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님, 다시 시작하세요. 이제 저도 2월에 졸업하니 이제는 형수님 차례예요." 하며 찬성표를 던져준 건 막내 시동생이었다.
묵언하는 수도승처럼 말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지금이야, 지금이 찾아온 기회라고 얼굴빛으로 내게 전해주는 남편의 격려에 힘입어 나는 마음의 중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만두를 빚다가 대학교 입학을 하겠다는 나에게 가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찬성 반대 표시를 해주었다. "제 나이 이제 겨우 30대 중반이예요."하긴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작은 아이는 유치원생 게다가 시동생 둘이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막내 시동생은 지방 분교에 다니느라 학비 외에도 방세와 식대 그리고 용돈 등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않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할 기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는 새해에는 막내 시동생이 무역학과를 졸업할 예정이고 남편도 지방발령을 받아서
봄에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시어머니는 내게 공부는 무슨 공부냐, 지방에 내려가려면 운전이나 배워라 하시면서 채근을 하셨다.
어머니는 빨리 운전을 배워서 시골에 가더라도 불편하지않게 하라고 성화를 하셨지만 이미
마음 속으로 원서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사가 되는 것은 철들기 전부터 바래왔던 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병마와의 싸움으로 나의 꿈은 좌절되었고
이제 그 깨어진 꿈 조각을 다시 주워서 맞추기 위한 퍼즐놀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면서 유아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유아교사가 되기 위해서 여러
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침 작은 아이 담임교사를 통해서 방송대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좀 길긴 하지만 주부로서 살림을 하면서 공부 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있
고 졸업 후에는 정교사 자격증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몇 일후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남편은 지방(음성)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 날부터 우리 집 저녁 밥상은 책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저녁 설겆이를 마치면 각자의 책을 들고 책상으로 모여와 둘러 앉았다. 큰 아이는 숙제를
들고 오고 작은 아이는 동화책을 가져오고 나는 이름도 생소한 "유아교육개론"과 "아동발달"
등 전공서적을 읽었다.
그렇게 한학기가 바람처럼 지나갔다.
전공과목 성적보다 교양과목 성적이 더 좋은 이상한 성적표를 받아들
고 한참을 생각하였다.
"이걸 어쩐담......"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생소한 유아교육용어들과 친해지려면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야하는데..
한 달에 한 번 있는 유치원 자모대화로는 너무 부족하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교실청소였다.
아이가 수업을 마칠 시간이면 청소를 핑계로 작은 아이 교실에 찾아갔다.
때로는 아이들 작품 정리도 하고, 환경판도 고치고 , 선생님 자료준비도 도와주면서 내 전공
공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유치원 교사 한 분이 갑자기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으니 근무를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갑자기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지고 이 소식을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하는지 갈등이 일어났
다.
애써 흥분과 놀라움을 감추며 생각할 시간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 우리는 캐나다로 이민오게 되었다.
짐정리를 하면서 문득 교사자격증이 눈에 띄었다.
남편은 모든 엔지니어 관련 자격증을 번역해서 공증을 받는다고 준비를 하는데 난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캐나다에 가면 이 교사자격증은 한낱 종이에 불과할 텐데 번역은 무슨.....
그래도 고생하며 딴 것이니 가져가야지 하면서 가방 한쪽에 밀어넣었다.
이민와서 일주일 동안은 이곳에서 살기 위한 서류들을 만들러 다녔고 다음 일주일은 몸
살로 앓아누웠다. 몸살이 거의 나아갈 무렵 지역신문을 보다가 구인광고를 발견하였다.
대이케어(어린이집)에서 1급 교사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내용으로 보아 1급은 높은 급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바로 전화를 하였다. 사람대신 전화응답 기계가 메모를 요구하였다.
나는 최대한의 영어실력을 발휘해서 한국인이고 유아교육을 전공했으며 이곳에 온지 보름이
되었는데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전화를 끊으면서 연락을 기다리는 것은 무리라고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1시간도 채 되지않아 연락을 받게 되었다.
뮤리어라는 할머니였는데 그녀는 데이캐어의 오너였고 내일 12시 반에 찾아오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었다.
그런데 참으로 난감하였다.
무엇을 가져가야하나?
한글로 된 서류 뿐인데, 할 수 없지 그거라도 가져가자
그 케네디언 할머니가 한글을 알리도 없는데 난 가져간 서류를 일일이 설명하였다.
저, 이거는요 한국 정부에서 발행한 교사 자격증이고요. 저거는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였던 경력서이지요.
