬ 1831년 런던에서만 6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854년까지 세 차례 발명해 총3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200년 전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흑사병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공기가 콜레라를 전염시킨다고 생각했다. 악취가 나는 데를 지날 때면 코를 막았다. 하지만 오염된 물이 콜레라를 옮긴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런던의 하수도와 제방은 1870년대에 건설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런던시민들의 오물은 템즈 강으로 바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런던 사람들은 템즈 강의 물을 다시 가정의 식수로 사용했다. 공기가 콜레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들과는 달리 콜레라의 확산이 물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존 스노우(1813년~1858년) 박사였다. 존 스노우는 재미 있는 실험을 하나 했다. 콜레라가 발생했던 곳의 위치를 지도에 하나씩 표시해 보았다. 공교롭게도 런던 브로드 스트리트에 있는 물 펌프를 중심으로 콜레라가 집중적으로 발병했다. 원인은 물이었다. 아주 오랫 동안 인간은 문명의 이름으로 물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왔다. 그래야 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⑭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 인구 백여 명의 일본의 작은 마을 하리에, 이곳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상수도나 하수도가 없다. 그 대신 카바타 라고 불리는 특별한 수도시설이 있다. 물은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대신 음식재료나 그릇을 씻을 수 있는 정도만 고이게 한다, 그릇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는 잉어가 해결한다. 물은 그저 아래로 흘러갈 뿐 아무도 물을 모우거나 물길을 막지 않는다. 모우지도 않았기에 버릴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2000년 된 일본의 카바트 시스템이다. 잉어가 먹을 만한 잔반은 흘려보낸다. 하지만 더러운 국물이나 기름은 가능한 한 흘려보내지 않게 해서 하류 쪽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한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하류 쪽 사람들도 안심하고 사용한다. 상류와 하류의 사람들이 서로 신뢰감을 가지고 있다. 순환하는 것은 가득 차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빈 공간을 향해 흐르고 끊임없이 밀려들고 밀려나간다. 지구의 모든 문명은 물과 섞인다. 우리에게 오는 물도 우리를 거쳐가는 물도 모두 소중하다. 우리는 모두 순환하는 존재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