아참 이거는요 매우 특별한 상장이에요. 표창장이라고 하는데요. 유치원에서 아이들 잘 가르치는 교사로 뽑혀서 특별하게 아주 특별하게 주는... 맞아요 아주 스페샬하게 주는 상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더니 이력서를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난 솔직히 말하였다.
이력서를 쓸 줄 모른다고 하지만 오늘 집에 돌아가면 배워서 내일 가져올 수 있다고...
할머니는 흔쾌히 그러라면서 배웅해 주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우리를 공항에서 픽업해 주었던 남편친구를 찾아가서 이력서 쓰
는 법을 배웠다. 한국처럼 세대주 이름을 쓰지않았고 재산도 나이도 필요없었다. 이 부분이 제일 마
음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준비한 이력서를 전해주기위해 대이케어로 찾아갔다.
단지 이력서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 물론이지요...
현관문 유리를 닦아달라고 하였다. 신문지에 물을 적셔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마른 종이로 다시 마지막 점검하면서 유리를 비추어보니 맑은 캘거리 하늘이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책장 안에 책들이 너무 낡아보였다.
쭈그리고앉아서 떨어져나간 책장들을 일일히 테이프를 붙이고 접힌 부분들은 펴주고 하면서 책정리를 마치고 다시 둘러보니 주방이 보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하였다.
막 손을 닦고 돌아서려는데 할머니가 뒤에서 다가와 안아주더니 원더풀, 하며 손가락을 펴보였다.
케네디언 아이들과 전세계 인종의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놀이하고 배우고 잠자고 먹고 하는 곳-데이 케어
아이들 다루는 일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의사 소통이 문제였다.
나름대로 학교 다닐 때 영어과목을 잘 하였고 이민 오기 전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워서 잘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어학교에 가기 전 뮤리얼 할머니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영어를 더 배우러 가야겠어요. 오전 9시에 시작하면 오후 2시에 끝나는데 당분간 일을 못하지싶어요. 하였더니 할머니가 그래, 그럼 내가 2시에 학교에 데리러가지요. 하였다.
도저히 그만둘수가없었다.
주정부에 보낸 데이케어 서류는 기다려도 오지않았다.
여보세요... 제 이름은 애나입니다. 데이케어 서류를 보낸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요... 서류 진행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요.
아, 예. 보내주신 서류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본이더군요. 저희는 원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적증명서도 보내주기 바랍니다.
다시 한국에 전화하여 원본과 성적증명서를 주정부에 보내도록 부탁하였다.
한여름 캘거리 햇볕은 너무 뜨거워서 모든 것을 녹여버리려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아침에는 영어학교로 수업이 끝나면 할머니 차를 타고 다시 데이케어로 집에 오며 저녁 준비하고 밤에는 숙제하고...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 마치 대량생산하는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있었다.
기다리는 주정부 서류는 8월이 다가도록 오지않았다.
절망의 바다는 아직도 나를 떠나지않아 허우적거리는 몸짓이 게속되던 어느 날 현관 문 옆 우체통에 누런 서류 봉투가 꽂혀있었다.
무슨 서류지... 하며 열어보니 앨버타주정부에서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 장에 무언가 축하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서류도 있어여하는데 달랑 이 편지 하나였다.
참 이상하다...하며 일어서려는데 무언가 툭, 하고 서류 하나가 떨어졌다.
주정부 사자그림의 직인이 찍힌 데이케어 서키피케이션이었다.
주저않아서 목놓아 울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놀라서 다가와서 안아주자 우리는 함께 울었다.
어머니를 방문하고 돌아온 어느 날 매니저가 찾았다.
애나, 더 좋은 포지션이 있는데 한번 어플라이 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근무하던 보우밸리 컬리지에서 석유회사 본사 안에 있는 데이케어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먼저 함께 근무하던 케네디언 동료 교사를 만났다.
나를 보자마자 애나ㅡ 그 수첩 어디갔어...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이제 그 수첩은 졸업했어, 하였다.
로리라는 그 교사는 내가 목에 수첩을 걸고 영어 단어를 적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하였다.
난 그 곳에서 한국의 유아교사자격증이 여기서 가장 높은 급수인 3급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과 한국인의 우수성을 동시에 느꼈다.
난 지금도 가끔 어머니께 농담삼아 이야기한다.
"어머니, 그때 공부하길 정말 잘했지요? 나이 생각 안하고..."
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하시고 미소로 대답하신다
첫댓글 4550자